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다정의 동공이 흔들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은 그녀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으악!”
갑작스러운 외마디 비명에 도훈도 함께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럽니까?”
그녀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잽싸게 가리며 말했다.
“생얼인 걸 깜빡했어요.”
난 또 뭐라고…….
도훈이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여유 있게 웃음을 짓는 그와 달리 다정은 심각해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마스크라도 쓰고 올게요.”
“화장 안 해도 예쁜데, 뭐 하러 가려요?”
“…….”
화장을 안 해도 예쁘다고……?
언니들은 늘 자신이 화장 안 하면 만두피같이 생겼다며 놀려대곤 했다.
그렇게 구박만 받았던 다정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가슴이 지잉, 하고 크게 울렸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괜스레 부끄럽기도 해서 다정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요.”
“그런 말 앞으로 내가 많이 해줄게요. 원한다면 더한 말도 해줄 수 있고.”
이보다 더한 말은 얼마나 낯간지러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뱉는 도훈의 모습은 더욱 상상이 안 갔고.
다정이 쑥스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물었다.
“서울에는 이제 막 도착하신 거예요?”
“네. 일 끝나자마자 바로 온 겁니다.”
“많이 늦으셨네요. 출장 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납품일 문제로 마찰이 좀 있었어요. 본사 측과 제대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 모양이더군요. 다행히 잘 해결하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그의 말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다정이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곧바로 집에 가서 쉬시지, 왜 저희 집까지 오셨어요? 만약 제가 잠들어 있었으면 어쩌려고요.”
“말했잖아요. 보고 싶어서 왔다고.”
자신은 언제쯤이면 그처럼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당당히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도 보고 싶었어요.’
이 한마디가 뭐가 어렵다고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입 밖으로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애교가 몸에 배지 않은 자신을 속으로 원망하는 그 순간 도훈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줄 것도 있고.”
그렇게 말한 도훈은 재킷 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다정이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사실 화이트데이 때 주려고 했는데, 계속 타이밍이 안 맞아서 못 주고 있었네요.”
다정은 그가 건넨 상자를 천천히 열어보았다. 이윽고 반짝이는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자 속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목걸이였다. 목걸이 가운데에 달린 별 모양의 장식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다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절로 입이 살짝 벌어진 다정이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너무 예뻐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도훈은 흡족한 듯 입매를 올렸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넋을 놓고 목걸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도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걸 저에게 준다고요?”
“네. 초콜릿에 대한 답례예요.”
“초콜릿이요?”
다정이 그에게 초콜릿을 주었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아마도 밸런타인데이에 주었던 초콜릿을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전 겨우 초콜릿이었는데요.”
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게다가 그건…… 팀장님을 위해 만든 것도 아니었는데.’
그건 현우를 위해 밤새 만들었던 초콜릿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정은 그가 준 선물이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제게 너무 과분한 선물인 것 같아요.”
난감해하는 그녀의 표정에 도훈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런 말 듣고 싶어서, 선물 주는 거 아닙니다.”
“…….”
“한다정 씨는 그저 기뻐해주면 돼요. 내가 원하는 모습은 그것뿐이니까.”
다정은 다시 한번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디자인이며, 색감이며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완벽한 선물이었다. 다만 누가 봐도 비싸 보일 것 같은 목걸이의 고급스러움이 다정의 부담감을 더하게 만들었다. 목걸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녀를 보며 도훈이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너무 예뻐요. 이렇게 예쁜 목걸이는 처음 봐요.”
다정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목에 걸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을 만큼 예뻐요.”
“보고만 있으면 안 되죠. 목걸이는 목에 걸라고 만든 건데.”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그녀의 손에 쥔 목걸이를 가져가 들었다.
“내가 걸어줄게요.”
도훈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스쳐 목 뒤로 향했다. 목걸이를 채우는 그의 손길이 살갗을 스치며 간질였다.
다정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왔다. 가까워진 그의 턱선과 짙어진 향수향 때문에 마치 안겨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왔다. 도훈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설렘을 주는지 그는 절대 모를 것이었다.
섬세한 손길로 목걸이를 채운 도훈의 상체가 떨어졌다.
“다 됐어요.”
다정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들어 바라보았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그대로 박아놓은 것처럼 눈이 부셨다.
“너무 예뻐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녀의 눈망울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전 팀장님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다정은 감격에 젖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했다.
“고마워요. 정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고마우면 뽀뽀라도 한 번 해주든지.”
“네?”
도훈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 건드리며 가리켜 보았다.
“볼은 괜찮다면서.”
그의 말과 행동에 얼굴이 붉어지는 다정.
대체 언제까지 그 말을 우려먹을지 문득 걱정이 들기도 했다. 평소의 다정이라면 그의 짓궂음을 야단치는 반응을 보여줬을 테지만 오늘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도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았다. 잡은 옷깃을 살짝 앞으로 당기자, 도훈의 상체가 그녀에게로 기울어졌다.
