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24화 (24/32)

Chapter. 24

올리브오일과 마늘, 갖가지 채소로 맛을 낸 파스타가 둥그런 접시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왔다. 다정이 동그래진 눈으로 환호를 질렀다.

“와, 너무 맛있어 보여요.”

“냉장고에 재료가 별로 없어서 간단히 만들었어요. 다음엔 더 맛있게 해줄게요.”

도훈은 제 접시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어서 먹어요.”

“잘 먹을게요.”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다정은 먹음직스러운 파스타 면을 포크에 돌돌 말아 입 안 가득 넣었다. 적당히 짭짜름한 면과 마늘향이 조화롭게 섞여 훌륭한 맛을 냈다.

“너무 맛있어요. 팀장님은 못하는 게 없네요.”

입 안이 행복해지자 입 밖으로 칭찬이 술술 나왔다. 그 소리가 싫지는 않은 듯 도훈이 옅게 입매를 올렸다. 열심히 포크질을 하며 맛있게도 먹는 다정을 보면서 그가 물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봐요.”

“누가 밥도 안 먹이고 몸을 혹사해서요.”

그녀의 몸을 혹사한 장본인은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제 파스타를 다정의 그릇에 덜어주며 말했다.

“많이 먹어요.”

그러자 다정이 쓱 고개를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많이 먹여서 뭐 하려고요?”

“또 잡아먹으려고요.”

농담으로 말했건만, 다정의 얼굴은 진심으로 새하얘졌다. 그녀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렇게 혈기왕성하신 분이 그동안 어떻게 참으셨대요?”

“그러니까요. 내가 그동안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그동안 쌓인 거 풀려면 아직 멀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팀장님은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잖아요. 저는 팀장님만큼 체력이 넘치지 않는다고요.”

“알겠어요. 그럼 앞으로 횟수를 좀 줄여보도록 하죠.”

“팀장님은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닌데요? 시간을 줄여야죠.”

“시간을 어떻게 정하고 합니까? 차라리 횟수를 줄이는 게 낫죠.”

“정하고 하라는 게 아니라, 적당히 하라는 뜻이에요. 저 이러다가 몸살로 쓰러지겠어요.”

도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뜻밖의 의견 차이에 그는 회사에서 중요한 사안을 다룰 때보다 더 심각한 얼굴이었다. 한참 고심하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결정을 내렸다.

“알겠어요. 다정 씨 말대로 시간을 단축해보도록 하죠.”

“네. 감사해요.”

이런 걸로다가 감사하단 말을 할 줄이야. 다정이 어처구니없어하는 순간, 도훈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횟수는 내 맘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죠?”

이야기가 왜 또 그렇게 되는 걸까.

다시 본전으로 돌아온 기분에 다정은 허탈한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제가 체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겠네요.”

“내가 예전에 미리 경고했잖아요.”

도훈이 씩,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낮져밤이’라고.”

아……. 그게 경고였구나.

다정은 그 말이 경고인지도 모르고, 두근두근했던 과거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문득 그녀는 여사원들과 음담패설을 나누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분명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었다.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 우리 신랑 연애할 때는 하루가 멀다고 달려들더니만, 지금은 연례행사 됐어.’

다정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팀장님도 결혼하고 나면 조금은 달라지려나.’

지금은 연애 초반이고, 또 그의 말처럼 쌓인 게 워낙 많은 나머지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나누는 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 사원들의 말대로 그의 넘치는 정력이 줄어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안도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다정은 더는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단념한 후, 파스타를 먹는 데 전념했다. 그녀가 그릇을 깨끗이 비울 즈음에 도훈이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제 평생 함께할 사람인데 호칭 좀 정리하죠.”

파스타를 모두 먹은 다정이 티슈로 입술을 닦으며 그를 응시했다.

“호칭 정리요?”

“설마 식장에서도 팀장님이라 부를 겁니까?”

“아……. 습관이 돼서 그렇게 불렀던 건데, 듣기 많이 불편했어요?”

“불편하기보다는 너무 딱딱해 보여서.”

“알겠어요. 그럼 회사 밖에서는…… 도훈 씨라고 부를게요.”

“그것도 딱딱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야지.”

