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29화 (외전 2) (29/32)

외전 2. 이 또한 사랑이라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욱이 거실로 향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은 그의 짙은 눈썹을 가렸고, 회색조의 샤워 가운 안으로는 그의 단단한 근육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고, 소파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을 본 성욱의 낯빛에 실망감이 번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했지만, 역시나 그가 원했던 문자는 아직 없었다.

“하아…….”

성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앉았다.

애정과 얼마 전 격렬했던 밤을 보내고 난 후,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체온을 함께 나눈 몸처럼, 떠났던 그녀의 마음도 함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 다는 아니어도, 아주 조금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착각이었음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 이후로 성욱은 그녀와의 만남을 계속 이어나가길 원했지만, 애정에게선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하긴…… 그렇게 쉽게 마음을 다시 주긴 힘들겠지.’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다시금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핸드폰 문자함에 여태껏 자신이 그녀에게 보낸 문자들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다 내가 잘못했어.]

[만나서 이야기하자.]

[어디야?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게.]

[미안하다. 정말…….]

[제발…… 다시 한번만 나한테 기회를 줘.]

그 어떤 답장도 받지 못한 수많은 문자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씁쓸함이 차올랐다.

그는 오늘도 오지 않을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며, 문자를 써내려갔다.

[뭐하고 있어?]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바빠? 언제 시간 돼?]

그녀가 부르면 언제 어디서든 맨발로 뛰쳐나갈 수 있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었다. 정말 미치도록…….

문자를 전송하려는 순간, 성욱의 시선이 베란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향했다.

“…….”

언제부터 왔었던 걸까.

창밖으로는 새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리며, 까만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흩날리는 눈꽃을 보는 성욱의 눈동자에 애틋함이 번졌다. 그의 한 쪽 가슴이 저절로 아려왔다.

‘나랑 결혼하자.’

솜털처럼 하얀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날.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녀를 만나고, 사랑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아련하게 스쳐지나갔다.

***

7년 전.

“자. 오늘 밤을 찢을 각오로 달려보자고! 우리 직원들의 행복과 건강을 위하여!!”

한껏 취한 부장의 건배사에 삼진그룹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건강을 위한다면서 밤을 찢을 각오로 달려보자니. 너무 모순인 건배사가 아닌가.

그의 건배사가 못마땅하지만, 직원들은 얼굴에 환히 미소를 띠며 소리쳤다.

“위하여!!”

연달아 부딪치는 잔과 사원들의 수다로 분위기가 시끌벅적한 가운데, 구석에 앉은 성욱은 회식 자리가 따분한지 말없이 술잔만 입에 가져갔다.

성욱은 삼진그룹 회장 차태호의 차남이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아들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성욱이 한국 땅을 밟은 지는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태호는 아들 성욱에게 신입사원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라며 마케팅 부서에 입사시켰다. 그의 제안을 형과 어머니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강경한 태호의 입장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첫 출근을 앞두고, 어머니 희란은 말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죽은 듯이 살아. 아무도 너 따위에게 관심 가지는 일 없도록 살란 말이야!’

성욱 역시 회사 일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고, 욕심도 없었다. 굳이 그녀가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지 않았어도, 죽은 듯이 살 예정이었다.

성욱은 그녀의 말대로 조용히 회사를 다녔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도 꼭 필요한 대화만 나누었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가 거리를 둔다고 해서, 상대방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입사한 지는 이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잘생긴 신입사원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오늘도 회식 하는 내내 여직원들은 흘깃흘깃 성욱의 외모를 감상했다.

포마드로 말끔하게 넘긴 검은색 머리카락과 남성미가 가득 풍기는 턱선.

짙은 눈썹과 강인한 눈매. 날렵하게 뻗은 콧날과 도톰한 입술.

영화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그의 외모는 여사원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 눈부신 외모에 쫙 벌어진 어깨와 186cm의 훤칠한 키까지 더해져, 여사원들 사이에선 완벽한 남친의 표본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워낙 성욱이 말을 아낀 덕에, 모두가 그를 그저 잘생긴 신입사원으로만 알고 있었지, 차태호의 아들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여러 개 쌓일 즈음, 성욱은 따분한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세 시간은 된 것 같은데, 아직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집에 일 있다고 하고, 그냥 나가버릴까.’

성욱은 테이블 가운데에 앉아있는 부장을 바라보았다. 거의 고주망태가 된 그는 옆자리에 여사원들을 끼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성욱이 혀를 차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심하기는.’

성욱이 이 주 동안 부장을 지켜본 결과, 그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상사였다. 윗사람들에게는 온갖 아부와 아첨을 떨면서, 아랫사람들에겐 하대하고 제멋대로 부렸다. 특히나 여사원들에게는 더욱더 함부로 대할 때가 많았다.

오늘 회식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취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부장이 걸쭉한 목소리로 앞에 앉은 여사원에게 말했다.

“자자. 이번엔 우리 예쁜 민지 씨가 한번 따라봐.”

그의 말에 신입사원인 민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재빨리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부장은 그녀가 채운 술을 단박에 원샷하더니, 껄껄 웃어 보였다.

“역시, 예쁜 여자가 따라주니 술맛이 좋구먼!”

