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는 다정의 모습에 가족들이 현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온몸에서 짙은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애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 술 냄새~! 술통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옆에 있던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적당히 마시지,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그냥 마시다 보니까.”
다정은 축 처진 몸을 이끌고 거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피곤해서 바로 잘게요.”
계단 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양옆으로 애정과 소정이 붙으며 말했다.
“팀장님이 데려다 줬어?”
“…….”
“집까지 왔으면 잠깐 차라도 마시라고 하지 그래?”
“…….”
“팀장님이랑 아직도 화해 안 한 거야?”
“…….”
“별일 아니면 그냥 네가 좋게, 좋게 넘어가 줘. 원래 남자들이 눈치 없는 행동을 할 때가 간혹…….”
“제발 그만 좀 해!”
다정이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언니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 팀장님이랑 헤어졌어.”
“?!”
“이미 다 끝났다고!”
그녀의 울분 가득한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내버려둬.”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틈만 나면 자신과 도훈의 이야기를 속닥거리는 회사 직원들에게도 내뱉고 싶은 말이었다.
사귀는 기간이 짧았기에, 이별의 여파도 짧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다정의 큰 착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자꾸 도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토록 힘겨울 줄 몰랐다.
울부짖다시피 소리친 다정이 성큼성큼 제 방으로 올라갔다.
쾅! 다정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며 가족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다정이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팀원들이 그녀에게 와르르 몰려들었다. 안 그래도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다들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다정 씨. 어제 회식 때 진짜 멋졌어.”
“부문장님 표정 보고 우리 모두 통쾌해 죽는 줄 알았어!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었다니까!”
“다정 씨, 정말 다시 봤어요. 오늘부터 나 다정 씨 팬 하려고요~”
어젯밤 다정이 부문장에게 했던 행동은 사원들에게 놀라움과 함께 통쾌함을 선사했다. 사원들은 그녀의 용기를 높이 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부문장에게 가장 많이 시달렸던 신입 여사원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다정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선배님. 제가 늘 부문장님께 외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셔서.”
“아니에요, 소윤 씨. 나야말로 언젠가 꼭 하려고 했던 말이었는걸요.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었죠.”
그녀의 말에 신입 여사원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젖어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춘희가 다정에게 물었다.
“나도 정말 놀랐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났어?”
“누가 그랬거든요. 할 말은 하고 살라고. 안 그러면 평생 당하고 산다고.”
“…….”
그녀의 말에 춘희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말하는 그 누구는 바로 도훈을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다정 역시 자신도 모르게 도훈의 이야기를 한 것이 낯간지러웠는지, 말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후로도 한참 동안 팀원들은 부문장과 다정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다가, 도훈이 아침 조회를 시작하고 나서야 수다를 멈추었다.
다정은 사원들의 말에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단 하루 만에 자신을 추켜세우는 분위기가 조금은 부담스럽게도 느껴졌다.
***
그날 밤 저녁.
다정의 집.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다정의 방 문이 슬며시 열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배꼼 방 안을 들여다보는 애정과 소정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굉장히 조심스러운 그녀들이었다.
“다정아. 자?”
방 안을 살피던 그녀들의 시야 안으로 침대에 엎드려 있는 다정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는 거야?”
“아니, 안 자.”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온 두 자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미안해, 다정아. 그동안 우린 팀장님이랑 싸운 줄만 알고…….”
어젯밤 다정의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그녀들은 내내 어떻게 동생의 마음을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
다정은 아무 말 없이 누워있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애잔해지는 언니들이었다. 언니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마디씩 이어나갔다.
“팀장님이랑은…… 정말 완전히 끝난 거야? 헤어진 지는 얼마나 된 거야?”
“팀장님은 널 좋아하는 걸로 보였는데? 대체 왜…….”
두 자매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에게 보여준 도훈의 모습은 정말 다정을 많이 아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두 자매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설마…… 딴 여자 생긴 거니?”
그녀들이 아는 선에선 연인관계가 이토록 단박에 무너질 계기는 여자 문제밖에 없었다. 불안한 예감이 제발 정답이 아니기를 바라며 두 자매는 다정의 대답을 기다렸다.
“…….”
다정이 침묵하자, 두 자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맞네……. 맞어…….”
여자 문제였다니…….
