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 -5화 (5/32)

Chapter. 5

한신 건설 본사는 대형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역삼동에 위치해 있었다.

1980년에 세워진 한신 건설은 국내에서 발전소, 전철, 아파트, 리조트 등을 건설하며 입지를 다졌고, 해외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 꾸준히 세를 확장해나갔다.

최근 6년 연속 건설사 도급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건설회사 브랜드 평판에서도 줄곧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다정이 한신 건설에 입사한 지는 2년이 되었다.

지난 2년 동안 다정은 지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신 건설 기획팀에서 성실함으로는 다정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기획팀 사무실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도 다정이었고, 기획팀 창가에 놓인 화분에 매일 아침 물을 주는 것도 다정이었다.

물론 이는 지도훈이라는 남자가 나타나기 이전의 이야기였다.

외국 기업에서 스카우트된 남자가 기획팀에 등장한 후로 기획팀 출근 1등은 늘 지도훈이었다.

매번 2등으로 출근 도장을 찍게 된 다정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항상 일찍 와서 팀장실에 앉아있는 그는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등은 아니어도 늘 2등을 기록했던 다정이 오늘 아침은 헐레벌떡 빠른 걸음으로 회사 입구를 통과했다.

엘리베이터를 탄 다정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

“하아…….”

다정은 뛰느라 벅찼던 숨을 내뱉었다. 둥그런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이 모든 게 어젯밤 온 세상 술은 다 마셔버리겠다는 사람처럼 술을 들이켠 덕분에 생긴 일이다.

숙취로 밤새 고생하던 다정은 결국 평소에는 잘만 듣던 알람 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언니들이 옷을 빌려달라며 방에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다정은 아직도 침대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정은 다시는 어제처럼 무식하게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띠링. 15층입니다.]

무미건조한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기획팀 사무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다정이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무실 안에 있던 여직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정이 살짝 당황해하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

“다정 씨!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정말 팀장님이랑 사귀는 거야? 그 철옹성 같은 남자랑 만나는 게 사실이냐고?”

다정이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대답했다.

“네.”

그녀의 대답에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이구나! 축하해~”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다정 씨 능력 좋다~! 어떻게 팀장님 마음을 빼앗은 거야?”

와르르 쏟아지는 질문에 다정이 난감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선배 여직원 한 명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뭐라고 대답 좀 해봐. 우린 지금 한다정 씨 오기만 기다렸단 말이야.”

“…….”

“어제 둘이서 데이트한다면서 먼저 나갔잖아. 어제 팀장님이랑 뭐 했어?”

남의 연애에 왜 이토록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다정은 담담히 대답했다.

“술 마셨는데요.”

“어머. 단둘이 술 마셨다고?”

술을 마셨다는 대답 한마디에 여직원들이 웅성거렸다.

“주로 어디서 술 마셔?”

“왠지 팀장님은 술 한 잔을 마셔도 근사한 데서 마실 것 같아.”

“분위기 좋은 와인바? 야경이 보이는 호텔 스카이라운지?”

또다시 파도처럼 밀려드는 질문에 다정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오늘도 끝이 뾰족한 안경을 쓴 윤 주임이 부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부러워라. 나도 팀장님이랑 단둘이 술 마시고 싶다…….”

“어머. 주임님은 유부녀잖아요. 그러면 안 되죠!”

“참나. 유부녀는 생각도 못 하니? 팀장님이랑 살림을 차리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술 한 잔 같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못 해?”

가뜩이나 요즘 남편이 속을 썩여 기분이 좋지 않은 윤 주임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사이, 기획팀 공식 야화 담당 춘희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후후……. 과연 팀장님이랑 술만 마셨을까? 다정 씨 오늘 늦게 온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춘희의 말에 여직원들이 까르르 웃었고, 다정은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아였다.

그녀는 관심 없는 척 서류를 보면서도, 그들의 대화는 다 듣고 있었다.

여직원들의 쏟아지는 관심에 아직 자리에도 앉지 못한 다정이 말했다.

“저 이만 자리에 가볼게요. 팀장님께 아직 인사도 못 드렸고…….”

“팀장님은 지금 사무실에 없어. 이사님 뵈러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긴. 그가 사무실에 있었다면 이렇게 소란스럽게 대화할 수는 없었겠지.

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사무실 입구 자동문이 열리며, 여직원들을 아침부터 떠들썩하게 만든 또 다른 주인공 한 명이 등장했다.

