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22화 (22/32)
  • Chapter. 22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은 짧은 편이었다. 회사 방침에 따라 길게는 두 시간인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점심과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한신 건설 점심시간은 한 시간 반이었지만, 기획팀 사원들은 다른 팀보다 좀 더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보냈다. 기획팀의 수장인 도훈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딱 맞춰서 온다고 눈치를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내에선 식사 후, 카페에 모여 여유롭게 오후를 보내는 기획팀 팀원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오늘도 점심을 먹은 기획팀 여직원 몇몇이 로비 카페테리아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창 대화 중이던 춘희가 동그래진 눈으로 다정에게 되물었다.

    “팀장님이 집에 왔었다고? 왜?”

    생과일주스를 빨대로 쭉 들이켜던 다정이 대답했다.

    “아. 할머니 생신이셨거든요.”

    그녀의 말에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던 다섯 명의 팀원들이 동시에 입을 벌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다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표정들이 왜 그러세요?”

    “아니, 다정 씨 어머니 생신도 아니고, 할머니 생신인데 팀장님이 가셨단 말이야?”

    흥분한 춘희의 목소리에 다정이 살짝 당황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춘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웬일이야! 우리 팀장님이 마음이 급했나 보다. 이제 청첩장 돌릴 일만 남았네!”

    팀원들도 동의하며 맞장구를 쳤다.

    “애인의 가족 행사에 참여한다는 건, 백 프로 결혼 생각이 있다는 거지.”

    “맞아요. 가벼운 마음이라면 절대 그런 행동은 안 해요.”

    “축하해, 다정 씨. 이 속도면 올해 안에 결혼하는 거 아니야?”

    그녀들의 말에 다정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사래 쳤다.

    “에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팀장님이 다정 씨에게 프러포즈 안 했어?”

    “네. 안 했는데요.”

    “정말? 결혼 이야기 한 번도 나눈 적 없어?”

    ‘결혼 이야기라…….’

    다정의 머릿속에 문득 도훈이 가족들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교제 기간이 짧은 편이고, 다정 씨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조금 더 저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앞으로도 다정 씨에게 최선을 다할 겁니다.’

    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프러포즈인가?’

    비록 저한테 한 말은 아니었다만, 내용상 프러포즈와 다름없는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게다가 증손자를 보는 것이 소원이라던 길순에게 저도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할머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냥 내뱉은 말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뭇 진지해진 그녀의 표정을 읽은 춘희가 테이블 위에 손을 턱 내려놓았다. 그녀가 씨익 웃으며 호언장담했다.

    “조만간 팀장님이 프러포즈를 한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저도 걸게요.”

    “저도요.”

    옆에 있던 팀원들이 차례로 손을 올려놓으며 제 손모가지를 걸어댔다. 조그만 에스프레소 잔을 손에 들고 있는 윤 주임을 제외한 채.

    그녀는 에스프레소 원액을 여유 있게 한 모금 마시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들 손이 집에 한두 개씩 더 있나 봐? 남녀관계는 그리 쉽게 단정 짓는 게 아니야.”

    윤 주임은 살짝 조소 섞인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애인 부모님을 몇 번 뵈었다고 결혼하면, 대한민국 사람들 다 결혼했게? 요즘 젊은 커플들은 서로 부모님 뵙는 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데, 뭐.”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확 끼얹는 발언에 팀원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다정은 그녀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들 몇 번 본 것을 결혼으로 연관 짓는 건 너무 앞선 나간 생각이었다.

    ‘게다가…….’

    다정의 낯빛에 그늘이 졌다. 행복함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5개월 후면 도훈이 호주로 떠난다는 사실을. 곧 떠나게 될 그가 프러포즈를 한다고 한들, 실제로 결혼은 언제 가능할지 미정이었다.

    ‘팀장님이 호주로 떠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장거리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다정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게다가 호주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그녀가 도훈과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심하던 중, 핸드폰 문자음이 울렸다.

    다정은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애정에게서 온 문자였다.

    [곧 네 회사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을 테니까, 놀라지 마. 그리고 절대 끼어들지도 말고!]

    ‘이게 무슨 말이야?’

    앞뒤 자르고 보낸 언니의 문자 내용을 다정은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문자를 곱씹어보던 그 순간이었다.

    “여기 민세아라는 여자 어디 있어?!”

    로비 전체를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다정의 귓가에 들려왔다. 로비에 있는 직원들 모두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로비 입구 쪽에는 시선을 강탈하는 차림의 두 여자가 서있었다.

    한 명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에 털이 부한 검은색 밍크코트를 입고 있었다. 보는 사람까지 땀나게 만드는 밍크코트는 무려 종아리까지 내려와 답답함을 더했다. 지금이 5월 초임을 감안했을 때, 그녀는 추위를 몹시 타거나 아니면 정신이 조금 이상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또 한 명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머리카락은 아이돌 저리 가라 할 만큼 핫한 핑크색이었고, 호피무늬 재킷에 광이 흐르는 검은색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대략 15센티는 되어 보이는 굽은 무기처럼 보였다.

