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20화 (20/32)
  • Chapter. 20

    <도훈 이야기>

    팔다리가 끊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극심한 통증에 눈을 떴을 땐, 도훈이 타고 있던 차는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도 흘렀다. 도훈은 정신을 차리고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의 고운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엄마!”

    뒷좌석에 앉아있던 도훈은 간신히 손을 뻗어 엄마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하지만 엄마는 꼼짝도 못 했다. 구겨진 앞쪽 차체에 다리가 낀 것이었다.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안간힘을 써보아도 엄마는 움직이지를 못했다.

    “도……훈아.”

    눈조차 힘겹게 뜨던 엄마는 다급히 도훈에게 말했다.

    “어서…… 빠져나가.”

    “싫어요. 엄마랑 같이 나갈 거예요.”

    “엄마 말 들어.”

    “싫어…….”

    “어서!!!”

    엄마의 강한 목소리에 도훈은 잠시 주저하다 차에서 내리기로 했다. 옆으로 기울어진 차 안에서 열 살 소년이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엄마를 구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했다. 도훈은 힘겹게 차 문을 열고, 악착같이 빠져나갔다.

    차에서 나오니, 고속도로는 언덕 위에 있었다.

    도훈이 타고 있던 차는 사고로 펜스를 뚫고, 언덕을 굴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도훈은 찻길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깨진 차창 파편이 박힌 팔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엄마 걱정에 아픈지도 몰랐다.

    “도와주세요!!!”

    도훈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엄마가 다쳤어요!!”

    길이 너무 어두워 자신을 보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원래 이토록 박한 일이었을까.

    필사적인 요청에도, 멈추는 차들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매정하리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도훈은 원통했다.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신이 원망스러웠다.

    신도 사람들도 엄마를 구해줄 수 없다면, 악마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을 정도로 절박했다.

    ‘제발 누구든지 좋으니까…… 엄마를 구해줘.’

    그렇게 열댓 대의 차가 도훈을 지나치던 무렵이었다.

    짙은 파란색 트럭 한 대가 비상등을 켜며 속도를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갓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도훈의 옆에서 멈추었다.

    트럭 운전석에서 중년의 한 남성이 내렸다. 그는 울고 있는 도훈에게로 재빨리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그 남자가 도훈에게는 신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아니, 그 순간만큼은 신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급한 마음에 평소 똑 부러진다고 칭찬을 받았던 도훈도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차가……! 엄마가……!”

    남자는 도훈이 가리키는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옆으로 기울어진 차량에서는 회색빛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저기 엄마가 타고 있다는 말이니?”

    도훈이 울음을 삼키며 끄덕였다.

    “꼬마야. 너는 여기서 기다리렴.”

    다급하게 펜스를 넘어가는 그의 손목을 도훈이 붙잡았다.

    “저도 같이 갈래요.”

    남자는 제 손목을 붙잡은 작은 손을 다른 한쪽 손으로 꼭 어루만졌다.

    “걱정 말고 있어. 엄마는 아저씨가 꼭 구해줄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주저 없이 펜스를 뛰어 넘어갔다.

    빠르게 언덕길을 내려간 남자는 옆으로 기울어진 차량 위쪽으로 올라갔다.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도훈의 엄마를 구조하기 위해 애썼다. 도훈은 멀리서 두 손을 꼭 쥔 채로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1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지던 순간, 마침내 차에서 나오려고 하는 엄마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살았다……!!!’

    기적과도 같은 장면을 보며 도훈의 눈동자가 환희로 젖어들었다.

    ‘다행이야. 정말!’

    남자가 붙잡고 있는 엄마는 기절한 듯 몸이 축 늘어져있었다. 그가 엄마를 힘겹게 차 밖으로 끌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펑!!!!!”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에 도훈이 놀라 몸을 웅크렸다.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때엔 엄마와 남자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엄마의 차는 불길에 휩싸였고, 하늘은 검은 연기로 자욱했다.

