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 -12화 (12/32)
  • Chapter. 12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말 알지?”

    술에 취한 부문장이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회식에 참여한 여직원들이 동시에 젓가락질을 멈추고, 인상을 구겼다.

    ‘또 저 얘기야?’라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문장은 데자뷔처럼 몇 년째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말을 이어나갔다.

    “스물네 살까지는 잘 팔리지만 스물다섯부터는 잘 안 팔린다는 말이지. 이건 명언이야, 명언!”

    “…….”

    “스물다섯도 잘 안 팔리는데, 삼십 넘으면 어떻게 되겠어?”

    여직원들이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문장의 말을 듣고 있으면 못 마시는 술도 저절로 땡겼다. 여직원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술잔을 부딪치는 순간, 부문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급하다고, 자기 주제도 모르고 아무 상대나 막 붙잡으면 안 되지.”

    다정은 부문장의 따가운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정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결혼도 수준이 맞는 상대랑 해야 돼.”

    “…….”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급이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다가 깨지는 부부들 내가 주위에서 여럿 봤어. 내 말 잘 새겨들으라고, 다들!”

    저 XX……!!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험한 욕이 입가에 맴돌았다.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무는 다정의 손을 누군가가 꼬옥 붙잡았다. 그녀의 손을 잡은 사람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춘희였다. 그녀가 낮게 속삭이며 말했다.

    “다정 씨가 참아. 부문장님 오늘 전무님한테 깨지고 와서, 심기가 보통 불편한 게 아니야. 잘못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려.”

    “…….”

    “봐봐. 이럴 때 늘 끼어들던 현우 씨도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하시잖아.”

    그녀의 말에 다정은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춘희의 말대로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들이켜고 있었다. 다정의 머릿속에 문득 세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현우 씨랑 헤어졌어요.’

    그는 안색이 좋지 않고, 표정도 없었다. 저렇게 맥없이 술을 들이켜는 것도 어쩌면 그녀와의 이별이 힘들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하는 현우에 비해,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있는 세아는 평상시와 똑같아 보였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의식하는 자신이 싫어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말자. 둘이 어찌 되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그러던 때에 부문장이 술잔을 들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목적지가 자신이 있는 테이블이라는 것을 눈치챈 다정.

    ‘이럴 때는…….’

    신속함이 생명이다. 그가 맞은편에 앉기 바쁘게, 다정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

    도망치듯 회식 장소에서 나온 다정은 화장실로 가지 않고, 가게 출입문으로 향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밖으로 나온 다정. 그녀는 식당 바로 근처에 있는 자그만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얼굴에 닿자, 술기운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원하다.’

    다정은 공원 벤치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차가운 바람이 닿은 두 뺨은 상기되어 붉은 기가 돌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보니, 또다시 세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현우 씨랑 헤어졌어요.’

    ‘왜 헤어졌는지 안 궁금해요?’

    솔직히 말해 궁금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만나고 싶을 만큼 세아도 현우를 많이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현우 또한 애교 많고 아름다운 세아를 많이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헤어졌다니…….’

    최근에 다툰 모습을 보았지만, 그게 헤어질 징조였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잠시 다투었다가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대체…… 왜 헤어진 걸까?’

    그녀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그 순간이었다.

    “한다정 씨?”

    귀에 익은 음성이 뒤에서 들려오자, 다정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현우 씨.”

    그녀의 시야 안으로 옅게 미소를 지으며 오는 현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가 다정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머리가 좀 아파서, 바람 쐬러 나왔어요.”

    다정에게 다가온 그가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앉았다.

    “부문장님 때문에 힘들죠?”

    “네?”

    “계속 한다정 씨에게 곤란한 말과 행동만 하시잖아요.”

    “하하. 부문장님이야…… 늘 그러셨는걸요.”

    “아니요. 제가 보기엔 팀장님과 사귀고 나서 심해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아무래도 저를 팀장님 짝으로는 인정하기 싫으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걸요.”

    “왜 이해가 되는데요?”

    “팀장님은 워낙 잘난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한다정 씨도 충분히 잘났어요.”

    잔잔했던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누군가에게 부족하단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

    다정은 그의 진지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뱉은 말은 예의상으로 한 말이 아닌 진심 어린 말이었다.

    ‘현우 씨는 예나 지금이나 참 다정하구나. 배려심이 깊고 매너 있는 사람이야.’

    현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에 따스함이 번졌다.

    ‘그래서 내가 이 남자를 좋아했었지…….’

    다정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감사해요. 그런 말을 또 누군가에게 들을 줄은 몰랐어요.”

    “또 누군가라니요?”