    그리고 두 여자 모두 저 정도면 앞이 안 보이지 않을까 싶은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돼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안내데스크로 걸어왔다. 평소 침착하고 상냥하기로 소문난 안내데스크 여직원이 잔뜩 겁을 먹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밍크코트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기획팀의 민세아라는 여자 당장 불러내요.”

    상대의 기를 단박에 꺾는 압도적인 아우라에 여직원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저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시고…….”

    순간 여자의 짙은 선글라스 너머 살벌한 눈빛이 느껴졌다. 울컥한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 여우 같은 계집애 때문에 이혼하게 생겼는데?!”

    옆에 있던 핑크 머리의 여자도 함께 흥분하며 맞장구를 쳤다.

    “당신 남편이 바람나도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그 여자랑 한 패 아니면 당장 불러!”

    맹수처럼 무섭게 달려드는 여자들에게 직원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을 쳤다.

    그 광경을 로비에 있는 직원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로비 카페테리아에 있던 다정과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했다.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팀원들은 월드컵 연장전을 관람하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흥미로움이 반씩 섞여있었다.

    ‘대체 누구인데 세아를 찾는 거지?’

    정체불명의 여자들이 찾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세아였기에, 다정 역시 그녀들의 존재가 궁금했다.

    선글라스에 반쯤 가려진 여자들의 얼굴과 체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정. 전혀 처음 보는 듯 생소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풍겼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발성도 분명 들어본 적이 있던 목소리였다.

    ‘서……설마…….’

    여자들을 바라보던 다정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때마침 그녀들이 그토록 찾던 사람이 로비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아는 동료들과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대는 여자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세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홱 돌리는 여자들. 사원증에 적힌 세아의 이름이 그녀들의 눈동자 안에 똑똑히 박혔다. 그 순간 여자들의 눈이 희번덕이며 매섭게 빛이 났다.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가 세아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누구? 내가 누군지 몰라서 물어?”

    “네. 몰라서 묻는데…….”

    “내가 차성욱 와이프다! 이 ***같은 년아!”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이 로비에 가득 울렸다.

    “와……와이프?”

    당황하던 세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짓은 네년이 했지!”

    밍크코트 여자는 그녀의 재킷을 확 잡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어디 꼬실 놈이 없어서, 임자 있는 놈을 꼬드겨?”

    “……!!!”

    “돈 좀 있는 남자면 유부남이든 말든 상관없다 이거야?”

    그녀의 말에 세아의 커다란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미 결혼한 차성욱이 바람을 피웠고, 그 상대가 바로 자신이라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로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눈빛 속에서 놀라움과 비난의 감정이 동시에 보였다.

    별 이야기도 아니었던 말도 사내 사람들 입에 오르면,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 퍼지고 만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도 온갖 추문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일단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애써 침착함을 찾은 세아가 당돌하게 말했다.

    “사람 잘못 찾아왔어요. 전 차성욱이란 사람과는 알지도 못한다고요.”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죽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세아의 면전에다 들이밀며 말했다.

    “그쪽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호텔을 들락날락거리나 보지?”

    세아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녀가 들이민 것은 다름 아닌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에는 세아와 성욱이 호텔 입구로 들어가는 사진이 찍혀있었다.

    “이……이건 어떻게…….”

    세아는 문득 직원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덧 주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건 어떻게 찍은 거야? 이거 초상권 침해인 거 몰라?”

    당황한 세아가 되레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들 사기꾼이지? 내가 성욱 씨한테 사실 확인해서 다 거짓이기만 해봐. 싹 다 경찰에 넘겨버릴 거야!”

    그녀가 사납게 밍크코트 여자를 몰아세우는 그 순간이었다. 옆에 있던 핑크머리 여자가 그녀의 손목을 홱 끌어 잡았다.

    세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키에 뾰족한 얼굴형, 선글라스 너머로 느껴지는 살벌한 눈빛이 지독히도 위압적인 여자였다.

    “다……당신은 뭐야?”

    “난 이 여자 언니다.”

    세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언니? 아주 친척들까지 다 부르지 그래?”

    비소 어린 그녀의 말에 여자가 붙잡은 손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이거 안 놔?”

    세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있는 힘껏 손을 빼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짜 여자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놔!”

    “…….”

    “놓으라고……요!”

    그녀의 괴력에 세아의 얼굴이 슬슬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대로라면 곧 제 손목이 부러져도 놀랍지 않을 힘이었다. 고통과 공포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잘 들어.”

    그녀는 세아를 똑바로 마주한 채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내 동생이 너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다시는 세상 구경 못 하도록 아주 자근자근 밟아버리고 싶거든?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넌 죽어도 모를 거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살벌한 기운에 세아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여자는 그녀의 손목을 더욱 꽉 쥐었다. 그녀는 세아의 귓바퀴에 대고 말했다.

