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다정 씨.”
다정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팀원 한 명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정의 선배 직원인 채영이었다. 채영은 복합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글자가 선명하게 안 나오네. 잉크가 떨어진 것 같은데, 비품실에서 카트리지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녀의 말에 다정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당신은 손이 없나요? 발이 없나요?
이곳이 회사가 아니고, 저 여자가 직장 동료만 아니었다면 바로 그렇게 따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로또 1등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계속 다녀야 할 직장이고, 그녀 또한 좋든 싫든 계속 마주쳐야 할 상대였다.
다정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입사한 후, 그녀의 모토는 ‘좋은 게 좋은 거다.’였다.
마찰 없이 평온한 회사생활을 보내고 싶어, 남들이 피하는 어렵고 귀찮은 일도 늘 참고 묵묵히 해냈다. 그게 자신은 물론 모두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지나치게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선 상대가 누구든 할 말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언성을 높여 서로 얼굴을 붉힐 바에 자신이 마음을 고쳐먹는 게 낫다.
비품실 한번 다녀오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소화도 시킬 겸 갔다 오지, 뭐.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모두가 편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사생활이었다.
살짝 구겼던 미간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다정이 대답했다.
“네. 가져올게요.”
채영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비품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다정 씨가 빠삭하잖아.”
만날 나만 시켜먹으니까 그렇죠.
다정은 내뱉고 싶은 말을 삼키며, 미온적으로 입매를 올렸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출입문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근처에 있던 한 대리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 다정 씨! 커피믹스도 없던데, 간 김에 가져다줄래?”
“…….”
다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다정이었다면 커피믹스가 떨어진 걸 알았던 순간에 바로 비품실에 다녀왔을 것이다.
하지만 한 대리는 점심을 먹을 때를 제외하곤, 늘 의자와 한 몸이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몸을 움직여야 하는 귀찮은 일을 하는 모습을 입사한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나무늘보일까.
오늘도 한 대리는 만사가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의자에 기대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토를 상기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좋은 게 좋은 거다…….’
마인드 컨트롤을 끝낸 다정이 그에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비품실 문을 열고 들어간 다정.
2년간 수없이 이곳을 들락날락한 덕분에 다정은 이제 눈 감고도 카트리지를 찾을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녀가 비품실 가장 안쪽에 있는 카트리지 박스로 걸음을 옮겼다. 구석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눈에 낯익은 그림이 들어왔다.
“?!”
바로 비품실 가장 안쪽에서 마주 보고 서있는 현우와 세아의 모습이었다.
아직 다정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서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다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비품실이 모텔이야? 왜 만날 여기서 난리야?
확 한마디 해주고 가버릴까?
다정은 울컥한 마음을 삭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 커플이랑 얽혀봤자 나만 스트레스 받지, 좋을 게 없잖아.’
다정은 비품실은 잠시 후에 다시 오기로 마음을 먹고, 문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녀가 문을 열고 빠져나가려던 순간, 현우의 세찬 음성이 비품실 안에 울려 퍼졌다.
“민세아. 너 정말 왜 이러는 건데?”
평소 나긋한 그의 말투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목소리.
다정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네가 요즘 보여주는 행동들은 내가 아는 민세아가 맞나 싶다.”
답답함이 느껴지는 그의 말 뒤에 세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현우 씨 나한테 뭐라 할 자격 없어.”
“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정말 나한테 미안한 점 없어?”
그녀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내 마음이 갑자기 돌변한 게 아니야. 이 모든 건 현우 씨 때문이라고.”
“…….”
“현우 씨야말로 날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잖아.”
다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둘의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더더욱 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비품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다정 씨. 여기서 뭐 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정이 얼른 비품실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긴 복도를 지나, 제 쪽으로 걸어오는 춘희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앞으로 다가온 그녀에게 다정이 말했다.
“비품실에 들를 일이 있어서요. 식사하고 오시는 거예요?”
“응. 오늘 점심 메뉴 완전 꽝이지 않았어?”
“다른 날에 비하면 오늘 반찬이 부실하긴 했죠.”
“오늘만이 아니야. 요즘 식단 정말 맘에 안 들어. 감옥도 그렇게는 안 올 듯싶어.”
춘희는 같은 층 휴게실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맛있는 커피로 속을 좀 달래줘야겠어. 커피 한잔 어때?”
“네. 좋아요.”
다정은 그녀와 함께 휴게실로 이동했다.
둘은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들고 철제와 검은색 인조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춘희는 다정이 마시는 음료를 보며 말했다.
“가만 보면 다정 씨는 만날 그것만 마시더라.”
다정이 들고 있는 음료엔 복숭아 그림과 함께 ‘3% 부족할 때’라고 쓰여 있었다. 복숭아향이 나는 이온음료였다. 다정이 말했다.
“네. 전 커피나 탄산음료는 별로 안 좋아해서요.”
“그렇구나. 2년 만에 다정 씨 음료 취향을 알게 되었네? 후훗.”
춘희는 캔커피를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의자 옆 창문으로 따뜻한 햇볕이 스며들어왔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진다. 놀러 가면 딱 좋은 날씨네.”
