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 -10화 (10/32)
  • Chapter. 10

    다정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나 때문에……?’

    귓가에 맴도는 바람 소리가 멈추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듯한 진동음이 가슴을 울렸다.

    마주 닿았던 도훈의 널찍한 가슴이 떨어졌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다정을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 맞닿은 그의 눈빛은 너무도 깊고 뜨거워서, 다정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도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 안에 담긴 열기가 그녀의 뺨을 타고 전해졌다. 다정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마주한 서로의 시선이 더욱 깊어졌다.

    도훈의 긴 속눈썹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날렵한 턱선이 함께 옆으로 기울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다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심장은 미칠 듯이 요동치고. 몸은 돌처럼 경직되었다.

    도훈의 입술이 거의 맞닿으려는 순간이었다.

    “!!”

    다정이 홱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 다정은 옆으로 시선을 돌린 채로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며, 긴장한 티를 팍팍 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다정은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의 집을 떠나 자신의 집에 도착한 다정. 그녀를 본 언니들은 얼굴이 빨갛다며 놀려대기 바빴다.

    언니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체도 않고, 다정은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자신이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새하얬다. 오르락내리락 뛰는 가슴은 도훈의 집에서보다 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

    “굿모닝, 다정 씨.”

    출근한 춘희가 다정을 향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다정은 고개 숙여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일찍 오셨네요.”

    “어라? 팀장님은 안 계셔?”

    춘희는 의아한 얼굴로 불이 꺼져있는 팀장실을 바라보았다. 다정이 대답했다.

    “팀장님 오늘부터 일본 출장이세요.”

    “아참. 그렇지.”

    이어 춘희는 입매를 길게 늘이며 말했다.

    “우리 다정 씨 닷새 동안 외로워서 어떻게 버티려나~? 호호홍.”

    “…….”

    그녀의 농담에 다정은 말없이 입술 끝을 작게 올려 보였다.

    춘희가 제 자리로 가자, 다정은 시선을 돌려 팀장실을 바라보았다.

    이틀 전, 도훈의 집을 방문한 이후로 서로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던 둘이었다.

    다행히도 오늘부터 그가 출장인 덕분에 어색하게 인사를 나눌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정은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한다정 씨는 운명을 믿어요?’

    ‘난 믿어요. 아니, 믿게 됐어.’

    ‘당신 때문에.’

    굵직한 저음이 연달아 다정의 머릿속을 스쳤다.

    ‘나 때문에 운명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내가 운명의 여자라도 된다는 이야기야? 내가 왜?’

    그의 말을 곱씹어볼수록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지는 다정이었다.

    ‘게다가…….’

    다정은 이해하지 못할 말을 늘어놓은 뒤, 다가왔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붉고 도톰한 입술. 그의 입술이 향하려고 했던 곳은 분명 자신의 입술이었다.

    그 상황을 떠올리던 다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키스하려고 했어.’

    자신이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니 더더욱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정은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졌다.

    그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정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귓가에 닿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정은 비로소 회상을 멈추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각선 방향에 앉아있는 채영이었다. 다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부과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그녀는 아침부터 광이 나는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채영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파일을 정리하며 이어 말했다.

    “혹시 비품실 갈 일 있으면 인덱스 라벨 좀 가져와 줄래? 서류 정리해야 하는데 내 게 다 떨어졌지 뭐야.”

    다정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채영은 바로 며칠 전에도 비품실 심부름을 부탁했던 인물이었다.

    “…….”

    다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조금 후에 휴게실에 가려고 했으니, 그때 비품실도 들르면 그만이었다.

    대답을 내뱉으려는데 문득 도훈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들이 귀찮은 일은 한다정 씨한테도 귀찮은 일입니다. 미련하게 참지 말고 솔직히 말을 해요.’

    다정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연한 것처럼 잔심부름을 시키는 그녀의 부탁을 계속 들어주는 것은 스스로 호구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다정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저 비품실 갈 일 없어요. 갈 일이 있었더라도, 채영 씨 부탁은 들어주고 싶지 않네요.”

    “그게 무슨…….”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게 한두 번이어야죠. 채영 씨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을 왜 항상 저에게 시키세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한 듯 채영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젖어들었다.

    “그거야…… 다정 씨가 자주 비품실에 가니까, 겸사겸사 시키는 거지. 그리고 다정 씨가…….”

    “제가 품목별로 어디 있는지 잘 알아서요?”

    “…….”

    제가 할 말을 다정이 먼저 내뱉자, 채영은 금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릴 뿐 할 말을 잃었다.

    다정은 단호한 어투로 이어 말했다.

    “그럼 채영 씨는 퇴사할 때까지 저에게 비품실 심부름을 시킬 건가요? 입사 3년차면서 아직도 비품실에 A4 용지가 어디 있는지, 라벨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더 문제 아닌가요?”

    채영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녀의 이야기에 기분은 상하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도 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채영은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다정 씨.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관둬. 그깟 일이 뭐라고 참, 생색은…….”

    다정은 그녀의 행동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이 센 채영이 저에게 순순히 사과할 거라고는 예상 안 했다. 그리고 앞으로 부딪칠 때마다 어색한 분위기가 될 것도 알았다.

    그렇게 되기 싫어 지금까지 버티고 참아왔다. 하지만 자신이 베푼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더는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한동안은 나랑 눈도 안 마주치려 하겠네.’