    “한번만 더 남의 것에 기웃거려봐.”

    창백해진 세아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고운 얼굴 다시는 못 쓰게 만들어줄 테니 말이야.”

    ***

    삼진 그룹 대표 이사실.

    깔끔한 분위기의 사무실 가운데, 성욱이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일에 한창 집중하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님. 민세아 씨라는 분이 찾아뵙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들여보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홱 열리며 세아가 등장했다. 그녀는 달려왔는지 씩씩거리며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성욱은 당황하는 비서에게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성욱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회사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세아는 그에게 성큼 다가와 물었다.

    “왜 계속 제 전화를 안 받았어요?”

    “보다시피 바빠서.”

    “급히 물어볼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녀는 불과 한 시간 전 회사에서 있었던 소동을 성욱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낮에 회사로 어떤 이상한 여자 두 명이 찾아왔어요. 그러더니 다짜고짜 자기가 성욱 씨 아내라는 거예요. 나 참, 기도 안 차서.”

    세아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크게 내뱉었다. 흥분한 그녀와 달리, 성욱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얼굴은 자세히 못 봤지만, 체구가 크고, 검고 긴 머리였는데……. 성욱 씨는 모르는 여자죠?”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세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작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성욱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세아를 빤히 응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제 아내 맞습니다.”

    그의 말에 그대로 굳어진 세아의 얼굴.

    “……네?”

    세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당혹감에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무……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결혼도 안 한 성욱 씨한테 아내가 있다니, 말도 안 되잖아요.”

    “식만 안 올렸을 뿐, 같이 살고 있으니 사실혼 관계나 다름없죠.”

    “……놀리지 말아요.”

    “난 지금 누구 놀릴 여유가 없습니다. 보다시피 바빠서.”

    지독하리만큼 냉정한 그의 태도에 세아는 커다란 눈을 몇 번이나 껌뻑였다.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다정한 남자였다. 결혼을 약속하진 않았지만,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인 세아가 몸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저에게 숨길 수가 있어요?”

    “숨긴 적 없어요. 당신이 물어봤다면 대답했을 겁니다.”

    “설마 숨겨둔 아내가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으니 못 물어봤죠!”

    “민세아 씨는 나를 잡아서 삼진 그룹의 안주인이 될 생각만 했나 보군요.”

    “……!”

    “하지만 어쩌죠? 난 이미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는데. 혹여 내가 삼진 그룹의 사장 자리에 앉을 기회가 있다고 해도, 민세아 씨를 안주인으로 삼기에는 창피하잖습니까.”

    그의 말은 날카로운 검이 되어 세아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남자에게 이토록 모욕적인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또한 누가 자신을 이토록 비루한 취급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절망으로 가득 찬 세아의 눈빛이 그에게 향했다.

    “성욱 씨한테 나는 뭐예요?”

    “민세아 씨는 저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명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난 민세아 씨 사랑한다고 한 적 없는데.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고.”

    “그동안…… 날 가지고 놀았던 거예요?”

    “가지고 놀다니……. 민세아 씨가 데리고 놀 만한 수준이나 됩니까?”

    묻는 족족 냉정하게 받아치는 그의 말에 세아는 꽤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새까만 눈동자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자존심이 상하고, 분했다.

    “어……어떻게…….”

    입술을 꽉 깨물던 세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울분을 토해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겉으로는 멀끔한 척, 고귀한 척 다 해놓고선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냐고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세아가 되물었다.

    “뭐라고요?”

    “나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선 전혀 죄책감이 없다는 것이죠.”

    성욱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건 민세아 씨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세아의 얼굴이 분노와 비참함으로 일그러졌다.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꽉 깨문 입술은 이미 살이 찢어져 붉은 피가 맺혀있었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찬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사람 잘못 봤어요! 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다 퍼트릴 거야!”

    “마음대로 해요. 고소도 해볼 테면 하고. 하지만 그 누가 민세아 씨 말을 믿어줄지 모르겠군요.”

    엉망진창인 세아와 달리 그는 시종일관 태연하고 여유로웠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 하나 해두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아내와 그 가족들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

    “만약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민세아 씨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겁니다.”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서늘한 시선이 세아에게로 향했다.

    “그것도 평생토록.”

    ***

    한참 동안 씩씩거리며 뭐라고 퍼부어댄 세아가 사라진 후, 성욱의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서류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세아가 내내 내뱉은 표독스러운 말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와 똑같이 본색을 드러내며 막말을 퍼붓던 세아는 결국 경비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 이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성욱의 인터폰이 울렸다.

    “이사님. 이사님과 선약이 되어있다며 뵙기를 청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함을 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아.”

    성욱은 누군지 알겠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요.”