말끔한 슈트 차림의 도훈을 마주하자, 여직원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금세 조용해졌다.

입구 근처에 있던 다정이 그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녀의 말에 직원들의 시선이 도훈에게 몰렸다. 그는 나긋한 미소와 함께 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한다정 씨.”

짧지만 깊은 눈 맞춤이 끝난 후, 도훈은 팀장실로 걸어갔다. 그가 팀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조용했던 직원들이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꺄아. 좋은 아침이래~ 들었어?”

“팀장님 눈빛 봤지? 우린 보이지도 않나 봐. 다정 씨만 보고 있더라고.”

“우리가 인사할 때랑은 목소리부터 다르잖아.”

별말 아닌 인사말에도 호들갑을 떨어대는 사원들을 바라보며, 다정은 한동안 회사생활이 조금 피곤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

사원들의 뜨거운 관심은 점심시간에도 이어졌다.

직원식당에 도착한 다정은 식판을 듣고 창가 쪽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여직원들이 우르르 몰려 앉았다. 그들 중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직원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은 살갑게 웃으며 물었다.

“팀장님이랑 주로 어디서 데이트해요?”

“팀장님 집이 엄청 부자라던데, 그게 사실이야?”

“팀장님은 혼자 살아? 혹시 가족들도 만나봤어?”

그들은 평소 궁금했던 점을 전부 다 들으려고 했고, 사실 도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다정으로서는 이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식사하는 내내 말을 거는 직원들 덕분에 다정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이윽고 시끌벅적했던 식사가 끝이 났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자는 직원들의 권유를 예의 있게 거절한 후 다정은 홀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15층에서 내린 그녀는 기획팀 사무실로 바로 가지 않고, 복도 끝에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 도착한 다정은 음료 자판기 앞에서 재킷 주머니에 있는 천 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지폐 투입구에 돈을 넣고, 평소 즐겨 마시던 음료가 아닌 콜라를 누르는 다정. 체한 것처럼 답답했던 속이 탄산을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왜 안 나오지?”

지폐를 똑바로 넣고 버튼도 제대로 눌렀는데 음료가 나오지 않자 다정이 미간을 구겼다. 그녀는 몸을 숙여 음료가 나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때였다.

“쿵!”

누군가가 자판기를 세게 두드리자, 다정이 바라던 콜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밑으로 내려왔다.

다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바로 옆에는 다름 아닌 현우가 서있었다.

현우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요 녀석이 한 번씩 말을 안 듣죠? 이렇게 꼭 주먹을 써야 내놓더라고요.”

현우는 허리를 숙여 콜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정에게 건네주었다.

며칠 전의 다정이었다면 좋아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현우를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다정은 낮은 톤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음료를 받고, 곧바로 자리를 뜨려는 다정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축하해요.”

“……?”

“팀장님이랑 사귀는 거 말이에요.”

그의 입에서 축하한단 말을 또 들을 줄이야.

이 남자는 나를 몇 번이나 죽일 생각인 걸까.

다정은 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 못 챈 현우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제 사원들 앞에서 화끈하게 연애 공개하는 모습 보고 놀랐어요.”

“…….”

“팀장님이랑 다정 씨는 당연히 비밀 연애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공개할 줄이야……. 난 두 사람을 위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치고 싶어도, 참고 있었는데 말이죠. 하하.”

다정은 환히 웃는 현우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는 평소와 같았다. 다정을 대하는 태도에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아무래도 현우는 다정이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세아와의 관계를 눈치챘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주임님에게는 서슴없이 말했으면서, 왜 현우 씨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

다정이 세아의 모순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사이, 현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 다정 씨가 팀장님께 고백하는 장면을 봤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의외였어요.”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내려앉았다.

“다정 씨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게다가 팀장님을 좋아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죠.”

“…….”

“특히나 팀장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는 다정 씨의 말은…… 꽤 충격적이었어요.”

그의 말에 다정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크게 휘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게 왜…… 충격적이었는데요?”

그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 다정으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응시하는 다정을 현우는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다갈색 눈동자가 더욱 짙은 빛을 띠었다.

“그건…….”

그가 다정에게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한다정 씨.”

다정의 이름을 부르는 굵직한 음성에 둘의 시선이 복도 쪽으로 향했다.

복도를 본 다정의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

‘팀장님……?!’