    다정은 아직까지 입술이 삐죽 나와 있는 채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좀 더 상냥하게 말해야 했나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그 순간, 맞은편에 앉은 춘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다정을 향해 찡긋 윙크를 했다. 그리고 잘했다는 듯이 엄지를 추켜올렸다.

    다정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

    그 후로 5일이 지났다.

    그날은 모든 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평화로운 날이었고, 도훈의 출장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다정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도훈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팀장님은 서울에 도착하셨을까? 수고하셨다는 문자 정도는 보내야 되지 않을까?’

    다정이 핸드폰을 쥐고 고민하던 찰나, 파티션 너머 불뚝 일어선 한 대리의 모습이 보였다.

    “자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 왔습니다~~”

    여섯 시 정각이 되자마자, 한 대리는 자리를 비운 팀장을 대신해 칼같이 퇴근을 선포했다. 평상시 굼뜬 굼벵이처럼 행동이 느려 사원들 사이에서 나무늘보라고 불리는 그였지만, 퇴근 시각이 되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사무실을 나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여섯 시가 되자마자 빛의 속도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윤 주임이 혀를 찼다.

    “우사인 볼트도 저렇게는 빠르진 않을 거야.”

    남은 사원들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던 순간, 춘희가 여사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날씨도 좋고, 불금이기도 한데 우리 여자들끼리 한잔하는 거 어때요?”

    그녀의 말에 몇몇 여사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안 그래도 한잔하고 싶었는데.”

    “간만에 밤새도록 수다 떨어요, 우리~”

    춘희는 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정 씨도 함께 가자.”

    “네. 좋아요.”

    다정도 여사원들끼리 뭉치는 건 오랜만이었기에 흔쾌히 대답했다. 다정처럼 모임에 참여하겠다는 사원도 있었지만, 선약이 있어 빠지겠다는 사원들도 하나둘씩 나왔다.

    춘희는 말없이 외투를 걸치고 있는 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아 씨는?”

    새치름한 표정의 세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전 빠질게요.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요.”

    “그래?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거야?”

    “아니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 그럼. 세아 씨는 다음에 함께하자.”

    그때 옆에 있던 윤 주임이 시크하게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나도 패스.”

    그 누구도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이 우리 큰아들 생일이야. 구첩반상은 아니더라도 생일상은 차려줘야지. 아침에 미역국도 못 끓여줬거든.”

    여기서 큰아들은 윤 주임의 남편을 가리켰다. 젊은 사원들은 깐깐한 윤 주임이 빠진다는 소식에 속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임님도 함께 가시면 너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다음엔 꼭 함께해요~”

    사원들의 말이 내심 기분 좋은 듯 윤 주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게. 내가 크게 한번 쏘려고 했는데 아쉽네.”

    그녀의 말에 춘희가 넉살좋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럼 카드만이라도 주시면…….”

    순간 윤 주임이 살벌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자, 춘희가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

    다정과 사원들은 회사 근처에 있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호프집은 룸 형태로 되어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천장에 달린 조명등이 주홍빛을 내며 테이블을 비추었다.

    긴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은 사원들은 맥주가 나오기 바쁘게 잔을 부딪쳤다.

    “자, 건배~~~!”

    술을 한 잔 들이켠 다정이 마주한 사원들의 얼굴을 보았다. 어쩌다 보니, 회사에서 내로라하는 주당 멤버들만 모인 자리가 되었다. 물론 자신을 제외하고.

    살짝 불길한 예감이 밀려올 즈음, 사원들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여자들끼리 이렇게 술자리 가진 건 정말 오랜만이다.”

    “부문장님이랑 대리님 없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좋네요. 우리 이제 앞으로 종종 이렇게 모여요.”

    불편한 인물들이 쏙 빠진 이 자리가 마음에 드는 듯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사원들의 수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당들이 모인 자리답게 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은 곧 세 잔이 되어 어느새 테이블엔 빈 술병들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

    술에 취한 춘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살짝 충혈된 눈동자로 앞에 마주한 다정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윽한 시선에 다정이 살짝 당황하던 찰나, 춘희가 입을 열었다.

    “다정 씨는 좋겠다.”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사원이 말했다.

    “춘희 씨도 참. 다정 씨만 보면 그 이야기 하더라. 다정 씨가 뭐가 그렇게 부러운데?”

    “난 팀장님처럼 잘생긴 남자랑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결혼한 게 천추의 한이거든.”

    춘희는 평소보다 한 톤 더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우리 신랑이 내 첫사랑이야. 믿지 못하겠지만 신랑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쫓아다녔어.”

    춘희의 남편 얼굴을 아는 사원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이해한다는 듯이 춘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그래, 그래. 내가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던 거지.”

    “…….”

    “눈도 작고, 키도 작고 하다못해 월급도 적은 남자가 뭐가 그리 좋다고 따라다녔는지 몰라.”

    춘희가 후회로 물든 한숨을 크게 내뱉자, 올해로 결혼 8년 차인 사원 한 명이 한마디 거들었다.

    “춘희 씨. 키 작고, 눈 작은 건 같이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 남자는 자고로 한 군데만 크면 되지, 뭐! 안 그래?”

    그녀의 말에 유부녀 사원들이 까르르 웃었고, 젊은 여사원들은 얼굴이 빨개진 채 작게 미소 지었다.