    그렇게 말한 그의 입가에는 보기 드문 미소가 번졌다. 그는 거울을 보고 제 넥타이를 만졌다. 재킷도 구겨진 곳이 없는지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옷매무시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의 안내에 따라 한 여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비서는 밖으로 나가면서까지 당황한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이사님이 정말 이 여자와 아는 사이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성욱은 제 사무실에 들어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핑크팬더도 울고 갈 만큼 선명한 핑크빛 머리에 짙은 선글라스. 길쭉한 몸을 에워싼 거친 느낌의 호피무늬 재킷.

    “꼴이 볼만하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성욱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고 민세아 회사에 쳐들어갔던 거야?”

    “웃지 말아줄래?”

    여자는 덤덤하게 말하며 가발을 벗기 시작했다.

    “그런 가발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야? 나도 좀 알려주지?”

    “제발 1절만 해줘.”

    가발에 이어 선글라스까지 벗은 여자. 선글라스 속에 감춰졌던 여자의 진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겉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멀끔한 인상을 가진 그 여자의 정체는 바로 다정의 언니 애정이었다.

    성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방금 민세아가 왔다 갔어.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더군. 이렇게 심하게 한 번 데었으니, 앞으론 적어도 임자 있는 남자만큼은 건들지 않겠지.”

    “…….”

    “추후에 나올 수 있는 상황까지 모두 대처해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의 말에 애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욱은 입가를 씩 올려 보이며 말했다.

    “내 역할은 이걸로 끝난 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애정. 그녀는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내뱉었다.

    “고마워.”

    그녀는 자신을 강렬하게 바라보는 성욱의 눈빛을 피해, 시선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당신 입장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부탁이었을 텐데.”

    성욱은 그녀와 오래전 연인 사이였다.

    애정이 스물다섯 살 때 둘은 만나 불같은 사랑을 키웠고,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애정은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결혼을 파투 냈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봤지만, 애정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성욱과 연락이 끊겼다가, 동생의 복수를 제대로 해주기 위해 애정이 먼저 그를 찾았다. 돈과 남자라면 환장하는 세아에게 성욱만큼 훌륭한 미끼도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욱은 여전히 나긋한 미소를 입가에 머문 채 말했다.

    “솔직히 5년 만에 나타나 다른 여자 좀 유혹해달라고 했을 땐 조금 황당했지. 하지만 당신에게 빚진 게 워낙 커서, 내게 이 정도 부탁은 부탁도 아니야.”

    그의 말에 눈 끝이 살짝 흔들리는 애정.

    그날의 일은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아진 줄 알았다. 하지만 성욱의 입에서 ‘빚’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애정의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모든 사람들이 애정이 결혼을 파투 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성욱이 애정에게 말했다. 자신이 없다고. 무섭다고. 도망가고 싶다고.

    애정은 그를 설득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애정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대로라면 결혼식장에 신부 홀로 서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왔다. 하지만 모든 것이 후회된다는 그와 결혼을 강행할 수도 없었다.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고심하던 예비 신부 애정은 결국 그를 대신해 결혼을 엎었다.

    그 이후로 애정은 내 인생에 결혼은 없다며 살아왔다. 그 생각은 여태까지 변함이 없었다.

    애정이 씁쓸한 얼굴로 회상에 잠겨있는 동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성욱이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

    “나 민세아라는 여자랑은 아무 일도 없었어. 호텔에 간 것도 거기 있는 레스토랑에 들른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줘.”

    그의 말에 애정은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누가 뭐래.”

    처음 그와 연락을 하고 만났을 때는, 다정의 일로 흥분한 나머지 서먹서먹한 줄도 몰랐다. 하지만 제정신으로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지금은 그가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애정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바쁠 텐데, 나 그만 가볼게.”

    그렇게 말한 그녀가 가발을 다시 주섬주섬 썼다. 한때 성욱의 약혼녀였던 애정이었기에 맨얼굴로 그의 회사를 들락날락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가발에 이어 선글라스를 낀 애정이 사무실 입구로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가라앉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사무실 가득히 울려 퍼졌다.

    “미안하다.”

    그의 굵은 음성에 애정의 걸음이 멈칫했다. 후회로 가득 찬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로 이어 들려왔다.

    “그때 난 너무 어리고, 겁쟁이였어. 내가 한 가정을 평생 동안 책임질 수 있을까? 내가 가장이 될 자격이 있을까? 내 부모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내가…… 완벽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런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에 덜컥 겁이 났어.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도망가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의 입가에 자신을 책망하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성욱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여태껏 난 단 한 순간도 널 잊은 적이 없어. 그렇게 널 보내고 후회 속에서 살았어. 차마 너에게 용서를 구할 자격도, 다시 만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했어. 그러다가 너한테 연락이 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진심 어린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나가는 그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떨려왔다.

    “너에게 난 그저 죽일 놈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애정이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야. 더는 신경 쓸 거 없어.”

    담담하게 말한 애정은 다시 사무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문손잡이를 돌리는 찰나, 성욱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

    애정이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성욱이 말했다.

    “네 부탁 들어주는 대신,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기로 했잖아.”

