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뭐든 먹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42/50)
  • 42. 뭐든 먹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봄은 재현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

    4월이 되자 재킷을 걸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 덕에 길에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볍고 밝아졌다.

    재현도 셔츠에 니트만 덧입고 회사를 나섰다. 나연이 차를 사겠다고 나오라고 해서 점심을 먹고 회사 근처 카페로 향하던 참이다.

    먼저 나와 테라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나연이 재현을 발견하고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무슨 얘길 하려고 밖으로 불러?”

    “개인적인 얘기라 회사에서 하긴 좀 그래서. 일단 앉아 봐. 너 루이보스 티 마실 거지?”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진동 벨을 건넸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주문해 놨어.”

    때마침 불이 들어오며 진동하는 진동 벨을 받아 들고, 재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운터로 향했다.

    예전에는 커피나 차를 마시고 싶어서 마신 적이 거의 없었다. 차를 좋아하는 혜운 때문에 어느 순간 재현도 덩달아 차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차 외에도, 단지 혜운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역시 좋아하게 된 것들이 늘어 갔다. 재현은 그녀의 취향을 닮아 가고, 반대로 혜운도 그의 취향과 닮아 가고 있었다.

    재현은 나연에게 음료를 건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한테 줄 거 있어.”

    “뭔데?”

    “이거.”

    나연은 수줍은 듯 웃으며 손바닥만 한 하얀 종이봉투를 건넸다. 그것은 딱 봐도 청첩장이었다.

    재현은 봉투 안에 든 청첩장을 꺼내 열어 보았다.

    “나 결혼해.”

    나연의 말에 재현은 웃으며 청첩장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보았다.

    “기념 삼아서 조금만 만든 거야.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할 거고.”

    “부모님은… 허락하신 거야?”

    “허락은 무슨…. 지난달에 결혼할 거라고 말씀드리러 갔는데 문도 안 열어 주시더라.”

    말끝에 긴 한숨을 내쉬는 나연의 표정만 보아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축하를 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기어이 지켜 낸 그녀가 용감해 보였다.

    “축하해!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고마워. 축하받고 싶었어.”

    재현의 말에 나연은 감동한 듯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그런 나연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했다. 그녀가 그동안 어떤 노력을 해 왔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6월이면 얼마 안 남았네?”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해서 준비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준비하다 보니까 은근히 할 게 많더라. 요즘 엄청 바빠.”

    “바빠도 좋지?”

    “어. 무지하게 좋아. 너무 행복해.”

    어쩐지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더라니….

    나연의 얼굴 가득 미소가 피어났다.

    “혜운 씨랑 같이 와 줄 거지?”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연은 환히 웃으며 기뻐했다. 결혼식 날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축하를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부럽다. 난 요즘 결혼 앞둔 사람이나, 결혼한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더라.”

    “너도 결혼하면 되지! 아…. 아직도 어머니 허락 기다리고 있는 거야?”

    재현 고개 끄덕이자 나연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렇다고 딱히 반대를 하시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더 어려워.”

    “휴우. 너나 나나….”

    기다림이 길어지다 보니 때때로 마음이 급해질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혜운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며 재현을 다독여 주었다.

    “난 요즘 네가 제일 부러운데.”

    “내가 왜?”

    “올해 임원으로 승진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디서 시치미를 떼? 축의금 두둑하게 내라!”

    브랜드 론칭 6개월 차에 접어든 본 스테이크 하우스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좀 더 안정권에 접어들 때까지 지켜봐야 하기에 섣불리 성공이라고 말할 순 없었지만, 성공적인 안착을 했다는 게 회사 안팎에서의 평가였다.

    그 덕에 재현이 올해 임원 승진이 될 거라는 얘기는 이미 본가인 직원들 사이에선 정설로 통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재현은 본가인의 최연소 임원이 될 것이다.

    “저녁에 시간 어때? 혜운 씨랑 다 같이 식사 안 할래?”

    “오늘은 안 돼. 내 생일이거든.”

    재현이 무덤덤하게 말하자 나연이 깜짝 놀라 재현을 보았다.

    “아, 맞네! 이맘때가 네 생일이었는데…. 깜빡했다.”

    “괜찮아. 나도 네 생일 기억 못 하니까.”

