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 -7화 (7/32)
  • Chapter. 7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훈과 헤어진 후, 사무실에 도착한 다정.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다정은 살짝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도훈이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굳이 따지면, 난 낮져밤이입니다.

    난 낮져밤이입니다.

    낮져밤이…….

    악!!

    다정이 괴로워하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다 들었어! 다 들었다고!!’

    사색이 된 다정의 얼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팀장님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벌건 대낮에, 그것도 회사 카페에서 19금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허구한 날 그런 음란한 대화를 즐기는 여자로 볼 거 아니야.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팀장님 이야기를…….

    다정은 팀원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시 곱씹어보았다.

    티셔츠만 입은 그의 복근이 어쨌다는 둥, 체력이 좋은 것 같다는 둥, 밤에 장난이 아닐 것 같다는 둥…….

    대화를 상기할수록 다정의 얼굴은 처참해졌다. 앞으로 그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할지 걱정이었다.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다정은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굳이 따지면, 난 낮져밤이입니다.’

    팀장님이 낮져밤이?

    낮이밤이도 아니고 낮져밤이?

    팀장님이 누구한테 져주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부문장은 물론 다른 임원들 앞에서도 비위를 맞추거나 기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체육대회 때 휩쓸었다는 이야기도, 결국은 그가 그만큼 승부욕이 강해서일 테다.

    그런 남자가 누구한테 일부러 져준다는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흠. 애인한테는 한없이 맞춰준다 이거지.

    그 대신 밤에는…….

    “…….”

    밤에는 뭐?

    순간 다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쳤어.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정은 고개를 좌우로 세게 저었다.

    일하자, 일.

    그녀는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없는 업무를 찾아 헤맸다. 서류를 펼치고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도훈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그것도 침대 위, 상의를 탈의한 채 섹시함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다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상상하지 마. 상상하지 말라고!’

    ***

    저녁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엘리베이터 안에는 퇴근 중인 사원들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다정과 도훈도 있었다.

    그와 살짝 떨어진 곳에 선 다정.

    오늘 낮에 있었던 사건 이후로 그와 마주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 그의 얼굴만 보면 자동으로 ‘낮져밤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도착하고, 다정은 슬쩍 팀원들 사이에 껴 로비 층에서 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한다정 씨.”

    굵은 음성에 다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바로 도훈이었다.

    “어디 가요? 차는 지하에 있잖아요.”

    “아…….”

    로비 층에서 함께 내렸던 팀원이 물었다.

    “오늘은 팀장님이랑 같이 안 가?”

    다정은 저에게 향하는 사원들의 시선을 느꼈다.

    가짜 연애를 시작한 후, 도훈은 늘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오늘은 둘이 따로 퇴근하자, 팀원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연애하기 전 습관이 남아서, 자꾸 로비 층에 내리네요. 하하.”

    엘리베이터에 탄 다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모른 척해주지, 굳이 붙잡은 도훈이 얄미웠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에 도착했다. 도훈과 함께 내린 다정은 주차된 그의 차로 향했다.

    차 앞에 도착한 다정이 그에게 말했다.

    “매번 저 바래다주시는 거 귀찮지 않으세요?”

    “안 귀찮습니다.”

    “팀원들 눈이 신경 쓰여서 바래다주는 거라면 괜찮아요.”

    조수석 문을 열어주려던 도훈이 그녀를 응시했다.

    다정이 말했다.

    “애인이라고 만날 꼭 같이 퇴근하라는 법 있나요?”

    “네. 당연히 같이 퇴근해야죠.”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이어 말했다.

    “이대로 한다정 씨 회사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줘 볼까요? 내일 팀원들 사이에서 둘이 싸웠네, 헤어졌네, 별소리가 다 나올 겁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이 좀 더 짙어졌다.

    “말했잖아요. 연애든, 일이든 난 완벽하게 하고 싶다고.”

    그는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한다정 씨 바래다주는 거 하나도 안 힘듭니다. 걱정하지 말고 타요.”

    강경한 그의 어투에 다정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결국, 그녀는 감사하단 말과 함께 조수석에 올라탔다. 힘들어지면 언제든 이야기하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본 도훈은 문을 닫아주었고, 자신도 차에 올랐다.

    그가 시동을 걸려던 차에, 다정이 말을 꺼내었다.

    “저……. 팀장님께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요.”

    그녀의 말이 의외였는지 도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나한테요?”