도훈을 좋게 봤던 만큼 실망감은 컸고, 실망감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애정과 소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곧 이어 그녀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얼굴 번지르르한 놈들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
애정은 속상한 마음에 다그치듯 말했다.
“지지배…….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으면, 우리한테라도 말을 했어야지! 왜 혼자 속앓이를 해?”
다정이 침대에서 홱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몰라서 물어? 언니들은 내가 헤어졌다고 하면, 무작정 팀장님께 매달리라고 할 사람들이잖아.”
“어머머! 너 언니들을 뭐로 보고! 아무리 우리 집에 남자가 궁했어도, 여자 문제 있는 놈은 우리 쪽에서 사양이거든!”
두 자매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됐어. 잘 헤어졌어! 솔직히 말해서 다정이 네가 훨씬 아까웠어!”
“그래, 맞어! 넌 나이도 어리고, 또……. 아무튼 네가 백 배, 천 배 아까웠어!”
마치 자신들이 실연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들은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한참 동안 도훈의 욕을 해대던 언니들은 침대로 다가와 다정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된 거 다정이 너도 결혼하지 마!”
“그래! 남자한테 엮이면 고생길 시작이야! 그냥 우리끼리 오순도순 살자.”
다정은 헤어진 저보다 더 울상인 언니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더 잘난 사람은 도훈인데, 유일하게 내가 아깝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내가 가장 힘들 때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
내게 무슨 일이 있든 결국 곁에 남는 사람들.
문득 이런 게 가족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은 열을 내는 언니들의 모습이 애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했다.
언니들의 위로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질 않았다.
다정은 눈물을 삼키고 언니들을 끌어안았다.
그날, 세 자매는 간만에 싸움 없이 대화의 꽃을 피우며 밤을 지새웠다.
***
떨어진 벚꽃 잎이 길가를 분홍빛으로 수놓은 어느 아침.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은 다정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발에는 평소 즐겨 신던 검은색 구두가 아닌 새하얀 운동화가 신겨있었다. 옷차림 역시 단정한 블라우스가 아닌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신발 끈을 꼼꼼하게 묶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뒤에서 봉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아침 안 먹고 가려고?”
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듯 봉해의 눈매가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오늘 체육대회라면서. 가서 힘쓰려면 뭐라도 좀 먹고 가.”
“별로 생각 없어요.”
“다이어트도 어느 정도 먹으면서 해야지!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생각 없다니까요.”
다정은 짤막하게 대답한 후, 현관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미 그녀가 사라진 현관 쪽을 바라보며 봉해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휴.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것도 아니고…… 요즘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2층 계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이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다정이 저러는 거 다 팀장님 때문이잖아.”
그녀는 생각할수록 분한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우리 다정이는 저 꼴로 만들어놓고, 그 남자는 새 여자랑 희희낙락하면서 잘 지낼 거 생각하니 열 받아 죽겠네!”
“조용히 해. 엄마가 듣겠어. 여자 때문에 헤어진 건 우리만 알고 있게.”
옆에 있던 애정이 침착하라며 그녀를 다독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 역시 속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
애정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이어 말했다.
“우리 집에 와서 했던 말이나, 눈빛을 보면…… 정말 다정이를 끔찍하게도 아낀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정말 못된 놈이라는 거지! 겉과 속이 다른 사기꾼 같은 놈이라는 거잖아.”
다혈질인 소정은 어느새 얼굴 전체를 넘어서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씨. 그 남자 내 눈에 띄기만 해봐.”
“눈에 띄면 어쩌려고?”
“다정이 성격에 분명 별말도 못 하고 끝냈겠지. 내가 다정이 대신해서 아주 독하게 퍼부어 줄 테야!”
그렇게 말하며 소정은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소정의 평소 성격을 아는 애정은 절대 그녀의 앞에 도훈이 나타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
오늘은 회사 체육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행사는 잠실 종합운동장 보조 경기장과 실내 체육관을 빌려 진행했다.
뜨거운 햇빛을 가리는 천막 아래 기획팀 팀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음료와 다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거나, 경기 중인 팀원들을 응원했다.
오후 2시.
체육대회가 한창 계속될 무렵, 여직원들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쏠려있었다. 그녀들의 반짝이는 시선 끝에는 바로 기술팀과 축구 시합 중인 도훈이 있었다.
