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은은하게 빛을 뿜는 가로등 아래, 벚꽃 잎이 수놓은 길을 따라, 다정과 도훈이 걷고 있다.
목적지인 다정의 집이 시야에 조그맣게 들어오자, 둘은 걸음을 늦추었다.
다정은 도훈의 왼쪽 발을 흘깃 보며 물었다.
“팀장님 발목은 괜찮은 거예요?”
“검사 결과 아무 이상 없다더군요. 살짝 접질린 것뿐이니, 걱정 마요.”
“그래도 검사까지 해볼 정도였으면, 꽤 아팠던 것 같은데……. 축구하시다가 삐끗한 거예요?”
“아니요.”
“그러면요?”
도훈은 말하기가 살짝 창피한 듯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계단에서 내려오다 삐끗한 거예요.”
계단에서?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중한 성격에 운동신경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그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때, 도훈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의사에게 한다정 씨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그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슬쩍 지어 보였다. 하지만 다정은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그만큼 그는 쓰러진 자신 때문에 많이 당황하고, 걱정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다정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게 왜 당신 잘못이에요? 내가 부주의했기 때문인데.”
도훈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나저나 영양실조라니……. 내가 병명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압니까?”
“저도 놀랐어요. 쓰러진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고요.”
“의사 말로는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해서일 수도 있다던데, 맞아요?”
“다이어트를 하기는 했지만, 쓰러진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뺄 데가 어디 있다고 다이어트를 해요?”
“팀장님이 몰라서 그렇지 곳곳에 숨은 살이 얼마나 많다고요.”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기로 하죠.”
그의 마지막 말에 대화가 뚝 끊겼다.
이윽고 다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도훈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렇게 당황하면 어떡합니까.”
“…….”
“지금 당장 확인하려다 참은 건데.”
그와 잠시 멀어져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그는 이런 짓궂은 말을 얼굴 색 하나 안 변하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정의 두 볼이 더욱 빨갛게 달아오르는 사이, 둘은 어느새 다정의 집 바로 앞에 도착했다.
그녀를 마주 보고 선 도훈이 말했다.
“들어가요. 난 회식장소에 들렀다 갈게요.”
“팀장님도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종일 뛰어다니셨으면서.”
“명색이 팀장인데 얼굴은 비치고 가야죠.”
도훈은 현관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얼른 들어가요.”
“네.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히 운전하시고요.”
맑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는 도훈.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다정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잘 쉬고, 잘 먹어서 얼른 나아요. 그래야…….”
그래야…… 뭐?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도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뒷말은 말 안 해도 알죠?’라는 눈빛으로.
뒤늦게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도훈은 고개를 기울여, 그런 다정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그의 입술에선 나직한 음성도 함께 흘러나왔다.
“전화할게요.”
도훈은 걸음을 뒤로 옮기며, 그녀를 향해 씩, 입가를 올려 보였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다정.
벅차오르는 감정에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두 볼이 봄을 품은 벚꽃 색으로 물들었다.
***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연 다정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 한쪽에 앉아있던 길순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홱 쓰며 말했다.
“잠바도 없이 그렇게 갔다 온 겨? 녀석아, 멋 부리다가 얼어 죽어~!”
“할머니. 이제 봄이에요. 이렇게 다녀도 안 얼어 죽어요.”
“그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우짜려고~”
오늘도 어김없이 손녀의 옷차림을 못마땅해하는 할머니에 이어, 봉해가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할머니 말씀이 옳아. 이런 날씨에 감기가 더 잘 걸리는 거야.”
그들의 잔소리에 다정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2층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방금 막 방에서 나온 언니들이 물었다.
“일찍 왔네?”
“오늘 체육대회라면서? 회식 안 했어?”
가족들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 아팠다는 말 대신 다른 핑계를 댔다.
“피곤하기도 하고, 회식에 꼭 참여 안 해도 돼서…… 일찍 왔어.”
언니들이 살짝 피곤해 보이는 다정의 안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 얼른 들어가 쉬어.”
도훈과 헤어졌다고 말한 이후로 가족들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늘 짓궂게 다정을 놀리던 언니들도 잠잠해졌고, 엄마의 잔소리도 많이 줄어들었다. 가족들 모두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닦달하지 않는 가족들의 모습이 내심 좋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도훈의 어엿한 애인이 된 지금, 가족들이 더는 오해할 일이 없도록 진실을 말해야만 했다.
“저기…….”
다정의 작은 목소리에도 가족들이 크게 반응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다정은 순식간에 자신에게 집중된 가족들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도훈과 다시 만난다고 하면 모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마 엄청나게 좋아하겠지. 그리고 나선…….’