    “네.”

    “뭐가 궁금한데요?”

    “조금 많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도훈이 시동을 걸고, 핸드 브레이크를 내리며 말했다.

    “아니요. 지금은 배고파서 안 되겠는데.”

    “……아. 그럼…….”

    이어 도훈의 굵은 음성이 그녀의 목소리를 덮었다.

    “그럼 이야기는 저녁 먹으면서 하죠.”

    ***

    다정은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몇 분 전 잘 구운 스테이크와 채소로 가득했던 접시는 어느새 깔끔하게 비어있었다.

    다정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도훈을 흘깃 보았다. 그 역시 비슷하게 식사를 마치고, 물잔을 입술에 가져가고 있었다.

    엉겁결에 또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또 굉장히 비싼 곳.

    하지만 비싼 만큼 요리는 황홀한 맛을 선사했다.

    이 레스토랑 역시 그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해서 따라왔다.

    하지만 슬쩍 본 메뉴판은 다정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이번만큼은 아무리 그라도 부담스러울 금액. 이번엔 꼭 더치페이하자고 해야겠다.

    디저트가 나오기 전, 도훈이 물었다.

    “식사도 끝났으니, 이제 말해 봐요. 나에게 묻고 싶었던 이야기가 뭡니까?”

    다정은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카페에서 있었던 일 말이에요.”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그가 아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바로 말했다.

    “팀원들이랑 음담패설 나누었던 일 말하는 건가요?”

    “…….”

    가슴 한가운데 꽂히는 직구에 맛있게 먹었던 스테이크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기분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도훈이 그녀에게 물잔을 건네었다.

    “물 좀 마셔요.”

    입매를 씩 올리는 그의 모습에 다정의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일부러 나 놀리려고 저러는 거 맞지?

    가만 보면 은근히 능글맞다니까.

    다정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혹여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요.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건 오늘이 정말 처음이었어요.”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 일 때문에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팀원들 모두 팀장님을 좋아하고, 그만큼 관심이 있어서 한 이야기였어요.”

    “기분 안 나빴어요. 오히려 난 한다정 씨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으면 한걸요.”

    “…….”

    아까부터 입매를 내리지 못하는 그가 수상하다.

    왠지 말은 저렇게 해도, 이 사건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정이 물었다.

    “대화 내용은 어디서부터 들었어요?”

    “글쎄.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는 질문부터였나.”

    “그럼 다 들은 거나 다름없네요…….”

    “나도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팀원 한 명 목소리가 워낙 커서 저절로 들리더군요.”

    춘희 씨…… 말하는 거구나.

    하긴. 그 큰 목소리를 못 듣는 것이 더 이상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뒤늦게 춘희를 원망해봤자 남는 것은 없다.

    다정은 오늘 그에게 정말 들어야 하는 주제로 대화를 넘기기로 했다.

    “사실 저도 팀원들에게 팀장님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란해요. 그도 그럴 것이 전 팀장님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더라고요.”

    “전혀?”

    “네. 오히려 팀원들보다 더 모른달까…….”

    “…….”

    “그래도 명색이 팀장님 애인인데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다정은 제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물건은 바로 검은색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와 펜이었다. 그녀는 도훈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팀장님의 프로필을 작성해볼까 해요.”

    무슨 대단한 업무를 맡은 사람처럼 결연한 얼굴로 다이어리를 펼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도훈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펜을 잡고, 쓸 준비를 마친 그녀가 물었다.

    “먼저 나이부터.”

    첫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훈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내 나이도 모릅니까?”

    “알고 있죠. 그런데 제가 기억하고 있는 나이랑 확실히 맞는지 확인하려고요. 또…… 호주 나이를 쓰셨을 수도 있고.”

    “한국에서 왜 호주 나이를 써요? 한국 나이로 서른한 살, 호주 나이로는 스물아홉입니다.”

    그가 불러주는 대로 다정이 다이어리에 받아 적었다.

    반듯하면서도 귀여운 글씨체가 도훈의 시선에 들어왔다.

    “생일은요?”

    “11월 1일.”

    “혈액형은요?”

    “혈액형 묻는 나라는 우리나라랑 일본밖에 없는 거 압니까?”

    “대답하기 싫으시면 넘어갈게요.”

    “B형이요.”

    다정이 다이어리에 적다 말고, 흠칫 고개를 올렸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왜 그래요?”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B형이었거든요.”

