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30화 (외전 3) (30/32)
  • 외전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으음.”

    몸을 뒤척이던 다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며, 낯익은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짙은 눈썹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기다란 속눈썹, 제 모습이 비치는 까만 눈동자. 바로 자신의 남편 도훈이었다.

    “잘 잤어요?”

    그가 상체를 살짝 들어 비스듬히 누우며 물었다. 다정은 좀처럼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지금 몇 시예요?”

    “일곱 시요.”

    “언제 일어난 거예요?”

    “나도 방금 눈 떴어요.”

    다정은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도로 감았다.

    “으……. 너무 피곤해서 못 일어나겠어요.”

    그녀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도훈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한 번밖에 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말에 다정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한 번만 하면 뭐 해요. 그 한 번이 너무 길다는 게 문제인데.”

    “어제 계속 멈추지 말라고 애원했던 사람이 누군데요?

    “…….”

    다정의 얼굴이 빨개지며, 말문도 막혔다.

    막상 할 때는 나도 좋으니까 그렇죠. 다음 날 후폭풍을 생각 못 할 정도로.

    속에 있는 마음을 말하기엔 낯간지러워, 다정은 화제를 돌렸다.

    “아참, 나 어젯밤 이상한 꿈을 꿨어요.”

    “이상한 꿈?”

    “아주 넓은 바다에 작은 배 하나가 떠있는데, 그 배에 제가 타고 있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서 배가 이리저리 흔들렸어요. 그리고 하늘에서 막 벼락이 치더니, 무언가가…….”

    다정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추자, 도훈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무언가가…….”

    “?”

    “뭐였죠?”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합니까?”

    다정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무지 좋은 꿈 같았는데, 이따 퇴근하고 오는 길에 로또나 사야겠어요.”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꿈만큼 좋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당신은 무슨 꿈 꿨는데요?”

    “당신 잡아먹는 꿈.”

    다정이 경악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밤새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서 꿈에서도 했다고요?”

    대단한 남자 같으니라고.

    “나도 꿈에선 좀 쉬고 싶었는데, 먼저 유혹한 건 당신이에요.”

    “내가 어떻게 유혹했는데요?”

    “당신이 속옷만 입고 있었어요.”

    “만날 보는 모습이 뭐가 특별하다고.”

    “처형들이 준 속옷이었거든요.”

    다정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니들이 준 속옷이라면 신혼여행 때 입으라고 주었던, 차라리 벗는 게 나을 정도로 민망한 디자인을 자랑했던 그 속옷이었다.

    “대체 그건 언제 입을 겁니까?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런 꿈을 꿨겠어요.”

    “그걸 어떻게 입어요? 안 입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진심으로 실망한 표정을 짓자, 다정이 한마디 덧붙였다.

    “언젠가 내가 당신한테 큰 실수를 하거나, 잘못한 일이 생기면 입을게요.”

    “처형들이 벌칙 의상으로 입으라고 사준 건 아닐 텐데.”

    “그건 정말 못 입겠어요. 에로 배우들이나 입는 옷 같다고요.”

    다정은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안 예뻐요? 춘희 씨가 선물해준 잠옷인데, 의외로 편하고 촉감도 좋더라고요.”

    도훈은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을 바라보았다. 살굿빛 잠옷은 얇은 실크 소재로 속 안이 보일 듯 말 듯 비쳤다. 잠옷 안에 따로 속옷을 입지 않았기에,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도훈의 시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매끄러운 실루엣과 새하얀 살결이 보일 듯 말 듯 하며 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혔다. 웬일로 얌전하다 싶었던 그의 본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훈은 그녀의 잠옷 첫 번째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이것도 좋은데.”

    그가 그윽한 눈빛과 함께 단추를 풀어나가며 말했다.

    “벗은 게 더 예뻐. 당신은.”

    도훈은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풀어헤친 잠옷 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봉긋 솟아오른 둔덕 위로 도훈의 손가락이 덮쳤다. 부드럽게 주무르다가, 힘 있게 움켜쥐는 그의 손길에 다정의 입술 사이로 여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도훈은 조금 더 격렬하게 애무를 이어나가며, 그녀의 잠옷 단추를 모두 풀어냈다. 도훈이 그녀의 입술에서 가슴으로 입술을 옮겼다. 끊임없이 괴롭히는 손길에 예민하게 솟은 정점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혀끝이 돌기를 부드럽게 감싸다가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앗…….”

    도훈은 한쪽 손을 그녀의 잠옷 바지 안으로 넣었다. 긴 손가락이 매끄러운 숲길을 타고,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입술로는 그녀의 가슴을 탐닉하며, 손으로는 그녀의 가장 취약한 곳들을 건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자, 다정의 신음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하앗!”

    야릇한 감각이 퍼지며, 어느덧 그녀의 몸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이어지는 그의 애무에 다정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도훈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읏……. 그만!”

    물론 도훈은 정말 그만두라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제 잠옷을 벗고, 그녀의 위로 몸을 실었다. 뜨거운 감각이 깊숙한 곳까지 한 번에 밀고 들어섰다. 둘의 몸이 겹쳐 하나처럼 움직였다.

    신혼방 침대가 아침부터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움직임은 더욱 격해졌다. 가지런했던 시트는 다시금 엉망이 되었다.

    ***

    이른 아침. 애정은 출근을 하러 집에서 나왔다.

