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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내가 있을 곳은 (41/50)
  • 41. 내가 있을 곳은

    온종일 연락이 닿지 않는 재현을 향한 걱정으로 혜운의 마음은 소란했다.

    일이 바빠서 그런 것 같아 시간 날 때 연락을 달라고 메시지를 남겨 뒀지만 그는 확인하지 않았다. 한 번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된 적이 없었기에 초조했다.

    회의 중일 땐 종종 두세 시간씩 연락이 안 될 때도 있었지만 부재중 연락이 와 있는 것을 확인하면 곧장 답장이 오곤 했다. 그렇다고 휴대폰 전원을 꺼 놓은 것도 아닌데,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쯤 되니, 재현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으로까지 생각이 번져 피를 바짝 마르게 만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혜운은 다시 한번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곧장 그의 집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 어…. 혜운아.

    막 끊으려던 순간, 재현이 전화를 받았다. 혜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 종일 연락 안 돼서 걱정했어. 아직 많이 바빠?”

    - 아니….

    재현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재현아, 너 지금 어디야?”

    - 집…. 몸이 안 좋아서 일찍 들어왔어.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으면 너한테 바로 갔을 텐데…. 어디가 아픈데?”

    다른 일이 생긴 건 아니라니 천만다행이긴 한데, 일하다가 도중에 집에 갈 정도로 몸이 안 좋다고 하니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속상했다.

    혜운은 외투와 지갑, 차 키만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섰다.

    - 그냥 감기. 안 와도 돼. 약 먹고 한숨 푹 잤더니 다 나았어.

    “우리 사이에 가장 쓸모없는 게 빈말인 거 알지? 좀 더 자고 있어. 금방 갈게.”

    통화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혜운은 그제야 외투를 입었다.

    어제 진현을 만나러 다녀왔다고 했다. 간만에 형도 만나고, 찬바람을 쐬고 와서 기분이 좋다더니, 기어이 감기를 얻은 모양이다.

    평소에 재현은 그 누구보다 건강한 편이지만, 겨울이 되면 한 번씩 감기에 걸려 호되게 앓곤 했다. 가뜩이나 추위도 많이 타는 그가 어쩐지 이번 겨울을 그냥 순순히 넘기나 싶었다.

    거기다 며칠 내내 회사 일로 속 썩고, 과로까지 겹쳐 완전히 방전된 게 아닐까.

    대체 얼마나 아팠으면 메시지 확인조차 못 했을까.

    혼자서 끙끙 앓았을 재현을 생각하니 혜운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정신없이 운전해서 재현의 집에 도착한 혜운은 곧장 침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옆으로 웅크린 채 잠이 든 그가 있었다.

    혜운은 조심스레 다가가 재현의 이마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불덩이가 따로 없었다.

    “다 낫긴 뭘 다 나아. 미련하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종합 감기약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약을 먹었다더니, 병원에 간 게 아니라 이거 한 알 먹고 버틴 모양이다.

    속상하고 화가 났다. 당장 일으켜 잔소리를 쏟아 내고, 그를 번쩍 업고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다.

    깊은 잠에 빠진 건지, 아니면 눈을 뜰 기운조차 없는 건지, 재현은 자신의 인기척에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지금은 그를 깨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혜운은 외투를 벗어 두고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두 개의 물수건을 만들어 다시 침실로 돌아온 혜운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재현을 반듯하게 눕히고 이마 위에 물수건을 얹었다.

    그의 안색을 꼼꼼히 살피던 혜운은 다른 물수건으로 땀이 배어난 목덜미와, 열이 올라 뜨끈뜨끈한 팔과 손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혜운아….”

    “깼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린 그의 눈두덩에 짙은 쌍꺼풀이 두 겹으로 생겼다. 보기 안쓰러운 그 모습에, 혜운은 그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열 많이 나는데… 응급실이라도 다녀오자.”

    혜운의 말에 재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혜운의 손을 잡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뭐 좀 먹었어?”

    “아니.”

    “죽이라도 사다 줄까?”

    “아니.”

    “아니면 곰탕에 밥 말아 줘? 너 아프면 꼭 그렇게 먹었잖아.”

    “아니.”

    “아니면… 시원한 거? 동치미에 밥 먹을래?”

    “아니.”

    “그럼… 칼칼하게 찌개를 끓일까?”

    “아니.”

    “너 진짜….”