부장은 진심으로 웃었고, 나머지는 마지 못해 웃었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성욱이 슬슬 외투를 챙겼다. 그리고 부장에게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부장님.”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이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사원들이 모두 성욱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성욱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로 시선이 향해있었다. 성욱 역시 살짝 놀란 얼굴로 옆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갸름한 계란형 얼굴에 가로로 길게 뻗은 눈매. 짙은 다갈색 눈동자에 오뚝한 콧날. 그리고 야무져 보이는 입매.

차분해 보이면서도 조금은 딱딱한 이미지를 가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성욱이 생각했다.

‘이름이…… 한애정이었던가.’

그녀는 술에 취한 듯 살짝 충혈된 눈으로 부장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왜 자꾸 여사원들에게만 술을 따르라고 하나요?”

그녀의 말에 회식 분위기가 일순간 싸해졌다. 신입사원의 패기 어린 말에 당황한 직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당연 부장이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뭐?”

“저번 회식 때도 그렇고, 저저번 회식 때도 여사원들에게만 술을 따르라고 지시하셨잖아요.”

술에 취했음에도 똑 부러지는 그녀의 어투에 부장의 낯빛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고, 일부러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하. 그거야 내가 우리 여자 사원들이 나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그런 거지.”

“그럼 옆자리에는 무조건 여사원들만 앉히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그, 그것도 그렇지.”

“그럼 노래방에서 여사원들에게 섹시 댄스 춰보라는 것도, 함께 춤추는 척 부둥켜안는 것도요?”

막힘없이 내뱉는 촌철살인 말들에 부장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벌떡 일어나 되레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자네 취했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의 엄한 목소리에도 애정은 굴하지 않았다.

“제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부장님이 더 잘 아실 거 아닙니까.”

“한애정 씨!”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보다 못한 차장이 애정에게로 다가와 말렸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애정 씨가 많이 취했나 봅니다.”

차장은 애정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애정 씨, 뭐 해? 얼른 사과드리지 않고!”

“사과를 해야 하는 쪽은 제가 아니라, 부장님이세요.”

애정은 짙은 다갈색 눈동자를 크게 치켜뜨고 부장을 향해 말했다.

“지난 3개월간 부장님이 저를 포함한 여직원들에게 행한 발언과 행동들 모두 성희롱인 거 모르세요? 친해지려고 딸뻘 되는 직원들한테 치근댄다는 게 말이 됩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정은 그동안 가슴에 맺혔던 말들을 남김없이 그에게 토해냈다.

“술집에서나 하던 짓 부하 직원들한테 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여사원들 모두 부장님한테 이런 취급 받으려고, 뼈 빠지게 공부해서 이 회사 들어온 거 아닙니다!”

거침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히 메웠다. 부장은 금방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얼굴이었다. 당황한 차장이 어쩔 줄 몰라하며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누가 한애정 씨 좀 데리고 나가. 얼른!”

마케팅 부서가 생긴 이래 처음 겪는 이 상황에 직원들 역시 우왕좌왕했다. 그때 한 남자 직원이 애정의 옆에 있는 성욱에게 말했다.

“뭐 해? 신입. 얼른 집으로 보내지 않고.”

성욱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한애정 씨 얼른 차 태워서 보내.”

성욱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래다주는 게 썩 내키지는 않지만, 회식 자리를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좋은 찬스란 생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회식 장소에서 나온 성욱은 그녀와 함께 택시 정류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애정을 부축하며 앞으로 걸어가던 찰나, 갑자기 그녀가 팔을 홱 떼며 말했다.

“놔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택시 정류장까지만 같이 가죠.”

그러자 애정이 더욱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쪽 부축 받을 만큼 취하지 않았거든요?”

“…….”

“가 봐요. 난 알아서 갈 테니까.”

누가 봐도 취해 보이는데, 왜 고집을 부리는지…….

성욱은 술 냄새가 진동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그녀가 택시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굳이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부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성욱이 쿨하게 몸을 돌려 주차해 놓은 쪽으로 걸어갔다. 대리기사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는 그 순간이었다.

쾅!

무언가가 세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애정의 짧은 신음이 뒤쪽에서 울려 퍼졌다.

“악!”

성욱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애정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길가에 세워진 치킨 브랜드 KFCI 할아버지 동상과 싸우고 있었다.

“아우씨. 뭐야, 넌! 저리 안 비켜?”

그녀는 허공에 대고 주먹을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러다 동상 머리 부분에 주먹이 세게 부딪혔다.

“으악~! 아퍼.”

그녀가 제 주먹을 잡고 발을 동동 굴렸다.

“…….”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성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가기는 틀렸다.

***

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은 골목길.

택시 한 대가 좁은 골목 안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적당한 곳에서 멈춰 섰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성욱이 기사에게 택시비를 지불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옆 자리에서 곯아떨어진 애정을 깨웠다.

“이봐요. 일어나요.”

“에? 여기가 어디예요?”

“한애정 씨 집 앞이에요.”

애정은 그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내리기가 바쁘게 휘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성욱이 말했다.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요. 집이 어디예요?”

“안 바래다줘도 돼요. 나 안 취했다니깐요.”

그녀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리고 평소 주량에 비하면 오늘은 마신 축에도 안 들어요.”

