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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행복하게 해 줄게 (47/50)
  • 47. 행복하게 해 줄게

    회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단 민영의 연락을 받은 혜운은, 퇴근하자마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어머니!”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민영은 혜운을 미소로 반겨 주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가게 한창 바쁠 시간이잖아요.”

    “일 잘하는 알바생이 있어서 괜찮아.”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이라니. 대체 일을 얼마나 잘하기에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는 그녀가 믿고 맡긴 걸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어디 조용하게 이야기할 만한 데 있니? 기다리면서 여기저기 둘러봤는데, 주변에 회사가 많아서 그런지 어딜 가도 사람이 많은 거 같더라.”

    “네, 맞아요. 음….”

    회사 근처까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인 것 같아서, 혜운은 잠시 고민했다.

    “이 근처에 저희 집이 있는데, 그리로 가실래요?”

    “너희 집? 내가… 가도 돼?”

    “그럼요. 마침 어제 대청소를 해서 엄청 깨끗해요. 이럴 때 어머니 초대해야죠.”

    혜운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던 민영이 마지못해 일어섰고, 혜운은 그녀를 팔로 살짝 감싸 안으며 카페를 나섰다.

    민영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내심 긴장하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굴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건지 쉽게 짐작할 수가 없어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 덮어 두기로 했다.

    혜운은 민영의 차를 직접 운전했고, 집으로 가는 동안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긴 민영은 연신 웃어 주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온갖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쏟아 내던 혜운은 집 안에 먼저 들어가자마자 조명을 환히 밝혔다.

    “어머니, 들어오세요.”

    혜운은 민영의 가방과 외투를 챙겨 한쪽에 걸어 두고 차를 끓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그사이 민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집 안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집이 좀 휑하죠?”

    “아이구, 혼자 살면 다 그렇지 뭐. 아주 깔끔하니 좋다.”

    혜운은 잘 우려낸 차를 예쁜 찻잔에 따라 민영이 앉아 있는 창가 옆 테이블로 가져갔다.

    “야경이 참 예쁘네.”

    “저희 집에서 자랑할 건 야경밖에 없어요.”

    민영은 찻잔을 손에 쥐고 한 모금 마신 후에 혜운을 바라보았다.

    “혼자 지내는 거 외롭지 않았니?”

    “눈 뜨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바로 잠들어 버려서 외롭다는 걸 느낄 여유도 없었어요. 그리고…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해지니까, 그것도 견딜 만하더라고요.”

    혜운의 대답에 민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혜운은 혹시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하고 되짚어 보았다.

    “기특하다. 씩씩하게 잘 자라 줘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민영에게 칭찬을 받으니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혜운아, 엄마한테 섭섭했지?”

    “아니에요, 어머니.”

    “내가 너한테 상처 주고, 마음 아프게 했던 거 사과할게.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내가 괴로워서 그랬어. 엄마가… 이기적이었어.”

    “어머니….”

    민영은 혜운의 손을 꼭 잡으며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너희 둘이 서로를 얼마나 많이 아끼는 사이인지 엄마도 잘 알고 있어. 너희는 태어나기 전부터 각별한 인연이었으니까…. 내 감정에만 취해서 잠시 그걸 잊었어. 네가 재현이에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이야.”

    재현의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가족과 다름없었던 이웃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재현과 자신은 각별한 인연을 가진 친구 사이였고, 이제는 연인이 되어 또 다른 관계를 시작했다.

    “재현이를 가장 사랑해 줄 사람은 너뿐이고, 너를 가장 사랑해 줄 사람은 재현이뿐이라는 것도 알아. 너희 둘을 위해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야. 좀 더 일찍 결정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마음 졸이게 해서 미안해.”

    혜운은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떼는 순간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문 채 자신의 손을 덮고 있는 그녀의 거친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혜운아. 이제 엄마 눈치 보지 말고, 두 사람 원 없이 연애해 봐.”

    결국 혜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버텨 보려 해도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아 낼 순 없었다.

