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화
백작 부인의 이름은 카를라였다. 예쁜 이름만큼 불쌍한 여자였다.
본인은 연애결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결혼했지만 아니었다. 백작의 거짓말에 넘어간 거였다.
그는 어느 여자가 가장 좋을까 재어 보고 계산하다가 그중 한 명을 꾀어냈는데, 그게 하필 카를라였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는 해도, 계승권까지 포기할 정도면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속으로 카를라에 대한 욕을 삼켰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라,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책에서 읽은 내용은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알려 준 것도 아니었다. 이건 모두 카를라의 일기장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계속해서 이곳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방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니 말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자꾸만 나를 흔들어 놓았다.
온 방을 헤집어 봐도 내게 이 상황을 이해시켜 줄 특별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침대 바닥을 더듬다가 깨진 대리석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책 속에 들어왔다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다.
얇은 대리석 아래에는 카를라가 모아 온 불륜의 증거들과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매번 하녀들 몰래 조금씩 그것들을 읽어 내려갔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다는 말을 500번쯤 하지 않았을까?
카를라는 제 인생을 꼬다 못해 진창으로 처박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여자였다.
부모와 절연하다시피 한 결혼이라 그녀는 유모도 데려올 수 없었다.
왕의 시녀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결혼에 반대한 친구들과 연을 끊는 바람에 기댈 곳 하나 없었다.
그녀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사람이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혼수로 가져온 것들은 모두 백작의 사업 자금으로 쓰이는 바람에 카를라의 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매년 안주인에게 배정되는 품위 유지비를 아껴 백작에게 돌려주기까지 했다.
있는 거라곤 불행밖에 없는 여자였다. 아니, 그녀에게는 부질없는 희망도 있었다.
카를라의 일기 끝에는 꼭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도 언젠가 나를 사랑해 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언젠가 그녀를 사랑할 남자였다면 결혼한 이후에도 다른 여자와 놀아날 리가 없었다.
이카루스 백작은 기본이 안 된 놈이었다. 카를라는 그저 그의 재산을 불려 줄 도구에 불과했다.
‘사랑이 밥 먹여 주나?’
맞다. 먹여 주기도 한다. 지금껏 카를라가 가져온 지참금으로 사업을 불려 온 남자가 그 예였다.
그렇지만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놈에게 밥을 먹여 줄 생각이 없었다. 엿이나 먹으라지.
[차라리 내가 그를 증오했다면, 그의 피로 내 손과 칼을 적실 수 있었다면! 내게는 그의 부도덕을 고발할 혀도, 그를 찌를 손도 없다.]
일기장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글은 언제 보아도 내게 복수를 요청하는 듯했다. 눈물로 증거를 모으면서도 차마 남편을 힐난할 수 없던 가련한 카를라는 이제 없다. 이야기의 끝에 떨어진 타인이 있을 뿐이었다.
불쌍한 카를라의 삶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일이 없을까?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백작이 불행해진다면 내가 그녀의 몸을 쓰는 값은 되지 않을까.
우선 나는 침대 시트값을 받아 내기로 했다. 최소한 카를라가 가져온 혼수 목록에 적힌 것들만이라도 되찾을 생각이었다.
‘백작이 핑계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다행히 백작은 아침 식사를 같이하자는 권유를 거부하지 않았다. 백작과 카를라가 일주일 동안 얼굴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카를라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매우 기뻐했을 게 틀림없었다. 비록 그게 백작이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해도.
“어머, 오늘은 꽤 호화롭네요. 주방장이 솜씨를 발휘했나 보군요.”
나는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요리를 보고 감탄했다.
뭉근하게 끓인 당근 수프, 반숙 계란프라이와 베이컨, 여러 가지 채소들로 만든 샐러드와 작은 새 구이가 보였다.
새 구이는 크기를 봐서는 메추리나 그와 비슷한 종류 같았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킬 만큼 호화로운 아침이었다. 혹시 백작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당신이 헛것을 자주 본다고 들어서 눈에 좋다는 음식으로 준비했소.”
백작이 입술을 씰룩였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당신 방에 누가 있는 줄 알고 하인을 불렀다지.”
그제야 나는 그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이해했다.
내가 어제 본 것들을 모두 헛것으로 치부할 모양이었다.