“그러게요.”
“이번 주말에 팀장님이랑 데이트해?”
다정은 제 다이어리에 적힌 스케줄이 떠올랐다.
[팀장님 집]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춘희 덕분에 다시금 자각하게 되었다.
다정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 봐야지. 그 시기가 한창 좋을 때거든.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때지.”
“그……렇죠.”
“날씨도 좋은데 가까운 곳에 놀러 가면 되겠다. 먼 곳이면 더 좋고.”
춘희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이어 말했다.
“배편 별로 없는 섬 같은 데로 말이야.”
왜 그녀와 이야기하면 늘 이런 쪽으로 흐르는 걸까.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무리 늑대 같던 남자들도 나중엔 식기 마련이야. 다정 씨도 불타오르는 지금을 마음껏 즐겨놔야 나중에 후회가 안 될 거야.”
“……크음.”
다정은 누가 들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헛기침했다.
그 순간이었다. 둘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한 남자가 다정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때마침 복도를 걷고 있던 부문장이었다.
다정과 춘희가 동시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부문장님.”
부문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다정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도훈과 사귄 이후로는 늘 아니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그였지만, 오늘은 더욱 날이 서 보였다.
다정을 노려보던 그는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둘을 지나쳤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춘희가 물었다.
“부문장님 요즘 왜 저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신대?”
다정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삼켰다.
***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시각.
개인적인 일로 나가 있던 팀원들이 하나둘씩 사무실로 들어왔다. 팀원 모두가 자리에 앉자, 팀장실에서 도훈이 나와 말했다.
“점심 맛있게 드셨습니까?”
“네.”라는 대답과 함께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명 춘희를 제외하곤.
춘희가 못마땅한 얼굴로 불쑥 말했다.
“오늘 점심은 영 아니었어요. 무슨 병원 밥도 아니고, 맛도 너무 싱겁지 않았나요?”
그녀가 도훈을 향해 물어보자, 팀원 모두가 그를 응시했다.
‘그런 사항은 저한테 말씀하지 마시고, 조리실에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평소 같았으면 딱딱하게 말할 남자가 말없이 입매를 올렸다. 그 옅은 미소에 여사원이 동시에 녹아들었다. 그녀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냉미남도 연애를 하더니 변하는구나…….’
확실히 그는 다정과 연애를 한 후로 무뚝뚝했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심지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미소를 남발하니, 여직원들의 심장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늘도 근사한 슈트를 차려입은 그가 서류파일을 보며 말했다.
“그럼 오후 일과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모두가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팀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예고 없이 기획팀에 들이닥친 그는 바로 부문장이었다. 그의 등장에 팀원들은 고개를 숙였고, 부문장은 성큼성큼 도훈에게로 걸어갔다.
이윽고, 도훈의 옆에 선 그가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점심은 맛있게들 먹었나?”
팀원들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의 표정을 보아,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부문장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기획팀 기강이 아주 해이해졌어. 마주쳐도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여직원들은 만날 수다만 떨고 있고 말이야.”
부문장의 시선이 다정에게로 향했다.
“회사가 카페인 줄 아는 건지……. 참.”
“…….”
다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분명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녀를 흘겨보던 부문장은 다시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기획팀 기강도 바로잡고 단합도 할 겸 오랜만에 등산을 가보자고.”
등산이란 말에 팀원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벌써 지친 얼굴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오전 아홉 시에 회사 정문 앞에 모여서 출발하지. 내가 회사 버스는 예약해 놓았으니까.”
이어지는 그의 말에 팀원들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다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주 토요일이면 내일모레잖아.’
그리고…….
다정은 마침 펼쳐놓은 다이어리를 바라보았다.
토요일은 팀장님 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단합을 위해 모처럼 준비한 일이니까 꼭 참석하도록.”
강경한 어조로 말한 부문장은 다정 쪽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혹여 그럴 일 없겠지만, 데이트 같은 사적인 일로 빠지는 사람은 절대 없어야 하네.”
다정이 움찔했다. 이것 또한 백 프로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아마도 그는 휴게실에서 춘희와 자신이 했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부문장의 바로 옆에서 강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전 선약이 있어서 참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문장의 판판한 이마가 일그러졌다.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도훈이었다. 부문장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팀장인 자네가 안 간다고 하면 어쩌라는 건가? 팀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죄송합니다. 중요한 스케줄이라서요.”
“회사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딨어? 팀장이란 사람이 회사생활을 이런 식으로 할 건가?”
공격적인 그의 말에 도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도훈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여태껏 공식적인 사내 행사에 빠진 적은 없습니다. 부문장님께서도 이틀 전이 아니라, 미리 말씀을 해주셨다면 어떻게든 스케줄을 뺐을 겁니다. 저는 다음 기회에 함께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무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역시 촌철살인이다.
정말이지 그는 회장님은 물론, 대통령과 마주해도 긴장하지 않을 남자가 분명했다.
다정이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부문장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도훈에게서 홱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팀장이 이 모양이니 팀원들이 이 꼴이지, 쯔쯧.”