    다정은 대체 언제쯤이 되면 자신도 이런 농담에도 크게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오고가는 농담 속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대화 주제는 남자에서 최근 재밌게 보는 드라마로 갔다가, 연예인 이야기로 갔다가, 시댁 이야기로 갔다가, 다시 남자로 바뀌었다. 곧 결혼을 앞둔 여사원 한 명이 다정에게 물었다.

    “다정 씨는 팀장님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

    “재아 씨~ 그걸 질문이라고 해? 딱 보면 몰라?”

    “잘생겼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죠.”

    그녀는 대화에 끼어든 춘희에게 한마디 한 후, 다시 다정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 다정 씨. 외모 말고도 마음에 드는 게 있었으니까 연애를 했을 거 아니야.”

    “……그렇죠.”

    “말해봐. 팀장님의 어떤 점에 끌렸어?”

    다정은 잠시 고심했다.

    도훈의 매력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애인의 장점 하나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여자가 될 수는 없었다.

    다정은 그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도훈의 말과 행동을 떠올려보았다.

    “팀장님은…….”

    다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팀장님은 회사에 늘 제일 먼저 와 계세요.”

    춘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했다.

    “그게 매력이야?”

    옆에 있는 사원이 그녀의 옆구리를 쳤다.

    “어우, 쫌! 조용히 하고 들어봐요.”

    춘희가 조용해지자, 다정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직책이 높다고 해서 당연히 가장 먼저 와야 되는 건 아니거든요. 보통 막 입사한 사원들도 처음에만 일찍 오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금방 무너지기 일쑤잖아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히 행동하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닌데, 팀장님은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찍 오셨어요. 그 전날 아무리 회식이 늦게 끝나도, 밤샘근무를 하셔도 팀장님은 늦은 적이 없었어요. 그런 팀장님을 보면서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정은 항상 두 번째로 왔기 때문에 도훈이 제일 먼저 출근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팀원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것도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랬다니, 팀원들 모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다정은 그의 평상시 모습을 떠올리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팀장님은 겉으론 차가워 보여도, 알고 보면 자상한 면이 많은 사람이에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고, 특히 부하직원들을 아끼는 마음도 커요. 부문장님께는 가끔 보는 사람이 다 조바심이 날 정도로 거침없을 때가 있지만, 저희에게 함부로 대한 적은 없으시잖아요. 말투가 무뚝뚝해서일 뿐이지, 실상 내용을 따져보면 다 저희를 위해서 하는 말들이었어요.”

    “…….”

    “그리고 팀장님이 늘 무뚝뚝하신 건 아니에요. 가끔 진지한 얼굴로 농담도 하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그가 가끔씩 던지는 농담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결국엔 늘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회상에 잠겨있던 다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보셨으면 아마 다들 웃으셨을걸요.”

    그녀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춘희의 입술이 올라갔다. 그녀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다정 씨 팀장님에게 완전히 빠졌구나…….”

    “……네?”

    “지금 다정 씨 눈에서 하트가 쏟아지고 있어.”

    “제, 제가 언제요.”

    괜스레 낯간지러운 마음이 밀려와 다정의 귓불이 붉어졌다. 옆에 있던 여사원들이 한마디씩 더 보탰다.

    “다정 씨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조금 놀랍다. 솔직히 다정 씨는 늘 표정이 별로 없었잖아. 무표정 아니면 무표정이랄까.”

    “맞아요. 연애하고 나서 다정 씨 낯빛이 달라졌어요.”

    “에이. 다정 씨가 아무리 변한들, 팀장님만 할까?”

    마지막 춘희의 말에 다정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춘희는 여전히 취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등산 갔던 날, 다정 씨 버스 타자마자 팀장님 어깨에 기대서 잠들었잖아.”

    내가 버스 타자마자 잠들었구나…….

    그 사실을 몰랐던 다정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내가 그 옆 좌석에 앉아있어서 팀장님을 봤거든. 솔직히 두 시간 가까이 누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고 생각해봐. 무겁고 조금은 짜증도 날 법할 텐데, 팀장님은 마치 잠든 아이를 보듯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다정 씨를 보고 있더라고.”

    “사……랑스러운 눈빛이요?”

    다정은 낯간지러운 단어에 눈썹이 크게 휘었다.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아, 그녀는 분명 춘희가 부풀려서 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술에 취했으니 충분히 그럴 법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순간, 다른 사원들도 하나둘씩 목격담을 말하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나도 봤어요. 눈빛이 얼마나 다정한지, 보는 제가 다 부럽더라고요.”

    “그리고 다정 씨 부문장님 때문에 술 들이켰을 때도 팀장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어.”

    “어디 그뿐이야. 다정 씨가 무슨 말만 하면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가 있잖아.”

    사원들의 말에 다정이 되물었다.

    “……팀장님이요?”

    “모르겠어? 우리 모두 다 느낄 정도로 팀장님은 변했어.”

    “…….”

    도훈과 연애를 시작한 후, 다정은 그저 자신이 몰랐던 그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했다고 생각했었다. 자신과 연애하면서 그가 바뀌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사원들의 말에 다정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순간, 사원 한 명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팀장님은 다정 씨 어떤 면에 반한 거래?”

    “네?”

