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소원
재현이 놓아주지 않고 자꾸 괴롭히는 바람에 결국 저녁 식사는 한밤이 되어서야 할 수 있었다.
식탁 위에는 혜운이 정성껏 요리한 미역국과 불고기가 놓였다. 그리고 식탁 한가운데는 서른두 개의 초를 꽂아 둔 케이크가 자리했다.
“소원은 준비됐어?”
혜운의 물음에 재현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혜운은 웃으며 초에 불을 붙였다.
“노래 불러 줘?”
“노래 대신 뽀뽀는 안 되나?”
“생일이니까 봐준다.”
혜운은 웃으며 다가가 그의 두 볼을 손으로 꼭 잡은 채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재현은 흔들리는 촛불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어떤 소원을 비는지 알 순 없지만, 그는 꽤 오랫동안 소원을 빈 후에야 눈을 뜨고 촛불을 껐다.
“생일 축하해.”
혜운의 인사에 그는 쑥스러운 듯 손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생일이 열여덟 살 때였으니, 14년 만에 다시 그의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어서 감격스러웠다.
혜운은 재현에게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선물이야?”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재현은 한껏 기대한 얼굴로 봉투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고, 상자를 열어 본 후에는 혜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와….”
재현이 감탄하며 상자 안에서 꺼낸 건 손목시계였다. 혜운은 옆으로 다가가 직접 그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었다.
“예쁘다! 역시 내 안목은 탁월하다니까.”
혜운이 스스로를 칭찬하자 재현도 혜운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다.
재현이 그녀에게 선물해 준 시계와 같은 디자인의 시계였다. 오래전, 진현이 둘에게 같은 시계를 선물했던 것이 떠올라 준비한 것이다.
다행히 재현의 마음에도 든 모양이다.
“고마워. 매일 차고 다닐게.”
감동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혜운이 재현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자, 그의 팔이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혜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밥 먹자. 배고파서 죽을 거 같아.”
혜운은 재현의 팔을 뿌리치고 냉큼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근데, 무슨 소원 빌었어?”
“비밀.”
“나한테도 비밀이라고?”
“이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소원이라, 절대 말해 줄 수 없어.”
“치….”
대체 얼마나 대단히 간절한 소원이기에 자신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건지….
혜운은 섭섭함을 내색하지 않고 접시에 불고기를 가득 담아 재현의 앞에 놓아 주었다.
“알려 줄까?”
“절대 말해 줄 수 없다며?”
“생각해 보니까… 결국은 네가 이뤄 줄 수 있는 소원인 것 같아서. 차라리 너한테 말하는 게 더 빨리 이뤄질 것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은 재현의 말에 혜운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뤄 줄 수 있는 소원이라니…. 그렇다면 사소한 것일 텐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걸까?
점점 궁금증이 더해졌다.
“뭔지 들어나 보자. 뭔데?”
“대신, 꼭 들어준다고 약속부터 해 줘.”
“그건 듣고 나서 결정할래. 내 능력 밖일 수도 있잖아.”
“네 능력으로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거야.”
“음…. 그래?”
약간 속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내가 해 줄게. 뭔지 말해 봐.”
“네 생일날 말해 줄게.”
“뭐야. 나랑 밀당하는 거야?”
재현은 미역국에 만 밥을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약을 올렸다. 어쩐지 당한 것 같아 분했다.
“지금 빨리 말해 줘. 궁금하단 말야.”
“이틀만 참아.”
혜운은 재현이 너무 얄미워서 눈을 흘기며 노려보았지만 그는 늘 그랬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번에는 불고기를 입 안에 잔뜩 밀어 넣고 맛있다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그 모습에 혜운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 또다시 그의 접시에 고기를 듬뿍 담아 주었다.
대체 뭘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는 거.
너무 궁금해서, 이틀 동안은 잠을 설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낮에는 봄기운이 한가득인 것에 비해, 밤이 되니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재현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혜운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선 재현과 혜운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느릿느릿하게 걸어, 그의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도시락 싸서 소풍 가기로 했던 공원인데, 일이 바빠서 아직 소풍을 가지 못했다.