    “…….”

    다정은 전 남자친구와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자존심 강하고, 다혈질적인 성향이 있었죠. 평소에는 잘해주었는데, 가끔 말다툼하면 어떻게든 절 이기려고 했어요. 한 번 욱하면 누구도 못 말렸죠. 결국…… 끝도 별로 좋지 않았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그의 목소리 톤이 확 가라앉자, 다정이 움찔했다.

    “왜…… 화를 내세요?”

    “한다정 씨. 그 남자가 못된 놈이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모든 B형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저 그런 말은 안 했는데…….”

    도훈은 목이 타는 듯 물을 들이켰다. 다정은 저가 말실수를 했나 생각해보았다.

    그가 벌컥 마신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구남친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다정은 다이어리에 ‘집’이라는 단어를 쓰며 말했다.

    “집은 어디 쪽에 있어요?”

    “논현동이요.”

    “혼자 사시는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니, 부모님이나 친구가 같이 살 수도 있잖아요.”

    “부모님은 호주에 계세요.”

    “그렇군요. 저번에 팀장님이 오피스텔에 사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다정이 선뜻 말하기가 난감한 듯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평수는 어떻게 돼요?”

    “……평수가 왜 궁금하죠?”

    “저도 이해가 가진 않는데요. 사실 팀원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이야기예요. 팀원들 사이에선 팀장님이 매우 잘 산다는 소문이 있나 봐요. 제가 당연히 집에 가본 줄 알고, 몇 평이냐는 질문부터 집 구조까지 물어보더라고요.”

    “…….”

    그의 대답이 늦자, 다정이 바로 집이란 단어에 엑스 표시를 그으며 말했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넘어갈게요.”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도훈이 말했다.

    “집은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네?”

    “이번 주말에 어때요?”

    다정의 손에 힘이 풀리며, 펜을 놓쳤다. 테이블 위로 펜이 또르르 굴러갔다.

    도훈이 그 펜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집으로 와요.”

    다정이 토끼처럼 커진 눈을 여러 번 껌뻑였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다시 한번 물었다.

    “팀장님 집으로요?”

    “네. 말로 설명하기엔 집 구조가 워낙 독특해서 말이죠.”

    오피스텔 구조가 독특해 봤자 얼마나 독특하다고…….

    “어차피 사귀는 기간 동안 계속 받을 질문이라면, 미리 답사해놓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의 눈빛과 말투에서 흑심이라곤 0.1프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오버하면 이상한 여자가 되겠지??

    다정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글……쎄요. 주말에 스케줄이 없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스케줄은 개뿔. 네가 무슨 연예인이야?

    그녀는 저가 말해놓고도 우스웠다.

    이렇게 말한 후, 내일 확인해보니 중요한 일이 있어 못 갈 것 같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는 참이었다.

    “그럼 확인해봐요.”

    도훈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요?”

    그는 다이어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중요한 스케줄이 있다면 다이어리에 써놓았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는 씩 웃는 도훈.

    “…….”

    다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친 덫에 제가 걸려버린 꼴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결혼한 후로 주말은 거의 가족들과 보냈다. 특히, 애인이 없는 세 자매는 주말이면 똘똘 뭉쳐 영화관을 가거나, 쇼핑하러 갔다.

    그런 그녀의 주말에 특별한 스케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정은 월간 일정표가 있는 페이지를 향해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이번 주는 물론, 한 달 내내 주말 스케줄은 텅텅 비어 있었다.

    굴욕적이었지만 다정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다행히…… 중요한 스케줄은 없네요.”

    “잘됐네요. 그럼 토요일에 보기로 하죠.”

    “토요일 언제요?”

    “언제가 좋을까요? 난 낮도 밤도 상관없는데.”

    낮도 밤도…….

    낮과 밤이란 단어가 나오니, 다정의 머릿속엔 ‘낮져밤이’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어김없이 귓가를 울리는 음성.

    ‘굳이 따지면, 난 낮져밤이입니다.’

    미쳤어.

    이 상황에 그 말은 왜 떠올려?

    다정의 뺨이 봉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음담패설이 이렇게 위험한 후유증을 낳을 줄은 몰랐다.

    어찌 되었든 밤에 이긴다는 남자와 밤에 만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서둘러 말했다.

    “밤보단 낮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네 시에 보죠.”

    ……네 시?