다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녀의 주홍빛 입술이 살포시 도훈의 볼에 닿았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는 다정도 몰랐다.
용기의 근원지를 굳이 따지자면 오늘따라 유난히도 별이 밝았던 밤하늘이, 자신을 향한 도훈의 눈빛이, 그가 건넨 뜻밖의 선물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쪽.
부드럽게 닿은 그녀의 입술이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발뒤꿈치를 내린 다정이 살며시 눈을 떴다. 예상 못 한 그녀의 행동에 뺨 끝이 살짝 붉어진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진짜로 할 줄은 몰랐는데…….”
나직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다정은 뒤늦게 쑥스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 그럼 내일 봬요.”
민망함에 서둘러 집 쪽으로 몸을 돌리는 다정.
그런 그녀의 손목을 도훈이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이러고 도망가는 법이 어딨어요?”
그는 제게로 몸을 돌린 다정의 두 뺨을 그러쥐었다. 고개를 기울인 도훈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마주 닿았다. 부드럽게 겹친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다정의 입술을 머금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가며 빨아들였다. 입술로 전해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취하며 다정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과 혀가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키스의 농도가 짙어지며, 내뱉는 숨결이 뜨거워졌다. 다정의 숨이 가빠질 듯싶으면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곧 다시 맞닿는 그의 입술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한없이 부드러웠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강렬했다.
다정은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온몸이 녹아들 것처럼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
월요일 아침.
한신 건설 기획팀 회의실.
“뭄바이 해상교의 공사 구간은 총 3개로 나뉘는데, 바다를 가로지르는 1-2공구가 핵심 구간이 됩니다. 이 구간을 맡은…….”
다정은 테이블 맨 앞에 앉아서 회의를 진행하는 도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트라이프 무늬가 새겨진 셔츠에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눈부신 외모를 자랑하며 회의에 임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멋있었지만, 일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더더욱 섹시하고 매력적이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다정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어쩜 저렇게 멋질까.’
다정은 그의 짙은 눈썹부터 깊은 눈매, 오뚝한 콧날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눈도 멋지고, 코도 멋지고, 입술도…….’
쭉 내려오던 다정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서 머물렀다.
도훈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니, 어젯밤 그와 나눈 키스가 저절로 연상이 되었다. 뜨거웠던 입맞춤을 떠올린 다정의 얼굴이 저절로 붉게 물들었다.
‘팀장님이 못하는 게 없는 건 알았지만…… 키스까지 잘할 줄이야.’
다정의 시선이 다시 천천히 내려가, 그의 굵은 목선과 넓은 어깨, 슈트에 가려진 가슴을 응시했다.
‘키스 잘하는 남자는 다른 것도 잘한다던데…….’
다정은 자신도 모르게 든 야릇한 생각에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비난하며 고개를 휘저었다.
‘어머, 미쳤어.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한다정. 너 변태같이 왜 이래.’
부끄러운 마음에 두 볼이 더욱 빨개진 다정이 그를 응시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팀장님이 안다면…… 아마 기겁할 거야.’
그를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이, 무언가 계속 말하고 있던 도훈의 시선이 다정에게로 향했다.
“한다정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는 다정. 그녀는 넋을 잃고 도훈을 바라보던 시선을 급히 거두었다. 도훈은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한다정 씨, 제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네?”
“전체 공사비용 책정 금액에 관하여, 재무팀 쪽에서 연락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물음에 다정이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아. 네. 전체 공사비는 약 22억 달러이고, 저희가 맡은 2번 패키지는 약 9,642억 원의 공사비가 책정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는 어제 키스했던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다정을 대했다.
다정은 한 번의 키스로 크게 동요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너무도 덤덤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서운하게까지 느껴졌다.
‘팀장님은 정말 공과 사가 확실한 것 같아. 일할 때는 전혀 티를 내지 않으니, 저 남자에게 난 부하직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물론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왠지 모를 섭섭함이 가슴 한편에 밀려드는 다정이었다.
계획보다 길어진 회의가 끝이 났다.
팀원들은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다정도 제 자리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도훈이 말했다.
“한다정 씨.”
“?”
“잠깐 저 좀 보죠.”
다정은 그를 따라 바로 옆 회의실로 걸어갔다. 회의실에 들어온 도훈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그의 질문에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요.”
“오전 회의 내내 집중 못 하고 딴생각에 잠겨있던데.”
그가 기다란 팔을 마주 낀 채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뭐야. 혼내려고 부른 거였어?
여느 때와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살짝 실망하는 다정. 그녀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팀장님 생각했는데요.”
“…….”
“…….”
순간, 분위기가 갑자기 고요해지며, 도훈의 얼굴이 굳었다.
다정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를 보며 뒤늦게 후회했다.
‘아뿔싸. 너무 솔직했나?’