    눈앞에서 차가 폭발해버린 충격적인 장면에 도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두 다리는 물론 심장까지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어……엄마…….”

    그 자리에서 맥없이 주저앉아버린 도훈의 뒤로 119 차량이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이 차올라서 더는 눈앞이 보이질 않았다.

    엄마의 얼굴을 본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

    장례 이틀째.

    도훈은 제게 맞지 않는 헐렁한 상복을 입고 아버지와 함께 빈소를 지켰다. 도훈의 한쪽 팔은 깁스를 하고 있었고, 한쪽 다리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도훈은 맥없는 눈빛으로 빈소에 놓인 엄마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엄마는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다시는 저 미소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왔다.

    그 순간, 멀리서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조문객들이 수다를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아이 엄마가 서른 후반이라던데,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네.”

    “아이도 열 살밖에 안 되었대요. 엄마가 눈을 제대로 감을 수나 있을지.”

    “그러게요. 그 나이면 아직 엄마가 필요한 때인데 말이죠.”

    어린 도훈의 눈에는 장례식장에 와서 떠들썩하게 구는 조문객들이 너무도 미웠다. 맛집이라도 온 것처럼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는 조문객도 있었고, 심지어 웃는 조문객들도 있었다.

    “아이 아빠가 젊고 능력 있으니까, 아마 재혼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남자 혼자 아이 키우는 건 무리가 있잖아요.”

    “아이 아빠 사업이 그렇게 잘 된다잖아요. 연 매출이 얼마라고 했더라…….”

    더는 들을 수 없었던 도훈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여자들을 매섭게 쏘아본 뒤, 성큼성큼 빈소를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 비상문을 연 도훈.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에 앉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흑…….”

    엄마의 죽음이 자신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큼 슬픈데, 사람들은 재혼 이야기나 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도 서글펐다. 그리고 그 여자들의 말대로 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까지 생겼다. 도훈은 무릎을 굽혀 앉은 채로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였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도훈은 푹 숙이고 있던 얼굴을 살짝 들었다. 인기척과 함께 분홍색 운동화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얼굴의 절반만 한 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운동화였다. 뒤이어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오빠는 왜 울고 있어?”

    도훈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소녀 한 명이 서있었다.

    작은 체구에 동그란 얼굴 그리고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양옆으로 묶었고, 헐렁한 원피스에 도톰한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도훈이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리 가.”

    하지만 소녀는 저리 가기는커녕,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소녀는 도훈의 깁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팔이 많이 아파?”

    “아니야.”

    “그럼 간호사 언니한테 엉덩이 주사 맞았구나?”

    “아니야, 누가 그런 거로 운다고.”

    “그럼 엄마한테 혼났어?”

    “…….”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의 가장 아픈 구석을 건드리는 소녀였다. 지금 도훈은 엄마에게 혼나고 싶어도, 혼낼 엄마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었다.

    ‘엄마’라는 단어를 듣자, 도훈의 눈망울이 애틋함으로 젖어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오빠네 엄마가 하늘나라로 갔어?”

    “그래…….”

    “그래서 슬픈 거야?”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그럼 안 슬퍼?

    슬슬 피곤함이 밀려와, 도훈의 미간이 구겨졌다. 문득 내가 왜 이 소녀의 장단을 맞춰주고 있나 회의감이 들었다.

    도훈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저리 가서 놀아.”

    “이 계단이 오빠 거야?”

    “…….”

    “아니잖아. 그치?”

    은근히 할 말 다 하는 이 꼬마를 쫓아 보내는 대신, 도훈은 자기가 이곳을 뜨기로 결정했다. 도훈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소녀가 그의 팔을 어루만지듯 잡았다.

    “너무 슬퍼하지 마, 오빠. 내가 책에서 봤는데 죽은 사람들은 모두 하늘의 별이 된대.”

    “…….”

    “반짝반짝 예쁜 모습으로 바뀌어서, 우리를 지켜본다고 했어. 오빠 엄마도 밤마다 볼 수 있으니까 슬퍼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까이에서 본 소녀의 눈동자는 다갈색 같기도 하고, 검은색 같기도 했다.