    네 시가 낮이야?

    “네 시보단 한 시가 나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그가 옅게 입술을 올리며, 물잔을 들었다. 속 터지는 저와 달리, 여유로움이 넘쳐흐른다.

    물을 마시던 도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다이어리에 안 써요?”

    “……네?”

    “방금 중요한 스케줄 생겼잖아요.”

    그리곤 또 한 번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미소.

    저렇게 멋진 남자가 웃는데 안 떨리는 게 비정상이다.

    자신의 심장은 완벽히 정상이라고 자부하며 다정은 이번 주말 스케줄에 글자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팀장님 집]

    ***

    좁은 골목길을 앞에 두고, 세련된 색감이 돋보이는 세단 한 대가 멈춰 서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도훈과 다정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정은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온 도훈을 말리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도훈은 가로등이 거의 없는 골목길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고, 길도 너무 어둡군요.”

    “아니에요. 저 만날 혼자 가는 길인걸요. 그래도 납치 한 번 안 당하고 잘 다녔어요.”

    “한 번 안 당했다고, 계속 안 당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한 도훈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다정 씨 납치되면 난 못 구해주니, 그냥 같이 가죠.”

    그 말이 썩 기분 좋게 와 닿지는 않은 듯, 다정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녀는 도훈을 따라가며 물었다.

    “왜 못 구해주는데요?”

    “내가 리암 니슨이라도 됩니까? 납치범이 작정하고 납치하면, 경찰은 물론 CSI가 와도 못 잡아요.”

    지극히도 현실적인 대답에 살짝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다정이 진지한 얼굴로 조언했다.

    “그런 이야기…… 진짜 애인한테는 되도록 하지 말아주세요.”

    도훈이 걸음을 늦추며, 그녀를 응시했다.

    “왜요?”

    “여자들은 현실이 아닌 로맨틱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요. 빈말이라도 무조건 널 구해낼 거라고 해야죠. 여자들은 그런 말에 녹아들거든요.”

    “한다정 씨도 그럽니까?”

    “아니요. 전 너무 오글거리는 건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그럼 됐네요.”

    짤막하게 대답한 그가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둘은 다정의 집을 향해 함께 걸었다.

    다정은 자신과 나란히 걷는 그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굴곡진 그의 옆선이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냈다. 향수 냄새가 코끝에 은은하게 맴돌았다.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일 뿐인데, 매일 걷던 퇴근길의 모습이 달라 보인다. 어두침침했던 길이 잔잔한 불빛이 도는 분위기 있는 골목길로 변했다.

    함께 걷는 누군가가 팀장님이어서일까.

    다정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도훈이 말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그녀는 급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할 말은 없었지만, 마침 묻고 싶었던 질문 하나가 기가 막히게 떠올랐다.

    “아, 맞다. 물어보려고 했던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뭔데요?”

    “호주에서 오셨는데, 한국말은 왜 이렇게 잘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한국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렇구나……. 부모님은 호주에 계신다고 했죠? 한국에는 안 오세요?”

    “아버지가 워낙 바빠서요.”

    “어머니만이라도 초대하면 안 되나요?”

    “어머니는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의 말에 다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아……. 유감이네요.”

    도훈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고 해도, 부모의 죽음이 슬프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다정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어요. 사실 저도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때 전 너무 어려서 죽는다는 의미를 잘 몰랐어요.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갔다가, 언젠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거라 믿었어요.”

    “…….”

    그녀의 이야기에 도훈의 눈매가 가늘게 흔들렸다.

    “전 팀장님에 대해 모르는 게 정말 많네요.”

    다정이 그에게 물었다.

    “저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어요?”

    “기본적인 인적사항은 인사기록카드에 나와있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도훈이 물었다.

    “뭘 좋아합니까?”

    “……?”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꽃,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영화 장르 등 뭐든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다정의 다갈색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듯했다.

    “흠……. 음식은 웬만한 건 다 잘 먹고요. 좋아하는 장소는 겨울 바닷가처럼 조용한 곳이요.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싫어해요. 집이 워낙 시끄러워서요.”

    그녀가 하는 말을 도훈은 잠잠히 듣고 있었다. 다정은 이어 말했다.

    “좋아하는 꽃은 프리지아요. 잔잔한 음악을 즐겨듣고, 영화는 무서운 거 빼고 다 잘 봐요. 그리고 색깔은…… 반짝거리는 색이 좋아요.”