기분이 상한 그는 인상을 잔뜩 쓴 채 사무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팀원들은 한때 도훈에게 다정다감했던 그의 모습은 오늘부로 더는 볼 수 없음을 짐작했다.
문 쪽으로 향하던 부문장이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다정의 책상 앞이었다. 그가 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다정 씨는?”
“네?”
다정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문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물었다.
“한다정 씨도 빠질 건가?”
그의 말에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다정에게로 향했다. 그중에는 도훈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정은 그가 갑자기 등산을 제안한 저의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아무리 가까운 산일지라도 오고 가는 데 세 시간은 걸릴 테고, `산 중턱에서 술 한잔, 또 정상에서 술판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등산을 마친 후에는 근처 백숙집이나 삼겹살집에서 또 거하게 술판을 벌이겠지.
그렇게 모든 일과를 끝내고 집에 도착했을 땐 해 질 무렵이 돼 있을 것이다.
즉, 부문장의 뜻대로 등산을 가면, 토요일 오후 한 시에 도훈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약속은 자동 취소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분명 그는 도훈과 자신의 데이트를 방해하려고 등산을 제의했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정은 흘깃 도훈을 바라보았다.
강렬하면서도 확고한 눈빛. 그의 제안을 거절하라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다정은 다시 시선을 돌려 부문장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눈빛이 험악하기 그지없다.
말만 상사지, 깡패나 다름없다.
2년 동안 보아온 부문장은 뒤끝이 장난 아닌 사람이었다.
그에게 잘못 걸렸다간 1년, 아니 평생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
찰나의 시간 동안 다정은 도훈과 부문장 사이에서 미친 듯이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떨어졌다.
“아니요. 참석하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도훈과 부문장의 표정이 교차했다.
부문장은 만족스러운 듯 입술 끝을 올렸고,
“암, 당연히 그래야지.”
라고 덧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도훈의 낯빛엔 냉기가 가득 서렸다.
그의 날 선 눈빛에 다정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부문장이 자리를 뜨고,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려는 다정의 책상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다정 씨. 잠깐 이야기 좀 하죠.”
다정이 고개를 들어 옆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앞엔 입술을 굳게 다문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팀장실로 따라와요.”
높낮음 없는 그의 음성엔 싸늘함이 느껴졌다.
그날, 다정은 뒤늦게 깨달았다.
도훈도 부문장 못지않게 무서운 남자라는 것을.
***
도훈의 부름에 다정은 팀장실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그는 두 팔을 마주 낀 채로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아있었다. 그의 잘생긴 미간엔 주름이 움푹 잡혀있었다.
팀장실로 들어온 다정이 문을 닫자마자 도훈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랬습니까?”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빛에 다정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반응이 없자, 도훈이 답답한 듯 언성을 높였다.
“왜 약속이 있다고 말 안 했느냔 말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였구나.
다정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약속이 있다고 말하겠어요?”
“말 못 할 이유는 뭐가 있죠?”
“부문장님은 저랑 팀장님이 주말에 약속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계셨어요. 그 약속을 깨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등산을 제안한 거라고요.”
“그렇다면 더더욱 완강하게 거절했어야죠. 다시는 이런 갑질을 하지 못하도록.”
그가 강경한 어투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다정은 다정대로 답답했다. 이번엔 대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다정. 그녀는 도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말했다.
“팀장님은 8개월 후에 떠나면 그만이지만, 전 앞으로도 계속 다녀야 할 직장이라고요.”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옵니까?”
“부문장님한테 너무 밉보이면 좋을 게 없다는 이야기예요. 제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부문장님은 계속 마주쳐야 할 상사예요. 앞으로 문제없이 회사생활을 하려면 부문장님 갑질에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고요.”
“이번 일만 넘기면 끝날 것 같아요? 한 번 맞춰주면, 그다음에도 계속 맞춰주기를 강요할 사람입니다.”
“치사하고 아니꼽지만 어떡하겠어요? 제가 부문장님보다 더 높은 직책이거나, 회장님 딸이 아닌 이상 별수가 없잖아요.”
“한다정 씨는 부문장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그러잖습니까.”
“……?!”
그의 말에 나름 똑 부러지게 논쟁을 펼치던 다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훈은 더욱더 거센 어투로 말했다.
“다들 귀찮아하고, 어려워하는 일을 왜 한다정 씨가 도맡아 합니까? 팀원들이 시키는 일은 왜 늘 오케이해요? 한다정 씨는 입 없어요?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확실히 말을 하라고요.”
“…….”
“한다정 씨 그런 면은 아무리 봐도 이해 안 가는 거 압니까?”
이 남자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아무도 관심 두어주지 않았던 나의 모습을.
다정은 조금 당황스러웠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고, 담담한 자세로 그에게 말했다.
“저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직장인 대부분이 다 그렇게 살아요. 힘들고 지긋지긋해도 참고, 눈치 보고, 견뎌내는 게 직장생활이라고요.”
“…….”
“팀장님처럼 능력 있고, 맘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은 이해 못 하겠지만요.”
“네. 이해 안 갑니다.”