    현실성이 전혀 없는 소녀의 위로가 크게 와 닿지 않은 듯 도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바보야. 그건 동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잖아. 현실은 그렇지 않아.”

    “……현실은 어떤데?”

    “죽으면 못 봐.”

    도훈의 눈동자가 점차 흔들리며 젖어들었다.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거라고.”

    도훈의 머릿속에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흥얼거리던 엄마의 콧노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반겨주던 엄마의 포근한 품도, `주말 아침 엄마가 늘 만들어주었던 샌드위치도…….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할 생각에 도훈의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그 순간이었다.

    소녀의 눈망울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럼…… 우리 아빠도 영영 못 보는 거야?”

    “……뭐?”

    이윽고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 우리 아빠 없어지면 안 돼. 엉엉엉…….”

    크게 울음을 터트린 소녀를 보며 도훈은 당황했다. 그가 소녀에게 물었다.

    “너희 아빠도…… 돌아가신 거야?”

    “으응. 흑, 우리 아빠도…… 하늘나라로 갔단 말이야, 으엉.”

    “…….”

    ‘설마…….’

    소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야?”

    “흑……. 한다정.”

    “아빠 성함은?”

    “한 대자 영자야. 이름은 왜 묻는데?

    ‘한대영. 한대영이라면…….’

    도훈을 기억을 짚어보았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한대영이라는 남자는 도훈의 엄마와 같은 날 사망했다. 그가 바로 도훈의 엄마를 구하려다가 차 폭발로 엄마와 함께 사망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딸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되자, 도훈의 눈동자가 아련함으로 물들었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다정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도훈의 한마디에 다정이 훌쩍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훈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별이 돼. 그래서 밤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려고 나타나는 거야.”

    “정말?”

    “그래. 너희 아빠도…… 우리 엄마도 밤이 되면 계속 만날 수 있어.”

    “그럼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우리 아빠인 거야?”

    도훈은 애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울음을 뚝 그치고, 씩 웃어 보였다.

    “얼른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빠 만날 수 있게.”

    다정의 눈동자가 별을 담은 밤하늘처럼 초롱초롱 빛이 났다.

    해맑게 미소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도훈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젖어들었다.

    소녀는 저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아직 죽는다는 게 뭔지도 모를 만큼.

    ‘만약 내가 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이 아이까지 부모를 잃게 만들진 않았을 텐데…….’

    앞으로 아빠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할 소녀를 생각하자, 더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밀려오는 죄책감과 후회에 도훈은 차마 다정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미안해…….”

    도훈의 구슬픈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뜨거운 눈물이 그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다정이 그의 손을 잡았다.

    “왜 또 울어? 오빠.”

    “…….”

    “완전 울보 오빠네.”

    울보란 말은 생애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창피할 새도 없이 눈물이 계속 터져 나왔다.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을 오늘 다 흘려보내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그때, 다정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이거 줄 테니까 울지 마.”

    도훈은 그녀가 자신에게 건넨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고사리처럼 앙증맞은 손 안에는 반짝이는 포장지에 싸인 둥그런 물체가 있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초콜릿인데, 오빠 줄게.”

    다정은 큰 선심을 쓴다는 듯이 말했다.

    “이 쪼그만 게 300원이나 한다? 그런데 무지 맛있어. 한 번 먹으면 또 사게 돼. 먹어봐.”

    “…….”

    “누구 주지 말고, 오빠만 먹어. 알았지?”

    이어 그녀는 하얀 이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천진난만한 미소에 도훈의 눈망울에 애틋함이 번졌다. 도훈은 손을 뻗어 그녀가 건넨 초콜릿을 받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지금껏 자신이 받았던 수많은 위로 중에 가장 사랑스럽고, 따스했던 위로였다.

    ***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 후, 도훈의 가족은 호주로 이민을 갔다.

    호주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었고, 엄마와 아빠가 처음 만났던 곳이기도 했다. 도훈은 아빠와 함께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다.