“그럼 연습 한번 해봐요.”

“무슨 연습까지…….”

괜스레 쑥스러운 마음이 든 다정이 시선을 피했지만, 도훈은 그녀를 응시하면서 기다렸다. 그의 집요함을 이기지 못한 다정이 말했다.

“잘 먹었어요, 도훈 씨. 됐죠?”

일어나려는 다정을 그가 붙잡았다.

“한 번 더요.”

“굳이 뭐 하러 또 들어요?”

“굳이 한 번 더 듣고 싶은데 어떡합니까.”

“그게 도훈 씨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말해드릴게요. 도훈 씨.”

다정이 말끝마다 그의 이름을 붙이며 말했다.

“이제 일어나도 되죠? 도훈 씨.”

싱긋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도훈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다급해진 본능에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다정은 당황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다정을 안은 채로 어디론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왕 소원 들어줄 거면 제대로 들어주죠.”

“네?”

“다시 한 번 불러줘요.”

“계속 불러줬잖아요.”

“식탁에서 말고, 침대에서.”

그렇게 말하며 도훈이 도착한 곳은 온종일 두 사람이 뒹굴었던 침실이었다. 결국에 종착지가 이곳으로 향하자 다정은 아찔한 기분이 밀려왔다.

“아니…….”

그녀가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도훈이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그녀를 침대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몸 곳곳에 닿는 그의 입술이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종일 수없이 반복된 행위로 익숙해진 손길에 서로의 옷이 금방 벗겨졌다. 곧 침실은 뜨거운 열기로 다시금 차올랐다.

***

침실에서 또 한 번 뜨거운 사랑을 나눈 둘은 샤워를 마친 후,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른한 몸을 소파에 기댄 다정은 잠이 살짝 오는지,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때, 도훈이 일어나 방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다정은 그가 건넨 물건을 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어렸을 적 사진 보고 싶다면서요.”

그가 다정에게 건넨 건 다름 아닌 도훈의 사진첩이었다. 그녀는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사진첩을 펼쳤다. 그들은 나란히 기대 앉아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진첩 맨 첫 장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훈의 사진과 돌 사진이 있었다.

“꺄, 귀여워라. 눈 똘망똘망한 것 좀 봐~”

다정은 도훈에게도 이렇게 깜찍한 시절이 있었던 것이 신기한 듯 사진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 도훈은 칠흑 같은 눈망울과 고운 얼굴선으로 눈부신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몇 장 더 넘기자, 이번엔 늘씬한 몸매에 여리여리한 이목구비를 가진 한 여인이 다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분이…… 도훈 씨 어머니이신 거예요?”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피부에 커다랗고 짙은 눈동자를 가진 어머니의 모습에선 청순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다정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와……. 어머님이 너무 미인이세요. 연예인 같아요.”

그녀는 여전히 감탄에 젖은 눈빛으로 말했다.

“팀장님은 잘생기게 태어날 수밖에 없는 유전자였네요.”

그 후로도 이어지는 도훈과 가족들의 사진에 다정의 시선은 앨범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어떤 장에서는 까르르 웃기도 하고, 또 어떤 장에서는 눈부신 가족들의 모습에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앨범을 찬찬히 넘기던 다정의 눈매가 점점 가늘게 흔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웃지 않았다.

“…….”

이윽고 앨범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녀의 눈망울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도훈이 살짝 당황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다정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21년 전 사고로 아빠를 그렇게 보낸 후…… 처음엔 아빠의 빈자리가 그립고, 많이 쓸쓸했어요.”

“…….”

“하지만 제 주위엔 늘 시끌벅적한 언니들과 엄마, 할머니가 있었죠. 가족들이 많은 덕에 조용한 날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할머니와 엄마, 언니들이 제 곁에 있었기에 아빠의 부재를 많이 못 느끼고 자랐는지 몰라요. 그런데 팀장님은…….”

다정이 말을 잇지 못하고, 사진첩을 응시했다.

도훈의 어린 시절에 감탄하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정은 웃을 수가 없었다.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도훈 혼자서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초반에 엄마와 함께 웃고 있었던 아이의 해맑음은 뒤로 갈수록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어떻게 홀로 모진 세월을 버텨왔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는 어느덧 애틋한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사진 위로 투명한 눈물이 떨어져 맺혔다.

