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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화 (5/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화

잘생긴 남자와 마주쳐 놓고 한다는 말이 기껏 이런 거라니. 어쩔 수 없었다.

귓가에서 소리를 질렀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덜덜 떨며 손끝 하나라도 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 나를 당장 내려놔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 무례하긴!”

조금 떨기는 했어도 내 귀엔 꽤 훌륭한 협박처럼 들렸다. 하지만 기사는 나를 끌어안은 그대로 대답했다.

“실례했습니다, 부인. 무례함에 대한 사과는 부인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말 그대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승마장 입구 근처의 평평한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나를 내려 주었다.

기사는 내가 잔디를 밟고 똑바로 서자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만 꿇고 고개를 숙이기만 했을 뿐인데 연극배우처럼 근사했다.

“부인의 몸에 경솔하게 손을 댄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남자는 깍듯하게 내게 용서를 구했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아주 정중했다.

“그, 아, 아니…….”

나는 더듬거리다가 그에게 아직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레짐작으로 정중한 남자를 무뢰한으로 몰아간 셈이라 괜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목이 타는 듯한 느낌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조금 전에는 제가 흥분했던 거 같네요.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신사분께서 눈감아 주시기를 바라요.”

나는 짐짓 여기가 그런 곳인 걸 너도 알지 않느냐는 뉘앙스로 말하며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정돈했다.

말을 타기 위해서 가볍게 입은 치마 끝이 찢어져 있었다. 그리 심하게 찢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본 남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레, 레이디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생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내가 한 말을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나를 여전히 ‘레이디’라고 칭하며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새빨간 얼굴이 귀여웠다.

나는 정신을 놓고 기사를 바라보다가 퍼뜩 허리를 폈다. 이 남자와 오래 말을 섞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닌 듯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다는 뉘앙스를 비췄다.

“경, 감사했어요. 답례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도도하게 보일 정도로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이름도 묻지 않고 답례를 운운하는 꼴이 내가 생각해도 정말 거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서는 내게 다시 양해를 구했다.

“제가…… 모셔다드려도 되겠습니까?”

잘생긴 남자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못된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요.”

그는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기사를 그대로 형상화한 거 같은 남자였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흔들려선 안 돼.’

백작의 불륜을 꼬투리 삼아 재산을 돌려받기 위해선 책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카를라가 다른 남자와 놀아난다는 소문을 퍼트릴 수는 없었다.

‘무시하자.’

빠르게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이 많은 쪽으로 발을 옮겼다.

기사는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어, 어쩌다가 본 사람도 그냥 가는 길이 겹쳤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등을 따갑게 찌르는 눈빛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내가 무사히 일행들과 합류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자리를 떴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말 나를 순수하게 걱정해서 하는 행동이었을 성싶었다. 기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자 부끄러움이 다시 몰려왔다. 순수한 호의를 더럽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지레짐작으로 무례한 말을 던졌던 게 떠올랐다. 거기에 답례니 뭐니 하면서도 끝까지 이름을 묻지 않은 것까지. 완벽히 거리를 두는 행동이었다.

뜨거워진 뺨을 부채질하자 주변 부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왕실 소속의 기사님도 승마하러 오시나 봐요.”

“아무래도 왕궁보다는 밖이 더 재미있으니까요,”

그들은 남자의 등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소속을 알아낼 만큼 눈썰미가 좋았다. 거기에 잠깐 본 것만으로도 온갖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말재주도 있었다.

“신전 소속 기사님들도 가끔 나오신다지요?”

“어머나, 남사스러워라.”

이야기는 곧 기사와 궁중 시녀의 스캔들로 옮겨 갔다. 그러고는 곧 누가 누구와 게임을 하다가 사이가 틀어졌다느니 하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었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람이 강해지는 탓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치맛자락이 흐트러지자 부인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곧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도 날씨가 좋으면 또 오는 게 어떨까요?”

“초대장을 보낼게요.”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맞아야 건강에 좋대요. 저택은 신경 쓸 것도 많잖아요.”

그들은 은근히 나를 부추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빤했다. 바깥나들이에 이제 막 맛을 들인 부인은 승마장에 갈 핑계로 쓰기에 그만인 사람이 아닌가. 짐짓 모르는 체하고 그들의 초대에 응했다.

“초대장을 보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찢어진 치맛단이 자꾸만 발목에 감겨 거슬렸다. 완전히 찢어 버릴까 하다가 벨의 얼굴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 * *

마차에서 기다리던 벨은 내 치맛단이 찢어진 것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 뭐니.”

“마님, 괜찮으세요?”

“그럼. 안 다쳤어.”