그가 바로 대답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한다정 씨는 회사 다니는 내내 바보처럼 참고, 험한 일은 혼자 다 하겠다는 겁니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 줄 알아요? 아마 귀찮은 일 생길 때마다 부려먹기 좋은 상대 찾았다고 좋아할 겁니다. 평생 그런 취급 받으면서 회사 다니고 싶어요?”
지독하리만큼 냉철한 말에 다정의 마음이 울컥했다.
“저야말로 팀장님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네요.”
제 딴에는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왜 이토록 냉혹한 말로 돌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다정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제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세요? 제가 참을 만하다는데 왜 사람을 바보 취급하시냐고요?”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앞으로도 계속 혼자 바보같이 굴게 뻔한데.”
“그러니까 그걸 팀장님이 왜 신경 쓰시는데요? 참는 것도 저고, 고생하는 것도 전데 팀장님이 왜 이러시냐고요? 팀장님은……!”
격한 감정을 쏟아내던 다정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한번 꽉 깨문 후, 말을 이었다.
“제 진짜 애인도 아니시잖아요.”
격양된 목소리가 오고 가던 사무실이 한순간에 적막으로 뒤덮였다.
“…….”
그녀의 말에 도훈은 아무런 대척도 할 수 없었다.
다정은 조금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고, 그를 마주했다. 그녀가 말했다.
“팀장님 눈에 제가 미련하게 보인다는 거 이해해요. 하지만 제 행동으로 팀장님께 피해 준 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회생활을 하든, 그건 팀장님이 관여하실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길었던 그들의 대화는 다정의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끝이 났다.
둘의 모습은 상사와 부하직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그를 향해 다정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녀는 팀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다정이 팀장실에서 나오자, 사무실 분위기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다정은 팀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팀원들은 잽싸게 고개를 내려 일하는 척을 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팀장실 문이 닫혀있었으나, 조금만 귀 기울이면 대충 분위기가 어떤지는 알 수 있을 터.
아마 대화 내용은 자세히 못 들었어도,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는 것은 팀원들 모두 눈치챘을 것이다.
다정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흘깃흘깃 저에게로 향하는 시선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대놓고 하는 사내연애의 안 좋은 점 한 가지를 오늘 또 발견하게 되었다.
연인과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삐뚤어지면, 숨길 수 없는 재채기처럼 남들에게도 쉽게 들통나버린다는 것.
그리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관심을 감당해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책상에 앉은 다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키보드로 손을 가져갔다. 마무리 지어야 할 발표 자료가 컴퓨터 화면에 찼다.
집중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자꾸만 몇 분 전 보았던 도훈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팀장님은…… 제 진짜 애인도 아니시잖아요.’
그 말을 들은 도훈의 얼굴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씁쓸해 보였다.
다정은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 얼굴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한지 모를 다정이었다.
***
다음 날 오후.
점심시간이 되자, 다정은 팀원들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왔다.
밥과 갖가지 반찬을 담은 식판을 들고 다정은 한쪽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의 주위로 최근 친해진 여직원들 몇 명이 함께 앉았다.
“다정 씨. 반찬을 왜 이렇게 적게 담아 왔어?”
“오늘은 입맛이 좀 없어서요.”
“부럽다. 나도 입맛 좀 없었으면 좋겠다.”
여직원들의 농담에 다정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숟가락을 잡은 그녀는 맞은편 멀리 도훈이 앉아 식사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바글바글한 사원들 틈에서도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사람.
가짜 연애가 아니었다면, 절대 연애가 불가했을 사람.
다정은 재빨리 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럴 일 없겠지만, 혹여 시선이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
어제의 사건 이후로 그와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정이 밥을 한 숟갈 뜨려는 순간, 맞은편에 앉아있던 춘희가 말했다.
“팀장님이랑 아직 화해 안 했어?”
다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춘희가 이어 말했다.
“왜 싸웠는지는 몰라도 빨리 좀 화해해. 팀장님 무서워서 일을 못 하겠다고.”
“…….”
“오늘 오전 회의 때, 팀장님 냉기 도는 거 봤지? 나 정말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춘희의 말에 옆에 있던 팀원들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맞아요. 살짝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았어요. 진짜 일촉즉발의 팀장님이었죠.”
“윤아는 오늘 보고서 제출하러 갔다가 울 뻔했대요. 팀장님이 정말 지독하게 냉정한 피드백을 줬거든요.”
“요즘 괜찮아졌다 싶었더니, 다시 냉혈한으로 돌아왔어. 아니, 차라리 예전이 더 나아.”
팀원들은 종일 차가웠던 도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춘희가 다정에게 말했다.
“다정 씨가 먼저 애교 부리면서 다가가 봐. 둘 사랑싸움에 우리까지 이게 뭔 고생이야.”
“……죄송해요.”
다정은 불편함을 토로하는 팀원들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이래서 사내연애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구나. 다시금 절절하게 깨달았다.
춘희가 상체를 살짝 숙여 은밀하게 속삭였다.
“다정 씨. 아무리 화가 난 남자들도 적당한 애교와 진한 스킨십 한 방이면 다 끝나게 돼 있어. 잘 모르겠으면 내가 좀 알려줄까?”
