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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화 (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화

    나는 벨이 세탁물을 정돈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벨, 심부름을 해 줘야겠다.”

    “네, 마님. 어디로 갈까요?”

    “재단사를 부르렴. 내가 마지막으로 언제 불렀더라…….”

    나는 기억나지 않는 척 말을 흐렸다.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기억이 아예 없는 거지만. 벨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이제 일 년이 되었어요, 마님.”

    일 년이나 옷을 맞추지 않고 살았다니, 카를라도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그녀가 측은함과 동시에 미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불쌍하고 바보 같은 여자였다.

    가진 돈도 없고, 뒷배도 없이 남편에게 배신당한 여자. 분명 그늘진 뺨과 어두운 눈동자 때문에 우울함에 젖은 그녀는 귀신 같은 몰골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물론, 내가 이 몸에 들어앉은 이상 그런 꼴은 이제 안녕이었다. 나는 벨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여러 벌 맞출 생각이라고 전하렴.”

    “네, 마님.”

    벨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손은 항상 배꼽 아래에 공손하게 모여 있었는데, 요 며칠 동안 옷을 정돈하고 내 변덕에 어울려 주느라 평소보다 더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집사에게 심부름 값을 받는 김에 연고도 사 오고.”

    “네? 마님, 연고는 어디에 쓰시려고요?”

    그녀는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손이 거칠어졌잖니. 시중드는 하녀 손이 그래서 되겠어? 넉넉하게 사렴. 남으면 나눠 쓰고.”

    벨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녀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받는 게 부끄러웠다.

    “얼른 다녀와.”

    벨을 내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실컷 괴롭혀 놓고 연고를 사 주는 게 우습기는 했다. 하지만 아예 안 주는 것보다는 나은 거 같았다.

    나는 백작에게서 카를라의 지참금을 모두 돌려받으면 그들에게 두둑하게 보너스를 챙겨 주기로 마음먹었다.

    오래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재단사는 사흘도 되지 않아 저택을 찾아왔다. 잔뜩 준비하고 온 재단사를 보며 백작은 언짢은 표정을 했지만 대놓고 내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재단사는 두꺼운 패턴 북을 늘어놓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마님, 못 뵌 사이 더 우아해지셨군요.”

    나는 그녀의 거짓말을 건성으로 흘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카를라의 몸에 큰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라 치수를 새로 재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치수를 재는 몇 분 동안 내가 보기에도 깡마르고 볼품없는 몸에 대한 칭찬을 듣는다면 부끄러워 죽고 싶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는가?”

    재단사의 어색한 웃음을 무시하고 나는 패턴 북을 훑어보았다. 뭐가 예쁜지 잘 몰라 뒤적거리고만 있으니 재단사가 얼른 노란 천을 들이밀었다.

    “부인은 피부가 좋으셔서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리실 겁니다.”

    응접실 반대쪽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백작이 헛웃음을 쳤다. 재단사가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아이 같은 색은 원치 않네만.”

    내 말에 그녀는 얼른 천을 거두고 다른 색의 천을 내밀었다. 하늘하늘한 천이 손가락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그럼 감색은 어떠실까요. 너무 어둡지도 않고, 부인의 우아함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재단사는 패턴 북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나는 그녀가 보여 주는 그림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빗장뼈가 보일 만큼 넓게 파인 목선과 그에 대비될 정도로 부풀린 소매가 아이러니하게 어울렸다. 바짝 조인 허리에서부터 치마가 둥글게 흘러내리는 게 귀엽기까지 했다.

    짙은 녹색으로 칠한 드레스는 최소한의 레이스를 제외한다면 화려한 장식은 전혀 없었지만, 어쩐지 눈에 밟혔다.

    “이 디자인으로도 하나 맞추고 싶은데.”

    “예, 예. 그럼 이 옷도 감색으로 맞출까요?”

    “아니. 녹색이 좋겠어.”

    재단사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님, 이 옷을 요즘 유행하는 색으로 맞추기에는 좀…….”

    재단사는 연한 연두색에 가까운 천을 내밀어 보였다. 그게 요즘 유행하는 색이라, 녹색이라는 내 말에 그 색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입을 법한 발랄한 색이었다.

    이 세계의 유행 따위 알 게 뭐냐 싶기도 했고 카를라가 이런 색의 옷을 입는다면 분명 얼굴이 새카맣게 죽은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어 보였다.

    “여기에 칠해진 색으로 하고 싶은데.”

    “아하…… 확실히, 짙은 녹색이라면 마님께 잘 어울릴 겁니다.”

    재단사는 짙은 녹색의 천을 몇 가지 뽑아 늘어놓았다. 내 눈에는 거의 비슷비슷해 보였는데 그녀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었다.

    재단사는 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다가 두 장을 내 얼굴에 대보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나는 패턴 북을 팔락거리며 마음에 드는 옷을 몇 벌 골랐다. 야회복이 세 벌, 일상복이 두 벌, 외출복이 두 벌이었다.