그리고 나선 다시 도훈과의 연애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훈수를 둘 것이다. 이러고 출근을 할 거냐는 둥, 도훈을 집에 데리고 오라는 둥, 언제 결혼 날짜를 잡을 거냐는 둥……. 온 가족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훈의 이야기로 귀를 아프게 만들 것이었다.
그 악몽 같은 시간이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지는 다정. 동생의 안색이 좋지 않자, 애정이 물었다.
“왜 그래?”
“…….”
“무슨 말 하려는 거 아니었어?”
다정은 고심 끝에 도훈과의 열애 사실을 털어놓는 것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서둘러 다시 방으로 올라가는 다정.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애정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쟤가 또 저러네.”
애정이 안타까운 눈빛을 한 채로 말했다.
“팀장님이랑 헤어진 후부턴 늘 반쯤 넋을 놓고 다니는 것 같아.”
옆에 있던 소정 역시 눈물을 훔쳤다.
“불쌍한 우리 막내……. 하필 남자를 만나도 그런 놈을 만나서는…….”
글썽거리던 소정의 눈망울은 곧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그 남자 내 눈 앞에 보이기만 해봐. 아주 가만 안 둘 거야!”
그 시각, 다정은 제 방 침대에 누워, 앞으로 도훈과 함께할 핑크빛 나날들을 꿈꾸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언니들이 언젠가 마주칠 그를 위해 칼을 갈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
이틀이 지나고 난 월요일 아침.
화사한 색감의 블라우스를 입은 다정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처럼 다시 일찍 출근한 그녀를 반기는 건 역시나 사무실에 혼자 있는 도훈이었다.
창가에 서있던 그가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옅게 미소 짓는 도훈.
“이제야 일찍 오는군.”
햇빛보다 더 눈부신 그의 미소에 다정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차분한 컬러의 슈트에 세련된 타이를 맨 그는 오늘도 여전히 모델처럼 근사했다. 도훈이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주말 동안 푹 쉬었더니,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아요. 당신 또 쓰러지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못할 것 같으니까.”
“후훗. 그럼 저 일 안 하고 농땡이 쳐도 돼요?”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좋아요. 이번 주에 제출해야 할 보고서는 내가 대신 하죠.”
“농담으로 한 이야기인데, 그러게 진지하게 나오시면 어떡해요? 게다가 저만 봐주면 팀원들이 권력 남용이라고 욕한다고요.”
“권력 남용 좀 하면 어때요. 애인이 아프다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애인’이라는 단어가 설레면서도 낯간지럽게 느껴져 다정의 입술이 저절로 씰룩거렸다. 이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정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
“회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흘깃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도 올 낌새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정이 그에게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또 정확히 짚고 넘어갈 사안이라서 물어볼게요.”
사뭇 진지해진 그녀의 눈빛에 도훈의 눈매도 함께 가늘어졌다. 다정은 강하게 그를 응시한 채로 말했다.
“이제 우리 정말 연인 사이인 거 맞죠?”
그녀의 말에 잠시 분위기가 고요해졌다가, 도훈의 풋, 하고 터진 웃음소리에 정적이 깨졌다.
“겨우 그 질문을 하려고,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한 겁니까?
“웃지 마세요. 저에겐 중요한 문제라고요.”
다정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번 연수원 사건처럼 제가 팀장님 마음을 오해하는 일을 방지하려면,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도훈은 조곤조곤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게다가…… 팀장님같이 멋진 사람이 제 애인이라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래요.”
“…….”
“제 마음이 불안하지 않게, 팀장님께 제대로 확인받고 싶어요.”
다정은 수줍으면서도, 용기에 찬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도훈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걸음을 떼어, 다정에게 다가갔다. 이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면, 절대 이런 짓은 못 하죠.”
“…….”
“그리고…….”
도훈이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기울였다. 책상에 기대 서있던 다정은 뒤로 물러서지 못하고, 다가온 그의 몸과 밀착되었다. 붉어진 귓불 근처로 그의 음성이 나직하게 울렸다.
“이런 짓도 못 하고.”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도훈의 입술. 그윽한 눈빛과 은은한 향기에 매료되어, 눈을 살포시 감을 뻔……했던 다정이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급히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당황한 다정은 사무실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아직 출근한 직원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녀는 다그치듯 도훈에게 말했다.
“팀장님, 여긴 사무실이에요.”
“확인받고 싶다면서요?”
“이런 식으로 받으려 했던 게 아니라고요.”