    민영은 그런 혜운의 곁으로 다가와 눈물을 닦아 주며 품에 안았다.

    “진현이가 살아 있었다면, 너희 두 사람 연애하는 거 가장 먼저 축하해 줬을 거야. 엄마가 대신 그렇게 해 줬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그럴 수밖에 없던 그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래서 기다림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기에, 혜운은 그녀가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길 바랐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혜운아.”

    민영은 혜운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뒷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향기에, 혜운은 마치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재현은 영철의 SOS 요청을 받고 일찌감치 퇴근해 곧장 식당으로 달려왔다.

    민영이 오늘 하루 갑자기 휴가를 달라며 가게를 비웠는데, 저녁 장사가 다 끝나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다른 직원들이 있으니 가게 운영에는 큰 지장은 없었지만, 주방을 전담하던 민영의 빈자리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영철이 주방으로 들어갔고, 재현이 서빙과 계산대를 오가며 홀 일을 도맡았다.

    “알바생!”

    “네! 갑니다!”

    영철의 부름에 재빨리 달려간 재현은 국밥 뚝배기가 가득 담긴 쟁반을 건네받았다.

    “이게 마지막 주문이지?”

    “네, 아버지 수고하셨어요.”

    영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풀고 주방을 빠져나왔고, 재현은 마지막으로 주문한 테이블에 서빙을 마치자마자 곧장 손님이 빠져나간 빈 테이블 정리를 시작했다.

    영철은 계산대에 앉아 한숨 돌리며 말아 쥔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두들기고 있었다. 아담한 민영의 키에 맞춰 제작한 조리대가 장신의 영철에게 맞을 리 없으니, 허리에 가장 무리가 갔다.

    “알바생.”

    “네, 사장님.”

    “자네는 저쪽 테이블 정리를 하는 게 어때?”

    영철이 가리킨 곳은 방금 전 십여 명의 인원이 회식을 하고 빠져나간 테이블이었다. 재현은 앞치마 허리끈을 질끈 고쳐 매고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 알바생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예전같이 빠릿빠릿하질 않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재현의 우렁찬 대답에 영철과 직원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마침 혜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재현은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연결했다.

    “알바생! 통화는 간단히, 농땡이 치면 안 돼!”

    “혜운이에요, 아버지. 어, 혜운아.”

    - 방금 무슨 소리야? 너 어딘데?

    “가게에서 알바하는 중이야. 큰 사장님이 오늘 하루 종일 어딜 가셔서 퇴근하자마자 붙잡혀 왔어.”

    - 아! 그럼 일 잘한다는 알바생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큭큭대며 웃는 혜운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재현은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끼우고 양손으로는 부지런히 빈 그릇을 쌓았다.

    - 어머니 곧 도착하실 거야. 그 전에 일 다 끝내 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방금 전까지 나랑 같이 계셨거든. 어머니가 저녁도 만들어 주셨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볶음밥. 부럽지?

    잔뜩 신이 난 것 같은 혜운의 목소리에 재현은 들고 있던 빈 그릇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혜운의 말대로, 민영이 가게 밖에 주차를 하고 막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민영은 그 어느 때 보다 밝고 환한 표정을 지으며 영철에게 수고했다 말하며 손을 잡아 주었고, 재현에게도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 그리고 어머니가…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하셨어.

    “…정말?”

    - 응. 원 없이 연애하라고도 하셨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재현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재현은 그대로 민영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머!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엄마. 진짜, 진짜… 고마워요.”

    민영은 재현의 등을 다독여 주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그렇게 좋니?”

    “네. 너무 좋아서… 눈물 날 것 같아.”

    “으이구. 이놈 자식들.”

    민영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혜운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자 재현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삼켰다.

    이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려 왔기에 민영의 허락을 받게 되면 마음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허락을 하기까지 그녀가 했을 고민과 생각들을 떠올리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들 다른 생각 말고 연애나 열심히 해. 서른 살이 넘도록 연애 한 번 안 하고 기다릴 정도로 애틋한 사이인데, 하고 싶은 게 오죽 많겠니? 안 말릴 테니까 실컷 해 봐.”