    재현의 대꾸에 나연이 눈을 흘기며 노려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우리가 서로 생일까지 기억해 가며 챙겨 줄 사이는 아니지. 어쨌든 생일 축하해! 그럼 오늘은 혜운 씨랑 오붓하게 보내야겠네.”

    “응. 그러려고.”

    아주 오랜만에 혜운과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어서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디 근사한데 예약해 뒀어?”

    “아니. 집에서 같이 요리해 먹을 거야.”

    “음…. 그것도 좋지. 소꿉놀이하는 것 같고 재밌잖아. 요리하면서 백허그도 좀 하고, 그러다 눈 맞아서 스파크 튀면 요리고 뭐고…. 맞지?”

    나연의 호들갑에 재현은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다른 커플들도 상황은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혜운은 곧장 노트북부터 열었다. 오늘 제시간에 퇴근을 하려면 잠시도 쉴 수 없었다.

    혜운은 4월 1일자 정기 인사에서 파트장으로 승진했다. 네오의 최연소 파트장 승진으로 사내에 주목을 받아 사보에 실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던 일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자신이 책임지고 결정해야 할 것들이 조금 더 늘었을 뿐이다. 그래도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힘든 줄도 모르고 일하고 있었다.

    무영은 이번 인사 때 본사로 이동했다. 반드시 네오 사장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엄포를 놓으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안부를 핑계로 몇 번 연락을 해 오더니, 요즘은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쁜지 그마저도 뜸해졌다.

    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가 경선인 것을 확인한 혜운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졌다.

    “네, 할머니.”

    - 그래, 혜운아. 점심은 먹었니?

    “방금 먹고 왔어요. 할머니도 식사하셨어요?”

    - 할머니는 아직…. 나 지금 청주 내려가고 있어.

    “청주요? 이모할머니 댁에 가시는 거예요?”

    - 어. 경숙이가 대상포진으로 입원했는데 내가 보고 싶다고, 하도 와 달라고 그래서…. 진웅이가 데리러 와 줘서 차 타고 가는 중이야.

    경선의 막내 동생인 경숙은 경증 치매를 앓고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따르던 작은 언니 경선을 수시로 찾았다.

    - 청주에서 며칠 묵어야 할 것 같은데…. 모레 우리 혜운이 생일인데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아요, 할머니. 다음에 내려갈게요.”

    혜운은 생일이 되면 늘 경선의 집으로 내려갔고, 경선은 그런 혜운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미역국을 챙겨 주었다. 이번에는 재현과 함께 내려가기로 했는데, 아쉽게 돼 버렸다.

    - 이번에는 재현이한테 미역국 끓여 달라고 해. …가만있어 봐! 그럼 오늘이 재현이 생일이겠구나?

    “맞아요. 안 그래도 오늘 저녁때 제가 미역국 끓여 주기로 했어요.”

    - 재현이랑 저녁 맛있게 해 먹고, 할머니가 생일 축하한다고도 전해 줘.

    “네, 그럴게요.”

    - 이번 생일에는 재현이랑 오붓하게 보내면 되겠다. 하아…. 할머니는 재현이 덕에 걱정 하나 덜었네. 우리 혜운이… 이제 외로울 일 없을 테니까.

    얼마 전, 엄마 기일에 재현을 데려가 경선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온 참이다.

    경선은 재현은 전과 다름없이 반갑게 맞아 주었고, 교제 사실을 듣고는 오히려 당신이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민영을 기다려 주는 게 맞는 거라고 말씀해 주었다.

    통화를 마친 혜운은 왠지 울컥해서 입술을 꾹 깨물고 뜨끈해지는 눈시울을 티슈로 꾹 눌렀다.

    혜운을 부족함 없이 길러 주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던 그녀임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의 크기만큼 미안한 마음도 자리했다. 여전히 자신을 생각하면 마음부터 졸이는 그녀에게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꼭 보여 주고 싶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휴대폰을 보던 혜운은 배경 화면으로 설정해 둔 재현의 사진을 보며 다시 기운을 얻었다.

    재현은 퇴근 후 혜운과 만나 함께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혜운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짧은 단발머리를 반만 모아 묶었다.

    “나는 뭐 하면 돼?”

    “음…. 장 봐 온 거 정리해서 나눠 줘. 나는 당면이랑 미역부터 불릴게.”

    “알았어.”

    혜운의 지시를 접수한 재현도 소매를 걷었다. 그러곤 식탁 위에 장 봐 온 것들을 늘어놓고 두 군데로 나눴다.