다정은 그의 대담성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팀원들이 오기 전에 팀장님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사무실 밖 복도를 살피던 다정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연애는 남들에게 비밀로 했으면 해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정은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팀장님과 공개연애를 하면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부담스러운 면이 더 많았어요. 응원해주시는 팀원들도 있는 반면에,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 팀원들도 많았죠. 아무래도 팀장님은 상사이다 보니 더욱 그랬을 거예요.”
잠시 고심하던 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다정 씨 뜻이 정 그렇다면, 사내에선 우리 관계를 비밀로 하죠.”
“그리고 저희 집 식구들에게도요.”
“다정 씨 가족들에게도 말입니까?”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족들은 제 연애사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문제는 그 관심이 지나치다는 거죠. 팀장님과 교제한다고 했던 이후로, 제가 언니들에게 얼마나 많은 간섭을 받았는지 팀장님은 모를 거예요.”
“……그렇게 심했습니까?”
“네. 또다시 그 악몽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언니들이 팀장님을 귀찮게 할지도 모르고요.”
다정은 또렷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 관계를 영원히 비밀로 하자는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가족들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을 날이 오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최대한 노력해보죠.”
“고마워요.”
다정은 나긋하게 웃어 보인 후, 그에게 물었다.
“팀장님은 제게 바라는 거 없어요?”
도훈의 그윽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말하면 다 들어줄 겁니까?”
그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살짝 당황하는 다정.
“이, 일단 들어보고요.”
“그런 게 어딨어요?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들어줬는데.”
“…….”
다정이 마지못해 말했다.
“알겠어요. 팀장님이 바라는 게 뭔데요?”
왠지 수위 높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에 그녀의 얼굴은 미리 빨개졌다.
나름 각오하고 그의 말을 기다리는 다정.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도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예요.”
“…….”
그의 눈빛이 점점 더 그윽해지자, 다정은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아프지 말아요. 몸 관리 잘하고, 다이어트 같은 거 절대 하지 말고.”
“…….”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히 예쁘니까.”
도훈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죠?”
“그게…… 다예요?”
“그럼요. 이보다 더 중요한 바람이 어디 있다고.”
예상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오히려 다정은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도훈의 입가에는 어느새 웃음이 번졌다. 그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럽니까? 대체 무슨 말을 기대했기에.”
“제 얼굴이 어때서요?”
“홍당무 되었어요.”
“놀리지 말아요. 정말.”
그때, 복도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팀원들이 하나둘씩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에, 얼른 제 자리로 가려는 다정. 도훈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한다정 씨.”
다정이 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도훈이 말했다.
“다음 달 첫 주, 주말에 시간 낼 수 있어요?”
“……네. 아마도요.”
“그럼 나랑 여행 갑시다.”
“어디로요?”
“가까운 곳도 좋고.”
그는 옅은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먼 곳이면 더 좋고.”
***
점심을 먹은 다정이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도훈과 오해를 푼 이후로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다. 축 처져있던 눈매는 또렷해졌고, 우울했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걸음걸이조차 가벼웠다.
평소 즐겨 먹던 이온 음료를 마시려고 휴게실에 도착한 다정. 그녀는 휴게실 안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주춤했다.
‘현우 씨……?’
휴게실 안에 홀로 앉아있는 사람은 바로 현우였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다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정은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캔을 뽑은 뒤, 한쪽에 앉아있는 현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음료수를 건네었다.
“이거 마셔요, 현우 씨.”
현우는 음료수를 받으며 물었다.
“웬 음료수예요?”
“현우 씨에게 항상 받기만 했던 것 같아서……. 저도 한 번은 쏘고 싶었어요. 그래봤자 음료수지만.”
“차놓고 보니 막상 미안해져서 주는 선물인 거죠?”
그는 농담 섞인 어투로 말하며 웃어 보였지만, 다정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현우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늘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의 미소가 오늘따라 안쓰러워 보였다. 다정의 눈매 끝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저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그가 종종 자신에게 음료수를 건넬 때도, 언제나 나긋하게 아침 인사를 할 때도 그 모든 게 자신에게만 향하는 일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현우는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다정에게 말했다.
“몸은 이제 괜찮아요?”
“네.”
“다행이네요.”
현우는 그녀가 준 음료수를 매만지며 말했다.
“팀장님이랑 다시 잘된 거죠?”
다정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현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표정만 봐도 알겠는걸요. 얼굴에 다 드러나요.”
“정말요?”
“네. 얼굴에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쓰여 있는걸요.”
그의 말에 민망했는지 다정의 두 볼이 천천히 붉어졌다.
다정은 현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팀장님께 들었어요. 그날, 병원에서…… 현우 씨가 도와주고 싶다고 이야기했다면서요.”
