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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화 (1/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화

    프롤로그

    “신에게 맹세하건대, 이혼은 없어요.”

    엉켜 있는 두 남녀를 보며 비웃듯 말했다. 그 둘 중 하나는 내가 익히 아는 얼굴로, 이 몸의 주인과 결혼한 이카루스 백작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몸이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눈만 굴려 그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이불로 중요한 부위만 가리고 있는 여자는 익숙하지 않아도 낯설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침대 아래에 떨어진 옷 중 하나는 저택의 하녀들에게 지급되는 거였다. 백작이 침대 위로 끌어들인 상대는 저택의 하녀였다.

    ‘바로 방문을 열지 말걸 그랬어.’

    나는 내 방, 그러니까 백작 부인의 방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며칠 전 바꾼 새하얀 시트 위에서 남녀가 뒹구는 모습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정사에 정신이 팔린 그들의 대화도 들었기 때문이다.

    “넌 백작 부인이나 다름없어.”

    “그럼 이 방도 제가 쓸 수 있나요?”

    “물론이지. 음란한 부인께서 쓰시기엔 너무 정숙한 방인가?”

    “너무 좋아요! 제 취향으로 바꾸려면 조금 손을 봐야겠지만요!”

    바람 현장을 목격한 아내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그리고 가끔 전해 듣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화를 내며 물건을 던지거나 둘 중 한 명의 머리채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제 침대 위에서 내려오시죠.”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내게 향하는 두 쌍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축객령을 내릴까 하였지만 이런 몰골을 하녀들이 보아도 곤란했다. 아니, 이미 그들은 알고 있을 테지만 내가 재차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명령하듯 뱉었다.

    “지금 당장.”

    다른 장소였다면 문을 닫고 그대로 돌아갔을 테지만, 이 방은 백작 부인의 방이었고 그들이 뒹굴고 있는 침대는 백작 부인의 것이었다.

    지금은 내가 백작 부인이니, 적어도 지금은 내 거였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집사의 관리 소홀로 인해 얼마 전 바꾼 시트가 타인의 체액으로 더럽혀졌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방 열쇠는 평소 집사가 관리하며 장시간 외출할 때면 꼭 문을 잠그는 게 보통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방은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백작 부인의 개인 침실 열쇠는 백작도 마음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냥 문을 닫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외출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그러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기보다는 그저 다리를 쭉 뻗고 쉬고 싶었다.

    물론 백작과 그의 정부가 뒹굴던 방에서는 아니었다. 우선 그들을 쫓아내고, 다른 방에서 쉴 생각이었다.

    귓가에서 그들이 떠들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남의 방을 왜 멋대로 바꾼다는 건지. 애초에 나는 이혼을 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살던 곳이 아닌 세계에서, 믿을 구석 하나 없이 환경을 단번에 바꾸는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도통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백작의 상대는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창피하기도 하겠지.’

    끝까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뒤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하녀에게 명령했다.

    “백작님께서 거동하기 힘드신 모양이니 하인들을 불러오렴.”

    “네, 네?”

    “어서.”

    다행히 그녀는 내가 손짓하자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움직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제야 문 쪽으로 뒤돌았다.

    다른 방에 가서 차를 마셔야겠다. 못 볼 것을 보고 나니 심신이 피로해진 느낌이었다.

    “마, 마님!”

    백작의 정부가 목소리를 높여 애타게 불렀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피곤했다.

    * * *

    처음 빙의했을 때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 눈을 떠 보니 이상한 공간 안이었고, 요란한 옷을 입은 여자가 가까이에서 나를 살피고 있었으니까.

    “마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현기증이 나신다고 하시고, 계속 불러도 눈을 뜨지 않으셨어요.”

    마님이라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흔히 쓰지 않는 지칭어에 어리둥절할 틈도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공간, 난생처음 보는 얼굴, 연극에나 나올 법한 화려한 옷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

    “마차를 타고 계세요, 마님.”

    마차라니. 마차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갔을 때 놀이공원에서 탄 이후 단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다. 당장에라도 이 혼란한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고 거짓 통증을 호소했다.

    “아아, 머리가…….”

    “마님! 어쩌지, 데일,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요!”

    마차가 빠르게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필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뺨을 몇 번이고 쳐 보았었다. 이곳은 마차가 아니라 구급차 안이고, 옆에 있는 여자는 하녀가 아니라 구급대원일 거라고 되뇌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자기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결국, 마차는 마차였고, 옆에서 마부에게 고함을 치는 여자는 하녀였다.

    한 달이 지난 후에야 겨우 이 이상한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는 한참 동안 알아차릴 수 없었다.