갈지자로 걷는 그녀를 뒤따라 걸으며 성욱이 말했다.

“세 병이나 마셨잖아요.”

“나한테 세 병이나가 아니라, 세 병밖에 안 되는 거라고요.”

“아……. 네. 대단한 술꾼 나셨네요.”

성욱이 낮게 읊조렸다. 그걸 또 귀신같이 들은 그녀가 눈을 매섭게 뜨며 물었다.

“뭐라고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둘은 살짝 거리를 둔 채로 집까지 걷기 시작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어색한 둘 사이를 맴돌았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성욱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좀 참지 그랬어요.”

그의 굵은 음성이 고요한 골목길을 울렸다.

“부장님 성격 안 좋은 거 뻔히 알면서.”

그렇게 말한 성욱은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참으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애정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까만 밤하늘을 옮겨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조금은 차가운 눈빛을 한 채로 그녀가 이어 말했다.

“참고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오긴 오나요?”

“…….”

“아니잖아요. 아무도 말하지 않고 참고 있으면 부장님은 더욱더 우릴 괴롭히고 우습게 볼 거예요. 누군가가 이렇게 따끔하게 한 번 말을 해줘야 부장님도 조금은 정신을 차리지 않겠어요?”

묵묵히 듣고 있던 성욱이 물었다.

“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왜 당신이 굳이 자처합니까?”

그것도 새파란 신입 주제에.

성욱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질문에 애정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깊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게요. 이놈의 술이 문제죠.”

그녀는 어깨선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일단 정규사원 될 때까지는 얌전히 있으려고 했는데, 아까 민지 씨 어깨를 자꾸 더듬는 걸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질러버린 거예요.”

이미 저지른 일 어쩌겠어요. 그렇게 덧붙이며 애정은 하늘을 향해 숨을 크게 내뱉었다.

“하~ 그래도 속은 시원하니 좋네요!”

서늘한 밤공기 사이로 옅은 입김이 퍼져나갔다.

“훗. 이왕 지른 거 육두문자를 날려버렸어야 했는데~ 아쉽다!”

그렇게 말한 애정은 뭐가 그리 좋은지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성욱은 활짝 입을 벌려 웃는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이렇게 감정기복이 심한 여자였나.’

사무실에서 보았을 땐 똑 부러지고 깍쟁이 같은 이미지였는데, 지금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술에 많이 취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뭐, 조금 이상해 보이긴 해도 사무실에서 봤던 모습보단 좋아 보였다.

그때, 갑자기 애정이 눈을 번뜩 뜨며 소리쳤다.

“어? 우리 아빠다!”

그녀의 말에 성욱이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어디 계시다는 거예요?”

“저~~기요. 안 보여요?”

그녀가 손을 위로 쭉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막둥이가 하늘에서 제일 크고 반짝이는 별이 우리 아빠라네요. 후후훗. 맹하고 유치한 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성욱은 그녀가 말한 대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본 것은 별이 아니라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비행기였다. 굳이 그 사실을 말해 분위기를 깨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애정의 눈동자가 추억에 담긴 듯 그윽하게 빛을 냈다.

“저 어릴 적에 아빠가 그랬어요. 강자에게 약하지 말고, 약자에게 강하지 말라고.”

“…….”

“강자가 옳지 않은 일을 하면 모른 척하지 말고 맞서라고 했어요. 그래야 이 세상에 약자가 안 생긴다면서요.”

그렇게 말하는 애정의 얼굴은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아니, 성욱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바라보던 애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물었다.

“우리 아빠 되게 멋있죠?”

“…….”

성욱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네. 멋있는 분이시네요.”

그의 말에 애정은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왔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휴우. 내가 취하긴 취했나 보다. 그저 직장 동료인 사람한테 별말을 다 하네.”

애정은 다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갈지자로 걷던 그녀의 걸음걸이는 아까보단 좋아졌지만, 언제든 다시 넘어질 것만 같이 불안해보였다. 성욱은 그녀를 따라 집까지 걸어갔다.

회색조의 철제 대문이 있는 곳에 도착한 애정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성욱은 오래되어 보이지만, 크고 고풍스러운 집 외관을 보며 말했다.

“집이 좋아 보이네요.”

“네. 우리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거든요.”

“들어가요. 난 이만 가볼게요.”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성욱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그 순간이었다.

“차성욱 씨.”

조금은 차분해진 그녀의 목소리가 성욱의 귓가에 닿았다. 그가 몸을 돌려 애정을 응시했다.

애정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성욱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여자면서…… 왜 사무실에선 그토록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때, 성욱에게 어느새 다가온 애정이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이게 뭐예요?”

그녀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택시비로 써요.”

성욱은 시선을 내려 그녀가 건넨 종이 한 장을 보았다. 옅은 푸른빛을 내는 종이에는 해피모니 상품권이라고 쓰여 있었다. 술이 다 깬 줄 알았건만, 자신의 착각이었나 보다.

“이건 돈이 아닌 것 같…….”

“고맙다는 인사는 넣어둬요. 같은 신입사원끼리 돈이 어디 있다고.”

그녀는 손을 저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아직도 취기에 두 볼이 빨개진 채로 성욱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요.”

그리곤 대문을 열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고요한 골목길에는 상품권 한 장을 손에 든 성욱만 홀로 남았다. 그는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일 주말인데.”