    “사실 우리 모두 다정 씨가 어떻게 팀장님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궁금해하고 있거든. 김태이, 송애교가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냉미남을 무너뜨린 비결이 뭐야?”

    다정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한테도 비결 좀 알려줘~ 좋은 건 공유해야지.”

    “…….”

    다정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소리 없이 술 한 잔을 원샷한 춘희가 껴들었다.

    “그걸 본인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팀장님에게 물어봐야지.”

    그녀는 살짝 풀린 눈으로 다정을 응시했다.

    “다정 씨. 오늘 팀장님 출장 마지막 날이지?”

    “네.”

    “잘됐다. 우리 팀장님 불러서 직접 이야기 좀 들어보자.”

    “네?!”

    결단력이 빠른 춘희는 어느새 핸드폰을 손에 쥐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어디 보자. 팀장님 연락처가 어딨더라…….”

    다정이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아,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다음에 함께해요.”

    “뭐가 바빠? 스케줄은 오전에 끝났을 테고. 지금쯤이면 서울에 도착하고도 남았지.”

    “그래도 출장 갔다 와서 피곤할 테니…….”

    “아. 찾았다.”

    연락처에서 도훈의 전화번호를 찾은 춘희. 그녀의 손가락이 주저 없이 통화 버튼으로 향하려는 순간, 다정이 새파래진 얼굴로 손을 막았다.

    “제가 할게요.”

    “응?”

    “제가 연락해볼게요.”

    “흠……. 그럴래?”

    그녀의 행동을 제지한 다정은 숨을 돌린 후, 제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참석인원 반 이상이 술에 취한 이 모임에 도훈을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지난 일로 어색한 사이지 않은가.

    ‘어떻게 하지? 통화하는 척만 할까? 아니면 연결했다가 바로 끊어버릴까?’

    고심하던 다정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의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연결음이 뒤이어 들려왔다. 다정은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이렇게 된 이상 그가 깊이 잠들어 전화를 안 받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그가 전화를 받고 말았다.

    [여보세요.]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묵직하게 내려앉자, 다정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왔다.

    첫 마디를 말할 타이밍을 놓친 그녀를 도훈이 불렀다.

    [한다정 씨?]

    “저…….”

    다정이 그에게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독수리가 먹잇감을 낚아채듯, 춘희가 그녀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리고 한 층 더 높아진 톤으로 도훈에게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우리 팀장님 아니에요?”

    [왜 한다정 씨 핸드폰을 서춘희 씨가 받는 거죠?]

    딱딱한 그의 화법에도 춘희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술의 힘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취조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화내시면 저 무서워서 말 못 해요~”

    [화 안 났으니까 말씀하세요.]

    “다름 아니라 오늘 우리 여자들끼리 술 한잔을 했는데 말이죠. 기분 좋게 들이켜다 보니, 우리 다정 씨가 꼬알라가 되어서는 집이 어딘지, 여기가 어딘지,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지 뭐예요. 호호호홍.”

    […….]

    “문제는 다정 씨뿐만 아니라 단체로 꼬알라가 돼서 누가 누굴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랍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애인이 나서야 할 때인 것 같아 늦은 밤이지만 이렇게 연락을 드렸답니당.”

    다정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사원들도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숨을 죽인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이어 도훈의 굵은 목소리가 조용한 룸 안에 울려 퍼졌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그의 대답에 사원들이 옳다구나 환호를 질렀다. 장소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는 춘희에게 다정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굳이 거짓말까지 하면서 팀장님을 부를 필요는…….”

    “거짓말이라니?”

    “저 안 취했는데, 꼬알라 됐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춘희가 느긋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호홍. 그게 마음에 걸려? 걱정 마~ 이제부터 꼬알라로 만들면 되지~~”

    “?”

    춘희는 맥주잔에 맥주를 따랐다.

    “자, 지금부터 게임 타임!!!”

    컵의 6부까지 따른 맥주 위로 소주를 들이부으며 소리쳤다.

    “걸리는 사람은 무조건 원샷~~~!”

    ***

    다정은 몽롱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테이블 앞에는 소주와 맥주가 황금비율로 섞인 벌칙주가 놓여있었다. 벌써 이게 몇 번째 잔인지 셀 수가 없었다.

    게임마다 자신이 자꾸 걸리는 이유와 지진이 난 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흔들리는 이유는 예상컨대 딱 두 가지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 자기는 꼬알라가 되어가고 있거나, 이미 꼬알라가 된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겹쳐 보이는 가운데 시끌벅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걸 어쩌나~! 우리 다정 씨가 또 걸렸네!”

    “그러게 말이야. 나는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고 있어. 호홍.”

    “자, 원샷!”

    더 마시면 걸어서 집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이미 취기가 오른 다정은 분위기에 휩쓸려 흔쾌히 잔을 들었다.

    꿀꺽꿀꺽 거침없이 술을 들이켜자, 주위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맞은편의 춘희는 벌칙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다정이 마실 때마다 뭐가 그리 기쁜지 함께 들이켰다.

    “크~”

    다정은 한 모금도 남김없이 들이켠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쓰디쓴 알코올 향이 목구멍을 타고 퍼졌다.

    “우리 다정 씨 이제 보니 술꾼이네~!!”

    “멋지다, 멋져!!”