    혜운이 이를 악물며 발끈하자 재현이 피식 웃었다. 웃는 걸 보니 조금은 살 만한 모양이다.

    “난 지금 걱정돼 죽겠는데, 넌 웃음이 나와?”

    “아… 재밌다. 신혜운 나한테 쩔쩔매는 거 너무 좋아. 자주 아파야겠어.”

    바짝 약이 오른 혜운은 재현의 이마 위에 얹어 두었던 물수건으로 그의 두 눈을 가려 버렸다.

    혜운이 그러거나 말거나, 재현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너한테 이제 선택의 기회는 없어. 내가 만든 거 무조건 먹는 거야.”

    혜운이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하고 일어서자, 재현이 냉큼 혜운의 손을 붙잡았다. 마음이 약해진 혜운은 다시 돌아서서 재현을 바라보았다.

    “네 얼굴 보니까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하고 있네.”

    혜운의 일침에 재현이 또 한 번 웃었고, 혜운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침실을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요리를 하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평소에 요리를 즐겨 하지 않는 편이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재현이 요리를 해 준 적은 있어도 아직까지 혜운이 그를 위해 요리를 했던 적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주방도 아닌 그의 주방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아픈 사람이라 가뜩이나 입맛도 없을 텐데 더 맛없게 느낄까 봐 걱정이 앞섰다.

    냉장고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하던 혜운은 그가 냉동실에 꽁꽁 얼려 두었던 곰탕과 떡국 떡을 꺼냈다.

    이 곰탕만 있다면 요리에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이 곰탕은 분명 민영의 가게에서 가져온 것일 테니까.

    그리고 재현은 어렸을 때부터 아플 때마다 뜨끈한 곰탕에 밥을 뚝딱 말아 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지곤 했으니, 이 메뉴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혜운은 전자레인지에 살짝 해동한 곰탕을 냄비에 옮겨 담아 팔팔 끓이고, 그사이 파를 쫑쫑 썰어 떡국 준비를 마쳤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살짝 소금 간만 더해 떡국 떡을 넣고 한소끔 끓이는 것뿐이었다.

    인스턴트 요리에 버금가는 초간단 요리지만, 명색이 재현에게 해 주는 첫 요리라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겨 계란을 꺼내 지단을 부치며 흐뭇하게 웃었다.

    곰탕 떡국이 완성되는 동안, 혜운은 냉장고 안에서 김치와 동치미를 꺼내 먹을 만큼 그릇에 옮겨 담아 식탁 위에 놓았다.

    수저 두 벌을 챙겨 놓고 다시 전기 레인지 앞으로 가 팔팔 끓는 떡국을 지켜보고 있는데, 재현이 뒤에서 쓱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떡국?”

    “응. 거의 다 됐어.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재현은 혜운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얹으며 바짝 붙었다. 혜운의 등과 그의 가슴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딱 붙어 버렸다.

    “맛있겠다.”

    “당연히 맛있지.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곰탕에 떡만 넣고 끓인 건데.”

    “아니지. 신혜운이 끓여 줘서 더 맛있는 거지.”

    “어쩐 일로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할까? 너 많이 아프구나?”

    혜운의 장난스러운 말에 재현이 혜운의 목덜미에 진하게 입을 맞췄고, 간지럼을 참지 못한 혜운이 고개를 뒤로 젖히자 재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흔적을 남겼다.

    “네가 우리 집 주방에서 요리하는 거 보는데, 기분이 좀 묘했어.”

    “낯설어서?”

    “아니…. 너무 좋아서.”

    혜운은 전기 레인지의 불을 끄고 뒤로 돌아 재현을 마주 보았다. 재현의 두 볼을 양손으로 감싸 보니 여전히 열이 가득했다.

    “너랑, 매일 이렇게 살면 좋겠다.”

    혜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그가 꺼낸 그 말이 너무도 진실되어 보였고, 동시에 간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혜운은 옅게 웃으며 그의 볼을 엄지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있을 곳은, 결국 너의 옆이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분명 우린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밥을 먹고…. 나도 너랑 그렇게 살고 싶다.

    더는 네가 외롭지 않게, 나도 외롭지 않게….

    혜운은 미처 하지 못한 그 말을 마음 깊은 곳에 밀어 넣으며, 재현에게 입을 맞췄다.

    * * *

    재현은 팀 회의를 마치고 홍 실장이 속한 마케팅팀 사무실을 찾았다.

    갑작스러운 재현의 등장에 다들 의아해했다. 재현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넨 후 홍 실장의 자리로 향했다.