    아차……. 그랬지.

    애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이 뭔데?”

    성욱이 입매를 씩, 올리며 말했다.

    “나랑 같이 저녁 먹자.”

    ***

    점심시간에 일어났던 소동은 삽시간에 사내 모든 직원들의 귀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자극적인 그 소문은 이 사람 저 사람 입을 오고가며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좀 더 흥미진진해지도록 양념이 더해졌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세아는 유부남을 꼬셔낸 파렴치한 여자가 되었고, 그녀가 돈을 노리고 일부러 접근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탕비실에 모인 기획팀 팀원들 역시 세아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팀원들은 탕비실 한쪽에 앉아 너도 나도 보고 들은 이야기를 내뱉기 바빴다.

    “민세아 씨 말이야. 어떻게 유부남을 건드릴 생각을 했을까?”

    “남자 쪽이 꽤 부유했나 봐. 그래서 아예 뺏을 각오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는데?”

    “어머, 어머. 그렇게 안 봤는데…… 세아 씨 완전 무서운 사람이다~”

    “전 처음 볼 때부터 느낌이 오던데요? 딱 봐도 여시같이 생겼잖아요.”

    팀원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윤 주임이 안경을 쓱 올리며 말했다.

    “사실 이건 나만 알고 있었던 건데, 세아 씨 서현우 씨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팀원들.

    “뭐라고요? 정말로요?”

    “응. 지금은 헤어진 것 같지만.”

    윤 주임은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언제였더라. 혼자서 질질 짜고 있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와 서현우 씨, 다정 씨가 삼각관계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다정 씨가 둘 사이를 방해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 취급하던데, 알고 보니 다정 씨는 이미 팀장님이랑 알콩달콩 잘 사귀는 사이였던 거 있지?”

    윤 주임은 혀를 차며 뒷말을 이었다.

    “결국 민세아 씨 혼자 소설 쓰면서 자기가 피해자인 척, 불쌍한 척 굴었던 거였어. 난 그때 이후로 민세아 씨가 무슨 행동을 해도 다 가식적으로 보였고 말이야. 그래서 난 언젠가는 이런 일이 터질 줄 예상하고 있었어.”

    그녀의 이야기는 세아가 본래 나쁜 여자였다는 결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팀원들은 더욱더 흥분한 얼굴로 수군댔다.

    “주임님 말 들어보니, 세아 씨 정말 별로다. 겉으로는 도도한 척, 예쁜 척 다 하더니, 속은 완전 추접한 사람이었네.”

    “남직원들한테 여기저기 추파 던질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남자를 밝혀도 적당히 밝혀야지. 쪽팔리게 유부남이 뭐냐?”

    팀원들의 노골적인 뒷담화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고, 그들의 대화는 탕비실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는 다정의 귓가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점심시간에 있었던 소동을 두 눈으로 모두 목격했던 다정은 도무지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그도 그럴 것이 세아를 한순간에 파렴치한 여자로 전락시킨 두 여자가 바로 자신의 언니들이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로 보나, 체형으로 보나…… 언니들이 분명했어.’

    다정은 그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차성욱 그 사람 이야기가 나온 거지? 대체 언니들은 나 몰래 무슨 일을 꾸민 거야?’

    아무리 생각을 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언니들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집에 와서 이야기하자는 대답이 전부였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다정으로서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의 이야기에 함부로 끼지 못했고, 도훈에게조차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혹여 언니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 긴 한숨을 내쉬는 그 순간이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바로 종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화제의 인물 세아였다. 그녀는 사건이 터진 후 누군가에게 전화를 여러 번 걸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모습을 감췄던 세아가 사무실에 등장하자, 팀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성욱을 만나고 온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눈가는 퉁퉁 부어있었고, 싱그러웠던 입술은 바짝 말라있었다. 터벅터벅 맥없이 제 자리로 걸어가는 세아에게 한 대리가 말을 걸었다.

    “민세아 씨. 팀장님이 보자고 말씀하시던데.”

    “팀장님이요?”

    “그래. 아까부터 찾으셨어.”

    세아는 그제야 경황이 없어, 팀장에게 허락도 없이 근무 중 무단 외출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급히 서랍 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주위의 시선 때문에 화장을 고칠 틈도 없이 세아는 곧바로 팀장실로 향했다.

    아마 도훈은 무단 외출로 꾸짖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은 모든 팀원들은 물론, 뚝심 있는 세아 역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애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 상황에서도 상사에게 변명이나 늘어놓아야 하는 제 처지가 구슬프게만 느껴졌다.

    “똑똑.”

    노크를 한 세아는 천천히 팀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들어가자마자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매서워 보였다. 이럴 땐 먼저 지르는 게 답이다. 세아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시인했다.

    “죄송합니다. 급한 사정이 생겨서, 말씀을 못 드리고 잠시 외출을 다녀왔습니다.”

    “그 급한 사정이란 게 뭐죠?”

