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8화
백작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말을 타러 다닌다고 들었는데 불편하지 않겠어?”
“불편하다뇨?”
그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그럴수록 내가 비꼬고 싶어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가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바짝 긴장했다.
“다른 부인들은 전담 하녀를 셋 이상 둔다고 하더군.”
“그런가요? 저는 한 명으로도 족해서요.”
“사교 활동을 하려면 한 명으로는 부족하지. 적어도 두 명을 쓰도록 해.”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지만, 백작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단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시하는 사람을 붙일 생각인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꼬투리를 잡아서 이혼하겠다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차만 마셨다. 찻잔 바닥이 보일 때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담 하녀는 외모도 중요하잖소? 당신 하녀는 너무…… 뭐, 당신이랑은 꽤 어울리는 거 같지만.”
백작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이놈 좀 보게? 나는 혀를 찼다. 벨의 얼굴이 불타오를 듯 붉어졌다. 햇빛 때문은 아니었다.
“전담 하녀는 품행도 중요하니까요.”
백작은 내 말에 차를 마시는 척 인상을 찡그렸다. 써서 그런지, 아니면 내 말이 기분이 나빠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교계는 보는 눈이 많으니 다른 부인들에게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오.”
도발하는 말에 나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당장 저 뻔뻔한 면상에 주먹질하고 싶었다.
“모두 교양 있는 숙녀분들이세요. 많이 배우고 있어요.”
“당신이 숙녀의 교양을 배운다기엔 늦은 감이 있지 않소.”
나는 은근슬쩍 이야기의 흐름을 승마로 몰고 갔다. 더 외모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가다간 벨이 울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머, 배움에 늦고 빠름이 어디 있겠어요? 제 말이 없어서 조금 서투른 것뿐인걸요, 놀리시면 싫어요.”
물론 백작가에는 말이 있었다. 갈기가 멋진 갈색 말들이 여럿. 그러나 내가 말하는 말은 동물이 아니었다. 남자를 말에 비유하는 건 흔히 있는 언어유희였다.
이 세계는 19금 수위에 맞춰져 있으니 백작도 잘 이해할 거다. 그러니 내게 ‘너 요즘 남자 만나러 다니냐?’를 돌려 말한 것이겠지. 바람나기에는 늦지 않았냐고 비꼬기까지 했다.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일부러 승마장에서도 신경을 썼는데.’
천박한 말을 우아하게 돌려 입에 담자니 목이 간질거렸다. 여기서 욱하면 지는 거고, 그대로 넘어가도 지는 거다. 그러니 이보다 더 비꼬아 줘야 한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도 백작님처럼 예쁜 암말을 가졌다면 말을 잘 탔을 거예요.”
백작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찻잔과 받침이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았다. 백작가에는 암말이 없었다. 백작가의 말들은 모두 근육이 두둑한 수말이었다. 암말이란 그가 끼고 다니는 정부를 말하는 거였다.
“유감이군. 내가 키우는 말들은 모두 수말이라.”
“어머, 그렇군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속을 벅벅 긁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백작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이내 차를 같이 마시자고 한 속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아무튼, 하녀는 한 명 더 쓰도록 해.”
내가 얼굴을 굳히자 그는 자신이 승리했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벨은 공손하게 차를 따랐지만, 가볍게 떨리는 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찻잔을 던질 거라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는 탓에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새로 사람을 뽑을 예정이신가요?”
“괜찮은 인재가 세탁 담당으로 썩고 있더군. 이전 저택에서는 남작 부인의 전담 하녀였다니,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셈이지.”
그 한마디에 나는 백작이 추천한 하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택에 관심이 없는 그가 과거사까지 꿰뚫고 있는 이는 단 한 명. 세탁 담당 하녀인 백작의 정부뿐이다.
“세탁 담당이라니…… 말씀드렸지만, 전담 하녀는 품행도 중요하답니다.”
나는 웃으며 네 정부는 품행이 좋지 못하단다, 하고 대놓고 깠다. 맞는 말이잖아. 결혼한 사람이랑 붙어먹으면 행실이 안 좋은 거 맞잖아.
백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음, 혓바닥에 달콤한 승리의 맛이 감돌았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이깟 가벼운 말장난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추천하는 아이니 믿겠어요.”
기 싸움은 이것으로 족했다. 언뜻 들으면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벨의 손등이 창백해졌다. 나와 백작과의 기 싸움이 우스우면 우스웠지 이렇게 떨 일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백작의 말을 곱씹었다. 벨이 속상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다시 말을 덧붙였다.