다정이 슬며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두 뺨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회의 시간에는 회의에 집중해야지, 내 생각을 하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도훈의 모습은 전혀 화가 난 걸로 보이지 않았다. 되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덩달아 붉어지는 다정의 얼굴.
‘세상에. 팀장님이 쑥스러워할 때도 있다니.’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도훈이 미간을 좁혔다.
“혼나는 상황에 웃음이 나와요?”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걸 어떡해요.”
다정이 또 한 번 웃었다. 그러자 가늘어지는 도훈의 눈매.
그가 불쑥, 다정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한 손으로 다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둘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다정이 당황하며 말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이번엔 무섭게 한번 혼내보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도훈이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그러잡았다. 그가 턱을 기울여 가까이 다가오자, 다정의 가슴이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짙은 눈동자가 무섭다기보다는 섹시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다정이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달칵.
누군가가 회의실 문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도훈과 다정은 언제 달라붙어있었냐는 듯이 저 멀리 떨어졌다. 순간 이동을 해도 그렇게 빠르진 못했을 것이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정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분위기를 깬 주인공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자마자 다정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들 앞에 등장한 사람은 바로 세아였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어색하게 떨어져있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죄송해요. 빈 회의실인 줄 알았어요.”
빈 회의실인 줄 알았으면 뭐 하러 온 걸까?
다정의 눈에는 두 사람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방해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마침 팀장님을 찾아뵙고 싶었는데 잘되었네요.”
세아는 도훈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출장 보고서 건으로 긴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공장 측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니요. 공장 측 문제는 아니고요.”
세아가 흘깃 다정을 보며 말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녀의 눈빛은 마치 업무 이야기를 해야 하니 비켜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말에 도훈이 말했다.
“그럼 팀장실로 가죠.”
도훈이 먼저 회의실을 나가고, 세아가 그를 뒤따라 나섰다.
세아는 회의실 문을 지나쳐 나가려는 순간, 뒤를 돌아보며 다정을 응시했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려 보였다.
‘뭐야? 저 기분 나쁜 웃음은…….’
다정이 울컥하는 사이, 세아는 쌩, 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정은 어이가 없었다. 예전에는 겉으로 온갖 착한 척을 하며 뒤통수를 쳤다면, 요즘은 대놓고 여시 짓을 한다. 그건 그것대로 못 봐줄 노릇이었다.
***
금요일 오전. 다정의 방.
다정은 커다란 캐리어를 열고,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홱 열며 들어왔다. 바로 그녀의 언니 애정과 소정이었다.
그녀들은 도훈을 소개받은 이후로 걸핏하면 다정의 방을 들락날락거렸다. 다정이 깜빡하고 문을 안 잠근 것을 후회하고 있는 동안, 그녀들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워크숍 다녀온다는 거 거짓말이지?”
애정의 말에 소정이 맞장구를 치며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은 팀장님이랑 1박 여행 가는 거 아니야?”
난데없는 그녀들의 말에 다정은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는 아직 그런 사이 아니거든.”
“뭣?”
다정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언니들.
소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팀장님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어떻게 확신해? 네가 봤어?”
“팀장님이 평소에 얼마나 남자다운데!”
“낮에만 남자다우면 뭐 해? 밤에도 남자다워야지!”
밤에도 분명 남자다울 거야. 팀장님이 ‘낮져밤이’라고 했단 말이야.
이렇게까지 말하기엔 너무 민망해서 다정은 꾹 참았다.
언니들을 무시하고, 다시 짐을 챙기는 다정. 그녀의 한쪽 어깨를 소정이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다정아. 이번 워크숍이 기회다.”
“무슨 기회?”
“팀장님을 완벽하게 네 남자로 만들 기회.”
‘완벽하게 내 남자로 만들 기회?’
매번 속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정은 언니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언니들이 매뉴얼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따라만 해.”
그렇게 말한 소정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팀장님. 저 낯선 곳에서 자려니까 잠이 안 와요. 그리고 부엉이 울음소리가 너무 무서워요.”
요즘 부엉이가 어디 있어? 하고 따지기도 전에, 도훈 역을 맡은 애정이 느끼한 톤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하하! 귀엽기는. 내가 팔베개를 해주지. 이리 와, 베이비.”
소정이 그녀의 팔에 딱 달라붙으며 교태가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맛. 팀장님 팔뚝이 무쇠처럼 단단하네요. 다른 곳도 이렇게 단단한가요?”
“보이지 않는 곳은 더욱 단단한데…… 직접 확인해 보겠어? 베이비.”
“그럼 어디 조금만 구경해볼게요.”
“오, 노우.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으로…….”
더는 그들의 상황극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진 다정이 소리쳤다.
“우리 팀장님은 그런 말 안 하거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짐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말했다.
“워크숍에서 뭔 일이 일어나는 게 이상한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애정과 소정은 음흉한 표정을 해 보이며 말했다.
“과연 팀장님도 너랑 똑같은 생각일까?”