    도훈의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세아는 메마른 침을 넘긴 후, 말했다.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글쎄요. 민세아 씨에게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도훈이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삼진 그룹 대표이사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

    세아는 당황했다. 오늘 있었던 소란이 도훈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세아는 그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로비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물어보시는 거라면, 전 그 사람과 연인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이였을 뿐인데, 이상한 여자들이 오해를 하고 들이닥친…….”

    “그 사람이 민세아 씨 연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닙니다.”

    굵은 목소리로 말을 끊은 도훈은 강한 눈빛으로 세아를 응시했다.

    “지금 삼진 그룹에서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내가 궁금한 건 민세아 씨가 삼진 그룹 대표이사에게 기획팀에서 다룬 업무 내용을 발설했는지 여부입니다.”

    애써 힘주어 뜨고 있던 세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흐트러졌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성욱을 확실히 제 사람으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삼진 그룹이 새로운 사업으로 건설파트를 추진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성욱 씨한테 회사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초점을 잃은 세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생각해보니, 일과를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기획팀 프로젝트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세아의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을 누설한 적은 없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런 적이 있더라도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저는 그 사람에게 회사 이야기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어요.”

    “…….”

    굳게 입술을 다문 도훈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세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이 일은 내 선에서 조사하기는 힘들 것 같고, 인사 위원회로 넘길 예정입니다. 만약 민세아 씨가 차성욱 씨에게 회사 기밀사항을 조금이라도 발설한 증거가 나타난다면, 민세아 씨는 퇴사는 물론 법적 조치도 면치 못할 겁니다.”

    퇴사? 법적 조치?

    세아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지금이라도 성욱을 다시 찾아가야 하나, 초조한 마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를 다시 찾아간다 한들 문전박대를 당할 것이 뻔했다. 또다시 경비원들의 손에 이끌려 쫓겨나는 수모를 겪고 싶지는 않았다.

    ‘차성욱이 애초에 날 이용해먹을 생각으로 만난 거라면 어떡하지?’

    단박에 차갑게 변했던 그의 태도를 생각하니, 전혀 일리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토록 완벽한 남자가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할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저 외모만 믿고, 성욱 또한 여느 남자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했다는 착각에 빠졌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뒤늦게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당장은 제 살길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세아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그저 이용당한 것뿐이라고요. 전 아무 잘못도 없어요.”

    “빠른 시일 내에 인사 위원회가 열릴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죠.”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세아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팀장님은 왜 제 말을 안 믿어주시는 거예요? 저는 결백하다고요.”

    “민세아 씨라면 믿겠습니까?”

    그의 날카로운 음성이 세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상사로서 부하직원을 믿어주어야겠지만, 그간 민세아 씨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편을 들어주기가 힘들군요.”

    “팀장님. 제발 제 이야기를……!”

    “이만 나가봐요.”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딱 잘라내는 그의 태도에 세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만 떨어뜨렸다.

    사무실 한가운데 넋 나간 얼굴로 서있는 세아. 그런 그녀에게 도훈이 말했다.

    “내 말 안 들립니까?”

    끝까지 냉철한 그의 말에 세아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속이 무너져갔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때, 장밋빛일 거라고 생각했던 미래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

    팀장실 밖으로 나온 세아. 그녀가 나오자마자 기획팀 사무실 분위기는 급격히 싸해졌다. 사무실 안에 감도는 냉랭함을 느낀 세아가 분위기를 살폈다. 모두가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동정하거나, 안부를 물어주지 않았다.

    세아는 재빨리 제 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무실에서 어느 정도 권위가 있고, 은근히 마음이 약한 사람을 찾았다.

    그녀의 레이더망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윤 주임.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을 좋아하고, 눈물에도 약하다. 겉으로는 똑 부러지고 무뚝뚝해 보여도, 알고 보면 굉장히 감성이 풍부한 여자였다. 세아는 그녀의 곁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저기…… 윤 주임님.”

    세아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최대한 불쌍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윤 주임은 뾰족한 안경을 쓱, 들어 올렸다. 투명한 안경 너머로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세아 씨. 지금 업무 시간이잖아.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면 패스해줘.”

    무뚝뚝하게 말을 내던진 그녀는 곧바로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홱 돌렸다. 그녀의 냉정한 반응에 세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선가 수군대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환청인지 몰라도 비웃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섞여 들어왔다.

    세아는 고개를 돌려 사무실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여직원들은 물론 평소 호감을 표했던 남직원들조차 시선이 싸늘했다. 마치 모두가 자신을 경멸하는 것처럼 또는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세아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지금 이곳에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견디기 힘든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세아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세아는 안절부절못하며, 앞으로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오늘 로비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이제 사내에서 자신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유부남을 꾄 여자라고 대놓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더군다나 내일이면 자신이 회사 기밀사항을 유출했다는 말까지 돌지도 모른다.