    “들었지, 신혜운?”

    이번엔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건너왔고, 재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 비로소 빛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나에게는 왜 이리 서럽고 눈물겨운 일인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못난 나에게도 이런 감격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다니….

    힘들고 외로웠던, 서글프고 아팠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보상인 것만 같았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행복해지라고 선물을 준 것 같았다.

    * * *

    혜운과 재현은 그의 집 근처 공원으로 봄 소풍을 나왔다. 봄이 되면 도시락 싸서 소풍을 가자던 약속을 이제야 지키게 된 것이다.

    주말이라 공원에는 가족, 연인, 친구 단위로 소풍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혜운과 재현도 그들 가운데 돗자리를 펴고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적당한 세기의 봄바람이 불고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봄날 한가운데, 재현과 함께 있으니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재현은 혜운의 다리를 베고 누워 책 읽는 걸 꼭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하기에 허락했더니,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책을 배 위에 덮어 두고 눈을 감았다. 역시 로망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했다.

    혜운은 손을 펴 그의 얼굴 위에 작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배 위에 놓여 있던 책을 살짝 들어 내려놓았다.

    “혜운아.”

    “어? 안 잤네?”

    “배고프지 않아?”

    “도시락 먹을까?”

    재현이 벌떡 일어나 앉아 고개를 끄덕였고, 혜운은 아이스박스 안에 담아 온 도시락을 꺼냈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재현과 함께 준비한 3단 도시락 안에는 재현이 태어나 처음 싸 본 김밥과 혜운이 만든 김치볶음밥, 그리고 먹기 좋게 손질한 과일이 담겨 있었다.

    “재현아, 아까 내가 젓가락 챙겼지?”

    “그럴걸?”

    “근데 어디 갔지…. 안 보이네.”

    “차에 있나 보다. 내가 갔다 올게. 잠깐만 기다려.”

    주차장으로 향하는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혜운은 무심결에 공원에 난 좁은 길을 따라 유모차를 밀며 지나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옆을 지나던 나이 지긋하신 노부부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모습도 보았다.

    언젠가 자신도 재현과 함께 저들의 모습과 같이 될 거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신혜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재현의 목소리에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젓가락을 가지러 간다던 사람이 커다란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가 들고 온 것은 새하얀 레이스 리본으로 예쁘게 묶은 직사각형의 원목 상자였다.

    “이게 뭐야?”

    재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혜운의 옆에 앉았다. 혜운은 원목 상자를 감싸고 있던 리본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분홍빛 라넌큘러스였고, 그 다음에는 투명한 유리 돔이었다. 혜운은 상자 안으로 손을 넣어 유리 돔을 꺼내 보았다.

    그 유리 돔 안에는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마치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 같은 하얀 웨딩 슈즈가 담겨 있었다.

    “재현아….”

    “프러포즈할 때, 이걸 꼭 선물해 주고 싶었어.”

    재현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쥐고 있던 손을 활짝 펴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같은 모양의 반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거 신고, 나한테 올래?”

    혜운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재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재현….”

    “네가 허락해 준다면,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그 순간, 혜운의 두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도르륵 굴러떨어졌다. 가슴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혜운을 울게 만들었다.

    “너랑 같이 살고 싶어.”

    재현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혜운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재현은 그런 자신을 꼭 안아 주며 볼에 입을 맞췄다.

    재현은 혜운에게 유일한 존재였다. 오래전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도 절대로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갖게 한 사람도, 사랑이란 감정을 알게 해 준 사람도 재현이었다.

    그의 청혼에 이렇게까지 감격스러운 이유는, 너무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꿈꿔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좋아하고, 혼자서 애태우며 그를 기다리고 그리워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다시 재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혜운은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췄다.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혜운은 다짐했다. 그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곁에서 모든 순간을 함께하겠다고.

    혜운의 눈물 어린 약속에 재현은 환하게 웃으며 혜운을 꼭 끌어안았다. 혜운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참았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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