긴 복도 끝에서 도훈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날이 선 눈매는 보는 이의 입을 바짝 마르게 할 만큼 서늘하게 느껴졌다.

“팀장님…….”

도훈의 등장에 다정과 현우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짙은 적막이 휴게실을 덮쳤고, 다정은 살짝 당혹스러운 얼굴로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길게 뻗은 그의 눈매는 평소보다 몇 배로 날카로웠고, 눈빛은 매서웠다.

오늘 아침 나긋한 미소를 지어주었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 맞나 의심될 정도였다.

그 모습에 다정의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마치 애인 몰래 옛 애인을 만나다 걸린 기분이랄까.

따지고 보면 그는 진짜 애인이 아닌데도 말이다.

도훈이 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있었군요.”

“……절 찾으셨나요?”

“급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는 현우와 다정의 앞으로 걸어왔다.

“둘이 대화 중이었던 것 같은데.”

그가 딱딱한 시선으로 현우를 응시하며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한다정 씨는 내가 데려가죠.”

그의 시선에서 서늘함을 느낀 현우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곧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요한 대화 중이었다고 해도, 데려가실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가늘어지는 도훈의 눈매.

둘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다정이 재빠르게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팀장님. 저에게 급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

“여기서 이야기하실 건가요? 아니면 사무실로 갈까요?”

그녀의 물음에 도훈이 현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복도 쪽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따라와요.”

***

그를 따라 팀장실로 들어온 다정.

그녀는 의자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있는 도훈을 응시했다.

그의 짙은 눈썹 사이엔 주름이 깊게 패어있었고,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끝이 날카로운 눈매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다정.

그녀는 업무 중 실수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봤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정적을 깨고, 다정이 용기 내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것처럼 그는 다정의 목소리에 허공에 두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다정과 눈이 마주친 그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홍콩 리조트 사업 자료 조사는 어떻게 돼가고 있죠?”

“마무리 단계입니다. 예산 기획안만 작성하면 됩니다.”

“보고서는 언제까지 제출할 수 있습니까?”

“월요일 오전까지 제출하도록 할게요.”

“그래요, 그럼.”

그리고는 대화가 끊겼다.

뒤늦게 다정은 대화 내용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가 자신에게 한 질문은 이미 어제 오전에 했던 이야기였다.

한 달 전도 아니고,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을 이 똑똑한 남자가 기억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리조트 사업 건이 그토록 빨리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었나?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다정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하고선,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고작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도훈의 낮고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그렇고…….”

도훈은 다정이 손에 든 콜라 캔을 주시했다.

“웬 콜라예요?”

“에?”

“탄산음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네. 그런데 오늘은 속이 좀 답답해서…….”

그의 정갈하고 짙은 눈썹이 휘었다.

“많이 안 좋습니까?”

“아니요. 점심을 급하게 먹었더니, 살짝 체한 것 같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렇군요. 계속 안 좋으면 병원에 가 봐요.”

“네. 알겠습니다.”

또다시 대화가 끊겼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리조트 보고서랑 콜라 이야기로 끝이야?

급히 날 찾았다는 이유가 정말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아 다정의 눈매가 가늘어지던 참에, 도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오후에 협력사 미팅으로 외근할 예정입니다.”

“아……. 네.”

“협의할 문제가 많아, 퇴근 시간 전에 마치기는 힘들 것 같네요.”

“…….”

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다정은 그가 왜 자신을 급히 찾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정은 당혹감을 누르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미팅이 길어지면 힘드시겠어요. 팀장님은 워낙 화술이 뛰어나시니까, 잘하실 거라 믿어요. 잘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

그리고 이어 어김없이 찾아온 정적.

다정은 그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무언가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으면서도…….

또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심중을 알 수가 없었다.

다정은 사무실 한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은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저…….”

다정의 목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가르고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전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도훈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윗입술보다 조금 더 도톰한 그의 아랫입술이 작게 짓눌렸다.

도훈이 그녀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나가봐요.”

다정은 그에게 인사한 후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해방되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휴. 불편해서 혼났네.’

긴장감이 풀리며 그제야 그녀의 얼굴색이 밝아졌다.

문득 제 손에 든 콜라가 시야로 들어왔다.

다정은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렸다.

잠깐.

내가 탄산음료 안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대?