벨은 다행이라며 저택에 도착하는 대로 드레스를 수선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피곤했다.

그래도 맑은 공기를 쐬었다고, 기분이 나아지기는 했다. 정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라도 괜찮은 구석이 있구나 싶은 마음이 조금 들었으니까. 이 마차의 도착지가 백작이 있는 저택만 아니었다면 이 세계에 조금은 정을 붙일 수 있었을 텐데.

만약 백작이 카를라를 백작 부인으로서 존중한다면, 적어도 저택 안의 하녀에게는 손을 대서는 안 되었다. 카를라의 자존심을 가장 상하게 한 건, 백작의 정부가 세탁 담당 하녀라는 거였다.

불륜과 바람에 상대의 지위가 무슨 상관이냐 싶었지만, 카를라는 그것을 못내 부끄러워했다. 계급 사회에 익숙한 카를라는 놀아난다면 적어도 그가 저와 비슷한 귀족 부인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제게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백작은 그녀를 비웃듯 저택의 하녀에게 손을 뻗었고, 결혼도 하지 않은 하녀와 뒹굴며 안주인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속닥이기까지 했다.

백작은 정말 나쁜 놈이다. 카를라에게 한 짓만 훑어보아도 뻔했고, 내게 하는 짓을 봐도 그랬다. 그는 저택에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옷이 찢어졌군. 정숙하지 못하게.”

“말에서 떨어질 뻔해서요.”

카를라였다면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면 백작과 대화를 나눈다고 기뻐했을까. 아무렴 어떠랴. 나는 둘 다 아니었다.

그저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나는 계단으로 올라가다가 말고 그를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오래되어 천이 낡은 모양이죠.”

돈이 많으면서도 부인의 옷 한 벌 사 주지 않는 백작에 대한 공격이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절약은 미덕이지만 과하면 궁상이 되는 법이지 않소.”

기가 차서 하, 하고 숨을 뱉었다. 이렇게 군다 이거지. 나는 이참에 백작에게 옷을 뜯어내기로 했다. 궁상스럽다는 말에 그냥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네요. 몇 벌 새로 장만해야겠어요.”

그제야 백작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제대로 반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내가 서 있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나는 난간을 꽉 쥐고 입가를 끌어 올렸다. 백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옷이 그렇게 많은데 한 벌 망가졌다고 새로 맞추는 건 낭비요.”

나는 코웃음을 쳤다. 카를라의 드레스 룸에는 유행이 지난 옷밖에 걸려 있지 않았다. 그마저도 몇 벌 되지 않았다.

고쳐 입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옷을 돌려 입으면 수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카를라가 자주 밖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가 이 때문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백작은 제 부인의 옷장에 옷이 몇 벌 있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옷 한 벌 사는 것도 아깝게 여기든가.

“그래요? 그렇군요.”

나는 괜히 반박하는 대신 웃어 보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미리 말해 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 * *

날이 밝자마자 당장 옷장 안에 있는 드레스를 몽땅 세탁하라고 명령했다.

“마님, 갑자기 빨래를요?”

“그래. 실내복 몇 벌만 빼고.”

의아한 얼굴로 묻는 벨에게 미리 생각해 놓은 변명을 던졌다.

“너무 오래 넣어 뒀잖니? 수선하기 전에 깨끗하게 빨아 놓으면 너도 편할 테니까.”

벨은 쉽게 납득했다. 유행이 지난 옷들이었지만, 모두 좋은 천을 써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거기에 여러 번 수선해 세탁이 까다롭기까지 했다.

덕분에 세탁 담당 하녀들은 한동안 철야를 해야 했다. 눈 밑이 퀭해진 하녀들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참 그들을 괴롭혔다.

“침대 시트에 보풀이 생겼잖니.”

침대 시트에 콩알보다 작은 보풀이 생겼다고 트집을 잡거나, 일부러 테이블보에 홍차를 흘리기까지 했다. 커튼이 칙칙하다며 죄다 걷어 내고 다른 커튼을 달기도 했다.

죄책감이 가슴을 찔러 댔다. 백작의 정부가 우는소리를 할 때까지 죄 없는 하녀들의 손이 부르텄다.

이 주를 그렇게 괴롭히자, 백작이 백기를 들었다.

“당신이 맞추고 싶은 대로 맞춰. 너무 많이는 안 돼.”

그는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내게 던지듯 말했다. 공대도 하지 않았다. 정부가 백작을 단단히 괴롭힌 모양이었다.

겨우 이 주 만에 나가떨어질 근성으로 카를라를 일 년이나 괴롭혔다는 게 우습기까지 했다. 어쨌든 지금은 백작의 기를 한 풀 꺾어 놓은 게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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