춘희는 늘 중간이 없었다. 모 아니면 도였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간, 도훈에게 성희롱으로 고소당할지도 모른다.
다정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부끄러울 거 없어. 내가 남자들이 환장하는 기술 하나 가르쳐줄게.”
남자들이 환장하는 기술?
다정의 귀가 쫑긋했다. 솔직히 그게 뭔지 궁금하긴 했다.
“그게…… 뭔데요?”
솔깃한 다정이 상체를 낮춰 춘희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때였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다정의 옆에서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현우가 식판을 들고 서있었다. 춘희가 다정 대신 말했다.
“당연히 되죠. 식판 무겁겠다, 얼른 앉아요.”
현우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다정은 괜스레 신경이 쓰여, 도훈이 앉아있는 쪽을 흘깃 보았다. 여전히 도훈은 묵묵히 식사 중이었다.
옆에 앉은 현우가 춘희에게 물었다.
“뭔가 심각해 보이던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요?”
춘희가 최대한 고상하게 둘러댔다.
“음. 연인 간의 사랑싸움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지 토론 중이었죠.”
“그랬군요.”
“현우 씨는 남자라서 잘 알겠네요. 연인과 싸웠을 때 어떻게 풀어나가야 좋을까요?”
“당연히 대화로 해결해야죠. 서로에게 쌓인 감정은 확실하게 풀고, 똑같은 상황이 오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굳센 어투로 이야기하던 현우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다정과 마주쳤다.
“하지만 대화를 해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남자라면…….”
그가 다정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나 같으면 당장 그만두겠어요.”
다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분위기가 잠시 고요해지려던 찰나, 춘희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 현우 씨. 그건 이제 막 시작한 커플에게 너무 가혹한 조언이다~”
현우가 피식 웃었다.
“하하. 그런가요?”
딱히 할 말이 없는 다정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다정은 맞은편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느꼈다. 그녀가 도훈 쪽을 바라보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좋은 표정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
토요일 아침.
한신 건설 본사 정문 앞은 등산복을 입은 사원들로 북적였다.
그들의 안색은 이미 산 정상을 찍고 온 사람들처럼 피곤해 보였다.
“주말 아침부터 등산이라니! 집이었으면 지금쯤 따뜻한 이불 속이었을 텐데 말이야.”
“부문장님은 등산을 좋아하면 혼자 다닐 것이지, 뭐 하러 우리까지 끌고 다니는 거람.”
“게다가 이틀 전에 통보하는 게 어디 있어? 요즘 부문장님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조용히 해. 저기 부문장님 오신다.”
부문장이 등장하자, 투덜거리던 사원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사원들은 부문장에게 환히 웃으며 인사를 했고, 하나둘씩 준비된 대형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출발 시각을 10여 분 앞두고, 윤 주임이 모인 인원을 점검했다.
그녀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부문장에게 걸어가 말했다.
“팀장님이랑 민세아 씨만 빼고 모두 모였습니다. 출발할까요?”
“민세아는 왜?”
“민세아 씨는 몸이 안 좋아서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오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부문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다 꾀병이지, 뭐. 며칠 전만 해도 기운이 넘쳐 보이더구먼.”
뒤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다정은 어제 비품실에서 목격했던 세아와 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세아가 일부러 빠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둘이 꽤 심각하게 싸운 모양이네.
다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좀 봐.
내 처지에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문자 수신함을 열었다. 새로 온 문자라곤 광고 메시지가 전부였다.
다정은 어제와 그제 모두 퇴근 시간이 되기 바쁘게 제일 먼저 사무실을 나왔다.
어색할 게 불 보듯 뻔한 도훈과의 퇴근길을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그런 자신을 붙잡는다거나, 바래다주겠다고 따로 연락하진 않았다. 그것이 정말 다행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
다정이 씁쓸한 얼굴로 광고 메시지를 하나씩 지워가던 때였다.
그녀의 옆쪽 좌석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앞쪽 자리가 비어 있었네요.”
다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회색빛 등산복을 입은 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현우는 비어 있는 두 좌석 중 안쪽 자리에 앉았다.
다정도 창가석이 아닌 안쪽 자리에 앉아있었기에 둘은 나란히 앉은 꼴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가 다정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멀미가 심했는데, 잘됐네요.”
예전 같았으면 그의 웃음에 가슴이 떨려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설레지 않았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현우는 등산용 배낭을 제 옆자리에 놓으며 물었다.
“결국, 팀장님은 안 오시나 봐요?”
“아……. 네. 중요한 약속이 있으신가 봐요.”
“흠…….”
현우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화해 못 했군요.”
“…….”
다정이 말없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가 어제 한 이야기 기억나요?”
“?”
“대화가 통하지 않는 연인이라면 하루빨리 그만두라고 했던 말.”
“……네. 기억해요.”
“그 말 새겨듣는 게 좋을 거예요.”
현우는 다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제 경험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다정은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와 세아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어두워진 그의 안색에 다정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현우가 입매를 씩 올리며 말했다.
“하하. 표정 풀어요.”
“…….”