    “팀장님도 저에게 그렇게 말씀해줬거든요.”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는 현우의 얼굴엔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어색해진 다정이 말했다.

    “담배 피우러 나오셨나 봐요. 그럼 전 이만…….”

    그녀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그의 목소리가 굵게 울리며, 다정의 발목을 잡았다.

    “마음에 두었던 여자가 있었어요.”

    다정은 몸을 일으키려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현우의 눈빛 속에선 설명하기 힘든 많은 감정들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그 여자에게 많이 표현하다 보면 그녀도 날 좋아해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늘 그녀를 칭찬하고, 기분 좋게 해주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그녀와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그 사람을 포기했어요. 그때는 포기하는 게 그녀를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다정은 그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를 저토록 속상하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최근에 헤어진 연인인 세아일 게 분명했다.

    현우는 후회로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뒤늦게야 깨달았어요. 상처받기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녀를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렸다는 것을요. 내가 너무 겁쟁이였다는 것을.”

    그가 고개를 돌려 다정을 응시했다.

    “한다정 씨.”

    붉게 충혈이 된 그의 눈동자엔 물기가 옅게 어려 있었다. 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치자 다정의 눈망울이 살짝 흔들렸다. 현우는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어떡하면 좋을까요?”

    “…….”

    “억누르려고 해도 자꾸만 새어 나오는 이 감정을……. 그 사람을 마주하면 할수록 애타는 이 마음을…….”

    그의 애절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흩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줘요.”

    현우를 알고 지낸 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얼굴이었다. 늘 매너 있는 웃음을 간직했던 그가 거센 바람 앞에 마주선 풀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다정은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세아와의 이별이 이토록 힘이 들었구나. 얼마나 괴로웠으면, 얼마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면…… 아무 연관도 없는 나에게 답을 구하는 걸까.’

    다정은 그가 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 자신이 그들의 연애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때 좋아했던 남자의 연애를 저가 상담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은가.

    “미안해요. 힘든 건 알겠지만, 저로선 딱히 할 수 있는 조언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현우의 진갈색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아니. 울 것까지야!’

    뺨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 한 방울에 다정은 심히 당황했다. 너무도 애달픈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자신이 울린 기분까지 들었다.

    당혹스러운 다정은 그를 위로하고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해보았다.

    “현우 씨 마음이 그렇게 힘들다면, 참지 말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다시 한번 표현하는 건 어떨까요?”

    그녀의 말에 눈물 맺힌 현우의 눈동자가 다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우 씨는 쉽게 포기해버린 게 후회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말고, 일단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다정이 진심 어린 조언을 내뱉던 찰나였다.

    “?!!”

    거센 팔 힘에 이끌려, 다정의 몸이 그의 품에 안겼다.

    현우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은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다정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문까지 막혔다.

    “현우 씨!”

    다정이 그를 힘껏 밀었지만, 현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

    다정은 다시 한번 그를 밀었다. 하지만 밀면 밀수록 단단한 팔심이 그녀를 더욱 세게 옭아맬 뿐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은 그의 품 안에서 다정은 계속해서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현우의 팔을 확 끌어당기며, 둘의 몸이 떨어졌다. 그의 품에서 겨우 벗어난 다정이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을 땐, 현우 말고도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해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도훈이었다. 다정이 회식 자리에서 계속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어 나왔던 그가 우연히 둘의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에게 꽉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보며 현우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왕자님이 등장하셨네요.”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바뀌며 이어 말했다.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다면…… 내가 왕자님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 말에 도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가 손을 뻗어 현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금방이라도 주먹질이 오고 갈 것만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다정이 급하게 도훈의 팔을 끌어 잡았다.

    “팀장님!”

    둘이 싸우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이 상황을 다른 누군가가 목격해서는 더더욱 안 되었다. 다정이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진정하세요. 현우 씨가 술에 많이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술에 취하면 남의 애인을 막 안아도 되는 겁니까?”

    “설명하자면 길지만…… 아무튼 오해예요.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요.”

    도훈은 시선을 내려 자신을 꼭 붙잡은 다정의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맘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현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도훈에겐 다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현우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던 그의 손이 마침내 떨어졌다. 그는 맥없이 주저앉은 현우를 향해 말했다.

    “서현우 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경고입니다.”

    날렵하게 뻗은 그의 눈매가 현우를 매섭게 응시했다.

    “다시는 한다정 씨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또 한 번 이런 일을 목격했을 때는……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니까.”

    도훈은 그렇게 말한 후, 다정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현우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핏줄이 설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다정은 자신의 손을 잡고 회식 장소로 걸어가는 도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미간에 깊게 진 주름과 꽉 다문 입술이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향하던 도훈의 발걸음이 갑자기 뚝 멈추었다. 따라 걸음을 멈춘 다정에게 그가 물었다.