    베이지색 코트에 검은색 팬츠를 입은 그녀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을 휘날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쌀쌀한 바람이 맞닥뜨리며, 그녀의 뺨 언저리를 붉게 만들었다.

    ‘춥다.’

    매서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골목길을 지나,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로 나오는 순간,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앞에는 낯익은 차 한 대가 보였다. 주인처럼 날렵하고 잘빠진 디자인의 차.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한 번씩 보게 되는 차 앞에는 성욱이 서 있었다. 말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채로. 애정을 본 성욱은 그녀에게로 곧장 다가오며 말했다.

    “타. 데려다줄게.”

    빠르게 돌아오는 애정의 대답은 냉담했다.

    “됐어.”

    “춥잖아. 타고 가.”

    “됐다니까.”

    짙은 눈빛의 성욱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태워만 줄 거야.”

    “…….”

    “곧 동생도 집에서 나올 시간이잖아. 나 같으면 괜히 마주치기 전에 타겠어.”

    애정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정말 곧 있으면 소정이 출근하기 위해 이곳으로 나올 터였다. 성욱이 빨개진 코끝을 찡긋거려 보이며 말했다.

    “나 얼어 죽겠어. 얼른.”

    잠시 주저하던 애정이 결국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 문을 닫아준 성욱은 입매를 올리며 운전석에 탔다. 그가 시동을 걸며 차를 움직였다. 애정이 딱딱하게 물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바라는 거 없어.”

    성욱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말했다.

    “그냥 아는 오빠든 동네 친구든 뭐든지 좋아. 아니면 그냥 출퇴근 시켜주는 운전기사라고 생각해도 좋아. 당신이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관계로 다시 시작하자.”

    “…….”

    “당신 편할 대로 생각하고, 나 마음대로 부려먹어. 당신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앞으로 당신이 싫어하는 짓은 절대 안 해. 다시는 나한테 오라고 재촉도 안 할 테니까…….”

    진중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나가던 성욱의 눈매가 애처롭게 떨려왔다.

    “밀어내지만 마.”

    “…….”

    “난 지금 낭떠러지 끝에 서 있어. 당신이 밀어내면 난 죽어.”

    그의 굵은 음성에 애정의 눈동자 또한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는 제 손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차창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라고는 생각 안 해?”

    성욱은 입술 끝을 미미하게 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농담 아닌데.”

    그는 진지한 얼굴로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없는 5년은 내겐 지옥과도 다를 게 없었거든. 숨을 쉬어도 쉬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지옥이 이보다 더 낫겠다고 생각할 만큼 끔찍한 나날이었어.”

    “…….”

    “혹여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매일 출퇴근길에 당신 회사를 지나쳐서 다녔어. 그러다 아주 가끔 당신을 볼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도 차마 다가갈 수가 없더라.”

    “왜?”

    “멀리서 본 당신은 아주 좋아 보였거든. 직원들이랑 웃으면서 회사에서 나오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어. 그 모습을 보고 당신은 나와는 달리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나 같은 건 이미 다 잊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굳이 잘 살고 있는 당신에게 뒤늦게 내가 나타나봤자 좋을 게 없을 거라 판단했어.”

    그를 바라보는 애정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떨려왔다. 한편으로는 가슴에 알싸한 통증이 일었다.

    어떻게 헤어져서도 저리 제멋대로일 수가 있을까.

    저 역시 그와 헤어지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는데…….

    왜 제멋대로 내 상황을 판단하고선, 결론을 지었을까.

    울컥하는 마음에 애정은 도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바보야.”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 그러니까 당신을 놓쳤지.”

    그리고 단호한 어투로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 같은 여자를 또다시 놓치는 바보는 없어.”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서고, 성욱은 운전석 옆 홀더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손에 쥔 무언가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허브티야. 당신 이거밖에 안 마시잖아.”

    애정은 그가 건넨 테이크아웃용 컵을 바라보았다. 온기가 가득한 컵에선 페퍼민트향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연애 시절, 그는 추위를 잘 타는 저를 위해 늘 따뜻한 차를 준비해오곤 했다. 성욱 같은 남자는 만나기 힘들 거라고 했던 소정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그 정도로 다정하고 세심한 남자였다.

    애정은 컵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목구멍을 지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종이컵을 어루만지는 손끝에서 냉기가 점점 사라졌다. 동시에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하암.”

    다정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그와 동시에 눈가에는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휴게실에 함께 앉아있던 춘희가 그녀에게 말했다.

    “요즘 다정 씨 하품을 자주 하네.”

    “하하, 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오네요.”

    “우리 팀장님 신혼 초라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우리 다정 씨 쓰러지겠다.”

    그녀의 농담 섞인 말에 다정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열정을 불사르는 사랑 덕분에 쓰러진 적이 여러 번이기 때문이었다.

    춘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다정 씨. 내가 늘 말하지만, 몇 년 지나면 자기도 팀장님도 지금 같지 못할 거야.”

    정말 그런 날이 오긴 올까요.

    다정이 전혀 동감하지 못하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서로의 체력과 애정이 넘쳐나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마음껏 즐겨.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한다?”

    춘희가 진지한 얼굴로 조언을 하는 그 순간이었다. 휴게실에 들어온 누군가가 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 선배님들 여기 계셨네요.”

    등장만으로도 주변이 화사해지는 주인공은 입사한 지 7개월 차가 된 서준이었다. 귀여운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늘 사랑을 받는 사원이었다. 한때 노래방에서 다정과 커플 노래를 불렀다가, 도훈의 질투를 사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서준은 오늘도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무슨 이야기 중이셨어요? 표정이 굉장히 진지해 보이시던데.”