“미안해요. 아침부터 내가 너무 진지하게 굴었네요.”
현우는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다정에게 건네었다. 샌드위치와 그녀가 즐겨 마시는 음료인 3% 부족할 때였다.
“일찍 나오느라 아침 안 먹었죠? 배고플 텐데 이거라도 마셔요.”
“전 괜찮으니까, 현우 씨 드세요.”
“제 건 따로 있어요. 혹시 몰라서 여러 개 사 왔거든요. 얼른 받아요.”
현우가 음료수를 잡은 손을 쭉 내밀었다.
“네. 그럼 감사히 마실…….”
다정이 음료수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잡으려던 음료수를 누군가가 홱, 가로챘다.
“?!”
다정과 현우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마침 배고팠는데 잘됐군요.”
둘의 앞에는 음료수를 들고 있는 도훈이 서있었다.
그는 깔끔하게 핏이 떨어지는 트레이닝복에 검은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산을 탈 준비가 되어있는 복장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다정과 현우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도훈이 샌드위치도 마저 가져갔다. 그가 현우를 향해 미소 아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서현우 씨. 한다정 씨랑 잘 나눠 먹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도훈의 눈매엔 서늘한 기운이 깃들었다.
“…….”
현우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때, 도훈을 발견한 뒷좌석 여직원이 그를 반겼다.
“어머. 팀장님 오셨네요!”
그녀가 도훈에게 물었다.
“팀장님 오늘 못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러려고 했는데…….”
도훈은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현우를 삼킬 듯이 바라보았다.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서요.”
다정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도훈을 보았다.
도훈이 올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기에, 그의 등장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도훈이 말을 걸었다.
“옆으로 좀 가죠?”
그가 창가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통로석에 앉아 있던 다정은 그의 요구대로 창가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훈이 냉큼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큰 키 때문인지, 마치 다정과 현우 사이가 커다란 벽으로 막힌 느낌이었다.
도훈은 현우에게서 받은 3% 부족할 때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마셔요.”
마치 자기가 산 것처럼 음료를 건네는 그를 바라보는 다정.
이른 아침인데도 화사한 피부와 날렵한 턱선을 자랑하고 있다.
팀장실에서 옥신각신한 이후, 처음 제대로 마주한 얼굴이었다.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다정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음료를 받았다.
그리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등산 가봤자 피곤하기만 할 텐데, 집에서 쉬시지…… 뭐 하러 오셨어요?”
춘희의 말대로 애교를 떨어도 모자랄 판에 이놈의 입에선 왜 이렇게 안 예쁜 말만 나오는 건지…….
다정은 귀염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자신의 입이 진심으로 원망스럽다.
도훈은 픽,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요. 더군다나 난 등산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죠.”
“…….”
“하지만 별수 없잖습니까.”
그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수밖에.”
그 말이 지금 상황이랑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의 매력적인 미소에 다정은 사고 회로가 일순간 정지해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림과 동시에 귀 끝이 화끈거렸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표정이 이상해졌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다정은 고개를 얼른 창가 쪽으로 돌렸다.
차는 출발했고, 오늘의 날씨는 눈부시게 화창했다. 맑은 하늘에 솜사탕처럼 하얀 뭉게구름이 떠다녔다.
하지만 다정은 창밖의 풍경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창밖으로 향해있으나, 온 신경은 도훈에게 쏠려있었다.
그가 쓰는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
그의 차를 여러 번 타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앉은 적은 처음이었다.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그를 스쳤다. 긴장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버스가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다정은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꼼짝하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조금씩 풀어지고, 몸이 나른해졌다.
너무 일찍 일어난 바람에 잠도 오기 시작했다. 무거운 눈꺼풀이 연거푸 내려앉았다.
다정의 입술 사이로 하품이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졸리면 한숨 자요.”
나직한 음성에 다정이 고개를 돌렸다.
도훈이 나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한쪽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다정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나보고…… 저 어깨를 베고 자라고??’
공유처럼 넓은 어깨에 기대어보고 싶은 충동이 순간적으로 들긴 했지만, 그 욕구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다.
앞, 뒤, 옆으로 회사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가운데, 그의 어깨를 베고 태연하게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정이 말했다.
“저…… 안 졸리는데요.”
“하품 계속 하던데.”
“제가요?”
“방금 한 하품이 여섯 번째였나.”
여섯 번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나 많이 하품한 모양이었다.
다정은 애써 졸리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전 원래 버스에서 잘 안 자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차만 타면 자는 체질이었다.
도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기대도 됩니까?”
“에?”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겨우 그의 어깨를 피했더니, 이젠 제 어깨를 내어줄 상황이 온 것이다.
“어제 생각이 많아서 잠을 못 잤거든요.”
“…….”
“무거우면 말해요.”
“아니, 잠깐만…….”
다정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의 머리가 그녀 쪽으로 슬며시 기울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에 닿고, 뒤이어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도훈의 가지런한 머리칼이 스르르 흐트러졌다. 쇄골에 닿는 느낌이 간질거렸다.