    “혹시 내가 방해한 겁니까?”

    “네?”

    “서현우 씨와 한다정 씨의 관계를 묻는 겁니다.”

    차가운 음성에 다정이 곧바로 대답했다.

    “현우 씨랑 전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다정은 그의 눈빛을 살폈다. 아무 사이도 아닌 둘이 왜 부둥켜안고 있었냐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도훈을 마주 본 채로 말했다.

    “현우 씨는 그저 제게 상담을 한 것뿐이에요.”

    “다정 씨가 서현우 씨 선생님이라도 됩니까? 왜 당신이 그 남자의 상담을 받아주죠?”

    도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다정이 입을 열었다.

    “사실 서현우 씨가 최근에 이별을 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별의 상처가 컸는지, 술에 취해서 제게 조언을 구하더라고요. 힘들어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보여서…….”

    “이별한 건 서현우 씨인데, 왜 한다정 씨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지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군요.”

    솔직하게 말했건만, 돌아오는 건 더욱 서늘해진 시선뿐이었다.

    “서현우 씨가 그렇게 안쓰럽고 불쌍해요?”

    “…….”

    “아니면 그 남자가 이별했다니까 다시 미련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이야기의 방향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자, 다정은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 사람이 가장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도움을 거절해요? 너무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을 어떻게 모르는 척하냔 말이에요?”

    “한다정 씨 눈엔.”

    순간적으로 굵어진 그의 음성에 다정이 말을 멈추었다.

    “나는 안 보입니까?”

    “……!”

    “내가 괴로워하는 건…… 하나도 안 보여요?”

    늘 곧았던 도훈의 음성이 흐트러지며,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난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안타깝고, 닿았다 싶으면 멀어지고, 정말로 닿았다고 생각하면 더 멀어지는 당신 때문에 미칠 지경인데!”

    거친 호흡과 함께 그가 말했다.

    “당신은…… 그게 하나도 안 보여?”

    다정의 커다란 눈망울이 파르르 떨려왔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이, 애절한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꽉 조여왔다.

    그가 험한 말을 내뱉은 것도 아니었고,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온몸에 통증이 일었다. 마치 무언가에 가슴 한복판을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를 이렇게 두어선 안 되었다. 저토록 허망한 얼굴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다정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을 뻗었다.

    “팀장님. 저는…….”

    그녀가 도훈의 소맷자락을 잡으려는 순간, 커다란 음성이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 두 분 여기 계셨네요!”

    다정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제 막 회식 장소에서 나오는 팀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팀원 한 명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둘에게 말했다.

    “2차는 맞은편 건물 호프집에서 하기로 했어요. 그쪽으로 오시면 돼요.”

    회식 장소에서 뒤이어 나온 팀원들이 길가로 나오자, 다정과 도훈 주위로 인파가 몰렸다.

    결국 둘은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2차 회식 장소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정은 복도를 걷고 있던 춘희와 눈이 마주쳤다.

    항상 일찍 오던 다정이 자신보다 늦게 오자, 춘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웬일로 늦게 왔어?”

    “어제 좀 늦게 잤더니, 늦잠을 잤어요.”

    사실 어젯밤 일로 다정은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도훈이 자신에게 했던 말과 그의 표정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춘희가 말했다.

    “한다정 씨가 늦잠 자는 일도 있구나. 얼른 자리로 가 봐. 서프라이즈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춘희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서프라이즈한 일?’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복도를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등장에 팀원들 모두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올~~~ 다정 씨는 좋겠다~~~”

    팀원들이 왜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영문을 모르던 다정은 제 책상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꽃바구니가 놓여있었다. 색색의 꽃들이 화려하게 포장된 채로.

    ‘웬 꽃이…….’

    다정이 토끼 눈이 되어 꽃바구니를 보고 있는 사이, 옆에 있던 여직원이 말했다.

    “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로맨틱하시다. 화이트데이라고 이렇게 여자친구에게 이벤트도 해주고~”

    “화이트데이요?”

    “네. 오늘 화이트데이잖아요. 몰랐어요?”

    다정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2018년 3월 14일.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탕 등을 선물해주는 기념일이었다.

    ‘팀장님이 선물해주신 거구나.’

    다정이 형형색색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어제부터 계속 꽉 막힌 듯했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 가요?”

    다정이 자리에 앉지 않고 어디론가 걸음을 돌리자 직원이 물었다. 다정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팀장님께 인사드리려고요.”

