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부문장님.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부문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도훈이 서있었다.
둘은 쉼터 구석진 곳으로 장소를 옮겨, 마주 섰다.
부문장이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뭔가?”
도훈은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현재 숙취로 힘들어하는 팀원이 많습니다. 산행이 힘든 팀원들은 쉬었다가, 먼저 내려 보내겠습니다.”
도훈의 말에 부문장의 미간이 꿈틀했다.
“뭐? 지금 여기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순식간에 거칠어진 그의 음성에도 도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네. 모두 힘들 겁니다. 휴식을 취해야 할 주말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산을 탔으니, 모두가 말은 안 해도 무척이나 지쳤을 겁니다.”
“자네 지금 내가 주말에 등산 스케줄 잡았다고, 트집 잡는 건가?”
술기운이 벌겋게 오른 부문장의 얼굴이 더욱더 달아올랐다.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고 집에서 안 쉬고 싶은 줄 알아? 팀워크도 기르고, 기강도 바로잡을 겸 일부러 시간 내서 스케줄 잡은 거네. 다 기획팀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등산으로 사내 팀워크가 길러지고, 기강이 잡힌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오히려 팀원들의 피로도만 누적시켜 능률이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군요.”
하는 말마다 똑 부러지게 다 받아치는 도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문장.
그가 이마를 쓸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외국에서 온 녀석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들으라는 식으로 혼잣말을 한 부문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보았다.
“지 팀장. 호주 회사에서는 지금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았던 모양인데, 여긴 한국이야. 한국은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엄격한 곳이야. 이런 대기업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는 도훈의 기를 누르고자, 최대한 험악스러운 얼굴로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 법을 따라야지.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상하관계 무시하고 지 팀장 멋대로 굴 셈이야?”
“그러는 부문장님이야말로 왜 한국 법을 안 따릅니까?”
도훈은 냉철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국립공원에서 음주가 금지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부문장님은 등산 때마다 팀원들에게 술을 강요하다시피 권했습니다.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등산객이 지나치는 곳인데도요.”
차가우면서도 강렬한 그의 눈빛은 그에게 질 기세가 조금도 없었다.
부문장이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도훈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시민들이 한신 건설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될까요? 또한, 이사님이나 회장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요.”
회장님이란 단어에 부문장이 발끈했다.
“……자네 지금 말 다 했나? 감히 어디서 회장님 이야기를 들먹이는 건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도훈의 음성이 조금 더 강해졌다.
“휴식 시간에 부문장님이 한다정 씨에게 했던 발언도 엄연히 성희롱에 해당됩니다.”
“뭐……? 서……성희롱?”
흥분한 부문장의 얼굴이 빨갛다 못해 샛노랗게 끓어올랐다.
“헛…….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그는 기가 막힌 듯, 연거푸 헛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부문장이 도훈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실비실해서 애도 못 낳을 것 같다는 말이 성희롱? 그깟 농담 한 번 했다고 성희롱이면 회사 사람들 다 감방 가야 돼!”
“부문장님께선 농담 삼아 던진 말이라도, 상대방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성희롱은 성립됩니다.”
“!!”
“이 정도는 요즘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데, 매년 회사에서 하는 성교육을 제대로 안 받으셨나 봅니다.”
“지 팀장!”
화가 머리끝까지 난 부문장이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꼴에 자네 애인이라고 편드는 건가? 이제 한다정한테는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군!”
“한다정 씨는 애인이기에 앞서 제 부하직원입니다. 한다정 씨가 아닌 다른 부하직원이 그런 말을 들었더라도 부문장님께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상사인 나를 가르치겠다는 거야?”
“저 또한 부문장님의 부하직원입니다. 저는 지금 부문장님께 강요하는 게 아니라, 정중하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부문장은 대체 그의 어디가 정중하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도훈은 강경한 어조로 제 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앞으로 제 부하직원에게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기세 넘치는 그의 모습에 부문장은 누가 상사이고, 누가 부하직원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부문장이 어이가 없어 하는 찰나, 도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문장님께서 표현이 남다르실 뿐, 부하직원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사님에게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
“저는 물론, 이사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늘한 목소리로 전한 그의 마지막 말에 부문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현재 도훈은 회사 대표이사에게 가장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고 있었다.