연예인들도 쉽게 소화하기 힘들다는 형광 빛의 유니폼도 그의 외모를 깎아내리진 못했다. 촌스러운 팀복을 입고도 그는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뛸 때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는 머리카락과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는 그의 남성미를 더욱 돋우는 역할을 했다. 그를 바라보는 여직원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팀장님 너무 멋지다…….”
“꼭 스포츠 영화 찍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외모도 외모였지만, 여직원들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녀들은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1년 전 체육대회 날 있었던 사건을.
작년 체육대회는 무척 더운 날씨에 열렸다.
도훈은 작년에도 역시 주전 선수로 축구 시합에 나가 맹활약을 했다. 한창 경기를 하던 도훈은 더웠는지 시합 도중 팀복을 벗어던졌고, 주위에 있던 여직원들은 물론 남직원들까지 그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동안 슈트 속에 꽁꽁 감춰져있던 그의 상체를 본 여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땀에 젖은 티셔츠는 맨 몸을 보는 것보다 더 섹시하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며 여직원들은 체육대회가 매일 열렸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 장면을 놓친 여직원들 역시 다음 체육대회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체육대회 날이 찾아왔고, 여직원들은 행여 놓칠까 자리를 뜨지 않고 도훈을 계속 주시했다.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이윽고 그가 팀복으로 손을 가져가자, 여직원들의 동공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어머. 드디어 벗으려나 봐.”
여직원들이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훈은 팀복을 거침없이 벗어, 한쪽으로 던졌다.
‘이럴 수가…….’
그의 모습에 모두 낯빛이 어두워졌다.
칼라 티 안에는 티셔츠 하나가 더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의 눈동자에 커다란 실망감이 내려앉았다.
“어쩐지 너무 거침없이 벗어던지더라.”
실망했던 것도 잠시, 여직원들은 다시 눈을 반짝이며 도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티셔츠 하나만 입고 뛰는 그의 모습은 그것대로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하얀색 티셔츠 안으로 넓은 가슴과 탄탄한 몸매가 은근하게 드러났다. 직접 보는 것보다 은근히 보이는 것이 왠지 더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티셔츠가 땀으로 젖어들 때마다 근육은 더욱 선명해졌다.
“햇살이 더 뜨거워졌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남은 티셔츠도 벗지 않을까요?”
동화책 <해와 바람>처럼 그가 뜨거운 햇볕을 못 이기고, 옷을 내던지기를 내심 고대해보는 여직원들.
하지만 햇볕이 점점 더 뜨거워지자, 엉뚱한 사람이 티셔츠를 홀라당 벗었다. 평소 만삭 임산부와 같은 배 사이즈를 자랑하는 한 대리였다. 한 대리의 파격적인 노출에 여직원들은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반전 경기를 종료하는 휘슬이 울렸다. 휘슬 소리를 들은 여직원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반전 끝났나 보다. 음료수라도 갖다 드리자.”
너도나도 음료수를 챙겨들고 고생한 팀원들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물론 도훈의 주위에 가장 많은 여직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세아도 끼어있었다.
다정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춘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정 씨. 어디 아파?”
먼 곳을 멍하니 주시하던 다정이 고개를 돌렸다.
“네?”
“아니.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춘희의 말대로 그녀의 낯빛은 평소보다 새하얬고,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다정은 땀이 맺힌 이마를 스윽 닦으며 말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그래? 몸이 안 좋으면 팀장님께 이야기해서 조퇴하는 게 어때?”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설사 조퇴할 정도로 아프다고 해도, 지금은 도훈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한 손에 음료수를 들고 천막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본 다정. 그녀가 춘희에게 물었다.
“지금 실내 체육관 쪽에서는 무슨 종목 해요?”
“2인 3각 달리기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온 팀 여직원들이 여기에만 모여 있으니, 거긴 휑할 거야.”
“그럼 저라도 가서 응원하고 올게요.”
“혼자서?”
“아무도 응원하지 않으면 쓸쓸할 거 아니에요.”
“그래. 거기가 실내라서 더 시원할 거야. 다녀와.”
다정은 음료수 몇 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막에서 꽤 멀리 떨어진 실내 체육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정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더운 숨이 빠르게 차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몸이 천근만근 같았다.
‘이상하다…….’
운동장을 지나가던 다정의 걸음이 갑자기 느려지며 이내 멈춰 섰다. 그녀는 괴로운 듯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왜 이렇게 어지럽지……?’
핑그르르 도는 느낌과 함께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눈앞이 새하얘졌다가, 순식간에 깜깜해지는 그때였다.