    다정의 시원시원한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 팀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팀원들이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떠들썩한 가운데, 한 팀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룸 입구 쪽을 가리켰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인물이 저기 있는데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듯해 보이는 도훈이 서있었다. 그가 말했다.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

    “팀장님~~~~!!!!”

    흡사 팬미팅 현장처럼 룸 안 가득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원들 모두 그를 반기며 자리에 앉으라고 재촉했다.

    “팀장님 오셨다~~~!”

    “얼른 앉으세요오~~”

    평소에 도훈을 어려워했던 사원들도 술의 힘을 빌려 그에게 살갑게 대했다.

    그는 한쪽에 앉아있는 다정의 옆으로 갔다. 도훈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괜찮…….”

    고개를 돌리던 다정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홱 내렸다.

    “……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다정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도훈의 짙은 눈동자를 가까이 마주하자, 지난번 그와 입을 맞출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의 향수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도훈은 볼이 빨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다정 씨는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제가 데려가죠.”

    그가 다정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벌떡 일어난 춘희가 팔을 쫙 뻗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머머~ 누구 맘대로요~?”

    춘희는 검지를 휘휘 좌우로 저어 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오는 건 마음대로여도, 가는 건 마음대로 안 되죠~~”

    “데려가라고 전화해놓고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도훈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깨갱했을 춘희였지만 오늘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그녀는 숟가락을 잡더니, 갑자기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지도훈 씨. 오늘은 우리의 팀장님이 아니라, 다정 씨의 애인 자격으로 오신 겁니다~!”

    “…….”

    “몇 가지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시면, 말없이 고이 보내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돠~~”

    도훈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대답을 꼭 해야 합니까?”

    “안 해도 되긴 한데, 그럼 벌칙주를 마셔야 해요.”

    도훈의 시선이 테이블 중앙에 있는 유리잔으로 향했다. 유리잔은 정체불명의 술과 음료들이 뒤섞여 오묘한 색을 띠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불편해지는 색에 도훈이 절로 인상을 썼다.

    “설마 저게 벌칙주입니까?”

    “어우~ 그럴 리가요.”

    그녀는 그 잔 옆에 있는 소주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벌칙주는 이겁니다.”

    “…….”

    “병째로 원샷하시면 됩니다.”

    과감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벌칙에 도훈의 낯빛에 그늘이 졌다.

    “자자.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 겁먹지 마시고요~~”

    “…….”

    “그저 다도 커플을 응원하는 사원들을 위한 작은 이벤트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내가 왜 이벤트를…….”

    “참! 다도 커플은 다정, 도훈 앞 글자를 따서 제가 방금 만든 커플명입니다. 참 잘 어울리죠?”

    도훈이 대꾸를 할 틈도 없이 그녀의 진행은 신속했다. 막힘없는 진행이 마음에 드는 듯 사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자, 첫 번째 질문!”

    춘희는 마이크 용도로 쓴 은빛 숟가락을 도훈의 입술 근처로 가져다대며 물었다.

    “처음 팀장님과 다정 씨가 커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원들이 놀랐는데요~! 둘이 어떻게 사귀게 된 건가요? 고백은 누가 먼저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다정이 흘깃 도훈을 바라보았다.

    굳이 따지면 고백은 자신이 먼저 했다. 하지만 그 고백은 실수였고, 억지로 말을 지어내야 할 도훈에게는 이 상황이 꽤 난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은…….”

    그가 곤란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다정이 먼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도훈의 굵은 음성이 그녀의 목소리를 덮었다.

    “제가 먼저 좋아했어요.”

    그 말에 다정을 비롯해 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했다.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도훈이 앞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오랫동안 한다정 씨를 지켜보다가 고백한 겁니다.”

    다정의 다갈색 눈망울이 떨려왔다.

    그저 자신을 배려해서 한 말인 줄 알면서도 심장이 뛰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도훈의 고백에 사원들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동안 겪었던 그의 모습에선 그녀를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말을 뒷받침할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보다 얼굴이 더 벌겋게 된 춘희가 들뜬 어투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구체적으로 우리 다정 씨의 어떤 면에 반하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그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춘희는 가운데에 놓여있던 소주병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

    도훈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작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사원들 모두 주말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보는 눈빛으로 도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빼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도훈이 입을 열었다.

    “예뻐서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그리 예뻤을까요?”

    “웃는 모습이요.”

    “어머, 웃는 모습이래~”

    여사원들이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을 보여주는 가운데, 그의 묵직한 음성이 또 한 번 떨어졌다.

    “일에 집중하는 모습도, 지루해하는 모습도.”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그의 한마디에 다시금 조용해졌다.

    도훈이 읊조리듯 말했다.

    “점심 먹고 나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

    “카페에서 팀원들과 수다 떠는 모습도.”

    “…….”

    “굽 높은 하이힐에 뒤뚱거리는 모습도.”

    나직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던 그가 고개를 돌려 다정을 응시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술에 취해있는 모습도.”

    그의 눈동자는 단박에 빠져들 것처럼 깊고 짙었다.

    “다 예뻐서 사귄 겁니다.”

    그 그윽한 눈빛을 마주한 다정의 눈망울이 가늘게 떨려왔다.

    귓가에 남은 잡음이 사라지고, 시야에는 그가 존재했다. 이 넓은 공간에 오직 그와 자신만이 머무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쿵쾅쿵쾅…….

    이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어대는 가슴.