또한 이사는 회장의 아들로 강력한 실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도훈이 오늘 일어난 사건을 트집 잡아 이사에게 전하는 순간, 부문장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이었다. 가뜩이나 이사와 거리가 멀어진 요즘, 굳이 책잡힐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곧 그가 내뱉은 이야기는 말이 부탁이지,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부문장이 도훈을 바라보았다.
입사한 후 가까이서 지켜본 도훈은 머리가 똑똑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임원이 그에게 매혹될 정도였으니까.
그가 마음먹어서 못 이뤄낼 일은 세상에 없었다. 그런 그를 적으로 만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계산기를 두들겨보던 부문장은 일단 오늘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
“숙취로 등산이 힘든 분들은 모두 하산하세요. 정상까지 가는 팀원과는 두 시간 후, 입구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도훈의 말에 부쩍 느려진 걸음으로 올라가고 있던 팀원들이 반가운 기색으로 그에게 몰려들었다.
“정말 내려가도 되나요?”
“네. 부문장님께 허락받았습니다.”
“우와~! 부문장님이 웬일이시래?”
어두웠던 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의 말에 하나둘씩 걸음을 돌렸고, 결국 절반 이상의 팀원들이 하산했다.
아직 두 볼이 불그스레한 다정 역시 도훈과 함께 산에서 내려갔다.
“자존심 센 부문장님 마음을 어떻게 돌리신 거예요?”
그녀는 도훈과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혹시 치고받고 싸운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굉장히 정중하게 부탁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뭐라고 부탁드렸는데요?”
“내 애인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다정의 눈동자가 살짝 떨려왔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그가 참 대단했다.
그리고 그 말이 뭐라고 가슴이 뛰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다정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감사해요.”
“한다정 씨 나랑 공개 연애한 후로 부문장님한테 미운털 박힌 거잖습니까. 당연히 내가 해결해야죠.”
그의 모습은 진짜 애인처럼 든든했다.
도훈은 홍조가 짙은 그녀의 뺨을 바라보았다.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얼굴이 아직도 빨갛습니까?”
“별로 안 마셨는데…….”
“술은 다 깼어요?”
“네. 이제 괜찮아요.”
“다행히 업고 갈 필요는 없군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입매를 올렸다.
그 미소에 다정의 얼굴에 물든 붉은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나란히 걷는 서로의 옷깃이 스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살짝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때 도훈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에게 손이 잡힌 다정이 살짝 당황해하며 말했다.
“팀원들이 다 보고 있어요.”
도훈은 더욱 단단하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잊은 모양인데, 우리 연애의 방침은 ‘대놓고’입니다.”
뒤에서 팀원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란스러운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는 다정의 심장박동 소리에 묻혔다.
추운 날씨인데도, 그가 붙잡은 손에서 땀이 날 것만 같았다.
회사에서 가는 등산이 이렇게 두근거린 적은 처음이었다.
***
“한다정 씨.”
누군가 다정의 이름을 불렀다.
굵게 울리는 중저음이 매력적인 음성.
참 언제 들어도 근사한 목소리다.
“한다정 씨.”
다정은 또 한 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올렸다.
“인제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순간, 목소리에 취해있던 다정이 번뜩 눈을 떴다. 그리고 옆으로 기울어져 있던 상체를 잽싸게 세웠다.
옆 좌석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잘 잤습니까?”
다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스 안은 둘만 있는 듯 조용했다.
산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팀원들과 버스에 탄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그 후로는 기억이 없다.
다정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제…… 제가 잤어요?”
“네. 한 번도 안 깨고 잘 자던데요? 여기에 기대서.”
도훈이 자신의 한쪽 어깨를 쓱 올려 보였다.
낯빛이 사색이 된 다정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죠?”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그럼 출발하고 나서부터 쭉 저 어깨에 기대어 퍼질러 잤다는 거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다정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차에서 못 잔다더니, 오늘부로 체질이 바뀌었나 보네요.”
“…….”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 듯 도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다정은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다들 내린 거예요?”
“네. 모두 진작 떠났어요.”
“아…….”
“기사님만 빼고.”
그의 말에 다정이 고개를 들어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기사가 백미러로 그들을 흘깃 보고 있었다. 도훈이 그녀의 가방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님도 퇴근하셔야 하니, 이만 내리죠.”