    엄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도훈의 아버지는 한동안 저녁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했다. 외할머니 역시 도훈이 깊이 잠든 후면,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잠이 들곤 하셨다.

    처음엔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과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 다른 이를 걱정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통이 조금씩 무뎌질 무렵, 도훈은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특히 유난히 깊은 밤, 반짝이는 별을 볼 때마다 그녀의 생각 또한 깊어졌다.

    “그 꼬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소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보다 어렸던 그녀가 아버지를 잃고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늘 가슴 한편에 애틋한 마음을 품고, 도훈은 자신의 인생을 묵묵히 걸어 나갔다.

    도훈은 한국에서 못다 한 학창시절을 호주에서 보내게 되었다.

    동양인이라고 얕보는 시선이 싫어, 도훈은 무엇이든 남들보다 두세 배로 노력했다. 더욱 악착같이 공부하고, 운동도 꾸준히 하여 몸을 키웠다. 그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그 결과 학생들은 그를 무시하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호감을 갖게 되었다. 서양인 못지않게 날렵한 이목구비와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눈동자 그리고 무뚝뚝한 듯 매너 있는 그의 태도에 그를 흠모하는 여학생도 여럿 있었다. 우수한 성적과 바른 성품 덕분에 선생님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고등학생 때는 동양인 최초로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교 건축학과에 수석 입학.

    대학 졸업 후에는 호주에서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건설 기업에 입사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탄탄대로 인생을 걷던 어느 날.

    한국 기업과 계약 체결에 관련된 미팅을 끝낸 도훈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지도훈 씨. 보면 볼수록 탐나는 사람이네요. 우리 회사에서 함께 일해보는 거 어떻습니까?”

    그는 계약 건으로 여러 번 미팅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으로, 한국 한신 건설의 대표이사였다. 젊은 나이에 이사직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아 아마 회장의 아들이나 손주인 듯했다. 한국 대기업은 아직까지 세습 경영의 고리를 끊지 못했으니 말이었다.

    “내년부터 해외 수주를 더 강화할 예정입니다. 기획팀 팀장을 도훈 씨가 맡아주었으면 좋겠군요. 물론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죠.”

    도훈은 대표이사가 건넨 명함을 받았다. 본사 주소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도훈.

    ‘서울이라…….’

    한참 명함을 바라보던 도훈이 말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

    “도훈. 정말로 갈 거야?”

    도훈의 동료인 리건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방금 도훈이 이직한다는 소식을 들은 듯했다.

    “아무리 그쪽 보수가 높다 해도, 우리 회사만큼 좋은 환경은 아닐 거야. 한국 기업의 살인적인 업무량은 익히 들어 잘 알잖아.”

    사실 수없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설 분야에서 도훈의 회사만큼 좋은 회사도 없을뿐더러, 도훈 역시 회사 생활과 환경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건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투로 그를 말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승진도 할 텐데, 여기서 일궈낸 게 아깝지 않아?”

    “별로 아깝지 않아. 나 혼자 이뤄낸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함께 한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 회사를 떠나 한국 기업으로 간다는 건 너무 어리석은 선택이야. 앞날을 멀리 보고 신중히 생각해봐.”

    “신중히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이야.”

    도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일이야 마음먹으면 언제든 찾을 수 있지만…… 사람은 아니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동료를 향해 도훈이 씩 웃어 보였다.

    “그런 게 있어.”

    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사람.

    해맑은 미소가 태양처럼 빛이 났던 사람.

    별을 쏟아 부은 것처럼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가졌던 사람.

    매일같이 찾아오는 밤처럼, 가슴 한편에 늘 머물렀던 사람.

    그녀를 만날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한국에서 머물 시간은 대략 3년 정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낼 거라고…….

    도훈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도훈은 한국 땅을 밟았다.