    그의 질문에 춘희가 고상하게 포장해서 말했다.

    “음. 부부로서 가져야 할 미덕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지요.”

    “하하. 그러셨구나.”

    서준은 자연스레 그들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선배님과 팀장님이 함께 있는 모습 볼 때마다 너무 부러워서, 저도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다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서준 씨는 나이도 젊은데, 벌써 결혼하고 싶어요?”

    “네. 저희 집은 아들만 셋인데 아직 아무도 장가를 안 갔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늘 누구 한 명이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나가라고 닦달이세요.”

    “어? 우리 집이랑 상황이 똑같네요. 우리 집은 딸만 셋인데, 저 시집가기 전에 할머니께서 얼마나 저희를 들볶으셨는지 몰라요.”

    “선배님네는 딸만 셋이구나. 만약 선배님이 결혼 안 하셨더라면 합동 미팅 했어도 되었겠어요. 하하.”

    그의 농담에 춘희와 다정이 함께 웃어 보였다. 그 뒤로도 셋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서준이 말했다.

    “아참. 이거 드리려고 와놓고선 깜빡했네.”

    그는 제 옆에 놓아두었던 갈색 봉투를 춘희와 다정에게 내밀었다.

    “밖에서 점심 먹고 오는 길에 사왔어요. 이 집 붕어빵이 그렇게 맛있대요.”

    “어머~ 우리 서준 씨 역시 센스가 넘친다니까. 우리가 붕어빵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춘희가 해맑게 웃으며 그가 건넨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봉투 안에 든 붕어빵 하나를 꺼내 다정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다정이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감사인사를 전한 후, 붕어빵을 집었다. 그리고 한 입 물려는 순간이었다.

    “?!”

    다정이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붕어빵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속이 더부룩한 듯 윗배를 어루만졌다.

    “저는 조금 있다가 먹어야겠어요.”

    “왜 그래? 다정 씨 붕어빵 좋아하지 않았어?”

    “요즘 소화가 좀 안 돼서요. 전 나중에 먹을게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붕어빵을 도로 봉투에 넣으려는 순간, 다정이 멈칫했다. 그녀는 붕어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아, 생각났다!”

    “응? 뭐, 뭐가?”

    “며칠 전에 꿨던 꿈 말이에요.”

    다정은 붕어빵에서 힌트를 얻고, 꿈 내용을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자신은 홀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무언가를 품에 안았다.

    그건 분명 황금빛의 잉어였다. 커다란 몸을 펄떡이며 제 품에 안긴 잉어는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였다.

    ***

    사무실에 돌아온 다정은 바로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황금 잉어 꿈]

    기대가 부푼 얼굴로 검색결과를 훑어보던 다정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천천히 꿈 풀이를 읽어보았다.

    -황금 잉어를 잡는 꿈은 장차 명예와 재물을 가질 훌륭한 아이 또는 사내아이를 갖게 될 태몽입니다.

    그저 로또를 몇 장 구입해야 되나 싶었던 그녀는 뜻밖의 정보에 많이 당황한 듯했다.

    ‘그 꿈이…… 태몽이라고?’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다정은 황급히 책상 위에 있는 작은 달력을 손으로 집었다. 생리 예정일에서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여태껏 생리가 예정일보다 늦어진 적은 몇 번 있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달이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달이면 그러곤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늦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생리가 늦어진 것 외에도 의심되는 상황이 몇 가지 있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잠도 너무 자주 오고, 몸도 쉽게 피곤해졌잖아. 속도 더부룩하고, 자주 체하고.’

    게다가 서준이 준 붕어빵 냄새를 맡았을 땐, 살짝 구역질이 나려고도 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본 결과, 잉어를 안은 꿈은 태몽이 맞을 확률이 높아졌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자신이 임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정이 얼떨떨해하는 동안, 컴퓨터 모니터에 알람 표시가 떴다. 다정은 사내 메신저에서 도훈이 보낸 쪽지를 확인했다.

    [홍콩 리조트 건 실적내역서 들고 팀장실로 와요.]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다정이 문을 열었다. 그녀는 검은색 파일을 한 손에 든 채, 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어깨를 쫙 펴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는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세련된 디자인의 회색 슈트는 저번 주말 백화점에서 함께 고른 옷이었고, 굵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남색 타이는 오늘 아침 자신이 매준 넥타이였다. 옷이 날개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멋진 슈트보다 더 빛나는 외모의 그가 다정을 응시했다. 언제 봐도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깊고 근사한 눈매였다.

    다정은 그에게 다가가 파일을 건넸다.

    “실적 보고서예요.”

    “보고서 쓰는 데 필요해서. 고마워요.”

    그가 파일을 받으며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정.

    ‘내가 임신했다고 하면,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말로는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갖자고 했지만, TV 프로에서 아이들만 나오면 아빠 미소를 지은 채 넋을 잃고 보는 남자였다. 무척 기뻐할 것이 틀림없었다.

    다정이 임신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심하던 중이었다. 도훈이 펜으로 서류를 끼적이면서, 넌지시 한마디 내뱉었다.

    “붕어빵은 맛있었어요?”

    다정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강서준 씨가 준 붕어빵 말입니다.”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이 정도면 감시자를 따로 붙여놓은 건 아닌지 의심할 만도 했다.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혹시 제 몸에 도청기라도 달아놨어요?”