    이런 자극적인 추문은 끊임없이 직원들 입에 오르내린다. 아마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는 시점까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으……!”

    세아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하고 또 분했다.

    남자 하나 잘못 만난 탓에, 탄탄대로였던 인생이 제대로 꼬였다. 잘리는 건 물론이고, 재수가 없으면 고소까지 당할지도 모른다.

    세아는 세면대를 꽉 움켜쥐었다. 서럽고 분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거야?!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왜……. 왜 나한테만!!”

    그녀는 냉혹한 운명을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

    그날 저녁. 다정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니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추궁하듯 캐물었다.

    “오늘 로비에 들이닥쳤던 거 언니들이지?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침대에 누워 얼굴에 마사지팩을 얹은 애정이 말했다.

    “무슨 일을 벌이긴, 너 대신 언니들이 민세아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줬지~”

    바로 옆에 앉아 옥수수를 먹고 있던 소정도 쩝쩝거리며 말했다.

    “너도 로비에서 민세아 얼굴 봤지? 완전 통쾌하지 않았어?”

    여유로운 그녀들과 달리 다정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로비에서 들었던 말은 다 뭐야? 세아랑 그분…… 그니까 차성욱 씨랑 무슨 사이인데? 세아가 유부남을 만났다는 건 또 뭐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못된 년 옆엔 못된 놈을 붙여놨지. 다 짜놓은 각본인지도 모르고 돈에 눈 먼 민세아는 우리 계략에 홀라당 넘어간 거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소정은 다 먹은 옥수수를 내려놓고 새 옥수수를 집으며 말했다.

    “애초에 차성욱은 유부남도 아니었지만, 이미 민세아는 직원들한테 유부남을 꼬신 여자로 낙인 찍혔겠지. 원래 큰 기업일수록 소문도 커지는 법이거든. 아마 쪽팔려서 곧 관둔다고 할지도 몰라.”

    설마 언니들이 성욱까지 끌어들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던 다정은 기가 찬 얼굴이었다.

    물론 세아가 그동안 자신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면,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종일 세아의 험담을 해대던 직원들을 보며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한순간에 밑바닥까지 떨어진 세아의 모습이 마음 한편에 걸려 다정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까지 찾아와 망신을 주는 건 너무하지 않아? 다들 세아한테 하는 행동이 180도 달라졌다고.”

    “심하긴 뭐가 심해? 너처럼 보살같이 구는 애들이 많으니까, 그런 못된 것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나대는 거야! 직원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해봐야 개과천선을 할 거 아니야?”

    소정의 말이 백번 옳다는 듯 애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해. 참고로 우리는 더한 것도 하려다가 이 정도 선에서 끝낸 거야.”

    다정은 문득 어렸을 적, 자신을 괴롭혔던 한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아빠가 없다고 놀려댄 그 녀석은 언니들에게 붙잡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맞았다. 그 사건으로 언니들은 정학을 받았고, 동네의 문제아로 낙인 찍혔다.

    그래도 언니들은 아직까지 그날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혼쭐을 내줄 걸 그랬다며 아쉬워하기까지 한다.

    언니들의 대범함과 충동성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세아 일도 이 정도로 끝이 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다정은 여전히 평온한 두 언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세아가 삼진 그룹 대표이사에게 회사 기밀사항을 유출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인사 위원회까지 열리게 생겼어.”

    그녀의 말에 애정이 마스크팩이 움직이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입을 열었다.

    “아아- 그건 걱정하지 마. 혹여 그 여자가 기밀을 나불댔다고 해도, 증거는 찾지 못할 거야. 자칫하다간 성욱 씨랑 팀장님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지. 성욱 씨가 뒷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

    “정말이야?”

    애정은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말아, 오케이 표시를 해 보였다. 다정은 한결 마음을 놓았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그분은……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이유가 뭐야? 추문으로 타격이 가장 클 사람은 그분일 거 아니야.”

    그녀가 말하는 그분은 바로 차성욱이었다. 언니의 결혼이 파투 난 후로, 차성욱이란 이름은 금기어나 다름없었기에 다정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옥수수를 뜯어 먹던 소정도 고개를 홱 돌려 애정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나도 그게 좀 궁금하다?”

    애정은 담담한 어투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나한테 여러모로 빚진 게 있어서 이렇게 갚는 거야. 그 사람 말로는 자기 평판은 더 나빠질 것도 없다면서, 그깟 추문 따위는 두렵지도 않다더라.”

    소정이 수상쩍은 눈빛을 하며 그녀를 응시했다.

    “흠. 아무리 빚이 많다 해도, 이렇게까지 도와주기는 힘든데……. 그것도 좋지 않은 추억을 나눈 사람에게 말이야.”

    그녀의 속마음을 날카롭게 파고들던 소정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 남자…… 언니에게 딴 마음 있는 거 아니야?”

    애정이 마스크팩을 확 떼며 몸을 일으켰다.