“워크숍이든 뭐든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데, 어떤 멍청한 남자가 그 기회를 날릴까나?”
그녀들은 짐을 챙기는 다정의 뒤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다정의 니트 안을 슬며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 설마 이 속옷 입고 갈 거야? 팀장님께 보여줄 용으로는 따로 챙겼지?”
“언니가 제대로 된 속옷 빌려줄까?”
그녀들의 말을 그대로 무시하는 다정. 언니들이 준 속옷은 보나 안 보나 벗은 게 차라리 나을 속옷일 것이 뻔했다.
짐 싸기를 모두 끝낸 다정이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방을 나가기 전, 아직도 옆에 붙어있는 언니들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언니들은 제발 신경 좀 꺼줘.”
“…….”
“응? 부탁이야.”
그녀의 진심 어린 눈빛에 언니들도 덩달아 진지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어.”
정말?
다정의 얼굴이 밝아지려는 순간, 소정과 애정이 말했다.
“그럼 둘이 결혼식장 들어가는 거 볼 때까지만 참견할게.”
“노놉~ 결혼식장 들어가는 걸론 부족하지. 이 언니는 네가 팀장님이랑 아이 둘 낳고 알콩달콩 살 때까지만 참견할게.”
‘그럼 그렇지…….’
다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나왔다.
멀어지는 그녀의 귓가에 언니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사고 안 치고 오면,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어휴. 저게 동생한테 할 말이야?
언니들의 말이 창피해 다정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언니들은 왜 만날 저런 생각뿐인 거야?’
***
워크숍은 회사 연수원이 있는 청평으로 가게 되었다.
오후엔 강당에 모여 초청강사의 강의를 듣고, 회의실에서 1분기 실적 및 기획방향에 관련하여 간단한 토론을 나누었다. 지루했던 일정이 끝이 나고 드디어 워크숍의 밤이 찾아왔다.
저녁을 먹은 팀원들은 가장 커다란 객실에서 모두 모였다. 팀원들 앞에는 각종 다과와 술, 음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도훈은 둥글게 모여 앉은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편하게 앉아 마음껏 드시고, 피곤하면 방으로 들어가 쉬면 됩니다.”
그의 말이 마음에 쏙 드는 듯 윤 주임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역시 팀장님이셔. 부문장님 같았으면 동틀 때까지 이곳을 못 빠져나간다면서 술을 먹였을 텐데.”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여사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말이 좋아 워크숍이지, 늘 술파티였잖아요.”
“전 술보다 그놈의 결혼 이야기 안 들으니까 살 것 같아요.”
“오늘은 부문장님도 없으니까, 우리끼리 마음껏 즐겨봐요.”
부문장은 해외출장 날짜가 변경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악덕 상사의 부재가 사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컸다. 워크숍의 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무르익어갔다. 다정 역시 주위에 있는 동료들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우리 회사 연수원 정말 잘 짓지 않았어요? 건설회사가 지어서 그런지, 건물 외관이며 내부며 고급스럽잖아요.”
“맞아. 난 애들 방학 때마다 한 번씩 휴양하러 오는걸.”
“게다가 객실에 서너 명이서 묵을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곳 별로 없어. 내가 전에 다녔던 회사는 연수원 갈 때마다 한 방에 열댓 명을 모아놓고 자게 했다고.”
다정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한 번씩 눈으로 도훈을 찾았다.
도훈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남자 팀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팀장님이 너무 바빠서, 워크숍 오고 나선 한 마디도 못 나눈 것 같아.’
도훈은 검은색 니트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회색 팬츠 차림이었다. 캐주얼한 차림도 멋지게 소화한 그의 모습을 보며 다정은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문득 머릿속에 오늘 아침 언니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워크숍이든 뭐든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데, 어떤 멍청한 남자가 그 기회를 날릴까나?’
함께 방을 쓰기로 한 부문장이 오지 않았으니 도훈은 혼자 묵는다.
‘팀장님은 혼자서 방을 쓰긴 하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어느새 얼굴이 붉게 번지는 다정. 그녀는 뜨거워진 가슴을 식힐 겸, 차가운 맥주 한 잔을 그대로 원샷했다. 하지만 이미 달아오른 마음은 쉽게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니들은 괜한 소리를 해가지곤……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거야.’
화끈거리는 뺨에 부채질하던 그때였다. 다정의 핸드폰에서 지잉- 하고 문자음이 울렸다. 그녀가 문자를 확인했다.
[잠깐 밖으로 나올래요?]
도훈의 문자였다.
***
문자를 본 다정은 팀원들이 술에 취해가는 사이, 밖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연수원 건물 밖으로 나오자, 현관 쪽에 서있는 도훈이 보였다.
다정이 그에게 물었다.
“왜 나오라고 한 거예요?”
“아까 얼굴 보니 취한 것 같아서.”
도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술도 깰 겸, 잠깐 걷죠.”