돌아서는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이틀 후, 성욱이 회사에 출근했을 땐 늘 일찍 와 앉아있던 애정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두리번거리며, 애정을 찾았다. 그리고 부장실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실루엣을 찾았다.

그녀의 성난 목소리가 부장실 밖으로 새어나왔다.

“왜 저만 정규직으로 전환이 안 되는 거죠?”

“수습기간이 괜히 있는 줄 알아? 수습기간은 신입사원의 회사 적응도, 업무능력, 성실성, 동료들과의 인간관계 등을 평가하는 기간이야. 고용자 입장에서 사원이 회사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당연 정규직 전환을 거부할 수 있지.”

“제가 다른 사원들보다 뭐가 부족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지각 한번 한 적 없었고, 업무를 태만한 적도 없습니다.”

“자네는 아직 업무 처리 능력이 부족해. 가르친다고 될 수준이 아니라고.”

“제가 부장님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아니고요?”

“뭐?”

화가 단단히 난 부장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자네 정말 끝까지 이럴 건가?!”

그들의 대화를 밖에서 듣고 있던 사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애정씨 참 안타깝다. 하루만 더 잘 버텼으면 정직원이 되었을 텐데.”

“그러게. 일도 잘하고, 야무져서 우리 모두 웬일로 괜찮은 신입사원이 들어왔다고 좋아했었잖아.”

“부장님도 진짜 너무해요. 어떻게 계약직 인턴도 아니고, 정규 채용으로 들어온 신입사원을 저렇게 잘라버릴 수가 있어요?”

“부장님 성질 더러운 거 하루 이틀이니? 그걸 모르고 덤빈 애정씨가 잘못이지. 덕분에 우리는 속이 시원하긴 했다만.”

사원들은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부장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둘은 투덕거리고 있었다.

모든 신입사원들은 3개월 수습기간을 거친 후,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틀 전 회식 자리가 마지막 수습기간이었다. 부장은 인사팀에 애정을 불성실함과 근무태만을 이유로 정규직 전환을 취소했다. 즉, 애정은 이틀 전 회식 사건으로 인해 해고 통고를 받은 것이다.

부장실을 응시하던 성욱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의 길게 뻗은 눈매가 날카롭게 빛을 냈다.

매서운 눈빛의 성욱이 부장실로 향해 발걸음을 떼는 그 순간이었다. 부장실에서 잔뜩 성이 난 애정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관두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케팅 부서실은 물론 다른 부서실에도 들릴 만큼 쩌렁쩌렁했다.

“정작 잘못한 사람은 가만 두고 힘없는 사람만 내쳐내는, 이런 빌어먹을 직장은 제 쪽에서도 사양이라고요!”

그 말과 함께 부장실 문이 쾅, 열렸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몸을 떠는 애정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제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제 소지품을 박스 안에 넣기 시작했다. 애정은 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씨. 누가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는 줄 아나. 더럽고 치사해서 안 다닌다. 확 망해버려라.”

그녀가 소지품을 마구 집어넣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가기까지 직원들은 함부로 끼어들지도, 위로하지도 못했다.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복도로 나온 애정이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한애정 씨.”

뒤에서 들리는 굵은 음성에 애정이 몸을 돌렸다. 그녀를 쫓아온 유일한 직원은 바로 성욱이었다. 애정에게 다가온 그가 물었다.

“정말 이대로 그만둘 생각이에요?”

애정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욱과는 입사한 후 대화를 나눈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물론 어젯밤 취해서 그와 나눈 이야기는 다 까먹은 상태였고.

다른 사람도 아닌 성욱이 마치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애정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애정이 대답했다.

“억울하지만, 별수 없잖아요. 내가 필요 없다는 회사를 고집 부려서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애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성욱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애정의 진한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내가 부장님한테 잘 말해볼 테니…….”

“성욱 씨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뚝 자른 그녀의 말에 성욱의 눈매가 가늘게 흔들렸다. 애정은 옅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도와주려고 하는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괜히 나 도우려다가 성욱 씨까지 밉보이지 말고, 앞으로 잘 버티며 회사생활 이어나가요.”

“…….”

“그럼, 잘 있어요.”

애정은 마지막까지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끝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욱. 그의 눈동자에 애틋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

성욱은 비서의 안내에 따라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는 결재 서류를 보고 있는 아버지 차태호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서류에 눈을 둔 그의 입술에서 굵고 낮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

성욱은 살짝 긴장한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마케팅 부서에서 함께 일하는 사원이 부당한 처사를 당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사원이었는데, 부장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로 전환이 취소됐습니다.”

태호는 미동도 없었다. 성욱이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한 부장이었어요. 그 사원은 옳은 말을 했을 뿐이고요. 지금이라도 인사팀에 해고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그 사원의 이름은…….”

“회사 일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사무실을 가득히 울리는 굵은 음성에 성욱은 더 이상 입을 움직이지 못했다. 태호는 여전히 서류를 바라보며 강인한 어조로 말했다.

“인사팀에서 이미 결정을 내린 사항이다. 번복하는 일은 없어.”

“아버지. 하지만…….”

순간 태호가 고개를 들어 아들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먹이를 향해 날아오는 매의 눈처럼 매서웠다.