    “……반짝거리는 색은 뭡니까?”

    “별처럼 반짝이는 색이요.”

    “…….”

    이해하기 힘든 듯 도훈이 미간을 늘어뜨렸다. 그 표정에 다정이 웃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다정의 집에 거의 다 다다랐다.

    그때, 도훈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남자는요?”

    “……?”

    그의 질문에 다정이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남자가 좋습니까?”

    그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다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딱히 좋아하는 스타일은 없어요. 대신, 절대 싫은 스타일은 있어요.”

    “그게 어떤 스타일인데요?”

    “거짓말 잘하고 무책임한 스타일이요.”

    그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흠, 하더니 말했다.

    “예전에 사귀었던 애인이 그랬나 보군요.”

    “…….”

    “B형 그놈입니까?”

    “…….”

    작두를 탄 듯한 그의 적중률에 다정이 말을 잇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심각해 보이는 도훈이 말했다.

    “한다정 씨. 그 남자가 못된 놈이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모든 B형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아까도 한 말을 또 하시네요…….”

    그것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게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그가 짙은 눈빛으로 다정을 응시했다.

    “나는 그 남자와 다르단 뜻이니까.”

    그의 말에 다정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짙은 흑색을 띠고 있었다. 빠져들 것만 같은 눈빛이 그녀의 심장을 두들겼다.

    그 순간이었다.

    “언니. 오랜만에 사우나 하고 오니까 좋다~”

    “넌 때 좀 작작 밀어. 창피해서 혼났어.”

    골목 끝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다정의 귓가에 울렸다.

    비록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다정의 언니들이었다.

    ‘헉!!’

    마치 경찰을 발견한 범죄자처럼 그녀가 안절부절못하자, 도훈이 물었다.

    “왜 그래요?”

    “저희 언니들이 오고 있어요.”

    다정은 언니들이 올라오고 있는 언덕길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수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근처에 숨을 곳이라곤 가로등밖에 보이질 않았다. 아쉬운 대로 다정은 도훈의 손을 잡고 가로등 뒤로 숨었다. 도훈의 등을 마주하고 그녀는 최대한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다.

    도훈이 물었다.

    “꼭 숨어야 합니까?”

    “네!”

    “이런다고 숨어질 리가…….”

    그의 말이 맞았다. 가뜩이나 요즘 살이 오른 자신의 덩치는 가로등과 도훈의 몸으로 숨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정의 가족에게 남자를 소개하는 건 대단히 큰 의미였다.

    엄마와 할머니는 늘 누구라도 좋으니 남자 한 명만 데려오라고 보챘고, 두 언니는 자신들은 이미 틀렸다며 다정에게 미루었다.

    식구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을 집 앞까지 바래다준 이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면, 아마 몇 달 동안 도훈의 이야기로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계약 연애인 줄 모르는 가족들은 사귀는 건 물론 결혼까지 하라고 부추길지도 모른다.

    이러한 연유로 다정은 절대 가족들에게만큼은 도훈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고 말해도, 기어코 특별한 사이로 만들어낼 사람들이었다.

    언니들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다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감는다고 언니들이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안 돼. 이러다 들키겠어.’

    그녀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다정이 더욱더 몸을 웅크리던 순간이었다.

    도훈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 코트 앞을 열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다정의 어깨를 안자, 그녀의 몸이 도훈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

    다정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언니들에게 들킬까 봐 두근대던 가슴은 다른 의미로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다정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언니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정은 숨을 죽이고, 매미처럼 그의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자연스레 한쪽 뺨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셔츠 너머, 탄탄한 가슴 근육이 볼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다정의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두근두근…….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진동이 크게 울려 퍼졌다.

    시트러스 계열의 은은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그의 가슴은 넓고 따뜻했으며, 단단하기도 했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건대, 그 몸은 꾸준한 관리와 타고난 체질이 아니면 절대 완성할 수 없는 몸매였어.’

    춘희가 했던 말을 몸소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다정은 귓불이 후끈거려왔다. 가슴은 쉴 새 없이 콩닥콩닥 크게 뛰었다.

    다정은 언니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기 위해 더욱더 몸을 낮추고, 도훈의 가슴팍에 바짝 붙었다. 그러자 도훈이 살짝 움찔했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팀장님은 지금 어떤 표정일까…….’