남자가 제 어깨에 기대 잠드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굴이 조막만 해서인지 몰라도,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기분 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왜 이 남자는 향기까지 완벽한 걸까.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는 소리조차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다정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또다시 몸이 뻣뻣해졌다. 숨도 편하게 쉬기 힘들었다.
두근두근…….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껴안은 것도 아닌데…….
그저 어깨를 빌려준 것만으로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순간부터 다정은 잠이 싹 달아났다.
한숨도 자지 못한 건 도훈도 마찬가지였다.
***
버스가 산 입구에 도착하고, 팀원들이 차례로 내리기 시작했다.
다정도 배낭을 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아직은 추운 2월이었지만, 햇볕이 따뜻해 등산하기 더없이 좋아 보였다.
산을 오를 준비를 하던 여직원들은 멀찍이 서 있는 도훈을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조각상 같은 얼굴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와 길쭉한 다리 덕에 평범한 등산복 차림도 근사해 보였다.
여직원들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뭘 입어도 귀티가 흐르네.”
“우리 신랑이 입으면 그냥 동네 백수 같아 보일 텐데.”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었어.”
도훈은 자신을 향하는 여직원들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배낭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는 다정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가방은 당일치기 등산용치고는 쓸데없이 커 보였다.
도훈은 못마땅한 얼굴로 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에베레스트라도 갑니까?”
“아. 혹시 몰라서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다정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준비가 철저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녀가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쓰는 순간, 도훈이 손을 내밀었다.
“줘요.”
다정이 살짝 난감해하더니, 모자를 건넸다.
그 모습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한다정 씨 모자를 어디다 씁니까? 가방 달라고요.”
“……왜요?”
“왜긴 왜예요. 들어주려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정이 냉큼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손은 이미 가방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가 제 가방을 한쪽 어깨에 지자, 다정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무거울 텐데…….”
“그러니까 내가 들어야죠.”
덤덤히 말을 내뱉은 그는 앞을 향해 걸음을 뗐다. 다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울리지도 않는 인디핑크색 배낭을 짊어진 그가 왜 이렇게 멋있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도훈을 잠시 바라보던 다정은 그를 뒤따라 함께 걸었다.
살짝 떨어진 채로 말없이 등산코스를 올라가는 둘.
묵묵히 산을 오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팀원들은 우리가 싸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다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싸웠다고 표현하긴 좀 그렇지만, 비슷한 일이 있긴 했으니까요.”
“이틀 전, 내가 했던 이야기가 그렇게 기분 나빴습니까?”
“기분이 나쁘기보단…… 조금 억울했어요.”
답답한 숨을 짧게 들이쉬던 다정이 이어 말했다.
“저라고 등산이 좋아서 왔겠어요? 또 팀원들 심부름도 아무 생각 없이 마냥 받아들인 건 아니에요. 상사 눈치를 보는 것도, 동료들 간에 큰 마찰 없이 지내는 것도 업무의 일부라고 여겼다고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제 자신을 다독이고 칭찬하면서 지금껏 버텨왔는데……. 그날 팀장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까 속상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어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그녀는 고개를 올려 도훈을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상했어도 팀장님은 엄연히 제 상사이신데, 제가 너무 버릇없게 굴었던 것 같아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말을 내뱉어서 죄송해요.”
“…….”
“그리고 제가 등산에 왔다고 해서, 절대 팀장님 약속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 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는 도훈. 그가 걸음을 늦추었다.
“알고 있어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날 내 말에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죠. 하지만 한다정 씨 바보 같단 생각은 변함없어요.”
“…….”
사과하겠다는 건지, 다시 싸우자는 건지 모를 그의 말에 다정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다정을 응시했다.
“나는 한다정 씨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의 입장이 아닌 자신의 처지도 좀 생각하라고요.”
그는 굵고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남들이 귀찮은 일은 한다정 씨한테도 귀찮은 일입니다. 미련하게 참지 말고 솔직히 말을 해요. 그저께 나한테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한테도 마음속의 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라고요.”
“어떻게 그래요?”
“왜 못 합니까? 조금만 더 열 받았으면, 욕도 할 것 같던데.”
“어머. 저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에요.”
둘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흘깃흘깃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등산하는 사원들이 그들을 지나칠 때마다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다정이 속삭이듯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또 싸우는 줄 아나 봐요.”
“한다정 씨가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죠.”
도훈이 말했다.
“좀 웃어보죠?”
다정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렇게요?”
“너무 인위적인데.”
그러자 다정은 하얀 이가 보이도록 환히 웃어 보였다.
“지금도 그래요?”
“…….”
넘치도록 해맑은 그녀의 미소를 잠시 빤히 바라보는 도훈.
짙어진 그의 눈동자에 다정의 활짝 올린 입가가 살며시 떨렸다.
순간, 도훈의 시선에 멀리서 둘이 서있는 곳으로 올라오는 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다정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걸로는 부족할 것 같네요.”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선 익숙한 스킨향이 흘렀다.
유난히 검고 매혹적인 눈동자 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차올랐다.
다정의 붉어진 뺨에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도훈은 한층 더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의 애정전선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뺨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천천히 내려가,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한번 제대로 보여주죠.”
