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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화 (7/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7화

    “그래요, 저는 귀걸이가 안 어울리죠.”

    나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백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백작은 팔짱을 풀지도 않고 나를 마주 노려보았다.

    나는 그를 보는 척 하녀들의 숫자를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백작의 정부까지 합해 스무 명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보세요, 이렇게 정교하고…… 너무 예뻐서 가지고 싶은걸요.”

    나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물론 귀여워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카를라의 외모는 빈말로도 사랑스럽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저 남들이 보기에 하녀들에게 물건을 사 주는 이유가 그럴듯해 보이면 되었다. 나는 귀걸이를 다시 훑어보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이러면 어떨까요? 저 대신 하녀들이 귀걸이를 달고 다니는 거예요.”

    “고용인에게? 그건…….”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조금 더 밀어붙였다.

    “그럴듯해 보일 거예요. 다른 부인들은 하녀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히기도 하는걸요. 하녀복처럼 단체로 귀걸이를 하는 거죠. 우리 저택의 하녀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게요.”

    이 정도면 백작 부인의 변덕으로 보일 수 있을 터였다. 귀족 여자들의 유행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기만 해도 좋았다.

    나는 장난기 많은 여자처럼 까르르 웃기까지 했다. 그래도 백작은 구겨진 얼굴을 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그럼 가진 것 중에 줄 게 있는지 오래된 장신구를 세척해 오라고 해야겠네요…….”

    꾀꼬리처럼 속삭였다. 세척이라는 말에 백작은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몸을 떨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가 우는 소리를 잘했나 보군.

    나는 상인이 가져온 귀걸이를 훑어보는 척했다. 그러고는 아까 봐 둔 것들을 손가락질했다.

    “같은 것으로 열아홉 개, 아까 고른 거에 추가해 줘.”

    빙긋 웃으며 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꽤 기뻐 보였다. 눈이 동그래진 게 다람쥐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얘, 이건 너희 나누어 가지렴. 백작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란다.”

    하녀들이 눈치가 있다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리라. 그들은 백작의 정부에게는 귀걸이를 나눠 주지 않을 거다. 모시는 주인의 변덕으로 이 주를 꼬박 고생한 그들의 분노는 백작의 정부에게 향하고 있었다.

    사람의 분노는 때로는 정당하지 않은 곳으로 흐른다. 이 귀걸이는 분노의 발산을 허락한 거나 다름없었다. 괴롭힘이든, 아니면 은근한 따돌림이든 좋았다.

    동료에게서 배척받은 정부는 백작에게 더 매달릴 거다. 그러면 그는 정부에게 따로 귀걸이를 선물하겠지.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였다.

    * * *

    인간은 남 탓을 하고 싶어 하는 생물이다. 나는 장신구를 정리하는 벨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이전보다 내가 편해진 모양인지 간혹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재잘거리곤 했다.

    “고 계집애가 얼마나 기고만장해 있는지 몰라요.”

    괜한 일을 시킨 건 나일 텐데 하녀들은 백작의 정부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벨도 마찬가지였다. 피해를 본 일이 없는 벨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벨의 단짝은 주방 하녀인 샬롯이었고, 샬롯의 언니인 잉게는 세탁 담당 하녀였다. 그러니 벨은 친구의 언니를 괴롭게 만든 주범을 싫어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번쩍거리는 귀걸이를 하고 와서는 뻐겼다는 거 있죠? 멀리서 봤는데, 움직일 때마다 흔들거리더라니까요.”

    나는 조금 멍하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벨의 분노는 정당하지 못했다. 그녀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동안 저택의 사람들 모두 백작의 불륜을 눈감아 왔다. 그들은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것도 모른다. 그러니 카를라에게 충성하여 분노한다고도 볼 수 없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내 중얼거림에 벨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마저 생각을 이었다. 하녀들의 분노가 정당하지 못하듯, 내 분노 또한 정당하지 않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카를라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그저 예상치 못한 불운에 휘말렸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백작이 싫긴 했지만 그건 백작이 나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는 많이 먹는다고 은근히 핀잔을 주거나, 옷이 예쁘지 않다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그러나 그의 코에 주먹질할 수 없다고 해서 정부를 괴롭혀도 되는 건 아니었다. 죄책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내가 카를라를 동정한다고 해서 그녀 대신 복수해도 되는 걸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백작의 정부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게는 백작을 괴롭힐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았고, 그녀는 그중 하나였다. 카를라와 내가 엿을 먹은 만큼 그도 꼭 쓴맛을 보아야 했다.