    백작이 헛기침하는 소리를 몇 번 무시하자 재단사도 아예 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소매에 고래수염을 넣으면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아 아주 근사하답니다. 이만큼 부풀릴 거예요.”

    “너무 과하지 않을까?”

    “요즘은 사제도 소매를 부풀리는걸요.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요.”

    “그럼 그렇게 해 주게.”

    나는 그녀의 부추김에 못 이기는 척 몇 벌을 더 골랐다. 재단사는 감각이 좋았다. 그녀는 기막힌 솜씨로 값비싼 것들을 추천해 주었고, 나는 추천하는 족족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프를 색만 다른 것으로 세 벌 구매하겠다고 하자 재단사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백작은 이 정도에서 끝나서 다행이라는 듯, 수표에 사인했다. 흥정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걸 보니, 카를라가 옷이 없는 건 가난해서가 아니라 이 녀석이 모질게 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 옷은 충분하겠지.”

    백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짐을 챙기는 재단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옷은 충분해요.”

    백작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이제야 피곤한 일이 끝났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풀었다. 안심하기는 이르다, 인마. 나는 얄미운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이제 모자와 양산, 그리고 구두만 맞추면 되겠어요. 아, 목걸이와 귀걸이도 새로 맞춰야 하고요.”

    나는 허전한 목이 드러날 수 있도록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아무래도 루비보다는 다이아몬드가 좋을 거 같아서요.”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에 나는 눈까지 접어 웃어 보였다. 이제 시작인데 뭘 그렇게 무서워하시나.

    * * *

    그야말로 돈지랄이었다. 나는 돈을 펑펑 써 댔다. 지금 백작을 파산시킬 수는 없으니 나름 적당한 선을 지켰다.

    수도 근처의 상인들을 저택으로 부르고, 종일 그들이 보여 주는 것을 몸에 걸치며 노는 건 즐거웠다.

    뭐든 해 봐야 는다고, 가면 갈수록 수월하게 물건을 고를 수 있었다. 첫날에는 겨우 리본을 두 개 샀지만, 사흘째 되는 날은 챙이 크고 화려하게 꾸민 밀짚모자를 두 개, 리본으로 장식한 보닛을 하나, 레이스로 짠 양산을 세 개 샀다.

    모두 색만 다른 것으로, 보자마자 사치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보석을 고르는 건 더 재미있었다.

    “마님, 에메랄드는 어떠십니까?”

    좋은 기계로 세공을 했다며 보여 주는 보석은 손을 대기가 무서울 정도로 눈부셨다. 그들의 마차에서는 장신구들이 끝없이 나왔는데, 종류만 나열해도 손가락을 다 써야 했다.

    목걸이부터 팔찌, 귀걸이, 브로치와 로켓, 반지, 머리 장식까지. 보여 주는 것들의 가격이 올라갈수록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슬쩍 눈을 돌렸다.

    그는 화를 참고 있었다. 그만 고르라고 하면 부인에게 면박을 주는 돈 없는 귀족이 될 거고, 더 고르라고 부추기기엔 카를라에게 쓸 돈이 아까울 터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가 고르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아, 재밌다!’

    곁눈질로 그가 화를 참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즐거웠다. 백작은 팔짱을 끼고 상인을 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화를 낼 수도 없을 터였다.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이것저것 사들이는지 알고 싶겠지만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목을 훤히 드러내는 디자인의 목걸이를 이리저리 살피며 백작에게 물었다.

    “어때요?”

    “그럭저럭.”

    그는 인상을 쓰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억지로 대답을 해야 했다. 목에 걸리는 목걸이를 모두 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카를라는 원래 외출을 자주 하지 않는다.

    “좋아. 목걸이는 이쯤 하지.”

    내 말에 상인이 하인들을 시켜 목걸이 상자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귀걸이가 담긴 상자들을 늘어놓았다.

    구색 갖추기용으로 가장자리에 둔 귀걸이가 시선에 걸렸다. 백작 부인이 쓰기에는 급이 낮은 보석이고, 사용인들이 쓰기에는 눈에 띄는 디자인이었다.

    “한번 걸어 보시겠습니까?”

    상인이 능숙하게 작은 거울로 귀를 비추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머뭇거렸다. 카를라에게는 귀걸이가 몇 개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도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빛이 바랜 진주 귀걸이 두 점뿐이었다. 귀를 뚫기는 했으나 치장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왜 그럴까, 고개를 기울이며 귀걸이를 대어 보았다. 섬세하게 세공한 귀걸이가 머리카락과 함께 아래로 늘어졌다.

    “당신에게는 귀걸이가 어울리지 않잖소.”

    질문하지 않았는데도 내 의문에 해답을 던져 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저런 식으로 카를라를 통제해 온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사랑에 눈이 멀어 참아 주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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