마주 잡은 커다란 손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다정이 낯간지러워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누가 좀 보면 어때요.”
덤덤하게 말한 도훈은 손을 붙잡은 채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연수원 건물 뒤에는 작은 산책길이 있었다. 물결이 잔잔한 호수 옆으로 난 길이었다. 통나무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호수 위를 걷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곳곳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뒤로 향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둘의 귓가를 속삭였다.
다정은 가슴이 설렘으로 진동했다. 연수원 산책길을 거니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걷는 이가 도훈이어서인지, 예전에는 그저 어두컴컴하다고만 생각했던 산책길이 지금은 굉장히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그와 나란히 걷던 다정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은 주량이 어떻게 돼요?”
그녀의 질문에 도훈이 곧바로 대답했다.
“글쎄요. 난 취하도록 마셔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주량을 모르겠군요.”
“그럼 팀장님이 즐겨 드시는 술 종류는 뭐예요?”
“술집에 갔을 때는 주로 위스키를 마시고, 식사할 때는 와인을 곁들이는 걸 좋아합니다.”
“참 팀장님다운 술 취향이군요.”
“더운 여름날 밤, 잠이 안 올 때면 캔맥주를 하나씩 먹기도 하죠.”
“어머. 그건 저랑 똑같네요.”
자신과 비슷한 점을 찾은 다정이 좋아하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씩, 웃는 도훈. 그가 길을 거닐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잘 안 맞는 술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뭔데요?”
“막걸리요.”
“네? 그 맛있는 술을요?”
“막걸리 마시고 난 다음 날은 숙취가 심하더군요.”
“후훗. 숙취로 고생하는 팀장님 모습이 상상이 잘 안 가요.”
둘은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길을 함께 거닐었다.
밤이 깊어가고 어둠이 짙어지자,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반짝이며 다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한 폭의 그림 같은 밤하늘을 응시하자, 도훈이 물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좋을 것 같아요?”
“네?”
“만약 이런 곳에서 또는 이런 집에서 살면 어떨 것 같은지 묻는 겁니다.”
다정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좋죠.”
다정은 주변을 쓱, 훑으며 말했다.
“사실 전 이렇게 한적한 곳에 펜션 같은 집 지어놓고 사는 게 꿈이었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돈부터 많이 벌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회사를 다니는 중이고요.”
“…….”
“꼭 펜션 같은 집이 아니더라도, 집 앞에만 나와도 이렇게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곳이라면…… 무조건 좋을 것 같아요.”
주위를 훑던 다정의 시선이 어느새 밤하늘로 다시 향해있었다.
“마치 아빠가 늘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도훈을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훈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어두워진 그의 낯빛에 다정이 의아해하는 순간, 도훈이 걸음을 멈추었다.
“한다정 씨.”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고 흩어지는 묵직한 음성.
다정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일 서울에 도착하면, 우리 집으로 올 수 있어요?”
“……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사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오란 말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어두워진 그의 낯빛을 보며 다정이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그렇게 심각한 얼굴인데요?”
“쉽게 꺼내기 힘든 말이기도 하고.”
도훈은 여전히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운 말이기도 해요.”
다정은 그의 눈빛을 마주보았다. 그의 말대로 도훈의 눈빛 속엔 애틋함과 두려움이 함께 어려있었다.
“……지금 이야기할 수는 없나요?”
“아무래도 지금은 곤란할 것 같군요.”
도훈은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내일 모든 걸 다 이야기할 테니.”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그의 어투에 다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그를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침착하자는 머릿속과는 달리, 가슴속에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간, 조용했던 바람이 거세지며, 다정의 옷깃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도훈이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바람이 꽤 차군요. 이만 들어가죠.”
***
술자리로 돌아온 다정은 다시 어울리던 동료들 옆에 앉아 술을 마셨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다정의 생각은 온통 다른 곳으로 향해있었다. 산책하면서 도훈이 했던 이야기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생각인 거지?’
자신을 향하던 도훈의 눈빛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깊은 슬픔이 느껴졌던 그 눈빛은 내일 그가 한다는 이야기가 결코 좋은 말이 아님을 직감하게 했다.
‘팀장님과 나는…… 잘되고 있는 게 아니었어? 이제야 진짜 연인다운 관계가 되어가는 줄 알았는데…….’
다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내가 팀장님께 잘못한 게 있었나? 아니면…….’
순간 다정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한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도훈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있는 세아가 있었다.
‘쟤는 또 어느새 저기로 갔담?’
도훈의 옆에서 까르르 웃는 그녀가 신경 쓰이는 듯 다정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오늘도 그녀는 자기 몸매를 과시하듯 몸에 착 달라붙는 소재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둘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연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주얼이 잘 어울렸다.
출장을 다녀온 이후로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던 다정은 생각했다.
‘출장 중에 둘이 많이 친해졌나?’
