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23화 (23/32)

Chapter. 23

여행지는 다정이 평소에 가고 싶다고 했던 곳 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정했다.

대관령에 있는 양떼 목장에 가서 기차도 타고, 양들에게 건초도 주었다. 탁 트인 전망과 동물들을 좋아하는 다정은 이곳에 있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후로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드넓은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해질 무렵이 다가오자, 둘은 해변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나섰다. 노란빛을 머금고 물결치는 바닷가를 보며 다정의 눈빛도 함께 일렁거렸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한적한 해변에 차를 세우고, 둘은 조금 걷기로 했다.

부드러운 모랫길을 따라 걸으며 다정과 도훈은 바다를 감상했다. 적당히 선선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산들산들 흩날렸다.

다정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이 바다의 끝자락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며, 은은한 주홍빛이 다정의 눈동자에 내려앉았다. 드넓고 아득한 바다를 보고 있자니, 먹먹한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도훈은 이제 5개월 후면, 이 넓은 바다를 수없이 지나쳐야만 닿을 수 있는 땅으로 가게 된다. 그가 호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할지, 언제 다시 한국에 돌아올지는 모른다.

‘그럼……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걸까.’

이제는 매일매일을 보아도 아쉬운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그와 한 달도 아닌 몇 달 동안 볼 수 없단 생각을 하자,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수많은 상념에 잠겨있던 다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주는…… 어떤 곳이에요?”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는 듯 도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 궁금해서요. 살기 좋은 나라라고 불리기도 하잖아요.”

도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주변 풍경을 스윽 훑으며 말했다.

“일단 호주는 공기도 맑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아요. 바다에 가면 하늘과 바다색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맑고 깨끗해요. 자원은 풍부하고 땅은 넓은 반면에 인구수는 적어 여유로운 삶이 가능한 나라죠.”

다정은 또렷한 눈망울을 하고선,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호주는 무엇보다 직업 간의 임금 격차가 작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과 용접공 같은 기술직 간의 임금 격차가 2배도 안 돼요. 대학교에 가지 않고, 졸업 후 기술만 잘 배워도 소득이 높습니다. 이런 이유로 호주 학생들은 우리나라처럼 굳이 의사 같은 전문직을 가지려고 애를 쓰지 않죠.”

“그렇군요……. 그럼 확실히 호주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겠네요.”

“네. 뿐만 아니라 교육비, 의료비, 양육비 지원과 연금 혜택 등 복지 정책도 잘 되어 있는 곳이에요. 호주가 살기 좋은 나라라고 불리는 것도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군요.”

“팀장님 이야기만 들어도 좋은 나라처럼 느껴져요. 누구 말로는 바다가 에메랄드빛이라던데, 언젠가 직접 보고 싶네요.”

그렇게 말하며 다정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는 도훈.

촤아아……. 잔잔한 파도가 하얀 모래 위로 밀려오는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랑 같이 갈래요?”

그의 나직한 음성이 바다 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그곳에서 나와 함께 지낼 수 있겠어요?”

“…….”

다정은 살짝 커다래진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사실…… 여러 번 생각했던 물음이었다.

만약 그가 호주로 같이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다정은 그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수차례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항상 같았다.

다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은 그곳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할 수 있는 일도 많겠지만…… 저는 아니에요. 물론 레스토랑 주방 보조 같은 일은 할 수 있겠지만요.”

“…….”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 많았어요. 특히, 부문장님이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여직원들은 사직서를 꺼낼지 말지 많이 고민했죠. 하지만 정작 나가라고 하면 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팀장님은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무척 고생하다가 어렵게 들어온 회사거든요.”

도훈은 푸른 바다를 등지고 서서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보기 싫은 사람들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아요. 기획안 써내는 건 스트레스 받지만, 막상 프로젝트를 성공하고 나면 뿌듯하고요. 이곳에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요인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넘치는데, 그곳에선 무엇을 해야 될지 감조차 안 잡혀요.”

다정은 애써 입가를 올려 보이며 씩씩하게 말했다.

“저 역시 팀장님과 멀리 떨어지는 건 정말로 아쉬워요. 그래도 우리가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더 자주 연락하고, 제가 연차 써서 팀장님 있는 곳으로 놀러 갈게요.”

“…….”

“회사뿐만 아니라 가족들 때문에라도 전 아직 이곳을 뜨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훗날 후회하더라도, 지금은 이곳에 남을래요.”

그녀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다정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쉽게 하는 말 아니에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본 답이에요.”

“…….”

“제 마음…… 이해할 수 있겠어요?”

도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야기에 조금은 섭섭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엔 나긋한 미소가 옅게 자리 잡았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번엔 조금 거친 파도가 철썩였다. 바닷물이 다시 쓸려가는 소리와 함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나 역시 호주는 안 가기로 했어요.”