털썩!!
비틀거리던 다정의 몸이 힘없이 운동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축 내려앉은 그녀의 눈꺼풀은 올라가지를 못했다.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찬 그 순간이었다.
뒷목과 허벅지 쪽으로 커다란 손길이 닿으며, 운동장 바닥에서 그녀의 몸이 천천히 떨어졌다. 공중으로 떠오른 몸은 이내 곧 넓고 따뜻한 품 안에 안겼다.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듯 조심스럽고 따스했다.
뺨에 닿는 널찍한 가슴과 코끝에 닿는 향기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다정은 좀처럼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렸다.
반쯤 뜬 시야 안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요 며칠 현실과 꿈에서 계속 마주치며 자신을 괴롭혔던 남자.
보려고 하지 않아도, 어느샌가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남자…….
남자의 얼굴을 본 다정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
다정은 꿈을 꾸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꿈을.
그리고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는 꿈을.
그 꿈에서 다정은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부드러운 손길을.
애틋하고 따뜻한 눈빛을.
결코 얕지 않은 진심 어린 마음을.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따스함이 좋아서, 다정은 오랫동안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꿈 속에 갇혀있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옅은 소음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베이지색 천장과 하얀 커튼이 보였다.
고개를 스윽 옆으로 돌리자, 낯익은 실루엣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팀……장님?’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어? 일어났어요?”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오는 실루엣의 정체는 바로 현우였다.
‘……현우 씨구나.’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사람도, 여태껏 자신의 곁에 머물렀던 사람도 현우였다는 것을 깨닫자 왠지 모를 씁쓸함이 가슴 한편에 사무쳤다. 다정이 누운 침대로 온 현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다정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팔에는 링거바늘이 꽂혀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체육대회 도중 다정 씨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의사 말로는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 증상이라고 하더군요.”
“영양실조요?”
“아니, 60년대도 아니고 영양실조가 뭐예요? 혹시 다이어트 중인 거예요?”
“…….”
한동안 끼니를 자주 거르고 음료수 등으로 대충 때워서 탈이 난 모양이었다.
다정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에게 물었다.
“현우 씨가 계속 여기 있었던 거예요?”
“네.”
현우는 침대 밑쪽에 두었던 비닐봉지를 뒤적이며 이어 말했다.
“물 좀 줄까요? 물 말고도 간단히 먹을 만한 것 좀 사왔어요.”
“…….”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골라왔어요. 여기서 다정 씨가 좋아하는 걸로…….”
“현우 씨.”
음료와 빵을 건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정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요.”
현우가 행동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정의 눈빛은 평소보다 짙었고, 입가는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그녀가 현우를 응시한 채로 말했다.
“나…… 서현우 씨 좋아했어요.”
고백의 말치고는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
현우의 눈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현우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갖고 계속 지켜봤어요.”
“저…… 정말이에요?”
“네. 사실이에요. 현우 씨 말대로 세아가 중간에서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 둘은 지금 사내 커플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녀의 말에 현우의 입매가 올라갈 여지도 없이, 다정이 곧바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제가 팀장님과 사귀기 전에 가능했던 이야기예요.”
“팀장님과는 끝났잖아요. 더는 팀장님을 신경 쓸 필요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더라고요.”
씁쓸한 표정의 다정이 손끝으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여긴…… 제 맘대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지워질 거예요. 기다릴게요. 난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요.”
“아니요. 기다리지 말아요.”
다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또렷한 눈빛으로 현우를 마주 보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말했죠? 저 역시 팀장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고, 좋아했던 기간이 짧았기에 금방 잊힐 줄 알았어요.”
“…….”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곪고 더해져서, 손 쓸 수 없을 만큼 벌어졌어요. 그 사람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쓰라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담담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짙은 다갈색의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떨렸다.
다정은 깊게 아려오는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서 지금 이곳은…… 그 누구도 들어올 틈이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구슬프게 갈라지며, 공중에 흩어졌다.
“아니, 앞으로 영원히…… 누군가를 좋아할 자신이 없어졌어요.”
다정의 두 뺨 위로 투명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는 현우. 그의 눈매도 처연하게 내려앉았다.
“다정 씨는…….”
현우가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팀장님을 많이 좋아했군요.”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토록 다정하고 눈부셨던 사람을.