***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현우는 아직 휴게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한쪽 손에 음료를 쥔 채,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해 보이던 그는 사무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휴게실을 지나가는 세아가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세아는 그를 보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쳤다. 그러자 현우가 그녀를 따라가 말했다.

“이야기 좀 해.”

세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그를 차갑게 응시했다.

“무슨 이야기?”

그녀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어 말했다.

“나는 어제 모든 걸 얘기했어. 뭘 더 이야기하라는 거야?”

“네가 한 말 모두 모순 덩어리라는 거 모르겠어?”

“어디가 모순인데?”

“모든 내용이 앞뒤가 안 맞잖아.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세아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녀가 냉정하게 몰아붙였다.

“믿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뭐?”

현우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세아는 조금 더 센 어조로 말했다.

“내 말과 상관없이 현우 씨가 원하는 상황대로 만들고 싶은 거 아니냐고.”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비켜. 난 더는 현우 씨에게 할 말 없어.”

“민세아.”

현우는 자신을 지나치려는 세아를 가로막았다. 며칠 전만 해도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던 그녀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안타까웠다. 또 이런 상황이 오게끔 한 그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가 세아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을 모르겠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모르겠어.”

그녀를 향한 현우의 눈빛도 이전과 달라졌다.

그 뜨거웠던 애정은 더 이상 그의 눈동자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없이 서글픈 원망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진짜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의 말에 세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저 멀리 복도에서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직원들이 둘 쪽으로 오는 것을 알아채고, 세아는 재빨리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직원들과 말을 섞었다.

“한 대리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현우는 언제 다퉜냐는 듯이 밝게 웃으며 직원들에게 향하는 세아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

다정이 나간 팀장실엔 도훈이 홀로 앉아있다.

그는 다정이 홀연히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다가, 바로 앞에 놓인 탁상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2018년 2월 16일.

향기로운 봄과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다시 선선한 계절에 접어들 때면 그는 호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8개월.

누군가에게는 긴 시간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한없이 짧은 시간일 뿐.

도훈은 10월 달력을 바라보았다.

빨간펜으로 표시된 날짜를 보는 그의 눈가가 흔들렸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간 모든 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조급하게 굴지 말자고 몇 번을 다짐하면서도, 돌아서기 바쁘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특히나 오늘 같은 상황에서는…….

“하아…….”

도훈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달력을 덮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다정 씨. 오늘 퇴근하고 뭐 해?”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다정의 맞은편에 앉은 희수가 고개를 빼꼼 올리며 물었다.

직속 선배인 그녀는 다정보다 1년 먼저 입사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고, 종일 수다 떠는 것이 취미인 그녀와는 성격이 잘 맞지 않아, 업무 외에는 딱히 교류가 없던 사이였다.

그녀가 이렇게 나긋한 목소리로 퇴근 후 일과를 묻는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다정은 조금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다정이 대답했다.

“별일 없는데요.”

“불금인데? 오늘은 팀장님이랑 데이트 안 해?”

“네.”

“잘됐다. 그럼 우리랑 같이 파스타 먹으러 가지 않을래? 쇼핑도 하고 말이야.”

2년 내내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했던 그녀가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심지어 쇼핑도 함께 하잔다.

다정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끊임없이 겪었던 일이었기에.

친하지 않았던 사원들이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고, 함께 카페에 가자고 했다. 까톡 아이디가 뭐냐며 묻기도 했다.

이 모든 건 바로 지도훈이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냉철한 눈빛에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그는 늘 여사원들이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대상이었다.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는 한 나라의 왕자님 같은 존재.

사원들은 그런 그를 차지하게 된 한다정이라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평범해 보이는 그녀가 어떤 매력을 지녔는지, 어떻게 그 지도훈을 꼬셔냈는지 궁금했다.

그녀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도훈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또한, 그녀와 친해지면 도훈과도 덩달아 친해지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인기남과 사귀면서 다정도 덩달아 인기녀가 된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직원들의 태도가 당혹스럽고,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다.

다정은 까만 아이라인이 돋보이는 희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식사를 한다면 밥 먹는 내내 도훈의 질문으로 시달릴 게 분명했다. 말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그녀는 밤새도록 자신을 붙잡아놓을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진 다정이 다급히 말했다.

“생각해보니 오늘 집에 일이 있어서, 일찍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식사는 다음에 해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희수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다시 쑥 넣었다.

퇴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자, 다정은 팀장실을 바라보았다.