    “그럴 리가.”

    그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로 말했다.

    “내가 휴게실 바로 앞을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대화가 즐거웠나 봅니다.”

    “그거야 춘희 씨가 워낙 목소리가 크고 재밌다 보니까…….”

    “뭐? 만약 선배님이 결혼을 안 했다면 합동 미팅 했어도 되었겠다고?”

    도훈은 기가 차다는 듯 비소 섞인 숨을 크게 내뱉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하필 들어도 그런 말만 들어가지고는.

    “서준 씨가 농담으로 한 말이지,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잖아요.”

    “진심인지 농담인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아니, 딱 봐도 뻔하죠. 그럼 유부녀한테 작업 걸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겠어요?”

    다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다 좋은데, 질투심이 많은 게 흠이다.

    그녀가 아직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나, 서준 씨가 준 붕어빵 한 입도 먹지 않았거든요?”

    “왜요?”

    “속이 안 좋아서요.”

    그 말에 방금까지만 해도 질투심에 미간을 좁히고 있던 도훈이 금세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물었다.

    “많이 안 좋아요?”

    “사실 며칠 전부터 소화가 안 되고, 울렁거렸어요.”

    “그럼 반차 쓰고 병원부터 가 봐요.”

    “아니에요. 오늘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속이 안 좋은 이유를 이미 알 것 같고요.”

    다정은 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을 휩쓸었다.

    “팀장님……. 아니, 여보.”

    “?”

    입술을 한번 지그시 깨물던 다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요.”

    순간 도훈이 들고 있던 펜이 툭 떨어지며, 책상 위로 또르르 굴러갔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

    고요함을 깨고, 도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병원부터 갑시다.”

    일어나기 바쁘게 외투를 챙겨드는 그를 보며 다정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업무 시간 안 끝났어요.”

    “지금 업무가 중요합니까?”

    “당연히 중요하죠. 아직 임신인지 확실치도 않은데, 일도 내팽개치고 병원에 가는 건 오버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당신까지 가는 건 더 오버고요.”

    “오버 아닙니다. 그럼 당신만이라도 반차 쓰고 갔다 와요.”

    “임신인지 아닌지는 퇴근하고 확인해도 늦지 않아요. 남은 시간 동안 보고서 작성도 마쳐야 되고요.”

    “무슨 보고서요? 내가 해줄 테니 줘요.”

    “제 일을 왜 당신이 해요? 공과 사는 구별해야 된다고 딱 잘라 말한 건 당신이잖아요.”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

    “팀장님이야말로 진정하세요.”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논쟁에 다정이 손바닥을 쫙 펼치며 그를 진정시켰다.

    다짜고짜 병원부터 가자고 하는 그는 임신 이야기에 이미 평상심을 잃은 듯해 보였다. 다정은 그를 설득하고자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일단 퇴근하는 길에 테스트기 먼저 사서, 임신인지 확인부터 해봐요. 병원은 내일 아침에 가보기로 하고요.”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립니까? 오늘 당장 갑시다.”

    “오늘은 가족 모임 있는 날이잖아요. 병원에 들렀다 가면 너무 늦어요.”

    “이런 연유로 늦는 건 가족분들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오랜만에 뵙는 데다가 엄마 생신인데, 이왕이면 함께 저녁 먹어야죠. 병원은 내일 아침 일찍 가면 되잖아요.”

    그 말에 도훈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다정이 잽싸게 다음 말을 꺼내며 선수를 쳤다.

    “일단 테스트기 결과 나올 때까지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걱정하고 닦달하는 건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똑 부러지게 말한 다정은 홱 걸음을 돌렸다. 그 어떠한 일에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그가 임신 이야기에 관해서는 이성적이지 못했다. 지금 그는 도무지 대화가 통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 손을 붙잡고 병원에 끌고 가는 모습을 보기 전에, 다정은 얼른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다정은 업무를 이어나갔다.

    보고서를 한참 작성하던 그녀가 팀장실 쪽을 흘깃 보며 생각했다.

    ‘혹시…… 내가 임신하는 게 기쁘지 않은 걸까.’

    ‘기뻐하는 기색은 없이, 병원부터 가자고 닦달만 했잖아.’

    뛸 듯이 기뻐해줄 줄 알았던 다정은 예상과는 다른 그의 반응에 내심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다정이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와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팀원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탕비실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근처에 자리 잡은 다정은 고개를 빼꼼히 기울이며, 탕비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도훈이 몸을 기울여 바닥에 흩어진 무언가를 집고 있었다. 탕비실 안에 있던 집기를 바닥에 쏟은 듯했다.

    마침 탕비실에 들어가려던 한 직원이 그를 도와 집기를 정리했다. 다시 조용해졌다 싶은 탕비실 안에서 또 한 번 큰 잡음이 흘렀다.

    “저기, 팀장님. 물 넘치는데!”

    다정이 동그래진 눈으로 탕비실 안을 살폈다. 정수기 앞에 물이 넘치는 컵을 들고 선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컵에 물을 담으면서 딴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직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에 젖은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티, 팀장님, 괜찮으세요? 뜨거운 물이던데요.”

    “괜찮습니다.”

    그는 무덤덤하게 말한 후, 자리를 정리하고 탕비실 밖으로 나왔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법한 실수를 여러 번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하던 짓을 하고……. 왜 저러지?’