    함께 장을 볼 때면 식재료나 생필품을 반으로 나눠 쓰곤 했다. 나름 효율적이긴 한데 이렇게 나눌 때마다 드는 생각은, ‘같이 살면 이렇게 번거롭지 않을 텐데…’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혜운에게 좀 더 기다리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하기 때문에 입 꾹 다물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다.

    “재현아, 미역국 진짜 내가 끓여? 네가 끓인 게 훨씬 맛있는데….”

    “맛은 중요하지 않아. 난 네가 끓여 주는 거 먹고 싶어.”

    “불고기도?”

    “응.”

    “하아…. 괜찮을지 모르겠다…. 난 정말 모르겠어….”

    혜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곤 휴대폰으로 조리법을 검색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 혜운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재현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두말 않고 내가 다 먹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해.”

    “하긴. 우리 소꿉놀이할 때, 너 흙으로 지은 밥도 먹었잖아.”

    “아, 맞아! 나 진짜 흙 먹었지! 기억난다.”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때는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인 꼬마 시절. 평소와 다름없이 소꿉놀이를 하며 흙으로 지은 밥과 돌로 만든 반찬을 두고 난 아빠, 넌 엄마 하면서 진짜 흙을 한입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 민영에게 엄청나게 혼나면서도, 혹시 혜운이가 먹여 준 거라고 하면 혜운이가 혼날까 봐 끝까지 자신이 한 일이라고 우기다가 더 얻어맞기도 했다.

    “그땐 진짜 미안했다. 내가 오늘은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맛있게 해 줄게.”

    혜운의 다부진 다짐에, 재현은 혜운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두 팔로 꼭 안았다. 한창 불고기 양념을 만들던 혜운이 팔꿈치로 재현의 가슴을 밀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시면 오늘 안에 저녁 못 먹습니다.”

    “뭐든… 먹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우, 미쳤어!”

    혜운이 어깨를 흔들며 재현을 떼어 내려 했지만 재현은 오히려 그런 혜운을 돌려세워 입을 맞췄다. 뒷걸음질 치며 냉장고까지 밀려난 혜운은 재현에게 꼼짝 없이 갇혀 버렸고, 마지못해 입술을 받아 주었다.

    재현은 혜운의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끼워 넣고, 혜운의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려 무릎 뒤를 손으로 받쳤다.

    그 바람에 스커트는 위로 말려 올라갔고, 재현은 스커트 안쪽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탱글탱글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쓸리는 스타킹의 질감이 재현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맨살의 매끈함과는 또 다른 야들야들함은 재현에게 색다른 자극이었다.

    재현은 혜운의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가 작고 도톰한 혀를 강하게 빨아 당기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탐스러운 가슴을 손안 가득 움켜쥐었다.

    얇은 블라우스와 브래지어 안에 얼마나 달고 차진 녀석이 감춰져 있는지 알기에, 재현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재현아…. 자, 잠깐만.”

    가쁜 숨을 몰아쉬던 혜운을 내려다보는데, 립스틱이 번져 엉망이 된 입매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헉, 하고 막혔다.

    단정했던 옷차림과 화장이 자신에 의해 헝클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주었다.

    재현은 다시 혜운의 붉고 앙증맞은 입술을 집어삼켰고, 이내 턱을 지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버렸다.

    “하재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나른한 음성에, 재현은 옅게 웃으며 혜운과 눈을 맞췄다.

    “왜.”

    “솔직히 말해. 요리해 달라고 한 거는… 미끼였지?”

    “그걸 이제 알았어?”

    혜운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재현은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봉긋하게 솟은 그녀의 가슴을 욕심껏 그러쥐었다.

    말랑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은 한번 손대면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던 하재현은 참 순수했는데….”

    “그 순수했던 하재현이 이렇게 훌륭하게 잘 자랐잖아?”

    재현의 말에 혜운이 눈을 흘겼지만, 다시 한번 입을 맞추자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려 그를 맞이해 주었다.

    두 팔로 자신의 목을 두르며 바짝 안기는 혜운을 그대로 안아, 재현은 침실로 향했다.

    그건 그녀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재현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열여덟 살 하재현이 그런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게 한편으론 나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널 보면서 어떤 상상을 하고 무슨 꿈을 꿨는지 다 말해 버리면… 네가 너무 놀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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