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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화 (4/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화

벨은 쏜살같이 초대장을 가지고 왔다. 산처럼 쌓였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벽을 새로 도배해도 될 만큼 쌓여 있는 초대장을 보며 다시 한숨을 쉬자, 벨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날짜가 지난 초대장은 따로 놔두었어요, 마님.”

내가 신경 쓰는 부분은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벨에게 애써 웃어 보이고는 초대장을 하나씩 개봉하기 시작했다.

카를라의 글씨체는 따라 하기 힘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초대장에 답장하는 건 중노동이었다. 한순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답장해야겠지…….’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화장대에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카를라의 필체를 따라 할 땐 딱 2가지만 주의하면 된다. 그녀는 몇 가지 글자의 획을 길게 빼거나 동그라미를 점으로 처리하는 등의 습관이 있었다.

빙의한 덕분인지 이 세계의 글자는 술술 읽을 수 있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내 원래 글씨체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그 정도만 조심한다면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실제로 내가 쓴 글씨를 유심히 보면 카를라가 쓰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아직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카를라는 모든 편지를 아주 짧게 쓰는 사람이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마님, 잉크를 보충할까요?”

“그래.”

모든 초대장에 답장할 필요는 없었다. 여러 번 초대한 귀족에게는 답장을 오래 못 해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쓰고, 아무 귀족에게나 건네기 위해 이름을 적지 않은 배포형 초대장은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잉크병을 다시 채워야 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나는 벨이 잉크병에 잉크를 따르는 것을 구경하다가 적당한 초대장을 찾아 뒤적였다. 그럴싸한 초대장이 많았다. 티 파티, 만찬회, 꽃놀이, 뱃놀이, 승마…….

“벨.”

“네, 마님.”

“내가 그동안 입었던 승마복 중에 뭐가 제일 어울렸니?”

나는 짐짓 그녀를 떠보는 척 물었다.

“네?”

벨은 당황하며 양손을 쥔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혼내는 것같이 들렸나 싶어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부드럽게 말을 붙였다.

“그냥 물어보는 거야.”

“저는 마님이 말을 타시는 걸 본 적이 없는걸요.”

그녀가 당황한 건 내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여서가 아닌 모양이었다. 카를라를 담당한 지 일 년이 넘은 전담 하녀가 본 적이 없다는 건, 그녀의 승마 실력이 그리 훌륭한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는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승마장에서 놀자는 내용의 초대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어머, 그랬던가? 하긴, 잘 못하는 걸 남에게 보이긴 부끄럽잖니.”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카를라가 말을 잘 못 타는 모양이니 내가 말을 못 타도 의심하지 않겠지. 말을 타는 건 처음이라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벨은 초대장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님, 승마장에 가시게요?”

“오랜만에 말을 타면 기분이 좋아질까 싶어서.”

“승마복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없으면 새로 사지 뭐.”

벨과 잡담을 나누며 들뜬 마음으로 답장을 적었다. 그러나 너무 들뜬 나머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세계가 미쳐 있다는 것.

카를라에게 승마를 권유한 부인들도 이 세계의 훌륭한 일원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승마가 아니라, 말을 타는 척 외진 곳으로 가 정부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거였다.

그걸 승마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아차리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보세요, 부인. 저 기사님은 참으로 늠름하시지 않나요?”

“어머, 셔츠가 땀에 젖었네요…….”

눈을 돌리면 하나같이 쭉쭉빵빵한 남자들뿐이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등이 널찍한 남자들이 눈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남자들은 맞추기라도 한 듯 번듯한 정장이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부인들은 그 옷만 보고도 어느 기사단인지 척척 맞혔다.

부인들은 마음에 드는 기사가 지나가면 일부러 말을 잘 타지 못하는 척 머뭇거렸다.

“부인, 마장이 처음입니까?”

“아, 아니에요…… 제가 서툴러서…….”

“하하, 제 무릎을 밟고 올라가시죠.”

그러면 남자 한 명이 적극적으로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귀부인이 남자의 무릎을 밟고 말 위에 올라타면, 기사는 말 타는 법을 알려 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승마장 중앙의 숲으로 말을 끌고 사라졌다. 참 대단한 세계였다.