    그 이후로도 다정은 종일 넋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도훈을 볼 수 있었다. 다정은 그때서야 그가 임신 이야기에 반응이 없었던 게 아니라, 엄청나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뒤늦게 살짝 후회가 밀려왔다.

    ‘저럴 줄 알았으면, 테스트기 먼저 써보고 말할 걸 그랬나.’

    ***

    “잘 가요, 애정 씨.”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애정은 직장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후, 회사 앞에서 헤어졌다. 진회색 롱코트에 검은색 구두를 신은 그녀가 회사 앞을 지나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코끝을 스치며 빨갛게 물들였다.

    정류장 근처에 다다르자, 오늘도 어김없이 차를 세우고 기다리는 성욱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일주일째 출퇴근을 시켜주고 있는 그였다.

    그는 약속대로 별말 없이 차로 그녀의 집 앞과 회사 앞을 오고가기만 했다. 그녀가 불편해할 만한 행동이나 말은 먼저 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이제는 익숙한 듯 조수석에 알아서 타는 애정. 그녀가 운전석에 올라탄 성욱에게 물었다.

    “매일 이렇게 데려다주는 거 지겹지 않아?”

    “지겹기는. 내 하루 중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인데.”

    그가 운전대를 잡으며 씩 웃어 보였다. 어두운 차 안이 환해질 만큼 근사한 미소였다.

    애정은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조수석 홀더에는 그가 가져온 허브티가 은은한 향을 내며 놓여있었다. 그녀는 문득 발밑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그녀의 발밑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슬리퍼였다. 성욱이 대답했다.

    “어제 보니까 구두가 불편한 것 같아서. 차 안에서라도 편하게 있으라고.”

    애정의 눈동자가 살며시 커졌다. 사실 어제 새로 신은 구두 때문에 종일 발이 아파 힘들었다.

    ‘티 안 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성욱이 못마땅한 얼굴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 회사는 꼭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녀야만 하는 거야?”

    “이거 별로 안 높아.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조금만 신고 있어도 발이 붓네.”

    성욱이 액셀을 지그시 밟아, 차를 움직이며 말했다.

    “힘들면 굳이 신지 마. 당신은 운동화 신어도 예뻐.”

    애정은 종일 자신을 힘들게 했던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그가 준비해둔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마치 무거운 족쇄에서 벗어난 것처럼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

    좁은 골목길 안을 환하게 비추며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세련된 외관의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사람은 바로 애정이었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성욱에게 말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성욱은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도 이곳에 있을게.”

    애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조수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집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차가운 바람이 살결을 스치며 냉기를 전했다. 추위에 애정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성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차에서 나온 그는 성큼 애정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늘 춥게 입고 다녀?”

    그는 자신의 목에 걸쳐져있던 챠콜색의 목도리를 빼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감기도 툭하면 걸리면서.”

    애정은 그가 해준 목도리를 두른 채, 성욱을 지그시 응시했다. 목 부근에 홧홧하게 닿는 온기처럼, 저를 걱정하는 그의 눈빛에도 따스함이 넘쳐흘렀다.

    단 한 번도 저런 눈빛을 하지 않은 적이 없던 그였다. 언제나 저를 향하는 눈빛엔 사랑스러움과 온기가 넘쳤다. 오직 단 하루, 결혼식을 앞둔 그날 밤을 제외하고선.

    애정의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성욱 씨.”

    애정은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모르겠어.”

    나직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에 성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우리가 정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애정의 말끝이 살짝 떨려왔다. 성욱은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성욱은 단박에 굵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돌아갈 수 있어. 물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노력하면 돼.”

    “노력한다고 과거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잖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마음도 변함없이 그대로야. 단지 방법이 틀렸을 뿐.”

    그는 절절한 눈빛으로 애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때 나는 당신을 지킬 수 없다면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상대방을 위해 이별을 택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

    “내가 어리석고 바보 같았어. 두려움에 정작 소중한 것을 잃은 겁쟁이는 이제 없어. 가족들 말에 휘둘리며, 가족의 지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아.”

    “…….”

    “5년간 내 힘으로 당당히 내 사람들을 만들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갔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에게도 예전처럼 당하고 살지 않아. 나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듯이, 가족들에게도 약점이 하나씩 있더라고. 나를 쳐내면 그들도 잃을 것이 많아. 더는 가족들도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해.”

    성욱은 손을 뻗어, 말없이 제 말을 듣고 있던 애정의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떨리는 눈망울을 마주 보았다.

    “당신이 힘든 일은 절대 안 겪게 할 거야. 가족들이 당신을 괴롭히려 든다면, 연을 끊을 수도 있어. 돈이나 직위 따윈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 당신이 내 곁에 없는데 그깟 허울뿐인 가족과 돈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의 강인한 음성이 애정의 가슴을 울렸다.

    “당신을 다시 붙잡을 수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어.”

    “…….”

    “애정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날 믿어줘.”

    애절한 그의 눈동자에서 진정 어린 마음이 느껴졌다. 애정의 젖은 눈망울이 그에게 향했다.

    “성욱 씨…….”

    서로의 애틋한 시선이 오고가는 그 순간이었다.

    “언니?”

    뒤쪽에서 들리는 익숙한 음성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손을 꼭 마주 잡고 걸어오는 다정과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애정을 본 다정이 반갑게 다가서려다가, 멈칫했다.

    “언니도 지금 도착한 모양……. 어?”