여자의 직감으로 보건대 분명 출장 중에 사이가 가까워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만 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는 다정으로선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때 다정의 시야 안으로 윤 주임이 들어왔다.
‘맞다. 윤 주임님이 있었지!’
다정은 술잔을 들고 슬쩍 윤 주임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출장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었다.
“주임님. 부산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굉장히 힘든 스케줄이었다고 들었는데요.”
“응? 나 부산 출장 못 갔는데?”
“……네?”
순간, 웃고 있던 다정의 입술이 그대로 굳었다. 윤 주임은 마시던 술잔을 내리며 말했다.
“출장 당일 아침에 갑자기 우리 둘째 아이가 아파서 입원을 했거든. 돌볼 사람이 마땅히 없어서, 팀장님께 이야기하고 출장은 빠지게 되었어.”
“그럼 출장에는 누가 간 거예요?”
“당일 벌어진 일이라, 인원 보충할 틈이 없었어. 어쩔 수 없이 팀장님이랑 세아 씨만 갔지.”
“팀장님이랑 세아 씨 단둘이요?”
그렇게 말하는 다정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그녀의 굳은 얼굴에 윤 주임이 되레 당황해하며 물었다.
“설마…… 다정 씨는 몰랐던 거야? 팀장님이 이야기 안 했어?”
“…….”
다정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둘이 간 거라고? 그럼…… 2박 3일 동안 함께 있었다는 거야?’
다정의 시선이 아직도 나란히 앉아있는 도훈과 세아에게로 향했다.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
침대 위에서 몸을 계속 뒤척이던 다정은 결국 방을 나와, 연수원 밖으로 향했다.
어두운 산책길은 가로등이 빛을 내며 길을 비추고 있었다.
다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그 길을 걸었다.
‘쉽게 꺼내기 힘든 말이기도 하고,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운 말이기도 해요.’
그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특히, 도훈과 세아가 단둘이 출장을 갔다는 것을 안 후로는 더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세아와 관련된 일인 건 아닐까? 설마 출장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그녀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고심에 잠겨있던 그녀는 성급한 결론은 짓지 말자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게 된다. 굳이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다정이 마음을 가라앉히던 순간이었다.
“다정 씨?”
뒤에서 들리는 굵은 음성에 다정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현우 씨.”
그녀를 부른 건 다름 아닌 현우였다. 트레이닝팬츠에 후드 점퍼를 걸친 그는 다정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 늦은 밤에 여기서 뭐 해요?”
“아……. 잠이 안 와서, 산책할 겸 나왔어요. 현우 씨는요?”
“저도 잠이 쉽게 안 들 것 같아서요.”
현우와 이렇게 단둘이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현우가 술에 취해 그녀를 끌어안았던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날의 사건 때문인지 다정은 현우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현우와 함께 있는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다정이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나 때문에 많이 곤란했죠?”
현우는 진중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그땐 감정이 격해진 바람에 실수를 했네요. 다정 씨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네. 그건 저도 알아요.”
“그 일로 팀장님과 다퉜나요?”
“약간 마찰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금방 풀렸어요.”
“다정 씨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
“어쩌면 그 사건이 팀장님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현우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정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우의 얼굴을 살폈다.
‘취한 것 같진 않은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그를 다정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층 더 짙어진 눈빛의 현우가 입을 열었다.
“다정 씨는…… 팀장님을 어떻게 생각해요?”
“네?”
“만약 팀장님이 다정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도 다정 씨는 그 남자를 계속 좋아할 건가요?”
사뭇 진지해진 그의 눈빛에 살짝 흔들리는 다정의 눈망울.
안색이 어두워진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마치 팀장님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
현우는 쉽사리 말을 꺼내기 힘든 듯 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결심이 선 듯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말을 다정 씨에게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요.”
“…….”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해버린 지금, 모르는 척하는 것도 다정 씨에게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장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다정의 낯빛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현우는 굳건한 어투로 말했다.
“사실…… 방금, 제 방을 나오면서 보고 말았어요.”
“무얼 말이에요?”
“민세아 씨가 팀장님 방으로 들어가는 걸요.”
다정의 눈매가 가늘게 일그러졌다.
“……이 시간에요?”
“네. 게다가 그 방은 분명 팀장님 혼자 쓰시는 방인데 말이죠.”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확실히 봤어요. 민세아 씨가 분명했어요. 그리고 제가 보았을 때 두 사람은…….”
현우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어요.”
다정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얼굴은 새까만 하늘과 대조되는 새하얀 달처럼 창백해졌다.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운 듯 다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되잖아요. 팀장님은 저랑 사귀는 사이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요?”
“세아가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현우는 강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다정 씨도 겪어봐서 잘 알잖아요. 세아는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하는 여자란 걸.”
세아가 욕심이 많다는 것은 다정도 알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그녀는 원하는 것은 꼭 갖고 말았다. 학점, 물건, 남자……. 그게 무엇이든 간에.
