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화
* * *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향할 때면 두 발짝 뒤에 전담 하녀인 벨이 따라붙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이 아가씨는 어제 일로 내가 어지간히 걱정되는지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마님, 책을 가져올까요?”
“아니야. 피곤하네. 좀 쉴 테니 부르면 오렴.”
“네. 쉬셔요.”
나는 벨을 쫓아내듯 내보내고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신경전을 끝내고 나니 피로가 몰려들었다. 카를라는 저런 거랑 용케 이 년을 살았다 싶었다.
심지어 이카루스 백작은 카를라가 평소랑 다르다는 것도 몰랐다. 아니, 이 저택의 사람들 모두가 카를라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걸 모른다.
괜히 눈물이 나올 거 같아 킁,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한참 연락을 못 한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내가 없어졌다고 울고 있으면 어쩌지.
일 때문에 자주 연락을 못 했던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심지어는 매일 죽일 듯이 싸웠던 우리 팀 팀장도 보고 싶었다.
내가 사라져서 다들 놀랐을 텐데. 카를라는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불쌍했다. 차라리 사고를 당해서 죽은 몸에 빙의했으면 마음이 편했을까?
이전에 쓰던 것을 깨끗이 빨아 교체한 침대 시트에서는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 그렇지. 리스트, 리스트.”
나는 몸을 반만 침대 아래로 늘어트렸다. 남이 본다면 꽤 흉할 몰골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모서리가 깨진 대리석을 들어 올리고, 그 아래에 있는 종이 뭉치와 일기를 꺼냈다. 빛 한 번 받지 않는 곳에 있었는데도 눈물로 얼룩져서 해진 종이 사이로 지참금 리스트를 찾았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아, 찾았다.”
지참금 리스트는 세 장이나 되었다. 현금으로 바꾸기 쉬운 보석부터 크고 작은 광산까지 다양한 것들이 섞여 있었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손가락으로 목록을 훑으며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았다. 광산은 리스트의 중간쯤에 적혀 있었다.
일기장과 함께 보관되어 있던 부드러운 연필로 그 옆에 작게 표시를 했다.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다 찾아 줄게. 언니만 믿어.”
백작이 카를라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어차피 정부에게나 쓸 텐데, 그럴 바에는 다시 빼앗아 오는 게 옳은 일일 테다.
나는 카를라의 일기장을 한번 쓰다듬었다. 좋은 가죽을 썼는지, 겉표지에 손때가 묻어 있었지만 찢어지거나 상한 부분은 없었다. 종이 위에 쓰인 카를라의 속내는 시커멓게 상해 있었지만 말이다.
불쌍한 카를라.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끝없이 고민했다. 조금 더 애교 있었다면, 좀 더 쾌활했다면, 좀 더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면…….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답이 되지는 못했다.
신의 이름으로 순결을 맹세한 부부 사이의 신뢰를 깨트린 건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남편의 외도를 왜 피해자인 그녀가 자책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짐작만 할 뿐.
그중에는 잠자리에서 남편을 만족시키지 못해 아내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있었다.
[신에게 기도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부덕함을 씻으러 가야겠다.]
그녀는 이 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는 제 몸을 의심했지만, 나는 백작이 의심스러웠다. 일 년이 넘게 눈만 맞으면 몸을 겹쳤다고 묘사된 정부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놈은 피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데, 계절이 바뀔 때쯤에야 한 번씩 의무적인 잠자리만 할 뿐인 부부에게서 아이가 생기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그러나 카를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이가 잘 생긴다는 온갖 민간요법을 적었다가 지운 흔적도 있었다.
그녀는 덕을 쌓아야 한다며 자선사업을 주도했고, 외로운 노부인에게 편지를 썼으며, 기댈 곳 없는 어린 영애들에게 기꺼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행동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일기장을 뒤져 알아본 그녀는 성녀가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잘못에는 가차 없는 귀족 여성 그 자체였다.
그런 그녀가 백작을 사랑해서 자신의 성정마저 뿌리째 뽑아 버린 것이다.
이 소설에서, 카를라도 단단히 미친 여자였다. 그녀는 사랑에 미쳐서 가문도 버리고 자기 자신마저 버렸다.
그러나 어쩐지 그녀가 도저히 남 같지 않게 느껴졌다. 나도 좋아하는 게 있으면 다른 걸 보지 않는 통에 주변 사람과 마찰을 겪은 적이 있으니까.
“사랑이 뭔데 다들 이렇게 미쳐 있냐…….”
나는 일기장을 한 번 더 쓰다듬다가 이내 다시 침대 밑으로 몸을 내렸다. 달칵, 하고 대리석 바닥 아래로 종이 뭉치가 사라졌다.