    ***

    그날은 한국으로 들어온 도훈이 처음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 기획팀 사무실에 들어온 도훈은 아무도 없는 횅한 사무실을 구경 중이었다. 사무실 곳곳을 둘러보던 도훈은 창가에 기대어 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이 그의 짙은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회사가 밀집된 이곳의 아침 풍경은 굉장히 분주하고 딱딱해 보이기도 했다. 길가를 거니는 수많은 직장인들을 보며 도훈은 생각했다.

    ‘지금쯤 그녀는 대학에 다닐까? 아니면 저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어있을까…….’

    사실 무슨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를 만나서 무엇을 할 생각도,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도 없었다.

    단지, 그녀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직도 그 해맑은 미소를 간직하고 있는지…… 그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아직 서울에 있어야 할 텐데…….’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심하던 그때였다. 사무실 입구 쪽에서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은 창가에서 시선을 떼어 입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사가 다 틀린 팝송을 흥얼거리며 제 자리로 향했다.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던 그녀는 뒤늦게야 창가에 있는 도훈을 발견했다.

    “어우! 깜짝이야.”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그녀의 모습에 도훈도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커다래진 눈을 하고선 말했다.

    “누, 누구세요?”

    “저는…….”

    “아! 오늘부터 나오기로 했다는 신입이군요.”

    신입?

    맡은 직책은 팀장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신입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도훈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저보다 일찍 온 사람은 오랜만이라 조금 놀랐네요.”

    여자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말했다.

    “원래 입사 초반에는 다들 군기가 꽉 잡혀서 일찍 출근해요. 그런데 회사 생활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결국 초심을 잃고 모두 흐트러지기 마련이더라고요.”

    “전 아닙니다.”

    “네?”

    “전 그렇게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 네.”

    무뚝뚝한 대답에 여자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를 떴다. 복도 쪽으로 사라진 여자는 웬 물병 하나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창가에 서있는 도훈에게 말했다.

    “저기……. 잠시만 옆으로 비켜주실래요?”

    “?”

    “화분에 물을 주어야 해서요.”

    그녀는 도훈의 바로 뒤에 있는 화분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말에 도훈은 조금 더 옆으로 걸음을 옮겨 창가에 기대섰다.

    여자는 기다란 물병을 기울여, 자그마한 화분에 물을 주었다. 흙이 촉촉이 젖고, 이름 모를 식물의 잎사귀에 물방울이 맺혔다.

    살짝 기울인 턱선 밑으로는 다갈색 머리카락이 사르륵 내려왔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이 그녀의 뺨 위를 아른거렸다.

    도훈의 시선이 화분에 물을 주는 그녀의 모습에 고정되었다. 얼굴선은 둥그스름하고, 콧방울은 작지만 밉지 않았다. 입술은 붉고 도톰해서 작은 체리가 연상되었다.

    둘 사이의 고요한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여자가 말했다.

    “아, 이건 이전 팀장님이 두고 가신 건데, 아무도 안 챙기더라고요.”

    도훈이 별 반응이 없자, 여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분명 신입사원이 온다고 들었는데, 이 남자는 회장님만큼 어려운 기운이 느껴졌다.

    여자는 속으로 팀원들 중 누구라도 좋으니 어서 출근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자,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던지기 시작했다.

    “새로 오신다는 팀장님은 경력이 화려하다는 둥, 이사님이 직접 스카우트한 사람이라는 둥, 집안이 재벌급이라는 둥 소문이 무성한 분이에요.”

    “…….”

    “전 아무래도 좋으니, 이번 팀장님은 퇴근만 제때 시켜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작게 입술 끝을 올렸다. 초반에 저를 보고 신입이라고 불렀던 것은 정말 도훈을 신입사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는 말로 보아, 여자는 도훈이 바로 그 새로운 팀장일 거라곤 전혀 생각조차 못 하는 듯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제 소개도 안 했네요.”

    화분에 물 주기를 마친 여자가 고개를 돌려 도훈을 응시했다.

    마주 본 여자의 얼굴은 아침 햇볕처럼 밝고 온기가 넘쳐 보였다. 그녀의 주홍빛 입술이 열렸다.