“그 사원을 다시 복직시키면, 그 다음은? 앞으로 해고당한 모든 사원들이 너도 나도 억울함을 토로하며 일을 크게 벌이겠지. 그때도 네가 모두 감당할 셈이야? 그깟 사원 한 명 살리자고, 회사 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가 성욱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회사 일을 배우라고 했더니, 엉뚱한 데나 정신을 팔고 있었군. 그따위로 해서 네 형 발꿈치나 따라갈 수 있겠어?”

“…….”

“사사로운 일에 신경 끄고 회사 일이나 제대로 배워. 준비가 되었다 싶으면, 내가 네 자리 하나쯤은 어련히 마련해줄 테니.”

성욱은 주먹을 꽈악 쥐었다.

형을 넘어설 생각이 없습니다. 자리 같은 것도 바란 적 없어요.

저 좀 내버려 두세요.

차라리…… 마치 날 아들 취급도 안 했던 때처럼, 외국에 놔두고 방치하세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이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빙빙 맴돌았다. 그가 마른 입술을 짓씹는 동안, 태호는 다시 아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로 나를 찾아오는 일 없도록 해.”

그의 서늘한 음성이 이어 울렸다.

“이만 나가 봐.”

***

애정이 회사를 나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성욱은 애정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애정이 떠난 후로, 회사 일과는 변함없이 흘러갔다. 한동안 사무실을 시끌벅적하게 했던 애정의 이야기도 하루 이틀이 지나자, 금세 시들해졌다. 그리고 사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모습으로 각자의 생활에 전념하기 바빴다.

하지만 성욱은 이따금씩 계속 애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갸름한 얼굴에 또렷하고 맑은 눈동자, 아담하고 붉은 입술.

그녀를 떠올리는 일은 비단 회사에서뿐만이 아니라, 회사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특히나 늦은 밤 집 앞을 거닐 때면, 별빛처럼 눈부신 미소를 머금었던 애정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왜 자꾸 그녀가 생각나는 걸까.’

성욱은 저 자신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놀라워하다가도, 이러다 말겠지 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곤 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성욱은 사원들에게 인사한 후 자신의 차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그는 문득 재킷 주머니 안에 짚어지는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걸 본 성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에 잡힌 건 바로 애정이 주었던 문화 상품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못 전해줬네.’

성욱은 차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이건 그녀가 술김에 잘못 준 물건이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꼭 필요한 물건일지 모른다고.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그가 핸드폰에서 애정의 번호를 찾았다.

‘만나서 돌려주자.’

하지만 연락처 목록에는 애정의 번호가 없었다. 입사할 때 비상 연락망을 받은 적은 있지만, 사원들과 교류할 생각이 없었던 성욱은 애초에 저장도 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비상 연락망이 어디 있더라.’

성욱은 아마도 자신의 가방 어딘가에 있을 비상 연락망을 찾기 위해, 차를 갓길 쪽으로 몰았다. 그리고 갓길에 정차를 하려던 성욱의 눈빛이 문득 차창 밖으로 향했다.

“?!”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한 여자의 모습에 성욱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회색 재킷에 검은색 치마를 입고 길바닥에 서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애정이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에 성욱의 입가가 올라가려다가, 흠칫, 하고 멈추었다. 애정이 중년의 남성과 마주본 채로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성욱이 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그의 귓가에 싸우다시피 소리치는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저씨. 왜 남의 몸을 멋대로 찍고 난리예요?!”

“뭐? 나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언제 아가씨를 찍었다 그래?”

“나 말고 여기 있는 학생 치마 속 찍었잖아요!”

그렇게 소리치는 애정의 옆에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이거 범죄인 거 아시죠? 콩밥 먹어야 하는 일이라고요! 핸드폰 이리 내놔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욱은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는 밖에서도 한결같구나. 참 인생 피곤하게 사는 여자네…….’

문득 성욱은 그녀가 해고당하던 날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욱 씨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그는 제 자신보다 훨씬 몸집이 큰 남성에게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애정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는 저는 무슨 힘이 있다고…… 앞 뒤 안 가리고 저렇게 나서는 걸까.’

사실 그녀는 여태껏 성욱이 겪어보지 못한 스타일의 여자였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여자.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큰 여자.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뒷일은 생각 않고 무작정 달려드는 여자.

그런 그녀가 참 바보같이 보이면서도, 동시에 반짝반짝 빛나 보이기도 했다.

‘하……. 어떻게 할까.’

남의 일에는 되도록 참견하지 말자는 게 성욱의 주의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있는 듯 없는 듯이 살라고 했던 희란의 말에 따라, 그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늘 혼자였고, 혼자인 것이 편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로도 아버지의 눈에 거슬리는 일 없게,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만큼은 모른 척 돌아설 수가 없었다. 성욱은 아직도 떠들썩한 애정과 남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이 아가씨 생사람 잡는 거 봐. 난 그런 적이 없대도 그러네! 저리 비켜!”

“아저씨 어디서 구라를 쳐요? 내가 두 눈으로 똑바로 봤는데 그만 발뺌하시죠?!”

“증거 있어? 내가 그랬다는 확실한 증거 있냐고?!”