    “실장님.”

    재현이 가까이 다가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일에 집중하고 있던 홍 실장은 그제야 재현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팀장님! 어쩐 일로….”

    “같이 점심이나 드시죠.”

    “벌써요? 아직 점심시간 안 됐는데.”

    “빨리 와요.”

    재현의 재촉에 그는 마지못해 일어나 주춤거리며 외투를 챙겼다.

    문제가 되었던 이벤트를 총괄 담당한 마케팅팀은 사고 수습을 위해 가장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중, 팀을 이끄는 홍 실장은 얼굴이 반쪽이 되어 버렸다.

    재현이 직접 몇 차례나 신경 써서 체크해 달라고 부탁했던 부분이었는데 마침 딱 그 부분에서 사고가 터지자 홍 실장은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사실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닌 상황임에도, 홍 실장은 소속 팀원들을 대신해 자신이 앞장서서 수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변명하거나 팀원을 탓하지 않았고, 팀의 실수를 끝까지 책임졌다.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 홍 실장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재현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특허권 침해 부분에 대한 검토 결과, 다행히 조리 과정과 재료에서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다. 레시피 선정작을 정식 메뉴화 하면서 셰프들이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

    완성 제품의 몇 가지 특징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특허권 침해 소송을 냈던 쪽이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이번에야말로 이런 관행을 뿌리 뽑을 작정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팀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저 어제 일찍 퇴근한 거 마케팅팀까지 소문났습니까?”

    “회사 전체에 소문 다 났는데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던 재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 친구가 간호해 줘서 싹 나았어요.”

    “우와…. 여자 친구가 간호도 해 주고, 좋으셨겠네요. 부럽다.”

    “에이. 실장님은 와이프분이 계시잖아요. 전 실장님이 더 부러운데요?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고, 얼마나 좋아요?”

    재현의 말에 홍 실장은 손사래를 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팀장님이 아직 뭘 모르시네…. 저도 뭐 신혼 때 잠깐 꿀 떨어지던 시절이 있었죠. 근데요, 아이 생기면 세상이 아이 위주로 돌아가거든요. 감기 걸리면 간호는커녕 아이한테 옮으면 안 된다고 접근 금지 명령 떨어져요. 겸상도 안 해 준다니까요?”

    씁쓸한 표정을 짓는 홍 실장의 모습에 재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래도 전 하루빨리 유부남이 되고 싶네요.”

    “예예. 나중에 유부남 되고 나서 다시 얘기하시죠.”

    연애나 결혼 같은 건 자신의 인생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혜운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자신과 공간을 함께 쓰고, 일상을 공유하고,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혜운을 다시 만난 후, 재현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더 혜운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온종일 딱 붙어 지내고 싶었다.

    어렸을 때 종종 혜운과 결혼을 하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이 있어서인지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매일 자라고 있었다.

    “실장님 아이는 누구 닮았어요?”

    “보여 드릴까요?”

    홍 실장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 주었다. 짖궂은 표정을 한 남자아이였는데 홍 실장과 꼭 닮아 있었다. 마치 홍 실장의 미니미 같았다.

    “제 삶의 활력소이자 비타민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우리 아들 사진 보고 나면 기운이 솟아요. 귀엽죠?”

    아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재현은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내분의 사랑을 빼앗아 갔는데도 그렇게 예쁩니까?”

    “네, 예뻐요. 자식을 사랑하는 건… 약간 다른 차원의 사랑 같아요.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팀장님도 자식 생기면 알게 되실 거예요.”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홍 실장의 표정은 아까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아졌고 기운이 넘쳐 보였다.

    정말 아들의 사진을 봐서일까?

    “전 개인적으로 절 닮은 아이보다는 여자 친구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네요. 얼마나 예쁠까요?”

    “아이구, 우리 팀장님 얼른 장가가셔야겠네.”

    그 순간, 재현은 혜운을 꼭 닮은 작은 아이를 상상했고, 가슴이 찌릿했다. 흔히들 말하는, 심장 아프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올봄에 하시는 건 어때요?”

    “안 돼요. 우린 그동안 못했던 연애부터 실컷 해야 하거든요.”

    민영의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서두르지 않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혜운과 아직 못 해 본 게 너무 많고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아서 좀 더 연애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눠서인지, 빠르게 결혼하고 싶다는 욕심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혜운과 가정을 꾸린다는 상상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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