***
버스에서 내린 둘은 근처에 주차해놓은 도훈의 차로 향했다.
도훈이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타요.”
다정이 차에 오르며 물었다.
“……팀장님은 술 안 마셨어요?”
“네.”
“왜요?”
“한다정 씨 데려다주려고.”
짤막하게 대답한 후, 도훈은 문을 닫아주었다.
그 말에 다정의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움직인 줄도 모른 채.
운전석에 탄 도훈이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았다. 차체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정은 딱히 둘 데가 없는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
그녀가 멍하니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도훈이 말했다.
“피곤하면 한숨 자요.”
“아니요, 괜찮아요.”
“하긴. 아까 워낙 많이 자서 잠은 안 오겠네요.”
“…….”
그가 던진 농담에 다정은 웃을 수가 없었다.
문득 그가 말만 안 했을 뿐, 곤혹스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듯 그녀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어깨 아프셨죠?”
“아니요. 축구공처럼 가볍던데요.”
축구공이 가볍나?
반어법인가??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옆으로 밀어내버리시지…….”
“하하. 어떻게 그럽니까.”
그녀의 말이 재밌는지 도훈이 소리 내 웃었다.
매력적인 입술 끝을 씩 올리니, 잘생긴 얼굴이 더욱 근사해 보였다.
다정은 시선을 내려 그의 널찍한 어깨를 주시했다. 딱 벌어진 어깨는 남성미와 섹시함이 동시에 풍겼다.
저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를 베고…… 내가 잠들었단 말이지.
다정의 뺨 끝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의 기분을 기억 못 하는 것이 왠지 억울했다.
그 순간 조용한 분위기를 뚫고, 차 안에 굵은 음성이 울렸다.
“안 피곤해요?”
다정이 그의 어깨에서 시선을 급히 떼며 말했다.
“네. 산에 갔다 오면 늘 피곤했는데, 오늘은 괜찮아요.”
“한다정 씨는 통금 있습니까?”
“아니요. 저희 집은 통금 없어요. 오히려…….”
오히려 언니들은 제발 어디서 외박 좀 하고 오라고 성화를 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은 하지 말자.’
다정은 뒷말을 삼켰다. 운전 중인 도훈은 시선을 정면에 둔 채 물었다.
“집에 들어가면 뭐 할 겁니까?”
“음……. 저녁 먹고 언니들이랑 사우나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렇군요.”
도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어 말했다.
“별 약속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가죠.”
무덤덤하게 내던진 그의 말에 다정의 동공은 지진이 났다.
입이 자연스레 벌어지며 그를 응시했다.
“지… 지금이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도훈.
당혹감에 다정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너무 늦지 않았나요?”
“다섯 시가 늦은 시각입니까?”
“하지만…….”
다정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본 도훈이 물었다.
“그 표정은 뭡니까?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
“…….”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다정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팀장님일지라도 결국은 남자. 성인 남자의 집에 함부로 발을 들여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도훈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
“안 잡아먹어요.”
자신의 집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도훈.
뒤이어,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직은.”
***
어둑해진 밤.
도훈의 차가 멈춰선 곳은 서울 외곽에 지어진 주택 앞이었다.
집 주변은 복잡했던 도심과 달리 한적하고 조용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오피스텔은 보이지 않았다.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맨션 외관을 보며 다정이 말했다.
“팀장님 오피스텔에서 지낸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훈은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며 대답했다.
“거긴 회사에서 제공해준 집이고요. 여기가 진짜 내 집입니다.”
“?!”
“평일엔 회사와 가까운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이 집으로 와요.”
서울에 집이 둘이나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모습에 기가 찬 다정.
독립하고 싶어도 자금이 부족해 언니들과 아등바등 사는 자신과 비교되었다.
“들어와요.”
도훈은 현관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다정에게 고갯짓했다.
다정은 사뭇 긴장한 얼굴로 그의 집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를 뒤따라 신발을 벗고 들어선 다정.
제일 먼저 깜짝 놀랄 정도로 넓은 거실과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장식과 무채색 계열의 가구들이 시선을 끌었다. 그의 집은 한눈에 봐도 넓고 깨끗했다.
“집이 정말 넓네요.”
그녀가 집 평수를 대충 가늠하고 있는 사이, 도훈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욕실은 하나인데, 먼저 씻을래요?”