    그의 코트 안에 얼굴을 묻은 다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귀를 쫑긋 세우고 언니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언니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갔는지 알 수 없기에 다정은 계속 숨을 죽이고 그에게 안겨있었다.

    ‘아직도 안 갔나?’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은 도훈의 손은 풀리지 않았다.

    다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갔어요?”

    도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깊은 눈매를 마주하자, 다정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도훈이 말했다.

    “이제 안 보입니다.”

    그의 말에 다정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길거리를 살폈다. 거리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에야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다정.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런 그녀가 조금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도훈이 물었다.

    “내가 한다정 씨를 데려다주는 것이 큰일 날 정도입니까?”

    “네. 우리 가족들에게는요.”

    다정은 상상만 해도 지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들키면 최하 결혼이거든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짙은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최하 결혼?”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집 식구 수가 조금 많아요. 게다가 다들 말이 많은 편이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거든요. 그래서 다들 누군가 한 명이라도 빨리 결혼을 하든, 독립해서든 집을 나가길 바라고 있어요.”

    다정은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이어 말했다.

    “할머니랑 엄마는 셋 중 한 명이라도 결혼하길 바라고 있고, 언니들은 결혼은 죽어도 안 하겠다며 저에게 미루고 있어요. 이 상황에 팀장님을 소개했다간, 아마 우리 가족들은 상견례부터 하자고 말할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는 그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아쉬운 듯해 보였다.

    그 표정을 읽지 못한 다정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는 나가고 싶어도 독립할 자금이 부족해서 못 나가고 있고요, 언니들은 충분히 독립할 수 있으면서도 안 나가고 버티고 있어요. 만날 싸우면서……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

    “결혼 자금으로 들어놓은 적금이 있는데요. 그걸 깨서 작은 원룸이나 하나 얻을까 생각 중이에요. 어차피 결혼은 언제 할지도 모르고…….”

    “해지하지 말아요.”

    그의 단호한 음성에 다정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왜요?”

    “금방 결혼할 수도 있잖습니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애인도 없는데 결혼을 언제 하겠어요.”

    “애인이 왜 없습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

    그의 말에 잠시 멈칫하는 다정.

    하지만 곧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팀장님은 가짜 애인이잖아요.”

    그러자 도훈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고요하고 짙은 그의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해지는 분위기가 싫어, 다정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겠어요.”

    도훈이 함께 걸어가려고 하자, 그녀가 양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요. 또 언제 언니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요, 그럼.”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세요.”

    “먼저 들어가요.”

    “아니에요. 팀장님 먼저…….”

    순간 다정의 시선이 도훈의 넓은 가슴으로 향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셔츠를 가리켰다.

    “헉, 어떡해요. 립스틱이…….”

    그녀의 말에 도훈이 고개를 내렸다. 그의 하얀 셔츠 위로 주홍빛 립스틱 자국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조금 전 그의 품에 안기면서 생긴 자국 같았다. 다정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립스틱이 묻었는지 몰랐어요.”

    “지워지겠죠.”

    “저한테 주세요. 제가 세탁해서 드릴게요.”

    “여기서 벗으란 말입니까?”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다정이 더욱 당황하며 볼이 빨개졌다.

    그녀의 반응이 귀여웠는지, 도훈이 입매를 올렸다.

    “그렇게 미안해 할 거 없어요. 일부러 새긴 프린팅 같고 좋은데요.”

    또 저런다.

    잘 나가다가, 왜 한 번씩 저렇게 짓궂은 말을 하는지 모를 남자다.

    도훈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다른 셔츠에다가도 해줘요.”

    다정은 기분이 묘했다.

    자신의 립스틱을 묻힌 셔츠를 입고, 근사한 미소를 짓는 저 남자가 이상하리만큼 야릇하게 느껴졌다.

    ***

    “다녀왔습니다.”

    다정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거실 바닥에 누워있던 길순이 걸쭉한 사투리로 그녀를 맞이했다.

    “녀석아, 왜 다리통을 다 내놓고 다니는 겨? 감기 들면 우짜려고, 쯔쯧.”

    거실 한가운데에서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있던 봉해도 그녀를 맞이했다.

    “우리 딸 왔어? 요즘 회식을 자주 하네.”

    “……네. 그러게요.”

    거실을 지나치려는 순간, 부엌 식탁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던 소정이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오는 길에 진상 커플 못 봤어?”

    “……진상 커플?”