다정의 진갈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도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다정이 물었다.

“왜요?”

“…….”

“그 좋은 데를 왜 안 간다는 건데요?”

건설업계 종사자들에게는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회사였다. 그런 곳에서 받은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다니, 다정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한때는 지금보다 좀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나 자신은 물론 모두에게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게 삶의 목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 무언지 알게 되었죠.”

그는 흔들림 없는 강인한 눈빛으로 다정을 응시했다.

“직업, 명예, 재산…… 이런 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지만, 사람은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어요. 그래서 난 다정 씨가 있는 이곳에 계속 남을 생각입니다.”

다정은 그의 말에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달래듯이 말했다.

“나 때문에 가지 않는 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이런 기회는 싶게 찾아오지 않아요.”

“이미 호주 회사 측에 말해 놓았어요. 이젠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아니, 언제 그런 결정을 한 거예요?”

“다정 씨랑 사귀고 나고 며칠 안 돼서요. 다행히 이곳 회사에는 말하지 않아서, 이사님께 한 소리 들을 일은 없겠군요.”

“저한테 상의라도 하고 결정하지 그랬어요. 그 좋은 곳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쉽게 포기한 거 아닙니다. 다정 씨처럼 오랫동안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본 결과 나온 답이에요. 몇 번을 생각해도…… 결국 답은 똑같았고요.”

“…….”

확고한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다정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도훈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곁에 남겠다는데 표정이 대체 왜 그럽니까? 안 기뻐요?”

그가 내 곁에 남아서 다행이라는 마음보다는 안타깝고 복잡한 감정이 더 가슴에 실렸다. 시선을 내린 다정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팀장님이 너무 많은 걸 포기하는 것 같아서…… 웃을 수가 없어요.”

도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며, 바람결에 흩날리는 다정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나 때문입니다.”

그의 그윽하고 강렬한 눈빛이 다정에게 향했다. 도훈은 그녀의 뺨을 그러쥐며 말했다.

“이제 당신이 내 곁에 없으면,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으니까.”

“…….”

“당신이 없는 삶은 내가 없는 삶과 마찬가지니까.”

이윽고, 그의 나직한 음성이 다정의 심장을 울렸다.

“내가 살기 위해…… 당신 곁에 남는 겁니다.”

다정의 눈망울이 애틋하게 떨려왔다. 도훈은 다른 한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다가온 그의 입술이 다정의 입술 위로 부드럽게 포개어졌다.

한없이 따뜻하고 감미로운 키스. 다정은 그의 입술을 뜨겁게 삼키며,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쏴아아아……. 바다 소리는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 낭만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주홍빛 석양 아래, 두 사람이 겹쳐진 긴 그림자가 하얀 모래 위로 늘어졌다.

***

차만 타면 잠이 드는 체질이라, 다정은 바닷가에서 차에 오르자마자 잠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깊이 잠에 취한 다정. 한 번씩 흔들리던 차체가 전혀 움직임이 없자, 감은 눈을 스르륵 떴다. 고요한 적막에 다정이 화들짝 놀라며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운전석에는 옅게 미소 짓는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물었다.

“언제 도착한 거예요?”

“얼마 안 되었어요.”

다정이 미안하면서도 민망한 마음에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착했으면 바로 깨우지 그랬어요?”

“너무 곤히 자길래.”

“저 혹시…… 코 안 골았죠?”

“골아도 예쁘니까 걱정 말아요.”

달달함이 듬뿍 담긴 그의 말에 다정의 입가가 씰룩 올라갔다. 어쩌다 이렇게 스위트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지……. 가슴속에서 행복한 탄성이 저절로 질러졌다.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린 다정.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여기는…….”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서울 외곽에 지어진 그의 집이었다. 다정의 손을 잡고 집 쪽으로 향하는 도훈에게 그녀가 물었다.

“왜 팀장님 집으로 온 거예요?”

“어디 원하는 곳 있었어요?”

“아니, 전 여행지 근처에서 잘 줄 알았는데……. 내일 오전에 바닷가도 한 번 더 보고 오려고 했고요.”

도훈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다정 씨에게 줄 게 있었는데, 너무 무거워서 못 가져왔거든요.”

“네? 그게 뭔데요?”

“일단 찬찬히 소개부터 할게요.”

“?”

“따라와요.”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다정이 살짝 의아해하며 그를 따라갔다. 그의 발걸음은 현관을 지나, 널찍한 거실 한가운데에서 멈추었다. 도훈이 거실을 크게 훑으며 말했다.

“거실 내부는 나무로 된 소재로 공간을 채워 편안한 느낌을 연출했어요. 거실 디자인은 가족들 간의 소통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수 있도록 안락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구나 소품 역시 따뜻한 느낌의 색이나 디자인을 선택한 거고요.”