    그녀는 애정의 바로 옆에 서있는 성욱을 보고 당황했다.

    “이분은…….”

    오랜만에 마주한 성욱의 모습에 다정이 얼떨떨해하고, 애정도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러던 사이, 눈치껏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도훈이 말했다.

    “저흰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이야기 나누고 오십시오. 그럼.”

    그는 다정의 손을 잡고 집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더욱 긴박한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바로 조금이라도 빨리 손주 사위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집 앞으로 마중 나온 길순과 딱 마주친 것이었다. 길순은 나오자마자 눈에 확 들어온 도훈을 보며 함박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때쯤이면 올 것 같아서 나왔더니, 내가 딱 맞추었고만! 얼른 들어…….”

    도훈을 반갑게 맞이하던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도훈의 뒤에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 눈이 노안으로 나빠진 게 아니라면, 애정의 옆에 서있는 남자는 성욱이 분명했다.

    길순이 당혹감이 역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아니? 자네가 이곳엔 어쩐 일인가?”

    아까보다 더 차디찬 바람이 그들 사이를 쓸고 지나갔다.

    ***

    다정의 집 거실.

    봉해의 생일잔치로 시끌벅적해야 할 집 안에 어색한 적막만이 흘렀다.

    거실에는 길순을 마주 보고 성욱과 애정이 나란히 앉아있었으며, 그 뒤로는 봉해, 소정, 다도 커플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길순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말해보게.”

    그녀는 성욱과 애정을 한 번씩 바라보며 말했다.

    “왜 두 사람이 우리 집 앞에 있었던 건가? 혹, 우리 애정이와 다시 만나는 건가?”

    그녀의 질문에 다시 한 번 짙은 정적이 거실 안을 메웠다. 입술을 지그시 물던 성욱이 결심한 듯 길순을 마주 보았다.

    “저희 둘 관계를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애정 씨에게 다시 만나달라고 조르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묻은 채,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애정 씨가 용서만 해준다면, 다시 한 번 제대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용서라니? 뭘 용서한단 말인가?”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길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욱은 입 안이 바짝 메말라왔다.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운 듯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결혼을 파투 낸 건, 애정 씨가 아니라 바로 접니다.”

    “?!”

    성욱의 말에 가족들이 놀란 얼굴이 되어 그와 애정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얼마나 놀랐는지 언제나 덤덤했던 길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성욱은 각오한 듯 또렷한 눈빛을 하고선 가족들에게 말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5년 전 그날, 제가 덜컥 겁이 나서, 애정 씨에게 먼저 결혼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

    “제가 생각이 짧고 어리석었습니다. 그 당시엔 저와의 결혼으로 애정 씨가 불행해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저와 똑같은 삶을 살지 않게 만들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족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낯빛이 어두워졌고, 봉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성욱이 강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굳건한 가정을 세울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웠습니다. 소중한 사람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도 배웠습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애정 씨와 다시 제대로 시작하고 싶…….”

    “그만 입 다물게!”

    거실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호통에 성욱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쇠약하여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던 길순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꾸짖었다.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애정이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겨!”

    “……!”

    “결혼 전날 신부 가슴에 대못 박고 도망갔으믄, 그 길로 깔끔하게 돌아설 것이지, 대체 무슨 낯짝으로 다시 나타나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느냔 말이여?!”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치는 길순의 모습에 성욱은 당혹감을 넘어 걱정이 밀려왔다. 그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할머님. 진정하시고…….”

    “아주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로구먼! 이제 와 이렇게 고백하믄, 우리가 얼씨구나 좋다고 다시 시집보낼 줄 알았는가?”

    얼굴이 일그러진 채, 거침없이 쏘아붙이는 길순을 보면서, 가족들 누구도 쉽게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늘 인자했던 그녀가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낯선 그녀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동안, 길순은 충혈 된 눈으로 성욱을 내려다보며 다시금 소리쳤다.

    “시방, 내가 자네 집안에서 우리 애정이 떨떠름해하는 거 모를 줄 알았는 겨? 낸들 그 집에 보내고 싶었는 줄 아냔 말이여?”

    “……!”

    “자네가 자네 집에서 귀한 아들이듯이, 우리 애정이 역시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손녀딸이여. 고저 자네 하나 믿고 그 살얼음 같은 집에 애정이를 시집보내려고 한 겨. 자네가 우리 애정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싶어, 자네 하나만 믿고 결혼 허락한 거라고.”

    그녀는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울분을 토해냈다.

    “그런데 그런 자네가 어째 우리 애정이를 버릴 수가 있느냔 말이여. 그것도 결혼 전날에!”

    그녀의 말에 성욱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이 고인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비통함에 잠긴 길순의 눈동자가 애정에게로 향했다.

    “아이고야……. 우린 것도 모르고, 여태껏 애꿎은 애정이만 닦달했고만.”

    손녀를 바라보는 길순의 눈동자에는 애틋한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결혼식 파한 여자라고 온갖 모진 소리는 애정이 혼자 다 들었는디, 동네 사람들이 아직까정 애정이만 보면 그 일을 수군대는디…….”

    그녀는 깊게 탄식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고야……. 저것이 홀로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을꼬…….”

    그 모진 일을 겪고도 가족들에게는 전혀 내색도 하지 않은 손녀딸이 그저 가엾고 가여워, 길순은 눈물을 그치질 못했다.