    다정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소정은 커다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뜨며 말했다.

    “응. 우리 집에 오는데 웬 커플 하나가 가로등 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거야. 남자가 여친이 예뻐 죽겠는지 꼭 부둥켜안고 놓아주질 않더라고. 크큭.”

    다정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과 도훈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래?”

    “아니.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는 짓인지 몰라. 그렇게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모텔을 가든가.”

    소정의 바로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고 있던 애정이 한마디 덧붙였다.

    “민망해서 혼났다. 쪽쪽 빨고 아주 난리였어.”

    “내가 언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나와 버린 다정의 억울한 외침.

    그 외침에 할머니, 엄마, 언니 둘이 동시에 그녀를 응시했다.

    “?”

    “?”

    “?”

    “?”

    부담스러운 여덟 개의 눈동자가 저에게 향하자, 뒤늦게서야 아차 싶은 다정.

    그녀는 침착하게 뒷말을 생각해냈다. 다정은 언니들을 쏘아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언제…… 내 아이스크림 먹으라고 했어?!”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는 듯 소정이 말했다.

    “지지배. 난 또 뭐라고……. 그게 그렇게 성질 낼 일이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에 들어맞는 말이 아이스크림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애정이 말했다.

    “우리도 이제 막 꺼냈어. 숟가락 들고 이리 와 앉아.”

    “됐어. 안 먹을래.”

    “…….”

    다정은 자신이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하며 엄마와 할머니에게 말했다.

    “저 피곤해서 바로 잘게요. 할머니,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그려. 얼른 들어가 자.”

    다정이 올라간 2층 쪽을 바라보며 소정이 말했다.

    “엄마. 막둥이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왜 동생이 아끼는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고 그래? 다 큰 언니들이.”

    “엄마도 참. 우리가 언제 뺏어 먹었어? 나눠 먹은 거지.”

    그렇게 말하며 소정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가득 넣었다. 그리고 애정에게 말했다.

    “혹시 너무 외로워서 저러는 거 아닐까? 우린 한 번 갔다 오기라도 했지만, 쟨 솔로 된 지도 오래됐잖아.”

    “말은 똑바로 해. 한 번 갔다 온 건 너지. 난 가려다 말았고.”

    “청첩장 다 돌리고, 결혼식 전날 때려치웠으면 갔다 온 거나 다름없지 않아? 이왕이면 웨딩드레스도 입어보고, 축의금도 다 받고 끝내지 그랬어.”

    “너처럼 1년 동안 서로 못 볼 꼴 다 보이고 헤어질 바엔 내 선택이 훨씬 현명하다고 본다.”

    손녀들의 이야기를 듣다 못한 길순이 옆에서 혀를 찼다.

    “으이구! 녀석들아! 그게 뭐 자랑이라고 떠들고 있어?!”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길쭉한 실루엣이 실내로 들어섰고, 센서등이 작동하며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구두를 벗고, 고요한 집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바로 도훈이었다.

    살짝 피곤해 보이는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드레스룸에 들어온 그는 먼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이어 검은색 재킷도 벗고, 셔츠 단추도 풀기 시작했다.

    풀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깊고 섹시한 쇄골과 탄탄한 가슴이 천천히 드러났다.

    세 번째 셔츠 단추로 향하던 그의 손길이 멈칫했다.

    “…….”

    도훈은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셔츠 위엔 주홍빛의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복숭아 색보다 좀 더 짙은 립스틱 자국을 바라보자, 도훈은 자신의 품에 안겨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어깨.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기.

    살짝 떨리는 다갈색 눈망울.

    붉게 물든 뺨과 작고 도톰한 입술.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리자, 도훈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된다면…….

    “날 완전 미친놈이라 생각하겠지…….”

    도훈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녀의 잔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 겨우 식혀냈던 열기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몸이 뜨거워지자, 성큼 부엌으로 향하는 도훈.

    냉장고 문을 열어 캔맥주를 꺼낸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술을 들이켰다. 차가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그의 몸으로 알싸하게 퍼졌다.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도훈은 맥주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베란다 창밖으로 고요한 밤풍경이 보였다. 깜깜한 하늘은 무수히 많은 별이 빛을 내며 어우러졌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밝은 별들이 그의 눈동자 깊이 차올랐다.

    “반짝이는 색이라…….”

    참……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입술 사이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다정.

    그녀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도, 가끔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미소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