그의 질문에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한 그녀의 목소리가 집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씨, 씻다니요? 왜요?”
“보통 나갔다 오면 씻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등산까지 했는데.”
민망할 정도로 덤덤한 그의 반응에 다정은 머쓱해졌다.
“전 집에 가서 씻을게요.”
“찝찝하지 않겠어요?”
맘 같아서야 개운하게 샤워는 물론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남자의 집에서 태연하게 샤워를 할 만큼 대담하지 못했다.
“그럼 손이랑 발만 씻고 나올게요.”
“그래요, 그럼.”
도훈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욕실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
다정은 텔레비전 화면을 마주 본 채 널찍한 소파에 앉아있었다.
화면에는 그녀가 평소 즐겨보는 프로그램인 <나 홀로 산다>가 방영 중이었다. 프로그램 등장인물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동안에도 다정의 입가는 전혀 올라가지 않았다.
그녀의 온 신경은 오직 물줄기 소리가 나는 욕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훈과 한 지붕 아래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가운데, 그가 지금 씻고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다정의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상상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상상이 되었다.
춘희와 부쩍 친해져서일까. 요즘 들어 음란마귀라도 쓰인 사람처럼 야릇한 상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욕실 문이 달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정은 그쪽엔 관심 없다는 듯이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도훈의 걸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은은한 바디샤워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재밌는 프로인가 봐요. 눈을 못 떼네.”
다정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상의를 탈의했다거나, 앞이 확 벌어진 가운만 입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회색 라운드넥 티셔츠에 검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려했던 모습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를 다정이었다.
“한다정 씨 취향도 파악할 겸, 나도 같이 볼까요?”
그가 자연스레 다정의 옆에 앉았다. 이마를 가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아직 물기가 촉촉하게 남아있었다. 말끔히 씻어낸 얼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를 자랑했다.
그의 나른한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젖은 속눈썹이 묘하게 뇌쇄적이다. 늘 단정했던 이미지와 달리 살짝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신선하면서도 야릇한 매력이 흘렀다.
그의 옆선을 바라보던 다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샤워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섹시해지면 어쩌자는 건지…….’
다정은 이 순간 코피가 안 터진 걸 감사히 여겼다.
회사 여직원들이 지금 그의 모습을 본다면, 체육대회 사건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닿을 거리에 앉은 그 때문에 다정은 잔뜩 긴장했다.
취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 좋은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마치 뜨거운 욕조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처럼 몸이 후끈거렸다.
두근두근…….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한 다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저 집 구경시켜주세요.”
***
그를 따라 구경한 방들은 모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결한 분위기였다. 가구와 가전제품은 딱 필요한 것만 갖춰져 있었다. 늘 그에게서 풍겼던 좋은 향기가 집 안 곳곳에서 느껴졌다.
혼자 사는 집 치고는 방의 개수가 제법 많았다. 얼핏 보이는 방만 해도 서너 개가 넘어보였다.
드레스룸과 서재를 지나, 대망의 침실로 들어선 다정. 침실 역시 다른 방처럼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다정의 시선이 모노톤의 이불과 베개가 놓인 침대로 향했다. 그녀가 사용하는 침대보다 두 배 정도 커 보였다.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팀장님 혼자 사시는 거 맞아요?”
“네.”
“그런데 무슨 침대를 저렇게 큰 걸 사셨어요?”
다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세 명도 충분히 자겠는걸요?”
그러자 도훈이 입술 끝을 매혹적으로 올리며 말했다.
“세 명은 오버고, 두 명이 딱 좋죠.”
“…….”
그 미소를 마주 본 다정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심장이 비상경보를 울렸다.
왜 무슨 말을 해도 이렇게 야하게 들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다정이 홱 걸음을 돌렸다.
“다…… 다른 곳도 구경하고 싶어요.”
도훈은 피식 웃으며 함께 걸음을 돌렸다.
“2층으로 올라갑시다.”
다정은 그를 뒤따라 집 한편에 있는 목재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던 그녀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2층엔 뭐가 있어요?”
“내가 이 집을 고른 이유가 그곳에 있죠.”
“?”
“한다정 씨를 꼭 초대하고 싶었던 이유도.”
이해 못 할 말을 늘어놓는 도훈을 따라 2층에 도착한 다정.