남자가 겁주려는 듯 사나운 눈빛으로 애정을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제가 봤습니다.”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애정이 놀란 눈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성욱이 서 있었다.

“다…… 당신은 또 뭐야?”

살짝 당황해하는 남자의 앞으로 바짝 다가간 성욱. 그가 말했다.

“저도 그쪽이 변태짓 하는 모습 똑바로 봤습니다.”

“뭐? 자, 자네가 잘못 본 거야! 즈, 증거 있어?”

“마침 제가 여기 바로 옆에 주차하고, 이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성욱은 옆에 주차해놓은 제 차로 고갯짓을 하며 가리켰다.

“차 블랙박스에 모두 찍혔을 텐데. 확인해보실래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순순히 자백하겠습니까?”

그의 당당한 말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늦은 저녁.

애정과 성욱은 경찰서에서 함께 나왔다.

성욱의 으름장에 놀란 남자가 범행을 자백했고, 그의 핸드폰은 경찰에게 압수됐다. 역시나 그는 이런 비슷한 일로 신고된 적이 있었던 남자였다. 남자의 지워진 핸드폰 자료까지 수사기관을 통해 모두 복원하기로 했고, 남자는 그 자료를 기반으로 추가 조사를 받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

뿌듯한 결과에 애정은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경찰서를 나왔다. 그는 성욱에게 말했다.

“더 못된 짓 하기 전에 저한테 걸려서 다행이에요. 여고생이 놀란 나머지, 말도 못 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게 얼마나 짠했던지. 그 못된 아저씨 다시는 이런 일 못하게, 손가락 확 잘라버렸으면 좋겠네!”

그녀의 말에 성욱이 입을 열었다.

“애정 씨가 이 구역의 슈퍼맨이라도 됩니까?”

그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왜 온갖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고 나서요? 게다가 오늘 같은 일은 무작정 달려들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못 해봤어요? 그 남자가 흉기라도 들고 있으면 어쩔 생각이었어요?”

“…….”

애정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제 동생 같은 학생이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요? 당연히 도와줘야지. 제가 아닌 누구라도 다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성욱 씨도 못 지나치고 나를 도와준 것처럼요.”

“…….”

“그리고 슈퍼맨이 아니라 슈퍼우먼이거든요?”

당당하게 말한 그녀가 여유 있는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성욱은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버스장이 저쪽에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이윽고 큰길가에 다다른 애정이 그에게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성욱 씨가 도와준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된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성욱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며 평소보다 부드러운 인상이 되었다. 맑은 눈망울은 여전히 예쁜 진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반듯하게 고개를 숙인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녀가 한 걸음씩 앞을 향해 나가는 그 순간이었다.

“한애정 씨.”

가을바람을 타고 굵게 울려 퍼지는 그의 음성에 애정이 고개를 돌렸다. 또렷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성욱은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성욱은 태어나 여자란 존재를 믿어본 적이 없었다.

여자란 한 없이 나약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가장 소중한 것도 내팽개치는 존재.

사랑한다고 애원했던 여자들도 결국엔 친어머니처럼 저를 쉽게 버리고,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어떤 여자와도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처음으로 제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고, 처음으로 제 모든 것을 뺏겨도 아깝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만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여자만큼은…… 믿고 마음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짙은 눈빛의 성욱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정말 고마우면…… 내 부탁도 한 가지 들어줄래요?”

그게 뭐냐는 듯 애정이 바라보았다.

성욱은 부드럽게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나랑 같이 저녁 먹어요.”

***

경찰서에서 헤어진 이후, 성욱과 애정은 주말에 만나 저녁을 먹었다. 그 뒤로도 식사자리가 몇 번 이어졌고, 식사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이브를 함께 즐기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서로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고, 좋은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싶어졌다.

애정은 삼진 그룹에서 나온 후, 화장품 회사 마케팅 부서에 취직했다. 삼진 그룹처럼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연봉도 괜찮은 편에 복지도 좋은 회사였다.

애정은 성욱이 삼진 그룹의 차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성욱이 일부러 속이려고 했다는 것은 아님을 알고 그를 이해했다. 게다가 이미 마음이 커질 대로 커져버려서 그가 재벌이든 거지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정이 깊어질 무렵, 성욱은 그녀에게 진심어린 고백을 준비했다. 그리고 고백하기 위해 한껏 무드를 잡은 어느 날,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애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욱 씨. 우리 이 정도 만났으면 사귀는 거 어때?”

불쑥 선수 친 그녀의 고백에 성욱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기도 했다.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고, 둘은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애정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여 성욱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둘은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트렸고,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서로를 생각했다. 하루만 보지 않아도 그리워질 만큼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서로의 손을 꼭 마주잡고 있으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성욱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행복을 평생토록 이어가고 싶었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거리에 내려앉던 어느 날 밤. 성욱은 그녀의 집 앞 놀이터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느 때와 같이 재잘거리는 애정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애정아.”

사실 프러포즈는 좀 더 멋진 곳에서 할 예정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차오르는 감정을 고백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빨리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평생을 약속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며 눈을 뜨고 싶었다.

성욱은 지나온 자신의 인생과 앞으로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과거와 똑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애정에게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

그의 청혼에 애정의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젖어들었다. 그녀의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다.