“아 참, 우리 주말에 할머니 댁에 내려가기로 한 거 취소해야 돼.”
“왜?”
“이모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청주 내려가셨어.”
“이번 생일은 할머니랑 같이 못 보내서 서운하겠네?”
재현의 다독임에 혜운은 마음껏 아쉬워했다. 이제 그의 앞에서 괜찮다는 말로 감정을 숨기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내가 그날 아주 근사한 곳에 데려가서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울지 마.”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재현의 모습에 혜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나 아이스크림 하나만.”
혜운이 편의점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뭘 원하는지 물을 것도 없었다. 혜운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혜운은 재현이 나오길 기다리다가 그의 카디건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진동하자 꺼내 보았다.
발신자는 민영이었다. 재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대신 받을까 고민하다가 혜운은 통화를 연결했다.
- 재현아.
“어머니, 저 혜운이에요.”
- 어, 혜운아. 둘이 같이 있구나?
“네. 지금 재현이 잠깐 편의점 갔는데… 재현이한테 바로 전화하라고 전할게요.”
- 아냐. 그냥 생일인데 저녁은 챙겨 먹었나 궁금해서 전화 걸어 본 거야.
“아…. 방금 저랑 같이 먹었어요. 미역국이랑 불고기랑 해서….”
- 아이구. 혜운이 덕에 재현이가 오래간만에 집 밥으로 포식을 했겠다. 챙겨 줘서 고마워.
민영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혜운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 초콜릿 맛 쭈쭈바를 사서 나온 재현이 누구냐고 물었고, 혜운은 입만 뻥긋거리며 어머니라고 알렸다.
- 내일 모레 혜운이 생일이지?
“네, 어머니.”
- 별다른 약속 없으면 재현이랑 같이 집으로 올래? 엄마가 혜운이 좋아하는 호박 식혜 해 줄게.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재현이랑 갈게요!”
- 그래. 점심때가 한가하니까 점심때 와. 그럼 모레 보자.
민영의 말투는 비록 덤덤했지만, 혜운은 그녀의 제안이 너무 반갑고 기뻐서 눈물이 날 만큼 울컥했다.
“어머니.”
- 응?
“재현이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운은 재현이 듣지 못하게 등지고 돌아서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 오냐.
민영과 통화를 마친 혜운은 마음 한구석이 찡해져 좀처럼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생일을 여전히 잊지 않은 것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감동적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14년 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때의 어머니를 만난 것 같아서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뒤섞였다.
가끔 재현과 함께 식당을 찾곤 했는데, 그때마다 영철과 민영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이 쌓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현과 혜운은 노력하며 묵묵히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엄마가 뭐라셔? 같이 오래?”
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현의 휴대폰을 다시 카디건 주머니에 넣고, 재현이 건넨 아이스크림을 한입 깨물어 입 안에서 녹였다.
“모레가 내 생일이라고, 어머니가 호박 식혜 해 주신대.”
“와… 너무하시네. 아들 생일에는 아침에 메시지 하나 달랑 보내 주고…. 신혜운 좋겠다?”
“어. 엄청 좋아. 그동안 어머니가 해 주시던 호박 식혜가 너무너무 먹고 싶었거든. …너무너무 그리웠거든.”
자꾸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라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난감했다.
재현은 그런 혜운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어깨를 감싸며 꼭 안아 주었고, 혜운도 그의 허리를 팔로 감싼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혜운은 지금 이 순간 재현이 자신의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웠다.
* * *
혜운의 생일날.
혜운은 재현과 함께 본가로 가는 내내 꽤 긴장했다.
토요일 점심시간대면 식당이 가장 바쁠 때인데도 민영은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웬만해서는 가게를 비우는 법 없는 그녀임을 알기에 혜운은 감사하고도 죄송했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어머니.”
“잘 먹을게요, 엄마.”
영철과 민영, 재현과 혜운이 정사각형 상을 두고 둘러앉았다. 혜운과 재현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식구들의 식사를 먼저 챙겼다.