“하아…….”
침대 위로 올라오자마자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어쩐지 일기장을 볼 때마다 남의 심연을 엿보는 기분이라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심란한 마음을 흐트러트리려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겼다. 벨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금방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마님.”
그녀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리 차를 마시고 싶지 않았거니와 괜한 심부름을 시키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 위를 구르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이며 말했다.
“머리를 좀 빗겨 줄래?”
“네.”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벨은 천천히 머리카락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카를라의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가 보였다. 핏기 없는 피부는 햇빛을 오래 받지 못한 병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은 귀족이라기보다 오히려 기도원에 적을 둔 견습 사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살짝 치켜 올라간 눈, 꾹 다물린 입술은 신에게 몸을 의탁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새카만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 눈은 내 것일까, 아니면 카를라의 것일까.
눈을 감자, 거울 위에 비친 형상도 사라졌다. 불쌍한 카를라.
* * *
이 미친 세계는 생각보다 더 멀쩡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생각보다’일 뿐이다.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고, 이혼은 거의 없었다.
왜냐면 이혼은 한쪽의 부도덕함을 증명해야 하는데, 다들 한 명 이상 정부를 끼고 하하 호호 노는 사람들의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혼 남녀와 기혼자가 불륜의 관계를 맺는 건 이곳의 도덕관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서로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고 즐기는 게 기본이란다. 입에서 연신 미쳤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 미혼인 여주인공이랑 붙어먹는 백작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건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는 지위가 더 높은 쪽이 책임져야 한다. 만약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면 재산이 더 많은 쪽이 책임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요컨대 정부인 여주인공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백작이 책임을 지는 구조였다. 염병.
만약 카를라가 백작의 부도덕함을 증명하기만 하면 이혼 또한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기장에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아마 백작의 사생아도 자신이 낳은 것처럼 보듬을 게 분명했다. 물론 나는 아니었다. 뭐가 예쁘다고 남의 애를 키워 주냔 말이다.
“윽.”
나도 모르게 입으로 신음을 내뱉자, 벨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프셨나요?”
“아…….”
나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벨은 손가락 끝까지 핏기가 사라져 창백했다. 자신이 머리카락을 강하게 잡아당긴 줄 아는 모양이다.
“아니야.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어.”
바들바들 떠는 벨을 보며 나는 카를라가 내 생각보다 더 성격이 나빴던 게 아닐까 의심했다. 조금만 뭐라고 해도 다들 덜덜 떨고, 심지어 가장 오랜 시간 붙어 있었던 전담 하녀마저도 자주 기겁을 하니 말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돌려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머리를 땋아 뒤로 묶고, 이리저리 핀으로 머리카락을 물결치게 만든 머리였다. 다른 장식 없이도 정말 예뻐 보였다.
“응, 예뻐. 아주 마음에 들어.”
그제야 벨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님, 진주로 머리카락을 장식할까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어디 나갈 것도 아닌데 굳이 귀찮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진주는 보고 싶어서, 시치미를 뚝 떼고 벨에게 말했다.
“몇 개만.”
벨은 서랍장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반짝거리는 구슬들이 상자 안에서 굴러다녔다.
진주는 아니었다. 진주라면 표면에 저렇게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리 없으니까. 인간의 손에서 나온 유분은 진주를 삭게 만든다. 그러나 굳이 그 말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구슬 한쪽에는 구불구불한 핀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저걸로 머리카락을 장식할 수 있는 모양이다.
벨은 구슬을 몇 개 집어 땋은 머리카락 사이에 찔러 넣었다. 의외로 구슬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를 좌우로 돌리면 빛을 받은 장식이 반짝거렸다.
“마님, 정말 우아하세요. 진주가 잘 어울리셔요.”
“그렇구나. 수고했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 세상에서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거였다.
인생은 새카만 우물에 떨어져 위에는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고, 아래에는 뱀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와중 조그마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거랬나. 그래도 그 나뭇가지 끝에 흐르는 몇 방울 꿀을 핥아 먹는 게 인간인 법이었다.
“저어, 마님…….”
내가 뿌듯한 표정을 짓자 벨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오래된 초대장을 정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깜빡하고 있던 일이었다. 카를라의 몸에 빙의한 지 두 달이 되었는데도 나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제처럼 마차를 타고 가까운 시내 외곽을 돌아본 게 전부였다.
처음 외출했을 때,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다리가 부었던 걸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한 번은 외출해야 했다.
사교 활동이란 귀족의 의무 같은 것이라, 카를라도 간혹 다른 사람들과 약속을 잡곤 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났다고는 해도, 아예 칩거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괜히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벨을 바라보았다.
“그래. 초대장을 가지고 오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