뺨을 어루만지던 도훈의 손끝이 천천히 내려가,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고개를 숙였다. 검고 짙은 눈동자 색이 확연하게 눈 안으로 들어왔다. 빠져들 것처럼 깊은 색이었다. 그녀의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흘렀다.
“어떤 식으로 보여줄까요?”
“…….”
“난 조금 진한 것도 상관없는데.”
입술에 머물던 그의 손이 자연스레 턱 쪽으로 옮겨갔다.
도훈의 날렵한 얼굴선이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다정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설마 여기서…….
키스를?
다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쿵쾅쿵쾅…….
심장은 고장 난 것처럼 뛰어댔다.
그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린 그의 향기가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다.
밀어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눈이 저절로 스르르 감겨왔다.
두근두근…….
숨조차 내쉴 수 없을 만큼 긴장된 순간이었다.
“눈은 왜 감는 겁니까?”
“……?!”
그의 말에 번뜩 눈을 뜨는 다정.
눈앞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키스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윽.”
민망함이 온몸에 사무쳤다.
다정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티…… 팀장님이 그런 뉘앙스를 풍겼잖아요.”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했으면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합니까? 벌건 대낮에, 이렇게 어르신들도 지나다니는 곳에서 키스할 리가 없잖아요.”
“…….”
“그리고 말했잖아요. ‘낮져밤이’라고. 나 낮에는 그런 짓 안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옅게 입매를 올리는 도훈.
다정은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개졌다.
처음부터 자신을 놀리려고 한 행동이 분명했다.
그에게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게 억울했고,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얄미웠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다정이 귀여운지 도훈의 입가엔 계속 미소가 걸렸다.
다정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저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신 거죠?”
“그럴 리가.”
도훈은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는 둘을 지나쳐 멀찌막이 걷고 있는 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아까는 정말 키스라도 해야 하나 고민스러울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
심각하긴 개뿔…….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다정은 입술을 삐죽대며 말했다.
“팀장님이 이렇게 유치한 장난도 치실 줄 아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많이 억울합니까?”
“당연하죠. 왠지 저만 바보 된 기분이잖아요.”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다시 할까요?”
“…….”
도훈이 매혹적인 입술 끝을 올렸다.
다정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다정.
저 페이스에, 저 미소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도훈과 마주 보고 있던 다정은 그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로 따라와 그녀의 옆에서 걷는 도훈.
그가 나직이 말했다.
“기분 풀어요.”
“…….”
“나도 나름 참은 겁니다.”
이어 무게감 있는 굵은 저음이 다정의 귓가에 닿았다.
“명색이 첫 키스인데, 여기서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의 말에 다정이 멈칫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또한 빠져들 듯 뇌쇄적이었다.
“…….”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어댔다.
다정은 속도를 내 더 빨리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득 남은 8개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 남자와 함께 있다간 심장에 위중한 병이라도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
산 중턱에 마련된 정자에서 팀원들은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모두가 정자나 근처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가운데 부문장이 일어나 목도 축일 겸, 술 한잔하자고 말했다. 그의 말에 팀원들의 손에는 종이컵이 들렸고, 컵 안은 곧 술로 채워졌다.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여사원들은 술잔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화려한 색감의 등산복을 입고 온 희수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우, 짜증 나. 무슨 술을 물 마시듯 먹자고 하는지 몰라.”
그녀의 옆에 있던 팀원들이 동조했다.
“말이 등산이지, 솔직히 부문장님은 술 마시러 온 거잖아.”
“황금 같은 주말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한쪽에서 그들의 투덜거림을 듣고 있는 다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문장이 이 등산을 기획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과 도훈이기 때문이었다. 팀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불만의 화살은 애꿎은 그녀에게로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여사원 중 유일하게 투덜대지 않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밥은 없어도 살지만, 술 없이는 못 산다는 춘희였다.
그녀는 컵 안에 술을 가득 채운 채, 옆에 앉은 다정에게 말을 걸었다.
“다정 씨. 팀장님이랑 화해한 거지?”
춘희는 컵에 담긴 술을 원샷한 후,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올라오면서 보니까,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던데?”
“아…….”
키스할 뻔했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건 춘희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사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 나도 봤어. ‘우리 커플이에요’라고 티 팍팍 내는 모습.”
“아무리 회사 밖이라지만 그래도 되는 거야? 보는 솔로 서럽게 말이야.”
“한다정 씨 바라보는 팀장님 눈빛이 뜨겁던데요. 후훗.”
솔로들의 농담 섞인 원성이 쏟아졌다.
몇몇 여사원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도훈과 다정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부문장이 불쑥 다가왔다.
그 짧은 사이에 술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그의 눈 밑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다정의 쪽으로 성큼 걸어와 말했다.
“다정 씨. 내 술도 한잔 받아야지~!”
다정의 잔에 술을 따르려던 부문장이 인상을 팍 썼다.
“뭐야. 아직도 첫 잔을 안 마셨어? 내가 첫 잔은 원샷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
“왜 멀뚱히 있어? 얼른 비우고 받아야지.”
다정은 소주가 담긴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순간 도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한다정 씨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의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