    소설 속에 흔히 등장하는 책 빙의가 아닐까 의심은 했으나 도저히 어떤 책인지 맞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던 소설이 한두 개도 아니고…… 힌트도 없는데 어떻게 찾냔 말이야.’

    수백 개 정도를 떠올려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간신히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19금 신 중심이라 자세한 설정도 없었고, 등장인물 이름도 중요하지 않은 작품이었으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빙의한 소설은 천 원짜리 단권 소설이었다. 흔히 말하는 야한 소설. 훌떡 읽고 잊어버릴 수 있는 청소년 구독 불가 19금 소설 말이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빙의한 소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의 내용이 정말 말도 안 됐기 때문이다.

    그냥저냥 야한 소설이기만 했어도 나는 이곳이 어딘지 끝까지 몰랐을 거다.

    [조각 몸매 백작에 여주가 진짜 사랑스럽고 깜찍해요. 달달하고 풋풋한 로맨스 좋아하시는 분은 꼭! 읽어 보세요!]

    댓글에 낚인 게 화근이었다.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이 유부남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지 않냔 말이다. 불륜남이라니!

    백작이 유부남이라는 말만 써 놨어도 그 책을 사지 않았을 테고, 그럼 이런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질 일도 없었을 거다.

    망할 가정파탄자들. 남의 침대 위에서 뒹굴다 백작 부인에게 걸리는 것으로 끝나는 19금 신 위주의 소설. 그게 내가 빙의한 소설의 정체였다.

    ‘그래. 그래도 불륜물을 이거 하나만 읽었으니 다행이지.’

    게다가 돈과 권력을 쥘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도, 집이 있다는 것과 몸의 주인이 사교적이지 않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적응했다고 해서 이 몸의 남편이 정부와 뒹구는 걸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후…… 웃기지도 않는군.”

    내가 머리를 붙잡고 씩씩거리자, 눈치 빠른 전담 하녀가 응접실로 나를 이끌었다.

    “저어, 마님…… 응접실이 비었는데, 그리로 모실까요?”

    나는 그녀의 주근깨 박힌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들은 내가 뭐라고 말만 하면 눈을 내리깔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귀족이 거만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조차도 두 달 동안의 경험으로 인해 아주 고압적인 백작 부인 흉내를 잘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마님, 차를 가져올까요?”

    “늘 마시던 게 좋겠구나.”

    “네.”

    가령 이런 식으로 명령을 한다던가, 손가락 하나로 남을 부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뻔뻔해졌다.

    하녀는 금방 차를 내왔다. 뜨거운 물로 데워진 찻잔을 들고 있자니 아까의 분노가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거 같았다.

    그러나 가슴 속의 답답함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사실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빙의했다고는 하나 남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소설이니까, 내 일이 아니니까. 몸을 낮추고 조용히 방에 처박힌 채 외도 상대가 누구인지 억지로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이곳이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제 방에서 이루어진 정사를 눈으로 목격하는 건 기분이 전혀 달랐다. 뱃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여긴 정말 소설 속이구나.’

    이상한 소설에 빙의했다는 실감을 이렇게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소설의 마지막을 눈으로 보게 되니 이제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어도 답답증은 가시지 않았다.

    “마님, 시트를 바꿀까요?”

    전담 하녀가 물었다. 당연한 소리를 왜 묻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오늘은 손님방에서 자야겠구나.”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는 퍽 덤덤하게 말했으나, 늘 단단히 틀어 올리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전담 하녀는 언제나 주인의 옆에서 시중을 들기 때문에 저택에서 그녀의 이름을 들을 일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다른 하녀가 벨라, 어쩌고 하는 이름을 얼핏 들었으나 뒷부분까지는 듣지 못했다.

    항상 옆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의 이름을 물어 쓸데없는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냥 그녀의 애칭을 부르곤 했다.

    “벨, 준비가 끝나면 오늘은 일찍 쉬어도 좋아.”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에게 명령했다. 벨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으나 내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화풀이라도 할까 봐 눈치를 보았다.

    주근깨가 콕콕 박힌 귀여운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쉬어.”

    “네, 마님.”

    벨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내 눈빛을 본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그대로였다.

    나는 방금 그 소동을 전혀 겪지 않은 것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 조금 식었네.”

    벨은 얌전히 식은 차를 버리고 뜨거운 차를 다시 따랐다. 당장이라도 버럭 화를 내야 할 백작 부인이 이렇게 덤덤하게 구니 당황스러울 거다.

    그녀는 내가 곧 칼을 쥐고 꺼꾸러질지도 모른다고 믿는 눈치였다. 아니면 이 일로 인해 한동안 저택이 흉흉해질 거라 믿든가.

    나는 침대 밑, 깨진 대리석 아래 쌓인 불륜 증거들을 떠올렸다. 입맛이 썼다.

    이 세계는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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