    “저는 한다정이라고 해요. 입사한 지는 5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제가 선배니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그녀의 소개에 도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한……다정이라고?’

    도훈은 그제야 그녀의 재킷에 가려있던 사원증을 주시했다. 슬며시 드러난 사원증에는 한다정이라는 이름 석 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이도 얼추 맞을 것 같았고, 생김새도 과거 소녀의 모습과 비슷했다.

    저 짙은 다갈색 눈동자와 둥그런 얼굴, 풋사과처럼 생기 어린 뺨.

    다시 자세히 바라보니,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똑같았다.

    이 넓은 땅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도훈은 이 상황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소개하자마자 굳어버린 도훈을 바라보며 다정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차.

    도훈이 잠시 멍하게 풀려있던 눈빛을 바로 하며 말했다.

    “이름이 예뻐서요.”

    “흔하단 말은 들었어도…… 예쁘단 말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싫지는 않은 듯 다정의 입가가 작게 올라갔다.

    그녀가 도훈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원증이 없네요. 아직 발급 못 받은 거예요?”

    “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지도훈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여자의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갑자기 동그래졌다.

    “…….”

    “…….”

    “이름이…… 지도훈이라고요?”

    “네.”

    “혹시 새로 온다는 팀장님이…….”

    “네. 접니다.”

    새하얘졌던 그녀의 얼굴이 이내 곧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랑 비슷한 나이로 보여서 당연히 신입사원인 줄 알았어요.”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도훈은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한다정 씨.”

    도훈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내가 팀장으로 있는 동안, 칼퇴근은 보장하죠.”

    창틈으로 따스한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무려 19년 만의 재회였다.

    ***

    도훈의 시선은 언제나 다정을 쫓았다.

    처음엔 그저 그 작은 소녀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해서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힘든 시절을 보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녀는 건강하고 바른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온 듯했다.

    늘 성실하고 맡은 일에 책임을 다했고, 주위 사람들과의 교류도 원만한 편이었다.

    다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사내에서 어렵고 귀찮은 일은 늘 그녀가 도맡아서 하곤 했다. 그때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쉽게 나설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녀의 상사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다정을 도와주면 그녀만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사내에 돌 것이 분명했다.

    다정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만큼, 그녀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많아졌다.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일찍 출근한다는 것.

    주인 없는 화분에 유일하게 물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

    자판기에서 늘 이온음료를 뽑아 마신다는 것.

    웃는 모습이 여전히 예쁘다는 것.

    하나를 알아가니 둘을 알고 싶어졌고, 둘을 알고 나니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졌다.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애틋한 감정도 함께 커져갔고, 그녀의 웃는 얼굴이 자신에게 향했으면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도훈은 그녀에게 향하는 이 감정이 단순한 연민도, 추억에 젖은 마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정을 지켜보는 동안, 알고 싶지 않은 사실 또한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녀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자신은 그저 직장 상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같은 팀의 서현우라는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남자로 사내에서 꽤 인기가 많은 듯해 보였다.

    게다가 보아하니, 그 남자도 다정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들 사이에 자신이 파고들 틈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도훈은 너무 늦게 알아버린 제 감정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도훈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업무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수정이 가능하고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사람의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의 결심과는 달리 자꾸만 그녀에게 향해있는 시선이,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입술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사람의 감정은 그리 쉽게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오랜 만에 만난 다정을 이름만 듣고선 바로 알아보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어렸을 적의 이야기라 자신을 만났다는 것조차 기억 못 할 수도 있었다.

    도훈은 과거의 일을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의 다정은 늘 밝은 모습이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듯해 보였다.

    그런 다정을 보고 있자니,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녀에게 슬픈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모두 알았을 때, 그녀에게 남는 게 뭐가 있을까?

    그에겐 애틋한 추억이지만, 그녀에겐 그저 안타까운 기억일 뿐이라면?

    모든 진실을 깨닫고 나서, 저를 원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나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도훈은 망설여졌다.