“그렇게 가엾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도훈은 그녀의 뺨 위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 역시 처음엔 힘들었어요. 어머니가 많이 그리웠고, 아버지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면, 텅 빈 집에 들어오기가 겁났었죠.”

“…….”

“하지만 지금은 외롭지도 않고,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요즘은 하루하루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가슴이 벅차요.”

도훈은 짙고 그윽한 눈빛으로 다정을 응시했다.

“당신이…… 내 곁에 있으니까.”

“…….”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이제 두려운 것도 없고, 그 어떠한 일도 버틸 수 있어요.”

그의 굵은 음성이 귓가를 스쳐,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다정의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또 한 방울 흘러내렸다. 다정은 손을 뻗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앞으로 그 어떠한 일이 생겨도, 이 사람만큼은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적어도 저만은 그의 곁에 끝까지 남으리라 다짐했다.

도훈은 자신을 꼭 끌어안은 다정의 어깨를 다독이다가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조금 더 넘겨봐요.”

“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사진첩을 톡, 치며 가리켰다.

“다 본 줄 알았는데.”

다정은 그의 말대로 다시 사진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사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순간 앨범의 마지막 장에서 다정의 손이 멈칫했다. 앨범을 본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마지막 사진첩 안에는 반짝반짝 빛을 내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바로 은은한 은빛을 머금은 반지였다.

예상치 못한 물건의 등장에 다정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도훈이 반지를 사진첩에서 뺐다. 도훈은 근사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프러포즈에 이게 빠질 순 없죠.”

그리고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 반지를 조심스레 끼워주었다. 다정은 감격에 젖은 눈빛으로 반지와 도훈을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예쁜 건 처음 봐요.”

도훈은 사진첩을 닫고,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남은 페이지는 당신이 함께 채워줘요.”

다정은 애틋한 눈빛을 하고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꺼번에 많은 감정들이 밀려와,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정은 그의 어깨를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눈동자가 그윽하게 빛을 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다정의 등을 안았다.

입가에 가득 미소를 담은 채, 그가 말했다.

“내가 말할 타이밍이었는데, 선수 치면 어떡합니까.”

그의 말에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다정의 입술이 올라갔다. 마주 보는 서로의 눈빛에 사랑이 넘쳐흘렀다.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술을 겹쳤다.

***

휴게실 안에 앉아있는 다정은 바로 눈앞에 손가락을 쭉 뻗어보았다.

쫙 펼친 네 번째 손가락에는 은빛의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일주일 전, 도훈이 주었던 반지였다.

반지를 바라보는 다정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가득 넘쳤다. 아까부터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선물한 반지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보고 또 봐도 예뻤다.

사무실에 반지를 처음 끼고 온 날, 모두가 예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프러포즈 이야기를 듣고선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주었다.

반지에 한참 심취해있던 다정은 복도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엔 저렇게 되네.”

“나라도 쪽팔려서 회사 못 다니지.”

직원들이 수군대는 목소리에 다정은 복도 쪽으로 걸어 나왔다. 긴 복도 끝에는 박스를 안고 맥없이 걸어오는 세아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박스 안에는 그녀가 사무실에서 쓰던 소지품이 들어있었다.

그 사건 이후, 세아가 성욱에게 회사 기밀사항을 유출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더욱 무성해진 소문과 직원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다 못한 세아는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보통 사직서 효력은 한 달 뒤부터 있지만, 회사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빠르게 퇴사를 허용했다.

긴 복도를 걸어오던 세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다정을 응시했다.

“내 꼴을 보니 만족스러워요?”

그녀는 비꼬듯 쏘아붙였다.

“속으론 지금 통쾌해 죽겠죠?”

“아니. 통쾌하다고 생각 안 해. 그저…….”

다정은 독기를 가득 품은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타깝다고 생각했어.”

그녀의 말에 세아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뭐……라고요?”

다정은 그녀를 응시한 채로 담담히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남들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았을 텐데……. 그걸 모르고 너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렸으니 말이야.”

다정은 아직도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눈송이처럼 새하얀 피부에 까만 눈망울.

생글생글한 눈웃음과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던 미소.