다정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2층은 아무런 가구도, 장식품도 없이 휑한 공간이었다.
“대체 여기 뭐가 있다는…….”
허무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다정의 시선이 어디론가 꽂혔다.
바로 아무것도 없는 2층 실내와 연결된 테라스였다.
“?!”
다정이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간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천장이 없이 설계된 테라스는 주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도심과 떨어진 곳이라 주변은 아무것도 없이 깜깜했지만, 하늘 위로는 무수히 많은 별이 빛을 발하며 반기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별들을 바라보며 다정의 눈동자가 함께 빛났다.
“와……. 너무 예뻐요. 정말…….”
테라스 문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훈.
“마음에 들어요?”
“네. 이 집 설계한 분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너무 멋져요.”
그림 같은 전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여기서 지내요.”
“에?”
“안 그래도 독립하고 싶다면서요. 난 1층에서 살 테니, 한다정 씨는 여기 2층에 살아요.”
“…….”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월세는 시세의 반 가격으로 받을게요.”
저 남자는 농담도 참 진지하게 하는구나.
다정은 순간 진심으로 받아들일 뻔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어투로 그의 진담 같은 농담을 받아쳤다.
“시세의 반 가격도 저는 비싸서 못 들어올 것 같은데요.”
“깎아줄 의향도 있으니, 생각 있으면 말해요.”
그가 피식 웃으며, 입매를 올렸다.
저 남자랑 같이 살 여자는 누가 될지 몰라도 저 미소를 매일 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도훈이 말했다.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네요. 이만 내려가죠.”
다정은 못내 아쉬운 듯 밤하늘의 풍경을 응시했다.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보고 싶어요.”
다정은 도심 속에선 쉽게 볼 수 없었던 광경을 두 눈 가득 담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테라스 난간에 살짝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반짝거리는 색을 좋아한다고 했던 건 별을 두고 한 말이었어요.”
밤하늘을 하염없이 응시하던 다정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전 겨우 여섯 살이었어요.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던 때였죠.”
그녀는 조곤조곤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이야기를 그림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전 아빠가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별이 되어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비록 닿지 않는 곳이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거든요.”
도훈은 테라스 문에 살짝 기댄 채, 그녀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별빛을 품은 그녀의 눈동자는 아련하고 어딘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오늘처럼 유난히 별이 반짝거리는 밤이면 아빠가 꼭 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엄마 말씀으로는 제가 밤마다 하늘을 보면서 아빠랑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요. 후후.”
그녀는 웃었지만, 도훈의 눈에는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서 있던 그가 입술을 떼었다.
“……아버지가 많이 그리웠겠군요.”
그녀는 도훈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립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어요.”
“…….”
“제가 태어날 때쯤부터 아버지 일이 바빠져서 언니들에 비해 저와 함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거든요.
추억에 잠긴 그녀의 눈빛에는 쓸쓸함이 번졌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모습도 봐주고, 놀이동산도 함께 가고, 반에서 1등 해서 상장 타오는 모습도 봐주고, 운동회 때도 함께 달려주고, 졸업하는 모습도…… 모두 다 옆에서 지켜봐 줬으면 좋았을걸…….”
“…….”
“조금 더 많이 추억을 만들고 떠났으면 좋았을걸…….”
다정의 눈동자가 점점 붉게 물들며, 눈물이 차올랐다.
담담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애달프게 갈라졌다.
“그랬더라면…… 흑…… 아빠도 떠나는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덜 무거웠을 텐데…….”
다정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젖어든 그녀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도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 저 진짜 남들 앞에서 잘 안 우는데…….”
다정은 급히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팀장님 앞에선 벌써 두 번씩이나 우네요.”
“…….”
“어휴, 술도 안 마셨는데 왜 이러는 건지…….”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에 다정이 난처해하는 순간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도훈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와락 자신의 품 안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는 다정.
“티…… 팀장님?”
도훈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널찍한 가슴에선 점점 빨라지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도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팀장님, 왜 이러…….”
“한다정 씨는 운명을 믿어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서늘한 밤공기를 뚫고 다정의 귓가에 닿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도훈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말했다.
“난 믿어요.”
“…….”
“아니, 믿게 됐어.”
나직한 그의 음성이 또 한 번 다정의 심장을 세차게 두들겼다.
“당신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