나에게만 향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그 다정한 눈빛도, `재미없는 내 농담에도 미소 지었던 그 입술도, `커다랗고 따스했던 손도…….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네. 좋아했어요.”
지워내리라 마음먹었지만, 하나도 지우지 못했다.
그와의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져서 자신을 괴롭혔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무엇을 하든 그가 떠올랐다.
회사에 가는 것이 괴로우면서도, 그를 보지 않으면 더욱 괴로웠다.
눈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아도, 마음속의 시선은 늘 그에게 향해있었다.
“아직까지도…… 좋아하고 있어요. 바보같이…….”
슬픈 고백과 함께 다정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도훈을 향한 마음이 변함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녀를 바라보던 현우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
“아직도 팀장님을 좋아하는 거라면…… 난 물러설 수밖에 없겠군요.”
다정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에 줄곧 내려가 있던 현우의 입매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렇다는데요, 팀장님?”
그렇게 말하며 옆쪽을 바라보는 현우. 그 모습에 다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순간, 옆 침대의 커튼이 촤르륵 열리며 다정의 시선을 빼앗았다.
짙은 눈썹을 살짝 덮은 머리카락. 깊은 눈매와 검은 눈동자. 수려하게 뻗은 콧날과 턱선.
그녀의 바로 옆 침대에 앉아있던 사람은 바로 도훈이었다.
“!”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다정.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이 저절로 뚝 그쳤다.
“티, 팀장님?”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다정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사이 현우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도훈의 발목으로 향했다. 그의 한쪽 발목은 붕대로 감겨있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팀장님, 다치셨어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날카롭게 뻗은 도훈의 눈매가 그녀에게 향했다. 그의 눈빛은 화가 나 보이기도 했고, 속이 무척 상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다정에게 물었다.
“그토록 힘들어하면서까지 참은 이유가 뭡니까?”
굵은 음성에 힘이 더해지며, 소리가 커졌다.
“날 좋아한다면서 그만두자고 한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다그치는 듯한 말투에 마음이 울컥해지는 다정.
그녀도 목소리를 높여 따지듯 물었다.
“팀장님이야말로 왜 그러셨어요?”
“뭐가 말입니까?”
“누구에게나 쉽게 줄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서, 왜 그리 진중한 척, 대단한 척 하신 거냐고요?”
매일 밤, 꿈속에서 원망스러운 그에게 홀로 외쳐댔던 말들이었다.
장마에 막힌 둑이 터지듯 참아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내가 운명이라면서요. 내 생얼도 예쁘다면서요. 내가 어디에 있든 붙잡을 거라면서, 팀장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고선……!”
원망으로 물든 그녀의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세아에게 넘어갈 수가 있냐고요!”
그녀가 외치는 말에 도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다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던 다정. 그녀가 다그치듯 물었다.
“왜 하필 세아예요?”
“……?”
“내가 세아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또다시 비수를 꽂을 수가 있어요?”
“지금 대체 무슨 말 하는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세아에게 넘어가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그 순간이었다.
울분에 떨리던 그녀의 작은 어깨가 커다란 손에 붙잡혔다. 그 손에 이끌려 다정은 저절로 고개를 들어 도훈을 마주 보게 되었다.
“한다정. 당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지만…….”
“…….”
“이것만큼은 확실해.”
두 손으로 그녀의 양 어깨를 끌어안은 도훈이 다정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당신 떠난 적 없어.”
“…….”
“날 그저 직장 상사로 바라볼 때도,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나에게서 돌아섰을 때도…… 언제나 당신이었다고.”
그의 굵고 강인한 음성이 그녀의 심장을 두들기며 울려 퍼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다정이 아니면 안 되었어.”
숨이 막힐 듯 강렬한 눈빛.
그의 눈빛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다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요란스럽게 뛰는 가슴은 이미 그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부여잡은 채, 단호한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한 말을 모두 믿어버리기엔, 아직 해결 못 한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정이 다시 차가워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세아한테는 왜 그리 쉽게 마음을 준 건데요?”
힘겹게 마음을 전했건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도훈 역시 답답한지 미간을 좁혔다.
“왜 자꾸 민세아 씨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까?”
“몰라서 물어요?”
“몰라서 묻는 겁니다.”
“나 다 봤다고요. 세아랑 팀장님이……!”
오고가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는 그 순간이었다.
한쪽에 누워있던 환자 한 명이 커튼을 확 열며 말했다.