같은 여자조차 가슴을 일렁이게 할 만큼, 반짝반짝 눈이 부셨던 사람이었다. 한때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고, 그녀가 친한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눈부셨던 모습은 지금의 세아에게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때 자신이 동경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초라했다.

자신의 값어치를 모르고 욕심만 세우던 그녀가 다정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신에게 한 행동을 용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다정은 씁쓸한 표정으로 세아를 응시했다.

“잘 가.”

대학교 후배이자 회사 동기였던 사람.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던 사람.

자신을 지독한 방법으로 배신했던 사람.

그녀는 다정에게 어떤 의미로든 절대 지울 수 없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다시는 보지 말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정은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그게 둘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고, 마지막 만남이었다.

긴 복도에 홀로 서있는 세아의 얼굴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세아의 아름다웠던 눈매는 흉하게 일그러지고, 도톰한 아랫입술은 그녀의 이에 지그시 눌려있었다.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원망과 분노로 얼룩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남의 탓으로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다정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안타까워? 지까짓 게 뭔데…….”

홀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주위 사원들이 이상한 사람 보듯 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빛이 사원들에게로 향했다.

“뭘 봐…….”

그녀는 분한 얼굴로 그들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세아는 광기 어린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분노와 절망이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사원들은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며, 쓴 소리를 한마디씩 내뱉곤 사라졌다.

***

“우와~~~ 너무 예쁘다~~~”

다정의 가족들은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도훈이 다정을 위해 설계한 집을 처음 본 그들은 입이 떡 벌어져 다물지를 못했다. 아이처럼 신난 애정과 소정은 1층, 2층을 뛰어다니며 구경하기 바빴고, 봉해와 길순은 정원과 주방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러있었다.

·

다정의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도훈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30분 가까이 이어진 집 구경을 마치고, 가족들은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도훈이 준비한 따뜻한 차를 들며 봉해가 말했다.

“우리 가족을 위해 이렇게 멋진 집을 지어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떻게 이런 집을 지을 생각을 했어요?”

도훈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답했다.

“돌아가신 다정 씨 아버님을 대신해서 제가 다정 씨와 가족분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가족들에게 무얼 해주고 싶으셨을까…… 생각해보니, 집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아버님도 건축업에 종사하셨으니 언젠가는 가족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라고 여겼거든요.”

그녀의 눈빛이 감격으로 젖어들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해준 도훈 씨가 너무 대단하고, 고맙네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요한 가구나 소품은 말씀해주시면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만…….”

봉해는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린 원래 집에서 계속 지낼 생각이에요.”

그녀의 말에 다정과 도훈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 마음은 정말 고맙구먼. 하지만 우린 그 집을 떠날 수가 없네.”

묵묵히 앉아있던 길순이 입을 열었다.

“그 집은 다정이 할애비가 만들어준 집이네. 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겠다고 영감한테 약조했는데,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겄어.”

“…….”

“이 집에서는 우리 다정이랑 오순도순 살어. 방도 많으니, 애들도 그만큼 많이 낳으면 되겄고먼.”

“할머님. 그래도…….”

“우리들은 그냥 가끔 한 번씩 보러 올 테니, 둘이 살어. 우리들이 같이 살아봤자, 자네가 한 달도 못 버틸 것이여. 저 계집애들이 얼마나 시끄러운디.”

길순이 눈을 옆으로 뜨며 애정과 소정을 가리켰다. 이미 두 자매도 마음을 굳히고 온 모양인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집은 정말 예쁘고, 지금 당장이라도 짐을 풀고 싶을 만큼 마음에 쏘옥 들지만…… 동생 신혼을 깨트리면서까지 지낼 생각은 우리도 없어요.”

“할아버지가 지은 집도 이제 정이 들어서 떠나기 싫은걸요.”

그렇게 말하며 애정과 소정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족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도훈은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성급하게 마음 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족분들을 생각해서 일부러 크게 지은 집입니다.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오십시오.”

그의 말에 길순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겄네. 일단 이 집에 아기들 웃음소리부터 나오게 해봐. 그럼 고것들 보고 싶어서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제.”

도훈이 입매를 올리며 힘 있게 대답했다.

“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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