    두려움이 앞서자, 솔직함이 덮어졌다.

    비겁한 변명일지 몰라도,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원망하는 모습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도훈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과거를 묻기로 결심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고,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리던 2월의 어느 날.

    도훈이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그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도훈에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제안을 승낙하고 8개월 후에 모든 일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이직을 결정하고 일주일 후.

    그날은 회식이 있는 날이었고, 밸런타인데이였다.

    도훈만 마주쳤다 하면 자신의 딸 이야기를 꺼내는 부문장은 그날도 역시 그에게 소개팅을 시켜주려고 했다. 하지만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는 도훈을 향해 부문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지 팀장, 혹시 만나는 여자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만나는 여자는 없지만…….”

    도훈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다정에게로 향했다.

    만나는 여자는 없지만, 만나고 싶은 여자는 있다.

    마음속 말을 내뱉지 못하고, 도훈은 쓴 소주를 한입에 삼켰다.

    ‘8개월 후면…… 더는 못 보는구나.’

    이곳을 떠나면 저절로 마음도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직을 결심한 이후로 그녀를 향한 마음은 더욱 애틋해져갈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말할까.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술기운이 알싸하게 퍼지자,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

    설사 그가 현우와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 해도, 떠나기 전에 이 마음을 전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도훈은 21년 전의 만남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정이 회식 장소에서 나가자, 그도 뒤따라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도훈은 다정이 어디 있는지 잠시 찾아 헤맸다. 그리고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그녀를 마주치게 되었다.

    도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했다.

    21년 전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그 이후로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재회 후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었던 이 감정까지.

    결심한 도훈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자…… 잠시만요!”

    그녀의 외침에 멈칫하는 도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거기서 들어주세요.”

    도훈은 그녀를 응시했다. 가로등 밑에 선 그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도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지켜보는 사이, 다정이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어요.”

    “…….”

    “저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습니다.”

    뭐?

    도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매번 꿈에서만 보아왔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눈과 귀를 의심했다.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공중에 흩어졌다.

    “늘 성실하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예의 있는 당신의 모습에 반했어요.”

    “…….”

    그녀의 고백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도훈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다정이 고백하는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녀는 가로등 밑에서 수줍은 얼굴로 시 낭독을 하듯 고백을 읊어나갔다.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두 뺨이 마치 인형처럼 사랑스러웠다.

    “기쁨은 공유하고, 슬픔은 함께 위로할 수 있는……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어요.”

    “…….”

    그나저나 무슨 고백을 저렇게 촌스럽게 하는 걸까.

    그녀의 고백은 70년대 연애편지에서나 나올 법한 말들뿐이었지만, 이것도 밤새도록 고민했을 그녀를 상상하니 웃음이 저절로 흘렀다.

    저 우스꽝스러운 고백도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아마도 자신은 그녀에게 단단히 빠진 것이 분명했다.

    “전 얼굴이 예쁜 편도 아니고, 애교가 많은 성격도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을 향한 진심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는 동안, 그녀의 손에 쥔 작은 상자가 도훈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초콜릿인 듯했다.

    문득 그녀의 모습에 한 소녀가 겹쳐 보였다.

    21년 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초콜릿을 내밀며 환하게 웃음 짓던 한 소녀의 모습이.

    “부족한 점이 있다면 노력할게요. 저와 함께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나가요.”

    “…….”

    “저와 사귀어 줄래요?”

    다정의 수줍은 눈빛이 그에게 향했다. 짙은 다갈색 눈망울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밤하늘처럼 빛이 났다.

    도훈은 생각했다.

    이 세상에 운명이란 게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그녀가 현우에게 고백을 했다는 것은 아직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뜻.

    하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내려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잘못된 고백을 운명으로 만들 기회를.

    그녀의 마음을 내게로 향하게 만들 기회를.

    “좋습니다. 하지만 난 비밀 연애는 싫습니다.”

    도훈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왕이면 우리, 대놓고 연애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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