세상에,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었다.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싸움을 걸다니…… 성격이 나쁘면 머리라도 좋아야지. 백작은 양쪽에 하자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머, 헛것이라뇨. 들고양이가 있었답니다.”
나는 스푼을 들고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법이니까.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 척, 얼굴 위의 비열한 미소를 숨겼다.
“더러운 짐승이 제 침대 위에 올라가 있길래 놀라서 하인을 불렀지 뭐예요. 제가 몸이 약한 건 아시지요? 그런 불결한 게 침대 위에 있었으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제 일을 살살 돌려 깠다. 원래 사람은 대놓고 욕을 하는 것보다 비아냥거리는 것에 화가 나기 마련이니까.
내 태도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달랐는지 백작의 주먹 쥔 손등에 핏줄이 불뚝 튀어나왔다.
그러나 제가 잘못한 줄은 아는지 하인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하였다.
체면이 중요하기는 한가 보지. 속으로 빈정거리며 겉으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말이지,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내 말에 백작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간신히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게 말이오.”
접시 위에 놓인 새 구이의 살점을 바르는 척,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빈정거렸다고 바로 기가 죽을 거면서 싸움을 걸긴. 카를라도 이 모습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가볍게 흥얼거리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어휴, 침대 시트가 더러워져서 얼마나 속상한지 몰라요. 얼마 전에 새로 맞췄는데.”
식당은 조용했다. 이따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중을 드는 하인들까지도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분노하지 않았지만, 남이 나를 보았을 때 화가 난 것처럼 행동하는 법을 잘 알았다.
다행히 카를라의 얼굴은 표정이 풍부하지 않아 더 그렇게 보였다.
백작은 나를 달래야겠다 싶었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백작님.”
내 부름에 백작이 화들짝 놀라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어쩜 저리 못생겼는지. 튀어나오려는 본심을 삼키고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곧 결혼기념일이잖아요?”
곧이라고 하기에는 결혼기념일이 한참 남았지만, 굳이 핑계를 끌어왔다.
작년 결혼기념일에 백작은 정부와 함께 여행을 즐겼다. 수도에서 얼마나 먼 곳으로 갔는지, 카를라가 수집한 불륜의 증거물 속에는 기차표가 두 장 들어 있었다. 구겨진 흔적이 적나라한 기차표에는 이카루스 백작 외 여성 1인이라고 갈겨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결혼기념일 선물이랍시고 백작이 카를라에게 던져 준 목걸이는 한눈에 보아도 품질이 낮은 루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함께 들어 있던 영수증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적혀 있다는 점이 카를라를 더욱 절망하게 했다.
분명 그건 정부의 목에 걸렸으리라. 물론 내가 받은 물건도 아니고 내 돈으로 산 물건도 아니었지만, 감정이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불쌍한 여자.’
카를라가 가여웠다. 빙의한 지 두 달이 되었는데도 그녀처럼 대우받는 것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가끔은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수도에서는 광산을 선물하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퍽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두루뭉술하게 수도에서 유행하는 것을 선물받고 싶어요, 따위로 말했다간 뇌를 하반신에 넣고 다니는 거 같은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선물을 줄지도 모른다.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고 싶어요. 낭만적이잖아요.”
백작에게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었다. 카를라의 지참금 목록에 있던 것이니 아직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광산이라 큰 재산이라고 할 건 아니었으니 결혼기념일에 주고받기에도 나쁘지 않은 물건이었다.
나는 거의 갈기갈기 찢어진 살코기를 포크로 조심스럽게 떠 입에 넣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눈이 뒤집혀 제 정부의 머리를 쥐어뜯는 것보다는 작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넘기는 편이 싸게 먹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것 말고, 더 바라는 건 없소?”
부인에게 광산을 양도하는 건 문제가 없지만, 정부에게 광산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한동안 토라진 정부를 달래 주느라 쩔쩔매야 할 거다. 그것보다 재미있는 게 있을까. 백작의 뺨에 손톱자국이라도 나면 웃느라 허리를 펴지 못할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아차, 하고 말을 덧붙였다.
“집사는 두 달 감봉이에요. 열쇠 관리를 소홀히 했더군요.”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 구이는 맛있었지만, 잔뼈가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