    “벨.”

    “네, 마님.”

    나는 콧잔등에 주근깨가 예쁘게 박힌 하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귀걸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니?”

    “네. 조금 전에 봤는걸요. 아래로 늘어지는 게 흔하지 않은 모양이었어요.”

    “비슷한 걸 구할 수 있을까?”

    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내 공범자로 삼기로 했다.

    “하나 구해 오렴.”

    그녀의 눈에 얼핏 측은함이 감돌았다. 괜히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오해를 하든, 나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꼭, 꼭 구해 올게요!”

    나는 충성스러운 벨을 보며 미소 지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에는 정부가 달고 다니는 것과 흡사한 귀걸이가 놓였다. 이것을 어떻게 쓸지는 이미 정해 둔 상태였다.

    머릿속에 수십 개의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게 문제였다.

    문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벨은 내가 건넨 귀걸이를 얼른 받아 서랍장에 숨겼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마님.”

    집사였다. 그녀는 봉급을 삭감당한 이후 내게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긴, 제가 생각해도 안주인의 방에서 남녀가 뒹굴게 만든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겠지.

    봉급만 삭감한 건 그녀에게 유감스러운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추 짐작한 바로는, 열쇠를 똑바로 관리하지 못한 집사는 그대로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추천장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게 보통이라나. 그녀가 나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했지만, 그렇다고 먹고 살길을 끊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작님께서 차를,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그녀는 썩 내키지 않는 말투로, 그러나 정중하게 백작의 티타임 초대를 알렸다. 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무슨 개수작이지.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나쁜 말을 지워 내고 물었다.

    “어디서?”

    “정원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십니다.”

    곁눈질로 창문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어 티타임을 가질 장소로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 푸드는 적당히 준비해 줘. 차는 내가 늘 마시던 게 좋겠어. 내 찻잔에는 레몬을 띄워 주고, 백작님의 것은…….”

    나는 카를라가 즐겨 마시던 쓴 차를 떠올렸다.

    “진하게 우리렴.”

    집사는 허리를 숙이곤 다시 자리를 떴다. 정말 백작의 말을 전하러 온 것뿐인 모양이었다.

    “마님, 머리를 다시 만질까요?”

    “아니야. 충분해. 숄만 걸치고 나가면 되겠어.”

    어차피 남편을 보러 가는 거다. 옷차림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뭐라고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벼운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창문 너머로 하녀들이 테이블이며 의자를 옮기는 게 보였다.

    나는 하녀들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원으로 향했다. 백작은 내 머리 위를 가리던 그늘이 테이블 위를 비켜날 즈음에야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한 권 들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책을 읽는 건 시력에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가 그리 더운 건 아니어서 정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 정원사가 가지를 친 덕분에 풋풋한 풀 냄새가 나는 게 퍽 상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않았어도 느적느적 걸어오는 저 얼굴에 주먹을 날려 줬을 터였다.

    “차가 식었군.”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허튼소리를 뱉었다. 나는 그 얼굴에 당장이라도 찻물을 끼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의 말대로 펄펄 끓는 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목소리를 높여 그를 비꼬았다.

    “뜨거운 차를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일부러 차 온도가 낮아질 때를 맞춰 오시는 줄 알았죠.”

    그가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다분히 과장되게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음엔 백작님의 취향에 맞춰 내오라고 이르겠어요.”

    내 의도가 먹혔는지, 백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나는 그게 햇빛 때문인 양, 벨에게 손짓했다.

    “얘, 백작님께 양산을 씌워 드리련?”

    하녀의 손에 들려 있는 알록달록한 양산을 흘겨보던 백작이 혀를 찼다. 얼마 전에 샀던 양산임을 알아차려 주었으면 했다.

    벨이 화려한 레이스 양산을 펼치자 그는 손을 내저어 쓰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쳇,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되겠다고 기대했는데. 삐죽거리는 입을 숨기려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당신이 데리고 다니는 하녀요?”

    마시려고 하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벨은 늘 옆에서 카를라의 시중을 들어왔는데,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이라니 우습지도 않았다. 나는 벨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나는 그를 훑어보았다. 백작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쉽게 열릴 거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비열함이 가득했다.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듬직함이나 녹아내릴 거 같은 다정함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지독한 기만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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