    “뭐?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어머? 그냥 해본 말인데, 왜 그렇게 당황하지? 진짜 둘 사이에 뭐가 있었던 거야??”

    “뭐가 있긴! 아무 일도 없거든!”

    마스크팩으로 환해져야 할 애정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다정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도 함께 돌렸다.

    “아무튼, 다정이 너는 민세아 일은 신경 끄고 팀장님이랑 진도나 제대로 빼.”

    소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이미 뺀 것 같은데, 뭘 더 빼?”

    그녀의 말에 다정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혼인 신고서에 도장 안 찍었잖아. 그 정도 진도는 나가야 언니들이 안심하고 두 다리 뻗고 자지.”

    “결혼은 사람을 오래 겪어보고 정해야 하는 거라고…….”

    “오래 겪어보기는 개뿔! 그사이에 제2의 민세아가 또 나타날지 어떻게 알아? 민세아보다 더한 년이 나오면 이 언니들도 감당 못 한다?”

    흥분하며 소리치는 애정의 말에 옆에 있던 소정도 목소리를 높였다.

    “팀장님 같은 사람은 더 지켜보고 말 것도 없어. 맹세컨대 그런 남자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라고. 아끼다 똥 되기 전에 얼른 네 걸로 만들어, 이것아!”

    그녀들의 거침없는 조언에 쩝, 입술을 달싹이는 다정.

    언니들의 이야기가 과하긴 해도, 전혀 일리 없는 말은 아니었다.

    ***

    날씨가 유난히 좋은 주말 아침.

    다정은 설레는 표정으로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잔잔한 꽃무늬가 새겨진 원피스에 노란색 카디건을 입고, 어깨에는 검은색 미니 크로스백을 멨다. 신발은 산책을 염두에 두고, 적당한 굽에 착용감이 좋은 구두를 신었다.

    다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 하늘에 떠다니는 몽실몽실한 구름처럼 가슴이 들떴다.

    그때, 먼 곳에서 도훈의 차가 골목길로 진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정의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다정의 집 근처에 주차된 차에서 도훈이 나왔다.

    “왜 나와 있어요? 전화한다니까.”

    “집은 답답하고, 날씨는 너무 좋아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오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다정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팀장님 기다리는 시간은 하나도 안 지루해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예쁜지 도훈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도훈은 깔끔하게 떨어지는 셔츠 위에 니트를 입고, 검은색 팬츠를 입고 있었다. 코발트 블루빛이 감도는 예쁜 색감의 니트였다. 평소와 달리 캐주얼하면서도 산뜻해 보이는 옷차림에 다정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팀장님은 어떻게 된 게 패션 센스까지 좋아요? 혹시 골라주는 사람 따로 있어요?”

    “그럴 리가. 그냥 잡히는 대로 입는 겁니다.”

    “잡히는 대로 입었는데 이렇게 멋있다는 건…….”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 건가.

    이 논리가 맞는다면 밤새도록 옷을 골라 입은 자신은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득 나름대로 꾸민다고 꾸민 제 자신이 그의 눈에 예뻐 보일지 궁금한 다정. 그녀가 수줍게 물었다.

    “저는 어때요?”

    다정은 어깨를 살짝 펴고, 원피스 끝자락을 잡고 살랑거렸다. 도훈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뜨거운 눈빛에 뒤늦게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녀를 응시하던 도훈이 말했다.

    “김태이, 송애교, 전지헌보다 더 예쁜데요.”

    다정의 몸이 저절로 배배 꼬였다. 그녀는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고,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에이~ 거짓말 말아요~”

    “물론 주관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겁니다.”

    “…….”

    이 남자가 정말.

    올라갔던 그녀의 입꼬리가 스윽 내려왔다. 다정이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가끔 팀장님은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하는 거 알아요?”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 듯, 도훈이 픽 웃었다. 그는 다정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눈에만 예뻐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에요.”

    “…….”

    “다른 남자 눈에도 이렇게 예쁘면 곤란하잖아요.”

    다정다감한 말과 눈빛에 다정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도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타요.”

    “감사해요.”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도훈도 운전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시동을 거는 도훈이 그녀를 응시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도훈이 웃음 지었다.

    “많이 들뜬 얼굴이네요.”

    “팀장님과 여행 가는 건 처음이잖아요.”

    요즘 들어 업무량이 부쩍 많아진 데다 각종 회사 행사, 가족 행사까지 겹쳐서 도훈과 사귄 이후로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오늘 여행을 다이어리에 기록한 후,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휴가를 내서라도 데려가는 거였는데.”

    들뜬 그녀의 얼굴을 보며 도훈이 말했다.

    “다음에는 휴가 맞춰서 더 먼 곳도 함께 가요.”

    “팀장님과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요.”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할 수만 있다면 매일 품에 안고 다니고 싶을 만큼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도훈은 다정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윽고, 아침부터 애정이 넘치는 둘을 태운 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3권에서 계속]

    (공금)ⓒ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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