외근을 나간 도훈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다정은 오늘 점심시간 때 마주했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혹시 협력사 미팅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다정은 핸드폰을 꺼내 도훈의 연락처를 검색했다.

[팀장님. 아직 미팅 중이세요? 회사에 안 들르시고 곧장 집으로 가는 건가요?]

액정을 꾹꾹 누르며 문자를 쓰던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다정은 문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관두자. 진짜 애인도 아닌데…….

이건 오버야.

그녀가 문자 전송을 취소하려던 찰나였다. 핸드폰 화면에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문자를 확인한 다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문자의 발신인은 바로 세아였다.

[퇴근하고 나랑 이야기 좀 해요.]

하아…….

오늘따라 퇴근하고 보자는 사람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

다정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난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정말 그녀에게 할 이야기도 없었고,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현우와 세아에게 받았던 상처가 완전히 아물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직 둘에 대한 감정이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시점에 그녀와 마주한다면, 또 한 번 크게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녀가 할 이야기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변명일 테고, 그 변명을 너그럽게 들어줄 만큼 자신은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다정의 냉랭한 문자에 답신이 왔다.

[선배. 중요한 이야기예요.]

다정은 핸드폰을 가방 속 깊이 넣어버렸다.

***

저녁 6시 10분.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정은 홀로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그녀는 월요일까지 제출하기로 했던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오늘 점심 때, 도훈이 이야기한 보고서였다. 그가 보고서에 대해 재차 물어봤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업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정은 완성된 보고서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하~ 끝났다!”

20분 후, 마침내 보고서 작성을 모두 마친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포근한 느낌의 갈색 코트를 걸치고, 검은색 숄더백을 어깨에 멘 후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다정이 있는 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버튼을 눌렀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띠잉. 15층입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려던 다정이 멈칫했다.

“!”

엘리베이터 안에는 현우가 서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다정을 발견한 그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금 퇴근하나 봐요.”

“……네.”

“얼른 타요.”

머뭇거리던 다정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문이 닫히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다정은 좁은 공간 안에서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했다.

다정은 그와 떨어진 곳에 서서 내려가는 층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담배 향이 흘렀다.

아마 옥상에서 담배를 태운 모양이었다.

2년 넘게 현우를 짝사랑해오면서, 그의 사소한 버릇까지 알고 있는 다정이었다.

그는 회사에선 별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회식 때마다 한 번씩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회사에서는 주로 옥상에 가서 피웠다. 기분이 안 좋거나, 업무가 많은 날이면 옥상에 올라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정은 흘깃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두워 보이는 낯빛에서 근심이 느껴졌다.

‘세아랑 다투기라도 한 건가.’

그를 바라보던 다정이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알게 뭐람. 둘이 지지고 볶든 말든…….

이제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잖아.

“팀장님 말이에요.”

현우의 굵직한 저음이 정적을 깼다.

다정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짙은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마치 비꼬는 것처럼 어투가 묘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어디가 그렇게 좋았다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다정이 입을 열었다.

“그냥…… 딱 봐도 멋지시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눈가가 흔들리는 현우.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긴 하죠. 팀장님은 키면 키, 얼굴이면 얼굴 빠지는 게 없으니까. 남자가 봐도 멋있는 사람이에요.”

“…….”

“다정 씨는 잘생긴 남자 좋아하나 봐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현우의 진갈색 눈동자가 깊어졌다.

“나도 못생겼단 소리는 안 듣고 살았는데.”

띠잉.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 층에 도착했다.

현우는 먼저 내리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다정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회전문을 통과하고 밖으로 나온 다정. 그녀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기예보에 비 온단 이야기는 없었는데…….”

먹구름이 낀 하늘에선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온 현우가 말했다.

“할머니 말씀 듣길 잘했네요.”

현우는 씩 웃으며, 가방에서 3단 우산을 꺼냈다.

“일기예보보다 저희 할머니가 더 정확하거든요.”

그는 우산을 펼친 후, 다정에게 말했다.

“버스 타고 가죠? 정류장까지 같이 가요.”

“아니에요. 많이 오지도 않는데, 그냥 뛰어갈게요.”

다정이 빗속으로 뛰어들 자세를 하자, 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같이 써요. 비 맞아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

현우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정의 눈망울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매너 좋은 사람.

그래서 이 남자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진짜 괜찮아요.”