    “내 그것만 생각하면…… 한탄스럽고 가슴이 문드러져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여.”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건 길순뿐만이 아니었다. 애정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성욱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길순은 눈물을 훔치며, 그에게 소리쳤다.

    “더는 자네 이야기 듣고 싶지 않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게!”

    “할머님.”

    “다시는 우리 앞에 얼씬거릴 생각 말어!”

    그렇게 말하며 길순은 홱 몸을 돌렸다.

    무릎을 꿇은 성욱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할머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애정 씨 속상하게 하는 일 절대 없을 겁니다. 다시 한 번만 저를 믿어주신다면…….”

    “한 번 제 색시 내팽개친 놈이 두 번 안 그러리라는 법 있나. 나랑 어멈이 죽을 때까정 끼고 살면 살았지, 자네에게만큼은 절대 안 주네!”

    길순이 매서운 얼굴로 가족들에게 외쳤다.

    “어멈아. 소정아. 이 못된 놈 안 내보내고 뭐 하고 있는 겨?!”

    “할머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성욱이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애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차갑게 식은 길순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되레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오르며 소리쳤다.

    “자네 진정 소금 한 바가지를 뿌려야 나가겄는가?! 안 되겠고만! 소정아. 소금 한 바가지 갖고 와라.”

    소정이 당혹스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길순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아! 얼른 안 가져오고 뭐 해!”

    “할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래. 너가 못 하면, 내가 가져오마!”

    울컥한 그녀가 주방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단호하고 또렷한 음성이 그녀의 걸음을 붙잡았다.

    “할머니. 그만하세요.”

    길순이 걸음을 멈추고 애정을 바라보았다. 여태껏 묵묵하게 앉아만 있던 애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이 사람에게 많이 실망한 거 알아요. 저 또한 성욱 씨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 것도 사실이고요. 제가 할머니라도 다시는 이 사람 얼굴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애정은 진지한 눈빛으로 가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 그만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성욱을 한 번 바라본 뒤, 한마디 더 이었다.

    “저도 이제…… 이 사람 용서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성욱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길순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아. 네가 뭐가 모자라서 너 싫다 도망간 놈을 만나려는 겨? 너는 용서해도 이 할미는 용서가 안 된다. 세상에 결혼식 하루 앞두고 제 처를 버리는 인간이 어디 있다냐.”

    “이 사람 단순히 제가 싫어서 헤어진 거 아니에요. 결혼식을 파한 것도 제가 다칠까 봐 두려워서였어요. 자신이 다칠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저만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요.”

    애정은 이미 마음이 기운 듯,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알고 보면 누구 하나 편들어줄 사람 없고, 기댈 가족도 없는 안타까운 사람이에요. 그동안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이, 저보다 더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예요. 그런 사람을 우리까지 내팽개치면…… 이 사람 어떻게 살아요?”

    그녀의 말에 성욱의 눈가가 다시 한 번 뜨겁게 젖어들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한없이 미안했다.

    애정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가족들을 설득해나갔다.

    “이 사람 이미 충분히 아파하고 후회했어요. 더는 이 사람이 외롭고 척박한 길을 홀로 걷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

    “아버지가 만약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분명 용서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용서하는 법이라고…… 아버지도 늘 말씀하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가족들이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 애정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 할머니 소원을 이루어줄 사람이기도 해요.”

    “소원……이라니?”

    “하루 빨리 증손주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

    가족들이 듣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정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 임신했어요.”

    그 한마디에 일순간 분위기가 고요해졌다가,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뒤늦게 반응했다.

    “뭐?”

    “뭐?”

    “뭐?!”

    모두가 입을 크게 벌린 채 되물었다.

    우습게도 그녀의 깜짝 발표에 제일 놀란 사람은 애 아빠 성욱이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애정을 바라보았다.

    “……뭐?”

    ***

    애정의 집 앞에 주차된 성욱의 차.

    히터로 공기가 따뜻해진 차 안에는 애정과 성욱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애정의 충격 고백 이후, 성욱은 줄곧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와 똑같이 얼떨떨해하는 가족들을 뒤로한 채, 애정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집 밖으로 나왔다.

    차 안에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성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서 했던 말…… 모두 사실이야?”

    “내가 그런 말을 거짓으로 할 리가 없잖아. 그것도 가족들 앞에서.”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정말 임신을 했단 이야기야?”

    애정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욱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녀가 임신이 될 만했던 밤은 한 달 전쯤 보낸 밤이 전부였다.

    “그럼 그때…….”

    “그 때밖에 더 있어?”

    “피임은 분명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거야 두 번째까지였고. 세 번째부터는 콘돔이 떨어져서 사용 못 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애정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그에게 설명하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상황을 직시한 성욱이 살짝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니 그럼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왜 내게 말 안 했어?”

    “나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어.”

    애정은 이미 모든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담담한 어투로 이어 말했다.

    “며칠 전 속이 자꾸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돼서 병원에 찾아갔어. 위 내시경 검사나 해볼까 싶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임신 가능성은 없는지 묻더라고. 그때 아차 싶었지. 그 길로 테스트기를 사서 사용해봤더니, 두 줄이 떴어. 그 다음 날 산부인과에서 임신 7주차라는 진단을 받았고.”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성욱의 놀란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흘깃 보던 애정이 말했다.

    “만약 성욱 씨가 내키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키울 생각이야.”

    “내키지 않다니.”

    “냉정히 따지면, 우린 지금 정상적인 관계도 아닐뿐더러 임신 역시 계획했던 일이 아니잖아.”