***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회사에서 집으로 온 성욱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집 밖으로 나오려던 가정부와 마주쳤다.

“오셨어요. 도련님.”

성욱도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녀를 지나치는 순간, 성욱의 시선에 익숙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잠시만요.”

성욱이 걸음을 돌려 그녀를 불렀다. 가정부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욱이 말했다.

“그거 버리시려고요?”

가정부는 성욱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자신이 들고 있는 쓰레기 수거함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거함 안에는 갖가지 종이 더미와 박스들이 들어있었다. 가정부가 대답했다.

“아, 네. 사모님이 당장 버리라고 하셔서요.”

그녀의 말에 성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가정부의 앞으로 다가가 수거함 안에 담긴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바로 금색의 포장지로 싸여있는 박스였다. 성욱은 이 박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이전에 애정이 집을 방문했을 때, 희란에게 선물로 준 스카프였다. 애정이 백화점을 몇 시간이나 돌며 고른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물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졌다.

울컥한 성욱이 선물상자를 들고, 곧장 본채로 들어갔다.

***

“어머니 어디 계세요?”

성욱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또 다른 가정부에게 물었다.

“사모님은 지금 안방에 계시는데…….”

성욱은 성큼성큼 안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강한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희란의 모습이 보였다. 눈매가 날카롭게 위로 향한 그녀가 성욱을 응시했다.

성욱은 그녀에게 다가가 선물상자를 보여주었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높아진 그의 언성이 방 안을 울렸다.

“어떻게 뜯지도 않고 버리실 수가 있어요?”

화가 잔뜩 난 성욱과 달리 희란은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차고 있던 귀걸이를 빼며 덤덤하게 말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니? 그 여자가 고른 거라면 싸구려일 게 뻔하지, 뭐.”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덧붙였다.

“기가 막혀서. 아무것도 없이 몸 하나 달랑 오는 주제에, 감히 그 따위 선물을 들이밀어? 날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저번 주 집에 방문해서도 아주 못 배운 티를 팍팍 내더구나.”

“어머니!”

성욱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제가 말씀드렸죠. 저는 몰라도, 그 사람만큼은 무시하지 말라고요.”

묵직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내뱉어졌다.

“그 여자 어머니한테 무시당할 사람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마음이 바르고 현명한 여자예요.”

그의 말에 희란은 비꼬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현명한 여자라면 애초에 너와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네 분수에 딱 맞는 여자야.”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격분한 그의 눈빛에 냉기가 서렸다. 그럼에도 희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더욱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화나니? 그럼 나는 오죽할까? 안 그래도 널 매일같이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데, 네 아빠는 너희 부부를 본채로 들인다는 고집을 안 꺾고 있어. 격 떨어지는 사람이 집 안에 한 명이 더 늘어나는 셈인데, 난들 좋겠냔 말이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숨 막히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욱이 소리쳤다.

“그 여자를 어머니에게 눈치 받으며 살게 할 바에 나가서 살겠어요!”

“그래, 제발 그래다오. 지금이라도 네 아버지한테 달려가 말해봐. 그 고집불통인 남자를 너라도 꺾어보란 말이다.”

성욱은 숨이 막혀왔다. 진절머리가 났다. 문득 이런 곳에서 애정이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희란은 언제나 성욱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한 집에 살아도 성욱을 유령 취급했고, 어쩔 때는 대놓고 욕을 퍼붓기도 했다.

자신은 참을 수 있지만, 애정까지 그런 취급을 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정과 결혼을 하기로 한 후, 희란에게 애정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그녀와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성욱은 아버지 태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애정과 결혼하면, 따로 나가서 살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성욱이 방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희란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네 친모가 회사로 찾아왔다더구나.”

“?!”

수년간 듣지 못했던 친모의 이야기에 성욱이 고개를 홱 돌렸다.

‘어머니가…… 찾아왔었다고?’

성욱의 눈빛에 의문과 아주 작은 기대감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다음에 이어지는 희란의 말로 순식간에 무너졌다.

“뻔뻔하게도 돈을 요구했다지. 달라는 대로 주지 않으면 네 결혼식 날 등장해서 깽판을 치겠다며.”

뭐?

성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태껏 친모를 원망하면서도, 가슴 한편에 작은 그리움도 함께 존재했다. 친모의 소식이 늘 궁금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성욱의 입술이 비틀렸다.

“……거짓말 말아요.”

“내가 이런 거짓말을 뭐 하러 하니? 널 낳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챙겨가 놓고선, 염치없이 또다시 모습을 보이다니……. 참, 기가 막힌 여자지.”

성욱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다. 꽉 쥔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래졌다.

“천박하고 몰상식한 건 엄마나 아들이나 마찬가지더구나. 빈대 기질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입 다무세요!”

“뭐?”

희란이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성욱의 몸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떨리고 있었다. 맹수처럼 살벌한 그의 눈빛이 희란을 응시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너 방금 뭐라고……?!”

“그 입 다무시라고요.”

거친 한마디에 희란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성욱은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한 마디만 더 말해봐요. 그땐 당신 말대로 몰상식함의 끝을 보여줄 테니까.”

그의 섬뜩한 목소리에 희란이 마른침을 삼켰다. 잘못했다간, 정말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그의 눈빛은 두려움을 주었다.