그는 브라운 색상의 커튼을 열었다. 베란다 창문 너머로는 푸른 잔디를 심은 마당이 보였다.

“마당은 꽃이나 식물을 심을 화단으로 사용해도 좋고, 동물을 키워도 좋을 만큼 면적이 넓은 편이에요. 또 아이들이 뛰어놀기도 좋고요.”

그의 말대로 뒷마당은 축구 경기를 해도 될 만큼 넓었다. 문득 이곳이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집처럼 느껴져 다정이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옅게 미소를 짓던 도훈은 또 다른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거실에 이어 다정을 데리고 간 곳은 주방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인테리어와 새하얀 아일랜드 식탁. 그리고 은은한 조명까지. 여자의 로망을 완벽하게 실현한 주방의 모습이었다.

“주방은 화이트 컬러의 벽면에 작은 포인트를 주어 깔끔한 느낌을 완성했어요. 물이 닿기 쉬운 상판은 스톤 계열 마감재를 사용했고, 원목을 사용한 부분은 부식을 고려해 식물성 오일 칠을 했죠.”

다정은 어느덧 집 안 곳곳 세심하게 신경 쓴 인테리어에 심취하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주방을 찬찬히 둘러본 그녀를 데리고, 도훈은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치 내놓은 집을 소개하는 부동산 업자처럼 집 구조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드레스룸을 제외하고 방은 총 다섯 개입니다. 이 정도 개수면 대가족도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생활할 수 있죠. 각각 방 안에는 활용도가 높은 수납장과 넉넉한 붙박이장도 마련해놓았어요.”

2층에 도착하자, 안락한 분위기의 다락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모난 모양의 높은 천장 위에는 누워서도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창문이 설계되어 있었다.

“복층의 꽃이라고 불리는 다락방 역시 목재소재로 마감하여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함과 동시에 바로 옆 테라스에서 들어오는 햇빛과 조화를 이루게 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다락방과 연결된 테라스 문을 열었다. 그와 함께 테라스로 나오자, 확 트인 전망이 눈앞에 펼쳐졌다. 살짝만 고개를 올리면 무수한 별들이 빛을 발하며 인사했다. 언제 봐도 눈이 부신 곳이었다.

“여긴 도심과 떨어진 곳이라 구름이 없는 날이면 별이 잘 보이는 편입니다. 그래서 천장이 뚫린 2층 테라스로 오면 마음껏 아름다운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죠. 물론 다정 씨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의 말에 다정의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별들이 수놓은 밤하늘은 단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영롱하고, 찬란해 보였다. 환한 달빛을 머금은 다정의 눈망울이 은빛으로 넘실거렸다. 그 모습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도훈이 물었다.

“어때요?”

다정이 고개를 그에게로 돌리며 되물었다.

“네? 뭐가요?”

“이 집 마음에 들어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걸요.”

“선물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

선물?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도훈은 여전히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 거예요. 이 집.”

다정은 잠시 넋이 나가있다가, 어이가 없어하며 말했다.

“무……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제 집이에요?”

“처음부터 당신에게 주려고 설계한 집이니까.”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는 다정과는 달리 그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고, 당신을 찾아서 선물할 예정이었죠. 아버지를 잃고 고생했을 당신과 가족들에게 이렇게나마 보상을 하고 싶었어요.”

“…….”

“착공은 내가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들어갔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방문해서 작업도 도왔죠. 작년에 완공되었지만, 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어떻게 선물해야 할지 고심 중이었어요. 당신과 연인이 될 줄 몰랐을 때에는 남몰래 주는 방법까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선물하게 돼서 다행이군요.”

다정은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주려고 했던 선물이 집이리라 그 누가 상상했을까.

그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계획을 했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팀장님 마음은 알겠지만…… 이렇게 큰 선물은 받을 수가 없어요.”

다정은 연이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집을 어떻게 선물로 받아요. 게다가 이렇게 크고 멋진 집을……. 이건 말도 안 돼요. 정말.”

“나도 공짜로 줄 생각은 없어요.”

그의 말에 다정의 한쪽 눈썹이 위로 둥글게 휘었다. 도훈은 나긋한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말했다.

“한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거든요.”

“조건이…… 뭔데요?”

“이 집에 관한 건 모두 당신 겁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더 큰 집으로도 만들 수 있어요. 그 대신…….”

도훈은 한 걸음 더 다가와, 그녀의 앞에 마주섰다.

밤하늘이 그대로 박힌 것처럼 깊고 눈부신 눈동자. 그 짙은 눈빛에 다정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도훈의 나지막한 음성이 반짝이는 별빛 사이로 굵게 흩어졌다.

“나도 같이 살아요.”