함께 온 부인들은 순식간에 짝을 맞추고는 사라졌다. 그들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그들처럼 누군가를 낚아챌 수 있을 거라 믿는 눈치였다.

“대단하다…….”

혼자 남은 나는 혀를 내두르며 말에 올라탔다. 곁눈질로 배웠어도 생각보다 쉽게 안장에 앉을 수 있었다. 카를라가 어느 정도 말을 타는 법을 배운 덕분일지도 몰랐다.

말을 모는 건 재미있었다. 작은 말인데도 평소와 달리 시야가 높아져서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말도 순해서 갑자기 뛰거나 멋대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

“오…… 예쁘다.”

나는 천천히 승마장 가장자리를 돌았다. 말뚝을 박아 놓은 경계선 주변에 붉은 꽃을 잔뜩 심어 놓았는데, 아래에서 볼 때는 그저 그런 잡초처럼 보였지만 말 위에서 보자 이것도 꽤 근사해 보였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산책이었다. 어쩌다 시선이 숲으로 향하면 냉큼 고개를 돌려야 하는 것만 뺀다면.

숲이라고 해도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작은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살구색 인영이 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귀를 기울이면 고양된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듣지도 보지도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멀찍이 말을 몰았다. 리듬감 있게 걷는 말 위에서 초점을 놓고 있자니 자꾸만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다 불태워 버리고 싶다.”

나도 모르게 하소연이 튀어나왔다. 하소연이라기보다는 범죄자 같은 소리였다. 이 세계에서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막막하던 마음이 터져 나온 건지,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중얼 말에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냐고. 이왕이면 힐링물에 빙의시켜 주면 얼마나 좋아. 왼쪽에 잘생긴 놈, 오른쪽에 귀여운 놈, 앞에는 예쁜 애, 무릎에는 고양이…….”

말을 하면 할수록 지금의 처지가 억울했다. 나는 왜 하필 빙의해도 이딴 소설에 빙의했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천 원짜리 소설을 산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잖아. 왜 하필 딱 한 번 읽은 미친 불륜물이냐고. 남편이 잘생기면 몰라, 못생겼잖아. 빌어먹을 신이시여,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뭣 같은 세계에 떨어트리시나이까!”

억울함을 한참 토로하다가 고개를 드니 아까와는 다른 풍경이 보였다. 나무들 사이로 말이 매여 있는 게 보였다. 불건전한 일들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잘못 들어온 모양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으악!”

말이 속도를 높여 뛰기 시작했다.

좌우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지는 말의 속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떨어지지 않도록 말고삐를 꽉 쥐는 것뿐이었다.

고삐가 금방이라도 끊겨 내 몸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았다. 너무 겁이 난 나머지 살려 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죽으면 불쌍한 카를라의 자리를 빼앗겨 버리고 말 거다.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종아리에 치맛자락이 마구 스쳤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살려 줘!”

순간 말의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나는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몸에 잔뜩 힘을 주어야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옆으로 휘청였고, 나는 그대로 낙마…….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하지 않았다. 내 몸을 붙잡은 건 지나가던 기사였다. 그는 흥분한 내 말 옆에 자신의 말을 바짝 붙이고, 양팔로 나와 말고삐를 잡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말은 금방 멈춰 섰다.

나는 하체는 말 안장 위에, 상체는 남자에게 붙들린 채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나는 기사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어디 부딪히셨습니까?”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는 것보다 더 놀랄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화사하게 빛나는 금발, 새파란 눈동자, 그을린 곳 하나 없는 피부와 늘씬한 몸.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게다가 그는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었다. 세상에 제복을 싫어하는 여자도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그의 외모에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사람이 놀라면 어휘력이 떨어진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입에서는 똑바른 문장 대신 어버버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사가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레이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는 내 등과 무릎 사이에 팔을 쑥 끼워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순간 여기가 야한 소설 속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남자를 믿어도 될까? 그대로 끌려가서 험한 짓을 당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마구 몰아쳤다. 그의 품은 넓고 따뜻했지만 무서운 생각 때문에 몸이 굳었다.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꽥 소리를 질렀다.

“나 유부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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