다정의 낯빛이 점점 더 새하얘지는 사이, 현우가 말했다.
“다정 씨도 모르는 사이에, 둘은 이미 깊은 관계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남녀 관계이니까요.”
“…….”
“……다정 씨? 괜찮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제가 직접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못 믿겠어요.”
어쩌면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은 전혀 안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애꿎은 자존심이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휘젓고 있었다.
다정은 연수원 쪽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직접 도훈을 찾아가, 모든 것을 제 눈과 귀로 확인할 작정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향했지만, 동시에 걸음을 늦추고도 싶었다.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될까 봐.
차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제 두 눈으로 마주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
그 시각.
도훈은 제 방으로 들어와 앉아있는 세아를 마주보고 있었다.
몇 분 전, 도훈이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를 들은 도훈은 다정을 예상하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정이 아닌 세아였다.
“무슨 일이죠?”
그의 물음에 세아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금 말입니까?”
“네.”
도훈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운 차림의 그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 옷만 걸치고 나가죠.”
“아니요. 밖에서는 좀 그렇고…… 팀장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건 내가 곤란할 것 같군요. 급한 일이 아니면, 내일 오전에 이야기하죠.”
무뚝뚝하게 말한 후 도훈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세아가 잽싸게 문을 잡으며 말했다.
“전 지금이 아니면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도훈을 마주보았다.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서 팀장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거고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훈이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이야기하죠.”
한결같이 냉담한 그의 대답에 세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상대로 도훈은 만만치 않은 남자였지만, 그녀 역시 쉽게 물러설 여자가 아니었다. 문을 닫으려는 그에게 세아가 말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정 선배인데도, 듣지 않으실 건가요?”
“……?”
순간, 문을 닫으려는 도훈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의 냉철한 눈빛이 세아의 표정을 빠르게 훑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정의 일에 관해서는 도훈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남색의 샤워가운을 꽉 여민 도훈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이렇게 5분 전에 있었던 그들의 대화가 지금 도훈이 그녀를 자신의 방에 들인 이유였다.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앉아있던 세아는 텅 빈 테이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쩜 물 한 잔 마시란 말도 안 한담.’
예상은 했지만, 도훈은 자신에게 조금도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마치 심문하는 형사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런 냉미남을 다정이 어떻게 꼬셔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한다정도 해냈는데, 내가 못 해낼 리 없지.’
세아는 자신 있었다. 지금은 그가 그녀를 돌 보듯이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녀밖에 모르는 남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특히나 가만히 있어도 섹시함이 흐르는 저 눈매와 꽉 여민 가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근육 잡힌 몸매는 하루 빨리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탐이 났다.
마음을 굳게 먹은 세아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전 사귀고 있던 사람과 이별하게 되었어요. 그 사람은 같은 기획팀 소속이고, 팀장님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서현우 씨 말하는 겁니까?”
“네. 역시 눈치채고 계시군요.”
세아는 자신의 눈동자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까만 눈망울에 물기를 살짝 머금으면,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말을 이었다.
“전 현우 씨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 남자는 연애하는 내내 제가 아닌 다른 여자를 가슴에 품고 있었어요. 현우 씨와 헤어지고,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일이 손에 잡히질 않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
“민세아 씨.”
그녀의 이야기를 뚝, 끊어내는 도훈의 굵직한 음성에 세아가 45도 각도로 내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네?”
“한다정 씨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아를 응시했다.
‘냉담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가 그럴수록 세아에게는 승부욕을 더욱 일으킬 뿐이었다. 먹잇감이 힘든 상대일수록, 제 것으로 만들었을 때의 성취감이 더 클 테니 말이었다.
세아는 여전히 쓸쓸한 눈빛을 한 채로 말했다.
“괜히 팀장님께 현우 씨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에요. 현우 씨와 헤어진 이유가…… 바로 다정 선배 때문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세아는 그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멀끔한 자태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
“설마 이것도 눈치채고 계셨던 거예요?”
그의 반응이 아쉽긴 했지만, 세아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본게임은 이제부터였으니까.
세아는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
“눈치가 그렇게 빠른 분이라면…… 다정 선배가 현우 씨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얼핏 보면 그의 표정엔 미동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아는 그의 눈매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캐치했다.
그가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 했다. 세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해 보이며 말했다.
“한때 저는 가장 가까이에서 선배를 지켜봤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선배를 잘 알고 있어요. 다정 선배는 팀장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현우 씨를 좋아했어요.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이요.”
“…….”
“팀장님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켜보았던 감정이 쉽게 잊힐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또 한 번 가늘게 흔들리는 도훈의 눈동자. 그 역시 누군가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사람이기에, 그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현우 씨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떨어뜨려내지는 못할 거예요.”