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의사 표현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현우는 잡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제가 마음이 안 편해서 그래요. 불편하면 내가 뛰어갈 테니 다정 씨가 우산 써요.”

그가 잡은 그녀의 손에 우산을 쥐여주었다.

다정은 더욱 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그냥 택시 타고 갈 거니까…….”

그 순간이었다.

그들의 옆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서현우 씨.”

옆으로 고개를 돌린 다정의 눈썹이 크게 솟구쳤다.

그녀의 눈앞에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서있는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지만, 손은 놓고 말하죠?”

“…….”

날이 선 목소리에 현우는 자신이 쥐고 있던 다정의 손을 놓았다.

다정은 그를 바라보았다.

긴 회의로 지쳤을 텐데도, 그의 근사한 얼굴은 여전히 빛이 나고 있었다.

다정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이 시간에 굳이 회사에 온 도훈에게 물었다.

“사원들은 모두 퇴근했는데……. 대리님이랑 이야기 되신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그러면 회사에는 왜…….”

그의 굵직한 음성이 빗소리를 갈랐다.

“당신 데리러.”

잔잔한 빗방울 사이로 짙은 그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 세계에 그와 나 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정에게 가까이 다가온 도훈이 한쪽 손을 뻗었다.

“!”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끌어 잡았다. 다정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따뜻한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을 붙잡은 도훈은 회사 앞에 세워놓은 차 앞으로 걸어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다정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를 따라갔다. 입구에서부터 보도를 걷고 있는 사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현우 역시 자신과 도훈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에 다정의 두 뺨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손을 슬쩍 빼며, 낮게 속삭였다.

“팀장님……. 다들 우리만 보고 있어요.”

“알아요.”

그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실으며 말했다.

“보라고 하는 겁니다.”

마주 잡은 손에서 열기가 몸 전체로 퍼졌다. 다정의 귀 끝이 후끈거렸다.

도훈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자신의 차 앞까지 걸어갔다.

조수석에 다가간 그가 문을 열며 말했다.

“타요.”

다정은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수석에 앉았다. 문이 닫히고, 다정은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맺힌 차창 너머, 아직도 회사 입구 쪽에 서있는 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 있어서 이목구비가 잘 보이진 않지만, 왠지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벨트 매요.”

어느새 옆에 앉은 도훈의 목소리에 다정이 창가에서 시선을 뗐다. 그녀가 벨트를 매며 물었다.

“정말 저 데리러 회사에 온 거예요?”

“네.”

“회의 때문에 피곤하셨을 텐데, 집에 바로 가서 쉬지 그러셨어요. 굳이 저 때문에 회사에 올 필요까지는…….”

“우산도 없는 애인을 비 맞게 둘 순 없잖아요.”

“……우린 진짜 애인도 아니잖아요.”

“남들 눈에는 진짜 애인이죠. 이렇게 비 오는 날, 다정 씨 홀로 집에 가게 만들면, 사원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

팀장님이 이토록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이었던가.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도훈이 액셀을 지그시 밟으며, 말했다.

“집에 가려던 참이었죠?”

“네.”

“약속 없으면 나랑 같이 저녁 먹읍시다.”

저녁을 또?

다정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도훈은 앞을 주시한 채로 이어 말했다.

“어제 가려다 못 갔던 일식집 어때요?”

“송학이요?”

“네.”

“팀장님 그 식당 가보셨어요?”

“아니요.”

“음식이 맛있긴 하지만, 가격이 꽤 비싸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한다정 씨한테 계산하란 소리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가격대면 제가 계산해도 부담이고, 안 해도 부담이에요.”

다정이 고개를 저어대자, 그가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실어 말했다.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요.”

신호에 걸려 차가 정차했다. 도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나도 사원들한테 맛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가보고 싶었는데, 일식집에 혼자 가서 먹긴 그렇잖아요.”

“…….”

“그러니 한다정 씨가 같이 좀 가줘요.”

어느 누가 이 남자를 거절할 수 있을까.

저토록 애틋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그윽한 시선을 마주하자, 순간 일식집을 통째로 사주고 싶은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랑 가자는 걸까? 같이 먹을 사람이 그렇게 없는 걸까.

하긴, 외국에서 살다 와서 친구들이 별로 없을 수도…….