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와 팀장님을 도와주려고 했던 거예요?”
현우는 말없이 음료수를 만지작거렸다. 꾹 다물고 있던 그의 입술이 열리면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실 난…… 다정 씨가 팀장님이랑 헤어졌을 때, 절대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치사한 방법일지 몰라도, 다정 씨가 팀장님 때문에 슬퍼하고 외로워할 때 곁에 있어주면 저절로 나에게 마음을 열 거라 기대했어요.”
그는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토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괴로워하는 다정 씨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 또한 힘겨워졌어요. 어떻게든 다정 씨를 행복하게 하고 싶었는데,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내가 한때 좋아했던 다정 씨의 미소를 되찾으려면, 내가 아닌 팀장님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죠.”
“…….”
“하지만 팀장님은 이유가 무엇이든 다정 씨를 배반했던 사람이고, 그런 남자를 다시 다정 씨 곁에 둘 수는 없었어요. 그러던 중 체육대회가 열렸고, 그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체육대회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정은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체육대회 때 현우의 마음이 단박에 바뀔 만한 사건은 없었다.
현우가 물었다.
“다정 씨가 쓰러졌을 때, 가장 빨리 다정 씨에게 도착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그의 물음에 살짝 커지는 다정의 눈망울. 현우가 제 물음에 답했다.
“바로 팀장님이에요.”
“…….”
“사실 팀장님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제일 먼저 도착했어요. 그 말은 줄곧 다정 씨를 지켜봤다는 뜻이기도 하죠.”
“…….”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다정 씨를 병원에 데리고 온 사람도, 누워있는 다정 씨 곁을 계속 지켰던 사람도 바로 팀장님이고요.”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라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모두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정의 눈망울엔 애틋함이 번졌다.
“뒤늦게 병원에 도착한 난 응급실 한편에 묵묵히 앉아있는 팀장님을 보게 되었어요. 팀장님은 누워있는 다정 씨 얼굴에서 시선을 한 번도 떼지 못하더라고요.”
“…….”
“그때 그 눈빛은…… 단지 다정 씨를 좋아한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었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 크기를 매길 수 있다면, 내 감정은 팀장님에게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걸 그날 깨달았죠.”
시선을 내린 채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현우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전 결심했죠. 이토록 서로를 애타게 좋아하면서도, 바보짓을 하고 있는 커플을 구원해주자고.”
그 말과 함께 현우는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다정은 한쪽 가슴이 크게 울렸다. 병원에서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평생 오해를 풀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내게 정말 고마우면, 팀장님이랑 싸우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해요.”
다정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정 씨를 향한 마음의 크기가 작았던 모양이에요. 딴 남자에게 양보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밖에 안 되었던 거죠.”
‘아니면…… 그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거나.’
현우는 뒷말을 삼킨 채, 입술 끝을 애써 올려 보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게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평소대로 대해줘요.”
다정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현우 씨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요.”
그녀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현우가 냉큼 먼저 말했다.
“팀장님과 연애하는 거 비밀로 해달라고요?”
“어떻게 알았어요?”
“말했잖아요. 다정 씨는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사내연애가 좋지만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다정한 눈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다정의 눈망울이 짙어졌다.
한때는 저 미소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온종일 행복했던 적이 있었다. 그와 말 한마디 나누는 것이 일상의 가장 큰 행복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보면 가슴이 설레기보다는,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랐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게 되었다.
다정이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 자꾸 고마워요? 난 딱히 잘해준 것도 없는데.”
“현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분명 현우 씨만큼 다정하고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현우는 씩 웃어 보였다.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래요. 전 옥상에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갈게요.”
그렇게 말하는 현우를 남겨둔 채, 다정은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현우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줄곧 따스하게 웃었던 그의 눈가에 애틋함이 물들었다. 맨 처음 그녀를 만난 날이 느릿하게 스쳐지나갔다.
‘안녕하세요. 한다정이라고 합니다.’
짙은 다갈색 눈동자와 맑았던 목소리.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자신을 향해 수줍게 미소 짓던 얼굴.
그 얼굴이 눈앞에 계속 맴돌아 잠 못 이루었던 나날들이 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마냥 좋아, 넋을 잃고 보았던 순간들이 있었다.
분명 그건…… 사랑이었다.
햇살처럼 눈부셨지만, 겨울비처럼 가슴 시렸던 짝사랑이 비로소 끝이 났다.
현우는 씁쓸한 눈빛으로 그녀가 준 음료수를 내려다보았다. 자조 섞인 한숨과 함께 그의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휴우……. 나 진짜 바보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