    다정은 밀물처럼 빠르게 젖어드는 이 감정이 두려워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건 다정뿐만이 아니었다. 도훈의 이야기를 넋을 잃고 감상하던 사원들의 마음도 함께 녹아들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열일곱 소녀처럼 반짝거렸다.

    “어머머…….”

    늘 무뚝뚝했던 그의 입에서 이토록 로맨틱한 대사가 나올 줄 그 누구도 상상 못 했기에, 감동은 배가 되었다.

    “팀장님 정말 로맨틱하다……. 나 순간 드라마 대사인 줄 알았어.”

    “팀장님이 다정 씨에게 제대로 빠진 거였군요~”

    “부럽다, 다정 씨~ 나도 연애하고 싶다~”

    사원들은 너도 나도 흥분한 얼굴로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춘희 역시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자, 벌써 마지막 질문이 왔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면 애인을 데리고 무사 귀환할 수 있습니다.”

    사원들은 벌써 마지막 질문인 게 아쉬운 표정이었다. 이 세상에서 갓 사귄 커플의 뜨거운 연애 스토리만큼 재밌는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자, 마지막 질문!”

    춘희가 엉큼한 목소리를 내보이며 물었다.

    “첫 키스는 언제 어디서 했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룸 안의 사람들은 드디어 원하는 게 나왔다는 듯이 일제히 환호를 질렀다.

    단 두 명, 다도 커플을 제외하고선.

    다정과 도훈의 시선이 흘깃 마주쳤다. 잠시 마주쳤던 시선은 금세 떨어지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불편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춘희 씨. 질문이 너무…….”

    “질문이 너무 세다고요? 흠……. 제 딴에는 수위를 아주 많이 낮춘 질문인데 말이죠~”

    그건 사실이었다. 아마 여자들끼리만 있었다면 더한 질문도 쏟아졌을 것이었다.

    춘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다도 커플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답을 못 하는 거 보니, 두 사람 다 첫 키스를 어디서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당시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호호호.”

    묵묵히 앉아있던 도훈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냥 벌칙주를 마시죠.”

    “안 돼요!”

    소주병을 잡는 도훈의 손을 다정이 홱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이 정도면 치사량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암, 그럼요. 소주 한 병 원샷하면 사람 죽습니다, 팀장님.”

    “서춘희 씨가 그렇게 정하지 않았습니까?”

    “아우, 팀장님도 참. 당연히 농담이었지요~”

    “…….”

    “그래도 대답을 못 하셨으니, 벌칙은 수행하셔야죠? 제가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해서 낭만적인 벌칙으로 바꾸었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도훈을 향해 찡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훈은 그녀의 윙크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춘희는 몸을 돌려 사원들 모두를 바라보았다. 도훈의 등장과 춘희의 진행으로 술자리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한 가운데, 춘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독사과를 먹고 잠든 백설공주가 왕자님의 무엇으로 깨어났죠?”

    사원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제가 대답하는 춘희.

    “네. 맞습니다. 바로 키스로 벌떡 일어났죠! 그럼 술에 취한 다정 씨를 일으킬 것도 바로…….”

    그녀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도훈을 가리켰다.

    “우리 기획팀 왕자님의 뜨거운 키스가 되겠습니다!”

    “…….”

    “팀장님. 우리 다정 씨를 데려가고 싶다면 애정 어린 뽀뽀 한번 진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에 도훈은 기가 찬다는 듯이 실소를 머금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통했다.

    사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뽀뽀해~! 뽀뽀해~!”

    다정이 당황한 얼굴로 사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눈이 반쯤 풀려있고, 양 볼은 새빨간 사과처럼 물들어있었다.

    ‘……망했다. 다들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야.’

    만취한 사원들의 모습에 다정은 난감했다. 지금 그녀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이미 팀장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으니까.

    사원들이 음절에 맞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뽀뽀해~! 뽀뽀해~!”

    짝, 짝, 박수 소리와 함께 사원들의 통일된 목소리가 룸 안에 울려 퍼졌다.

    다정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손잡은 게 다인 사람이랑 뽀뽀를 하라고?

    가뜩이나 며칠 전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다정은 슬쩍 도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말이 없었다. 이 상황이 난감한 건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때 한 직원이 다정에게 말했다.

    “다정 씨. 팀장님이 쑥스러우신가 보다. 그럼 다정 씨가 먼저 뽀뽀하는 건 어때~?”

    그녀의 말에 사원들도 다정을 떠밀었다.

    다정의 안색이 점점 더 하얘졌다.

    ‘어떡하지? 진짜 커플이라면 뽀뽀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 보여야 하잖아. 여기서 정색을 하는 것도 웃기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녀의 동공이 도훈을 응시했다.

    ‘그냥 눈 딱 감고 뽀뽀할까? 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짧은 시간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을 해대던 다정이 마음을 먹은 듯 제 입술을 달싹였다. 살짝 고개를 돌려 도훈을 마주 보았다. 긴장감에 자꾸만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뽀뽀해~! 뽀뽀해~!!”

    점점 더 커지는 환호 소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다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뽀뽀쯤이야…… 서양인들은 인사로도 하잖아.’

    그녀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도훈의 볼을 향해 입술을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만들 하시죠.”