성욱은 얼어붙은 그녀를 뒤로한 채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을 나오는 그 순간,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머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낮게 깔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성욱의 이복형인 재훈이었다. 성욱은 그를 무시한 채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가로막았다.

“어디 가려고.”

“비켜.”

성욱이 매섭게 말했다. 다시 그를 지나치려는 순간, 재훈이 말했다.

“네 친모가 회사에 찾아온 건 사실이다.”

성욱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거짓말 말라는 눈빛으로. 재훈이 다시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네 친모와 이야기를 나눈 것도, 돈을 준 것도 나거든.”

지금까지 겪어본 바, 희란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놀라울 사람이 아니었지만 재훈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성정은 아니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친모 이야기에 성욱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온갖 감정으로 떨리는 가슴을 겨우 억누르며, 성욱이 말했다.

“형 말은 안 믿어. 아버지께 가겠어.”

“아버지 찾아가서 뭐 하려고?”

재훈이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친모를 만나게 해달라고? 어머니와 형과 한 집에서 도저히 못 살겠다며 징징대려고?”

“…….”

“어디 당장 가서 아버지한테 말해봐.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는 안 봐도 뻔하지만.”

성욱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피가 맺힐 정도로.

그의 말대로 아버지를 찾아가봤자, 해결될 문제는 없다. 되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얻어맞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재훈이 온기 한 점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철없이 굴래? 오갈 데 없는 널 받아준 식구들에게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

“비참하고 열 받아도 참고 버텨. 막말로 네가 이 집을 나가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성욱의 눈매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그런 그를 보며 재훈이 혀를 찼다.

“너랑 결혼할 여자가 불쌍하구나. 너 같은 놈과 미래를 꿈꿀 생각을 하다니.”

“…….”

“뭐, 너희 부부가 어떻게 살든 나야 상관없지만, 되도록 우리한테 피해는 주지 말고 살아라.”

재훈은 멸시에 찬 눈빛을 보이며 그를 지나쳤다.

***

그 후 성욱은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

술에라도 의존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라도 잠들어보려고 했지만, 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두운 동굴 속에 숨어든 것처럼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회사도 가지 않고, 그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았다. 물론 애정과도 마찬가지였다. 침대 맡에 놓인 꺼진 핸드폰은 일주일 내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성욱은 독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쓰디쓴 통증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하지만 가슴속에 북받치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희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뻔뻔하게도 돈을 요구했다지. 그렇지 않으면 네 결혼식 날 등장해서 깽판을 치겠다며.’

‘널 낳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챙겨가 놓고선, 염치없이 또다시 모습을 보이다니…….’

성욱은 친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아주 어렸을 때 자신을 이곳에 맡기고 떠났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워하기도 했다. 아니, 원망보다는 그리움이 더욱 컸다. 언젠가는 다시 자신을 찾으러 올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

자신을 떠난 이유도 누군가의 압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 고독한 시간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작게나마 간직했던 친모에 대한 애틋함과 기대감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버렸던 것이다. 버린 걸로 모자라, 결혼식을 엉망으로 만들겠다고 협박을 하며 돈까지 요구했다. 그녀에게 자신은 자식이 아니라 돈이었다.

처참하고 비통했다. 그 어떤 걸로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찢어지고 뭉개졌다.

결국,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인 외딴 섬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이런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보잘것없는 내가 감히 누구를 책임질 수 있을까.

가족에게 사랑이란 것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내가…….

어떻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성욱의 눈동자가 눈물과 함께 일그러졌다. 위스키병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두렵고 또 두려웠다.

‘너랑 결혼할 여자가 불쌍하구나. 너 같은 놈과 미래를 꿈꿀 생각을 하다니.’

재훈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에게는 그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암흑같이 어둡고 고독한 길만이 존재했다.

그 참혹한 길을 애정과 함께 걸어갈 수는 없었다.

이 감옥 같은 공간에서 숨 막히며 사는 것은 저 혼자만으로도 족했다.

그녀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붙잡은 그녀의 손을 한시라도 빨리 놓아주어야 했다.

무언가 결심한 성욱의 눈빛이 참담한 열기를 띠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애정은 벌컥 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성욱의 연락을 받자마자 정신없이 나온 듯, 이 추운 날씨에 그녀는 얇은 추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애정은 집 담벼락에 기대서있는 성욱을 발견했다. 일주일 만에 연락이 된 성욱이었지만 그녀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의 몰골이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늘 반듯했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며칠째 면도도 하지 않은 듯 턱이 거무스름했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바짝 메말라 찢어지기까지 했다.

애정이 놀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성욱 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애정이 미간을 좁혔다. 지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진동했다.

“세상에…….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락도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

“일단 우리 집으로 들어가자. 속을 달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찾아볼…….”

그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려던 애정을 성욱이 불러 세웠다.

“……애정아.”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애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본 애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온기가 넘쳤던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허망한 눈빛.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떨리고 있는 어깨.

여태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모습에 애정이 당황하는 동안, 그가 입을 열었다.

“나…… 못 하겠어.”

“뭘 못 하겠다는 거야?”

“……결혼.”

뭐?

애정의 눈동자가 크게 일그러졌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애정은 숨이 턱 막혀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