“벨처럼 꼼꼼한 하녀이기를 바라요.”
“그건 아무래도 좋아. 이리로 오라고 했으니 얼굴이나 봐 둬.”
나는 백작이 참 겁이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눈이 돌아 버린 내가 어디 한적한 곳에서 그녀의 목을 부러트려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백작 부인이라면 부리는 사용인 하나쯤 해코지를 해도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는 위치였다. 물론 나도 그렇거니와 카를라도 남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 사회에서 분풀이로 하녀의 얼굴을 그어 버리거나, 팔다리를 부러트리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정부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걸까? 의문이 들기도 전에 백작이 목소리를 높여 누군가를 불렀다.
“리자!”
나는 그가 돌아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가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사실, 나는 백작의 정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소설의 내용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고, 알고 있는 거라고는 하녀라는 것뿐이었다.
침대 위에서 마주하기는 했지만, 바로 이불을 뒤집어써서 머리카락 색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굳이 백작의 정부가 누구인지 찾고자 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그녀의 모습을 만들어 낼 때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악역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했었다.
머릿속의 그녀는 눈이 치켜 올라가고 새초롬한 얼굴을 한, 어딘가 사람을 홀릴 거 같은 요염한 미녀였다. 그러나 실물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리자입니다, 마님.”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천사 같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었다. 꿀처럼 짙은 금발은 머릿수건으로 가려도 그 존재감을 숨기지 못했다.
흰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고, 새파란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뺨은 아이처럼 통통했고, 활짝 핀 미소는 이슬을 머금은 꽃 같았다. 나는 홀린 듯 그녀가 인사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백작의 옆에 섰다. 리자는 정말 산만하고 어수선했는데, 그녀는 쉬지 않고 제 손톱을 튕길 뿐만 아니라 몸을 좌우로 흔들어 대었다.
그러나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그 모습조차 천진난만해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미 말을 맞춰 놓은 모양이지, 속으로 비죽였다. 내가 싫다고 펄펄 뛰어도 백작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내 옆에 붙여 놨을 거다.
무슨 생각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 정부, 리자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리자의 귓불 아래로 흘러내리는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세탁 담당이니 옷 관리는 잘하겠죠.”
“네, 마님. 맡겨 주세요!”
나는 그녀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리자의 얼굴에는 불륜남의 배우자를 만나고 있다는 죄책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하녀들과 달리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대답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쩌면 이 또한 내 편견으로 만들어 낸 환상일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버리기로 했다.
“백작님은 바지 구김에 무심하지만, 나는 꽤 까다롭단다.”
“네, 마님!”
리자는 내 비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나는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작은 새를 괴롭히는 동네 꼬마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녀를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백작도 흐뭇하게 웃었다. 앞으로 지옥이 펼쳐질 텐데, 마음껏 웃어 둬라.
* * *
리자는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썩 마음에 들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남작가에서 전담 하녀로 일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러니, 카를라였으면 몇 번이고 속이 뒤집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보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박자 늦게 일을 처리했다. 큰 소리를 낼 정도는 아니라 나는 그녀가 언제까지 그렇게 구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리자, 마님의 차에 설탕을 넣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니?”
“하지만 백작님은…….”
“핑계 대지 마. 마님은 설탕 안 넣으셔. 다음번에도 실수하면 네 머리에 부어 버릴 거야.”
대신 벨의 속이 뒤집히는 중이었다. 벨은 둘을 가르치면 하나를 잊는 리자를 답답하게 여겼다. 내가 보는 앞에서 구박할 정도니 뒤에서는 얼마나 모질게 굴까.
그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당장 리자에게 주먹을 들어 올릴 기세인 벨을 말리기 위해 책을 내려 두고 명령했다.
“마부가 우편을 가져왔을 시간이구나. 누가 내려가서 가져오렴.”
“제가 가져올게요!”
벨에게 혼나던 리자가 외치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벨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내 주었다. 리자는 요란하게 달려 계단을 내려갔다.
저런 천방지축인 행동이 거슬리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벨이 또 인상을 썼다. 그래도 리자가 떠난 덕분에 읽던 책을 마저 읽을 수 있었다.
“마님! 편지가 왔어요!”
그러나 곧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책을 다시 덮어야 했다. 리자는 요란하게 문을 열고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정도를 모를 정도로 발랄했으며, 무례할 정도로 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