“아따, 거 아까부터 시끄러워 죽겄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는 다정과 도훈을 향해 소리쳤다.
“왜 병원에서 지지고 볶고 난리여! 사랑싸움 할 거면 나가서 하슈!!”
***
병원 앞, 도훈의 차 안.
둘은 차 안으로 장소를 옮겨 서로에게 쌓였던 감정을 모두 털어놓았다.
도훈의 이야기를 침착하게 모두 들은 다정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그럼…… 팀장님은 세아랑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세아’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도훈이 인상을 썼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가 상체를 다정 쪽으로 홱 돌리며 말했다.
“설마 지금까지 내가 민세아 씨랑 한다정 씨에게 양다리라도 걸치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제 두 눈으로 팀장님이랑 세아가 끌어안고 있는 걸 봤단 말이에요.”
“그건 민세아 씨가 일방적으로 한 행동이라고 벌써 세 번째 말하는 중입니다.”
“…….”
벌써 세 번째 듣는 이야기였지만, 다정의 감정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겠는데, 가슴이 멋대로 아려왔다. 그만큼 다정에게는 도훈과 세아의 포옹이 충격적인 장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아라면 그런 행동을 독단적으로 하고도 남을 위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눈치채고 보란 듯이 포옹을 했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아. 세아에게 또 속다니…….’
그녀에게 또 당했다는 사실에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다정.
그간 홀로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빗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허탈한 마음이 가슴에 밀려왔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도훈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대체 어떡하면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군.”
“세아는 누가 봐도 예쁘잖아요. 팀장님도 결국 남자니까, 예쁜 여자에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예쁘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야. 당신 말고 다른 여자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다정은 단호한 그의 말에 민망한 마음이 들기는커녕,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이 우스웠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그녀를 향해 도훈이 물었다.
“왜 진작 나한테 말을 안 했어요?”
“…….”
“애초에 민세아 씨 때문에 내게서 멀어지려고 했다는 걸 솔직히 말했으면, 이렇게 상황이 복잡해지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세아와 도훈의 관계를 의심쩍어한 순간부터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모두가 괴로워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정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자존심이 상해서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정은 지금이라도 그간 눌러왔던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도훈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팀장님은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향할 수 있는 그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나 혼자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바보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도 팀장님에게 깊은 마음 아니었다는 듯이 쿨하게 보내려고 했어요.”
“…….”
“그런데 한 번 자리 잡은 감정은 내 멋대로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팀장님이 원망스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립고 애틋한 마음도 함께 커져갔어요.”
다정은 살짝 내리고 있던 시선을 돌려 도훈을 응시했다.
그녀의 진갈색 눈망울은 애틋함이 번져 반짝이고 있었다. 다정은 그를 똑바로 마주한 채 제 마음을 고백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팀장님만 눈에 보였어요. 그러지 말자고 몇 번을 마음먹어도……결국엔 팀장님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진솔한 말과 눈빛에 도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윽고 그의 뺨에는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이 없는 그를 보며 다정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한다정 씨가 나한테 이렇게 표현하는 건 처음 있는 일 같아서.”
그는 무척이나 감격스러운 듯해 보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꿈인가 싶기도 하고, 진짜 꿈이면 어떡하나 두렵기까지 하달까.”
“저도 그래요.”
다정도 애틋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꿈속에선 팀장님이 이렇게 늘 다정한 눈빛으로 봤거든요. 눈을 뜨면 다시 냉기 도는 팀장님으로 바뀌어 있을까 봐 두려워요.”
그렇게 말하는 다정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도훈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순간 도훈이 그녀의 뒷목덜미를 쓸어 잡았다. 예고도 없이 다가온 그의 입술은 단박에 다정의 입술을 삼켰다. 놀라서 저절로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어, 깊고 부드러운 키스를 이어나갔다. 온몸이 녹아들 듯한 키스에 다정의 눈이 감겼다.
한참 동안 이어진 뜨거운 입맞춤 끝에 떨어진 도훈의 입술.
다정이 감았던 눈을 뜨자, 그윽한 눈빛을 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아직도 꿈 같아요?”
오랜 키스로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다정이 대답했다.
“아, 아니요.”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동감이 넘쳐서…….”
그녀의 말에 도훈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각오해요.”
도훈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놓아줄 테니까.”
방금보다 더 깊고 강렬해진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