    강직한 음성이 룸 안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사원들의 박수소리가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도훈이었다. 그가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장난을 치는 것도, 그걸 받아주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

    “모두들 월요일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의 마지막 한마디에 모두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렇다.

    주말인 내일과 모레는 도훈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지만, 월요일이 되면 회사에서 마주쳐야 한다. 그는 팀원들의 인사 결정권까지 쥐고 있는 팀장이다. 게다가 냉정하기로 소문난 상사. 그런 상사의 눈 밖에 나면 얼마나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모두가 잠시 망각했던 사실을 도훈은 손수 그들의 머릿속에 입력해주었다.

    즉, 지금 그가 멈추라고 할 때 멈추라는 뜻.

    룸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얌전한 사원들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절대 술이 깨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춘희마저도 마이크로 썼던 숟가락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도훈이 다정을 응시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 네.”

    도훈은 그녀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정 씨는 내가 데려가죠. 과한 음주는 해로우니, 여러분도 적당히 마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술이 깬 사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다정의 손을 잡은 도훈이 문 앞으로 걸어갔다.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사원들에게 말했다.

    “그럼.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뵙죠.”

    ***

    골목 입구에 짙은 색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차가 멈춰 서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다정이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고 있는 도훈의 날카로운 옆모습이 보였다.

    “팀장님.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정말 죄송했어요.”

    “뭐가 말입니까?”

    “늦은 밤중에 갑자기 술자리에 부른 것도 모자라, 팀원들에게 계속 곤란한 질문을 받게 해서요.”

    다정은 집으로 오는 내내 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긴 출장으로 피곤했을 그를 불러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안한데, 더불어 자신의 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팀원에게 갖은 수모를 겪게 했으니 말이었다.

    그녀는 도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오늘 팀원들이 조금 짓궂긴 했지만, 그래도 팀장님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여자들끼리는 정말 오랜만에 모여서 마시다 보니, 다들 기분이 업된 것 같아요. 결코 팀장님을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어요. 그저 팀장님과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그랬을 거예요.”

    그녀의 진지한 말에 도훈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해요. 걱정 말아요. 나 그렇게 융통성 없는 상사 아닙니다.”

    “마지막엔 굉장히 무서우셨잖아요.”

    바로 팀원들이 뽀뽀를 시켰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도훈이 잠시 말을 삼켰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다정 씨가 많이 난감해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팀장님 눈엔 내가 그렇게 보였나 보구나. 물론 당황한 건 맞지만…….’

    다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설마 팀원들이 뽀뽀를 시킬 줄은 몰랐어요. 처음엔 당혹스러웠는데, 생각해보니 뽀뽀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은 마음도 들었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갑자기 굵어진 그의 목소리에 다정이 살짝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니, 뭐……. 외국 사람들은 인사치레로도 하는 거잖아요. 입술이 아니라 볼 정도라면, 한 번쯤 해도 상관없었을 것 같은데…….”

    그 순간이었다.

    도훈이 그녀에게로 상체를 돌리며, 그녀의 얼굴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다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도훈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하죠.”

    “네?”

    “볼은 괜찮다면서요.”

    얼굴이 새빨개진 다정이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도훈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그의 미소에 다정이 상체를 뒤로 빼며 말했다.

    “그, 그건 아까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이야기고요. 지,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다정은 급히 가방을 들며 문을 열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러자 도훈도 안전띠를 풀었다.

    “집 앞까지 같이 가죠.”

    “아니요. 괜찮아요. 바로 코앞인걸요.”

    “우산도 없잖습니까.”

    “아…….”

    다정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호프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잔잔하게 내렸던 비가 어느덧 굵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 비는 맞아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차문을 여는 도훈. 그는 트렁크에 있는 우산을 꺼내 조수석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문을 열며 다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정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고맙습니다.”

    커다란 우산 아래, 다정과 도훈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다정의 집은 차가 지나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을 5분 정도 걸어야 도착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요?”

    “오늘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 드렸어요.”

    다정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저희 가족들은 통금 시간 없이 자유로운 편이에요. ‘때 되면 알아서 잘 들어오겠지’하는 주의랄까.”

    “그 말은 이해가 안 되네요. 만약 한다정 씨 같은 딸이 있다면, 난 조금만 늦어도 걱정될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재밌는지 다정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후훗. 팀장님은 완벽하게 딸 바보 예약이네요. 아이들을 좋아하시나 봐요.”

    “딱히 아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내 아이라면 예쁠 것 같군요.”

    “하긴. 팀장님 닮으면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인물이 장난 아닐 거예요.”

    “나보단 엄마를 닮아야 더 예쁘죠.”

    “마치…… 아내가 있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마주한 다정의 가슴에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어느새 다정의 집 근처에 도착한 둘. 다정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벌써 다 왔네요. 바래다 주셔서 감사해요.”

    “술 많이 마신 것 같던데, 술은 다 깼어요?”

    “네. 팀원들이 뽀뽀 시켰을 때부터 이미 확 깼어요.”

    맙소사. 왜 자꾸 뽀뽀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본의 아니게 뽀뽀 발언을 또 해버린 다정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그녀의 두 볼을 보며 도훈이 물었다.

    “왜 얼굴이 빨개집니까?”

    “그건…… 술에 취해서.”

    “술 다 깼다면서요.”

    “…….”

    대꾸를 못 하는 다정의 모습이 귀여운지 도훈이 씩 웃어 보였다.