그의 말에 다정의 진갈색 눈망울이 커다랗게 떨렸다.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잠들고, 밥도 같이 먹고, 출퇴근도 같이 합시다. 주말에는 여행도 다니고 그렇게 살다가 예쁜 아이들도 낳아요.”

“…….”

“이왕이면 당신 닮은 아이로다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살짝 올려 보이던 도훈은 다시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넓은 어깨를 곧게 펴고, 다정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눈빛이 보다 더 강렬해지며, 뜨겁게 빛을 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다정한 남편이 되고, 듬직한 사위가 되고,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게요.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다 이루어줄게요.”

한 마디 한 마디 진중하게 전하는 그의 말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깊은 확신에 차있었다.

“날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요.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늘 당신 곁을 지켜줄게요. 그러니…….”

다정의 눈망울이 뜨겁게 젖어드는 그 순간, 도훈이 말했다.

“나랑 같이 삽시다. 한다정 씨.”

다정은 두 손으로 입술을 가로막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정의 분홍빛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달려가 도훈의 품에 안겼다.

“……좋아요.”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다정이 말했다.

“무조건 좋아요.”

***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온 자연 채광이 침실을 아늑히 채웠다.

다정이 덮고 있던 새하얀 시트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음…….”

그 순간, 그녀의 뒤에서 허리를 꼬옥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잘 잤어요?”

잘 잤냐니……. 밤새 절 재우지 않았던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양심 없는 그의 말에 다정이 기가 차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밤새 괴롭힌 덕에 아주 잘 잤지요.”

피식 하고 웃는 그의 입술에서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다정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한 시요.”

“헉, 정말요?”

깜짝 놀라며 고개를 홱 돌리는 다정.

“그럼 여태껏 계속 잠만 잔 거예요?”

주말에도 늘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진 다정으로서는 오후 한 시가 되도록 잠이 든 일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도훈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정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었다.

“밤새 누구한테 시달렸으니, 지금까지 자도 이상할 거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긴 팔을 베개 삼아 그녀의 머리를 눕혔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로 정신없이 보냈잖아요. 오늘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빈둥대도 좋을 듯싶은데.”

그의 말에 다정이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죠?”

“……딱 한 가지만 빼고요.”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아는 다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밤새 그렇게 하고 또 한다고요? 짐승도 그렇게는 안 해요.”

“사람이 짐승보다 못하면 안 되죠.”

그의 말에 다정이 찌릿 눈을 흘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지 도훈이 웃음을 터트리며, 다독이듯 말했다.

“알겠어요. 이제 안 건드릴게요.”

“그 말은 이제 못 믿겠어요. 안 지킨 전과가 워낙 많아서…….”

다정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도훈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보였다.

“장담은 못 하지만, 노력은 해볼게요.”

그렇게 둘은 침대 위에서 나른한 오후를 보냈다. 조곤조곤 낮게 수다를 떨다가, 별 거 아닌 일로 잠시 투덕거리기도 했다. 가족 이야기도 하다가, 회사 이야기도 했다. 회사 이야기가 나오면 빠질 수 없는 부문장 욕도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다정이 말했다.

“다락방 천장 위에 있는 창문 말이에요.”

도훈이 계속 말하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천장에 창문을 다는 건 흔히 쓰는 설계가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다락방 바로 옆에는 넓은 테라스까지 있는데도 말이죠.”

사실 처음에 다락방을 보았을 때부터 살짝 의아했던 부분이었다. 다정은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절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예요?”

도훈은 옅게 입매를 올리며 바로 수긍했다.

“맞아요.”

혹시나 했던 그녀의 예상이 맞자, 가슴속 깊은 곳이 뭉클해졌다. 그는 다정이 다락방에 누워있을 때도, 별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었다.

다락방뿐만이 아니었다. 다정과 다정의 가족들을 배려한 그의 세심한 설계를 집 안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선물이 담긴 프러포즈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토록 멋지고 다정한 사람을 자신이 가져도 되는 건지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혹여 이 순간이 꿈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다정은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고맙단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에게 감사했다. 도훈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뽀뽀라도 한 번 해주든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다정이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됐죠?”

그가 뜨거운 눈빛으로 다정을 응시했다.

“입술 말고.”

다정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어, 어디에 해달라는 거예요?”

“볼에 해달라고 하려 했는데,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집니까?”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다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예뻐 죽겠는지, 도훈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과 볼, 이마에 차례로 키스를 퍼부었다.

가벼웠던 입맞춤은 점점 더 농밀해지면서, 침실의 공기도 뜨거워졌다. 그녀의 쇄골과 가슴 언저리에 입을 맞추던 도훈이 낮게 읊조렸다.

“오늘도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은데.”

그리고는 그녀의 이불 속으로 깊게 들어가,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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