    ***

    팀장실 앞에 선 다정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흐트러진 앞머리도 정돈하여 말끔하게 옆으로 넘겼다. 깊게 심호흡한 후, 문을 두드리는 다정. 들어오라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왔다.

    노크를 한 다정이 문을 열고 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훈은 체크무늬가 들어간 회색 슈트를 입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다정은 먼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도훈도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제의 일을 제대로 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다정은 먼저 이야기를 꺼내었다.

    “어제 있었던 일 말이에요.”

    그녀는 솔직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해나갔다.

    “팀장님과 그렇게 헤어지고, 신경이 쓰여서 잠도 못 들었어요. 어제 일로 팀장님 마음이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

    “하지만 팀장님도 오해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요. 저는 서현우 씨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같은 동료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뿐이지, 다른 마음은 없었어요.”

    말을 마친 다정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도훈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가 덤덤한 어투로 대답했다.

    “한다정 씨가 어떤 마음인지 이해합니다.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겠고요. 그러니 더는 어젯밤 일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

    말은 괜찮다고 하고 있지만, 어쩐지 그의 표정은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어두워 보이는 낯빛이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이 분위기를 깨고 싶어, 다정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감사해요.”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양 입가에 가득 머금으며 말했다.

    “저 사실 그렇게 큰 꽃다발은 처음 받아봐요. 화이트데이를 챙겨주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감사해요.”

    다정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표정이 굳어있나 의아한 마음이 들 때쯤, 그가 말했다.

    “그 꽃은 내가 보낸 게 아닙니다.”

    “?!”

    다정의 눈썹이 위로 크게 솟구쳤다.

    ‘팀장님이…… 보낸 게 아니라고?’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말했다.

    “그럼 누가…….”

    “그걸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겁니까?”

    냉정한 목소리에 다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정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화려한 꽃바구니를 보내줄 사람은 도훈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녀가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도훈이 말했다.

    “더 할 이야기 없으면 이만 나가보죠. 곧 회의 시작할 시간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차가워, 다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다정이 팀장실을 나가고 난 후, 도훈은 그녀가 나간 자리를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다정이 나갈 무렵부터 계속 진동음을 내며 울리고 있었던 핸드폰을 곧바로 받았다.

    [안녕하세요. 꽃 배달 서비스입니다.]

    수화기 너머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지금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15층으로 올라가면 되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도로 가져가주세요.”

    [네? 도로 가져가라니요? 한다정 씨 앞으로 꽃바구니 주문하신 고객님 아니세요?]

    도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도훈도 화이트데이를 맞이하여 꽃바구니를 주문했다. 유치한 짓이란 건 알지만, 모두가 둘의 연애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 이벤트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회사로 오는 꽃 배달은 여자들의 로망이라고 들은 적도 있었으니.

    좋아하는 꽃은 프리지아라고 했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색상부터 모양, 포장까지 꼼꼼히 살펴 주문했다. 그녀가 꽃다발을 받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름 기대도 되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회사에 왔을 때, 그녀의 책상에는 이미 꽃바구니가 놓여있었다. 바구니 안엔 프리지아 대신 빨간색, 분홍색, 하얀색의 장미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건 자신이 주문한 꽃이 아니었다.

    뒤이어 떠들썩한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부러운 시선으로 다정을 바라보았고, 다정 또한 꽃을 받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꽃이 두 번 연속 배달된다면, 사원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그걸 막기 위해, 도훈은 자신이 계획했던 이벤트를 취소했다.

    “맞습니다. 죄송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배달은 취소할게요. 요금은 모두 지불했으니, 문제없는 걸로 압니다.”

    [아니, 그러면…… 꽃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제가 알려줘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배달은 취소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도훈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

    괜한 사람에게 목소리를 높인 자신의 꼴이 한심했다.

    도훈은 책상 위 달력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7개월.

    지금 이 순간에도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다정은 무려 2년 동안 서현우라는 남자를 좋아했다.

    그런 그녀가 다른 누구에게 마음을 여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녀의 말대로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억지스러운 줄도 잘 알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녀에 관해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답답하고, 조급하고, 화가 났다.

    그조차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어젯밤 다른 남자에게 안겨있는 다정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이성이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현우의 얼굴을 날려버리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고 또 참았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여유가 사라지고, 조바심이 났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그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부담을 느끼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멀어지는 게 두려워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다가는 어쩌면 그녀와 영영 못 닿을지도 모르니까.

    한때는 그녀에게 다가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훈은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별을 수놓은 것처럼 반짝이던 눈망울.

    생기 어린 두 뺨과 수줍은 미소.

    ‘울지 마. 오빠.’

    자신을 다독였던 따스한 손길을, 그 자그마한 손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꼭 붙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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