    “팀장님은 저 놀리는 걸 은근히 즐기시는 것 같아요.”

    “은근히 아니고 대놓고 했는데, 이제야 느꼈습니까?”

    어우, 진짜. 능글맞은 거 봐.

    다정은 그의 농담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다. 팀장님이랑 어색한 상태로 지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문득 다정은 도훈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한다정 씨는 운명을 믿어요?’

    ‘난 믿어요.’

    ‘아니, 믿게 됐어. 당신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그답지 않았던 행동들.

    굳이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다정은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푹 쉬고, 회사에서 보죠.”

    다정은 돌아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팀장님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도훈은 다시 그녀를 마주한 채로 섰다.

    쏴아아아…….

    둘이 쓰고 있는 우산 위로는 잔잔한 봄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다정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집에 갔을 때 말이에요. 그때 저를 보고 운명을 믿느냐고 하셨죠?”

    그냥 넘어가기엔 계속 마음이 쓰였던 말이었다. 앞으로 그를 계속 마주하려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저는 운명을 믿어요. 하지만 제가 운명을 믿는 건 팀장님이 아니라 아빠 때문이에요. 언젠가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모습으로든 또 다른 인연으로든 꼭 아빠를 만날 거라 생각하거든요.”

    다정은 용기 내 그에게 물었다.

    “팀장님은 왜…… 저 때문에 운명을 믿는다고 말씀하셨나요?”

    “…….”

    “제가 팀장님의 운명의 여자라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물어 본 다정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가슴을 졸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빗소리와 함께 가만히 듣고 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그의 대답에 오히려 당황하는 다정.

    도훈은 보다 더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한다정 씨가 나에게 고백하던 날부터, 아니, 회사에서 한다정 씨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왜요?”

    “계속 기다렸으니까.”

    잔잔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그의 나직한 음성이 흩어졌다.

    “당신이 나한테 오기를.”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렸으니까.”

    두근두근…….

    빨려 들어갈 것처럼 검고 짙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다정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전혀 제어가 되지 않는 뜀박질이었다.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다정의 얼굴. 마주 본 서로의 시선이 얽히고설키며 뜨거움을 더했다.

    그 순간, 도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한쪽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한다정 씨.”

    굵직한 음성에 다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닿은 뺨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붉은 기가 도는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지금 키스한다고 하면…… 또 도망칠 겁니까?”

    자신을 삼킬 듯이 바라보는 매혹적인 눈빛에 다정은 숨이 턱, 멎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눈빛,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정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도훈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짙어지는 향수향과 가까워지는 그의 입술에 다정의 눈꺼풀이 저절로 살며시 감겼다.

    다가온 도훈의 입술은 먼저 그녀의 살굿빛 뺨에 닿았다.

    너무 깊지도, 가볍지도 않은 입맞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볼에서 떨어지자, 다정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홍시처럼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도훈이 말했다.

    “볼은 괜찮다고 해놓고선.”

    “…….”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짓궂게 구는 그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다시 한번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다정은 숨을 참았다.

    도훈의 커다란 손이 아까보다 깊게 그녀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가녀린 턱 선을 지나 목 뒤쪽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도훈. 그와 동시에 그의 입술이 다정의 입술에 닿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어머? 쟤 다정이 아니야??”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음성이 귓가에 닿자, 다정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예상대로 그녀와 가장 가까운 두 여자가 서있었다. 바로 애증의 정자매 애정과 소정이었다.

    “어…… 언니들?!!”

    다정은 질겁하며, 안다시피 붙어있던 도훈을 그대로 밀쳤다.

    ***

    다정의 집.

    자정이 넘은 시각인데도 거실은 환하게 불이 켜져있었다.

    그리고 그 거실 한가운데, 네 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는 도훈이었다.

    도훈은 누가 봐도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보이는 봉해를 보며 말했다.

    “모두 주무시는데, 제가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정의 엄마 봉해는 세상 따뜻한 미소와 함께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우린 저녁잠이 없는 편이라, 보통 이 시간에 늘 깨있어요.”

    도훈의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다정의 안색은 어둡다 못해 침침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난감했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마조마해하며 가슴을 졸였다.

    둘은 몇 분 전 집 앞에서 다정의 언니들에게 발각되었다.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두 언니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를 당장 집 안으로 이끌고 갔다.

    몇 년 만에 집을 찾아온 외간 남자의 소식에 가족 모두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물론 할머니 길순도 함께였다.

    길순은 도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그려. 그러니까 자네가 뭐 하는 양반이라고?”

    도훈이 강직한 어투로 즉각 대답했다.

    “저는 다정 씨가 근무하는 기획팀 팀장 지도훈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커다래진 소정이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어머, 팀장이라고요?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데……. 혹시 회장님 아들, 그런 건 아니죠??”

    “아쉽게도 아닙니다.”

    애정이 소정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질문 수준하고는……. 드라마 좀 작작 봐.”

    그렇게 말한 후, 애정은 도훈을 향해 바로 직구를 날렸다.

    “그래서 둘이 어떤 사이인데요?”

    다정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방금 말씀드렸잖아. 우리 부서 팀장님이시라니까.”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뀌는 애정.

    “흐음. 그저 팀장님인데 이 한밤중에 부하직원 집 앞에 왔다??”

    “그야 내가 술에 취해서 데려다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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