커다란 상에는 빈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요리가 가득했다. 예전부터 민영은 손이 커서 한번 음식을 하면 많이 해 이웃들과 나눠 먹는 걸 좋아했는데, 그 덕을 가장 많이 보았던 게 혜운이기도 했다.
“많이 먹어.”
민영은 영철의 접시에 먼저 두툼한 갈치를 놓아 주고, 혜운에게도 놓아 주었다. 그러곤 손수 옆 가시를 발라 뽀얀 갈치 살을 하얀 밥 위에 무심하게 얹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어렸을 때 혜운이 너 갈치 한 토막만 있으면 밥 한 공기 다 먹고 그랬는데…. 오이 무침도 먹고.”
“네.”
혜운은 민영의 추천대로 부추를 넣고 잘 버무린 오이 무침을 입에 넣었다. 그녀의 음식 솜씨는 말이 필요 없었다.
“맛있어요, 어머니.”
“갈 때 싸 줄 테니까 들고 가.”
“네, 감사합니다.”
혜운은 미역국에 밥을 반 공기 뚝 떠 넣고 꾹꾹 말아 한입 먹었다. 절로 웃음이 나는 맛이었다. 민영의 미역국에 비하면 자신이 끓였던 건 미역국이 아니라 미역이 발만 담갔다가 뺀 국이었다.
“엊그제 제 생일 때 혜운이가 불고기도 해 주고, 미역국도 끓여 줬어요.”
“혜운이가 고생했네! 여보, 기특하지 않아? 조그맣던 애들이 이만큼이나 자라서 밥도 다 해 먹고.”
민영은 영철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재현의 자랑에 혜운이 눈치를 보았지만, 영철은 흐뭇한 표정으로 재현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데 제가 너무 맛없게 해서…. 요리를 좀 배워야 할 거 같아요.”
“일하기도 바쁜 사람이 뭐 하러 요리까지 배워. 요리야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지. 안 그러냐, 재현아?”
민영은 가만히 있던 재현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냈고, 막 밥을 입에 넣던 재현은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 써먹어. 괜히 고생하지 말고. 쟤 시키면 잘해.”
“엄마, 이런 말씀 조금 죄송하지만 저도 좀 바쁜 사람인데….”
“네가 나만큼 바쁘니?”
“아니 뭐 그렇진 않지만….”
“난 너보다 훨씬 바쁜데도 가게 일부터 집안 살림까지 다해.”
“네, 어머님. 잘못했습니다.”
“식사나 하세요, 아드님.”
“넵.”
민영과 재현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혜운은 또 한 번 웃었다.
오래전, 가끔 경선의 퇴근이 늦어져 재현의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종종 보았던 모습이었다. 그리웠던 모습이라 그런지 유난히 반가웠다.
“결혼하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잘하겠지.”
영철이 무의식중에 꺼낸 말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던 영철이 민영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곤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니 나는, 두 사람 대화 방향이….”
“당신도 식사나 하세요.”
“어, 그래야지. 이야! 굴이 제철이라 그런가 엄청 싱싱하네?”
“굴은 가을이 제철이고요.”
“흠흠, 그렇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민영과 재현의 대화가 정말 영철의 말처럼 결혼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민영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다가 영철이 그 부분을 집어내자 놀란 것 같았다.
재현은 이 와중에 눈치 없이 혜운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혜운이 살짝 미간을 구기며 눈짓을 보냈지만 그저 좋은 듯했다.
지금 민영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는 민영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혜운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맛있는 밥을 차려 주지만 여전히 민영은 고민하는 중이고,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지금 그녀가 베풀고 있는 호의는 오래전 혜운을 예뻐하던 마음, 딱 그만큼만 허락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혜운은 좋았다. 매일 조금씩 자라는 희망을 보며 재현과 함께 기다리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영철은 혜운을 향해 눈짓을 보내며 접시에 두툼한 갈비찜을 놓아 주었다.
마치,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혜운은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