세아는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매우 속상하다는 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배는 제가 현우 씨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갈등하고 있어요. 어쩌면 이미 마음은 현우 씨에게 가있을지도 모르죠. 다만 선배는 많이 여리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사람인지라 팀장님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가엾은 선배를 위해서라도, 팀장님이 먼저 양보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그 둘을 위해서 물러나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
“그만하죠.”
도훈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를 끊었다.
세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냉철한 눈빛으로 세아를 응시하며 말했다.
“설사 한다정 씨가 그런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둘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무엇보다 제삼자의 이야기로 한다정 씨를 판단할 생각도 없고요.”
“팀장님. 그게 아니라……!”
“내가 민세아 씨 충고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뭐죠? 아무리 생각해도, 민세아 씨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너무도 차가워, 세아는 뼈 속까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는 민세아 씨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할 말은 더더욱 없습니다.”
“…….”
“다시는 이런 일로 찾아오지 말아요.”
끝까지 무뚝뚝하게 말을 이어나간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만 나가봐요.”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도훈이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마치 나가라고 재촉하듯 문을 여는 그의 모습에 세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토록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남자는 생애 처음이었다.
***
도훈이 묵는 방이 있는 2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다정.
2층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 뛰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2층에 도착한 다정이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바로 세아의 목소리였다. 다정은 복도에 들어서려던 걸음을 멈추고,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래요. 그럼.”
이어 들려오는 도훈의 목소리.
다정의 진갈색 눈망울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로써 현우의 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세아는 여태껏 도훈의 방에 머물다가 나온 것이었다.
‘어째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다정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는 문득 얼마 전 세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현우 씨보다 더 탐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일종의 선전포고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녀가 도훈을 유혹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쉽게 세아에게 넘어갈 줄은 전혀 몰랐다.
며칠 전만 해도 자신에게 마음을 표현하던 남자였는데…….
‘그럼 출장 기간 동안……. 그 짧은 시간 안에 결국 세아에게 넘어갔단 말이야?’
다정은 떨리는 가슴을 움켜쥔 채,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벽 너머로 도훈과 세아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복도 끝 쪽에 있는 둘은 다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도훈의 방 밖으로 나온 세아는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팀장님.”
면바지에 가운을 입고 있는 도훈의 차림새에 다정이 충격을 받으려던 순간, 더 충격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바로 세아가 갑자기 그의 품에 와락 안기는 것이었다.
“……!!”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호흡이 제대로 되질 않고, 숨이 그대로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몸이 비틀거리는 그 순간, 다정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 끌어당겼다.
바로 그녀가 걱정되어 뒤따라온 현우였다.
현우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그에게 이끌려 걸어가는 내내 다정은 아무런 생각도,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이 하얘지며 가슴이 세차게 뛰어올 뿐이었다.
다시 건물 밖으로 나온 현우가 다정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현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아…….”
다정은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의 떨리는 음성이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안 괜찮아요.”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을까.
오래전, 현우와 세아가 비품실에서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이 정도로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때는 배신감에 자존심이 무너진 정도라면, 지금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온몸이 휩싸였다.
“믿을 수가 없어요. 어째서…….”
다정의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도 안일하게 그를 믿었고, 자신을 믿었다.
“계속 내 옆에 있어줄 줄 알았어요.”
그렇게 쉽게 무너질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한때, 현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자신이 도훈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종착지가 정해진 것이 아닌데 말이었다.
“왜 하필 세아랑…….”
왜 하필 그녀일까.
내가 그녀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그녀 때문에 내 자존심이 산산조각이 되었는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그 허탈한 마음이 겨우 채워졌는데.
또 한 번의 상처가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
이번에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어떻게 치유할지 알 수 없는 깊은 상처가.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현우는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현우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그에게 안긴 다정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놓칠세라 그녀를 꽉 끌어안은 현우가 말했다.
“나한테 와요.”
“……?!”
“그런 나쁜 남자 관두고, 나한테 오라고요.”
다정이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의 가슴을 밀쳤다. 그녀에게서 떨어진 현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가 짙은 눈빛으로 다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좋아합니다.”
“…….”
“아주 오래전부터…… 한다정 씨를 좋아했어요.”
안 그래도 당혹스러운 마당에 그의 고백이 더해지며, 다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민세아 씨가 날 속이지만 않았어도, 난 당신에게 고백했을 거예요.”
“……네?”
강렬한 눈빛을 한 현우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엔 절대 안 놓칠 거예요. 이건 하늘이 내게 마지막으로 준 기회라고 생각해요.”
“……!”
다정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순간 누군가가 현우의 손목을 낚아채듯 끌어 잡았다. 강력한 힘에 몸이 홱 돌아서게 된 현우. 그가 옆을 바라보았을 땐, 날카로운 눈빛을 한 도훈이 서있었다.
그가 냉기 어린 시선으로 현우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이 여자한테 손대지 말라고.”
그 눈빛에 질세라 현우도 강렬한 시선으로 도훈을 노려보았다.
“팀장님이야말로 이 여자한테서 그만 떨어지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