그에게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 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도훈이 입매를 올렸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차는 일식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다정은 일식집에 도착한 후로, 기다란 테이블을 끊임없이 채우는 음식들 때문에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모든 음식이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맛있었으며, 이것저것 모두 맛보고 싶은 다정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싱싱한 생선회 요리가 나올 때쯤, 그녀는 문득 도훈이 생각보다 많이 먹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팀장님.”

두툼한 회를 집던 다정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맞은편에 앉은 도훈을 바라보았다.

“드시고 싶었다면서, 왜 이렇게 안 드세요?”

도훈이 붉은빛이 선명한 참치회를 앞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나도 열심히 먹고 있어요.”

“왠지 저 혼자 다 먹는 것 같아요.”

먹고 싶었다는 사람보다 저가 더 많이 먹는 것 같아, 다정은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도훈이 씩 웃으며 물었다.

“입맛에 맞아요?”

“네. 너무 맛있어요. 비싼 데는 이유가 있었네요. 입 안에서 살살 녹아요!”

헤벌쭉 웃으며,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어 보이는 다정.

그 모습에 도훈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정이 하얀 이를 보이며 웃고 있던 입을 재빨리 다물었다.

아뿔싸…….

나 방금 너무 돼지처럼 보였을 거야.

생애 처음 경험하는 황홀한 맛에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다정은 자신을 다독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맛있다니 다행이군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던 도훈이 물었다.

“여기 말고 또 가보고 싶었던 곳 없어요?”

“음……. 동기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신사동에 엄청 맛있는 파스타집이 있대요. 주방장이 이탈리아인이라는데, 그 사람이 만든 파스타를 먹어보면 다른 파스타는 못 먹을 정도라고 했어요. 가격이 비싼 게 흠이지만…… 다들 맛있다고 하니까 어떤 맛인지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그럼 거기도 나중에 가죠.”

그의 말에 다정의 눈이 살짝 커졌다.

“팀장님이랑요?”

“나랑 가기는 싫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녀는 앞에 놓인 물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우린 사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인일 뿐인데, 회사 밖에서도 설정을 이어나갈 필요는 없지 않나.’

다정은 속에 있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물을 꿀꺽 삼켰다.

***

“잘 먹었습니다.”

다정은 계산을 마친 도훈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먹을 땐 좋았는데, 계산해보니 너무 비싼 것 같아요. 금액 많이 나왔죠?”

“아니요.”

“하……. 제 말대로 그냥 더치페이할 걸 그랬나 봐요.”

“날 부하직원에게 더치페이 요구하는 쪼잔한 상사로 만들지 마요.”

도훈이 지갑을 재킷 안에 넣었다.

다정은 식당 입구로 향하는 그를 따라가며 말했다.

“다음번엔 제가 사드릴게요.”

“마음만 받죠.”

“곧 있으면 월급날이니까 비싼 곳에 가도 상관없…….”

식당 밖으로 나온 둘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들 바로 앞엔 낯익은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 역시 식당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해 보였다.

식당 앞에서 일행들과 이야기하던 남자는 도훈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도훈과 다정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회사에서도, 회사 밖에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대상 1위인 부문장이었다.

“안녕하세요, 부문장님.”

부문장은 애정 어린 눈빛을 하고선 도훈을 바라보았다.

도훈의 바로 뒤에 있는 다정도 인사를 했지만, 부문장의 눈에는 그의 모습밖에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부문장의 몸에선 술 냄새가 진동했고, 얼굴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밖에서 만나니 더 반갑구먼! 식사하러 온 건가?”

“네.”

“이 집 요리가 먹을 만하지? 안 그래도 내가 우리 지 팀장 꼭 한번 데려오려고 했는데 말이야.”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부문장은 도훈의 어깨를 다정하게 쓸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뺄 수 있나?”

그가 묻기 바쁘게 도훈의 입에서 대답이 떨어졌다.

“이번 주말엔 바쁠 것 같습니다.”

“언제 한번 시간 좀 내보지 그래. 우리 딸이 지 팀장 사진을 보더니, 마음에 쏙 들었나 봐. 소개 안 해주면 회사로 찾아오겠다고 야단법석이지 뭐야. 허허허.”

“…….”

그의 이야기에 도훈은 물론 뒤에 있는 다정의 표정까지 어색해졌다.

불행히도 부문장은 아직 다정과 도훈의 소문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도훈이 곧은 시선으로 부문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따님과 소개팅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내 딸이라서 그래? 허허 참, 그건 부담 갖지 말래도.”