    그녀는 특유의 냉철한 목소리로 똑 부러지게 말을 이어나갔다.

    “임신이란 명목으로 당신 발목 붙잡을 생각 없어.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난 상관없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야. 그러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날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하냐고!!”

    버럭 화를 내는 그를 마주보며 애정이 말했다.

    “솔직히 당신 지금 당황스럽잖아. 난 당신 표정만 봐도 다 알아.”

    “그래. 당신 말대로 당황스럽고, 놀라웠어. 이런 소식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

    성욱은 진솔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어대고, 가슴이 벅차기도 해.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어.”

    “…….”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뻐서 죽을 것 같아.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겼는데, 어떻게 안 기뻐?”

    당혹감에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을 냈다. 성욱은 또렷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도, 아이도 절대 포기할 생각 없어.”

    “…….”

    “당신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둘도 없는 기회고, 놓쳐선 안 되는 보물이야.”

    “…….”

    “아직 나에 대한 마음이 완전하지 않은 거 알아. 내가 저지른 일이 쉽게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도 알아.”

    그는 간절하면서도 강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맹세할게. 온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이 와도, 우리 둘, 아니 우리 셋이 떨어지는 일은 절대 없어. 당신과 아이만큼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거야.”

    “…….”

    “당신이 말했지? 나와 함께라면 지옥길도, 가시밭길도 따라갈 수 있었다고. 아니, 난 절대 그 따위 길을 당신과 아이가 걷게 만들지 않게 할 거야. 화목한 가정 속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순탄한 길만 걷게 할 거야. 이번엔 붙잡은 손 절대 놓지 않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갈 거야.”

    확신에 찬 그의 눈빛과 흔들림 없는 목소리. 애정의 가슴에 커다란 물결이 휩쓸었다.

    “애정아.”

    성욱은 애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구차하다고 말할지 몰라도 난 이렇게 빌 수밖에 없어.”

    “…….”

    “당신이 없으면 안 되는 나를 위해서라도,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꼬옥 부여잡은 채,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다시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줄 수 있겠어?”

    “…….”

    “다시 한 번만 날…….”

    애틋하게 젖은 그의 목소리가 차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사랑해줄 수 있겠어?”

    제발……. 그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동자는 어느새 젖어들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애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도 어느덧 애틋한 눈물이 가득 차올라있었다.

    “그동안 용서하지 못했을 뿐…… 당신은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어.”

    아니,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애정 역시 그를 향한 애틋함과 연민은 5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어떻게든 잊으려고 노력했으나,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가슴속 깊이 사무치는 원망도 결국엔 사랑이었다.

    “언제나 그리웠고, 보고 싶었어.”

    그의 끊임없는 열애와 진심 어린 사과에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어나가려던 찰나, 귀중한 생명이 찾아왔다.

    처음엔 애정 역시 많이 당혹스러웠으나, 머지않아 마음을 다시 잡았다.

    그와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임을.

    다시 한 번 그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늘이 내린 천사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임을.

    그렇게 마음을 먹은 애정이 말했다.

    “당신을 용서할게. 우리…….”

    뜨겁게 젖어든 눈망울에 그를 온전하게 담고서, 가슴 속 깊이 간직한 말을 고스란히 전했다.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자.”

    성욱의 뺨 위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모를 말이었다. 5년 동안 그저 꿈에서나 가능했던 말이었다.

    그는 감격에 벅찬 얼굴로 애정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성욱은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고마워……. 애정아.”

    그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내가 잘할게. 천 배 만 배로 잘할게.”

    “…….”

    “너 고생시킨 거…… 모두 갚으며 살아갈게. 태어날 아이에게 절대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될게.”

    성욱은 그녀의 어깨를 더욱 깊게 끌어안으며, 약속하고 다짐했다.

    “우리 셋…… 평생 행복하게 살아보자.”

    애정은 끝없는 눈물에 흔들리는 그의 넓은 어깨를 어루만졌다.

    애초에 답은 하나뿐이었다.

    메말라버린 가슴을 다시 따뜻하게 적시는 방법은, 끝없는 원망과 고독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이었다.

    비로소 해답을 찾은 애정이 그를 꼭 끌어안았다. 비어있던 가슴 속이 따스하게 채워졌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는 그를 다독이던 애정. 그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셋이 아니야.”

    “?”

    “총 넷이야.”

    “……응?”

    성욱이 고개를 들어, 긴 울음에 충혈 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정이 제 아랫배를 가리키며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한 명 더 있대. 그러니 총 네 식구라고.”

    그녀의 말에 입이 쩍 벌어지며 놀라는 성욱. 3초 동안 숨도 못 내뱉던 그는 감격에 벅찬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거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화장실을 바라보았다가, 애써 태연한 척 앉아있다가, 다시 화장실 주변을 배회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급히 소파로 가 앉았다. 도훈은 다시 담담한 얼굴로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화장실 입구에서는 테스트기를 들고 나오는 다정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그녀는 집에 들어온 후에야 침착하게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도훈이 살짝 떨리는 눈빛으로 결과를 물었다.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다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테스트…… 안 했어요.”

    다정은 마른 입술을 지긋이 물다가, 이어 말했다.

    “테스트하려고 하는 순간, 생리를 시작했어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입에서 아, 하고 짧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정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속이 안 좋았던 건, 며칠 전 회식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체한 모양이에요. 그리고 잉어가 나왔던 꿈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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