“부문장님 때문이 아니라, 애인 때문입니다.”

“……뭐?”

“애인을 두고 소개팅을 할 순 없잖습니까.”

“…….”

그의 말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부문장.

“허허 참……. 그새 애인이 생겨버렸나 보군.”

잠시 후, 그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하긴. 지 팀장은 주변 여자들이 가만둘 타입은 아니지. 내가 더 빨리 밀어 붙었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크네.”

부문장은 티가 나도록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도훈에게 물었다.

“주변에 우리 딸보다 예쁘고 유능한 여자가 있었나 보지? 뭐, 자네 정도면 회장님 딸과 사귀어도 손색없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네. 예쁘고 유능한 여자입니다.”

뭣? 누가? 내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다정의 동공이 흔들렸다.

부문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지 몰라도 그 여잔 로또 당첨된 거나 다름없겠구먼. 허허.”

부문장은 입가에 주름이 만연해지도록 크게 웃었지만, 그들 중 절대 웃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정이었다.

절대 끼어들 수 없어.

이 상황에서 내가 이 남자 애인이라고 어떻게 말해? 이건 자살 행위야.

다정의 안색이 점점 새하얘지는 사이, 뒤늦게 그녀를 발견한 부문장이 물었다.

“어? 한다정 씨도 있었군.”

다정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는데, 못 보셨나 봐요.”

“아아~ 내가 술을 마시면, 시력이 좀 나빠지거든. 한다정 씨도 식사하러 온 건가?”

“네.”

“누구랑?”

이렇게 바로 옆에 있어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다정은 안타까웠다.

“지 팀장님이랑요.”

“단둘이?”

다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문장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다정은 한쪽 손을 슬며시 들었다. 그리고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며 말했다.

“네. 그 로또 맞은 여자가 바로 접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문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다정과 도훈은 충격에 휩싸여 그대로 굳어버린 부문장에게 인사한 후, 식당을 떠났다.

둘은 소화도 시킬 겸,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불빛이 번지는 밤거리는 적당히 한적했다.

식당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다정은 참아왔던 웃음을 터트렸다.

“큭……. 아까 부문장님 표정 보셨어요?”

도훈이 곧바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놓칩니까?”

“아~ 정말 우리 둘만 보기엔 아까운 장면이었는데! 사진으로 남겨놓고,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보고 싶을 정도였어요.”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하는 다정을 보며 도훈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재밌었어요?”

“네. 저 부문장님이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봐요. 통쾌하기도 하고, 왠지 미안하기도 하더라고요.”

다정은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하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팀장님 애인이 나라니, 저 같아도 놀랐을 거예요.”

순간 도훈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다정 씨가 어때서요?”

“네?”

“한다정 씨가 내 애인이면 왜 놀라워해야 하죠?”

아니, 장난스럽게 한 말에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다정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야…….”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팀장님과 전 연인이라기엔 그다지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잖아요.”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그가 미간을 좁힌 채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어울리는 그림이 됩니까?”

대체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거람.

다정은 그가 이해 가지 않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해나갔다.

“음……. 팀장님이 좀 더 못난 사람이 되거나, 제가 더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팀장님이 못나지는 건 어려울 테고, 제가 팀장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다시 태어나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바로 반박했다.

“한다정 씨는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또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군요.”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팀장님이 대단한 남자인 건 사실이잖아요. 팀원들 모두 제 앞에선 말 못 해도, 속으로는 팀장님이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

“이렇게 된 데에는 팀장님 책임도 있다고요. 팀장님이 너무 잘난 바람에 상대적으로 제가 더 못나 보이잖아요.”

다정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따라서 웃어줄 줄 알았는데, 그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멀리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다정의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다정은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때, 도훈이 걸음을 멈추었다.

“한다정 씨.”

다정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검고 짙은 그의 눈동자엔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도훈이 마주 본 채로 말했다.

“내가 왜 한다정 씨에게 애인 역할을 부탁했는지 압니까?”

“제가 팀장님께 고백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면요?”

그녀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의 커다란 손이 다정의 볼 언저리에 닿았다. 그의 손길에 뺨을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이 귓가에 걸렸다.

두근두근…….

마주 닿는 그윽한 시선에 심장이 속절없이 뛰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공중에 흩어졌다.

“당신이니까.”

꼭…… 당신이어야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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