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그 누구도 마음 아프지 않게 (40/50)
  • 40. 그 누구도 마음 아프지 않게

    재현은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든 혜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코트를 가져가 어깨에 덮어 줬지만 그것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자신이 와 달라고 해 놓고도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한 사람을 괜히 오라고 한 건가 싶어 바로 후회했다. 퇴근했다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한 혜운은 아홉 시를 넘겨 퇴근을 하고도 재현의 늦은 저녁 식사를 챙기기 위해 먹을 걸 잔뜩 사 들고 왔다.

    힘들 땐 혼자가 편했다. 혼자 버티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프고 힘들어도 어디에 말할 곳이 없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버티고 마는 게 익숙해져, 몸에 인이 박혔다.

    혜운은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재현에겐 사실이었다.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은 복에 겨웠다. 언제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얼굴을 볼 수도 있으니까.

    혜운을 떠올리면 버틸 만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함께한다는 것은,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혜운이라서 차마 속일 수가 없었고,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거짓을 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했다.

    내가 더 잘해야지. 너무 고마운 사람이니까….

    보기만 해도 아까운,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

    재현은 몰래 입을 맞추려 다가가다가 혜운이 천천히 눈을 떠 시선이 맞닿자,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뭐 하려고 그랬어?”

    “자나 안 자나 본 거야….”

    “거짓말.”

    혜운은 재현의 볼을 손으로 밀어내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재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혜운에게 입을 맞췄다.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

    “아냐. 아까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서 잠깐 존 거야. 나 신경 쓰지 말고 일해.”

    혜운이 벌떡 일어나더니 재현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 도로 앉혔다.

    “일하다가 힘들고 피곤하면 나 한 번 쳐다보고.”

    혜운이 그 말끝에 생글거리며 미소를 짓는 순간, 재현은 덩달아 따라 웃고 말았다.

    “10분에 한 번씩 뽀뽀해 주면 안 되나?”

    “음….”

    “아까는 원하는 거 다 해 준다며?”

    “좋아! 까짓것 해 주지 뭐.”

    혜운은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고 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아까 읽다 만 책을 집어 들었다.

    “넌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오래전, 같은 말을 자신에게 하던 혜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운동화 끈을 대신 묶어 주던 열여덟 살의 신혜운.

    내가 첫사랑이었던 신혜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신혜운….

    재현은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재현아, 우리 솔직해지자.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적어도 우리끼리는 다 터놓고 얘기하자.”

    혜운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 왔다.

    “힘들다고 말하면 네가 마음 쓸까 봐, 항상 내 선에서 감정을 해결하려고 했어. 아마 너도 그랬을 거야. 내가 마음 쓰는 게 싫어서 늘 혼자 해결하려고 했겠지.”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말, 괜찮아.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서로를 이해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 준 것이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 속이 어떨지 짐작하면서, 결국은 함께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마음에 찌꺼기가 남더라고. 쟤는 왜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걸까, 내가 못 미더운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주제넘었던 건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도 이어져서 자꾸 마음을 갉아먹어. 우리가 그런 걸로 감정 낭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그치?”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운이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재현은 결국 다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고, 그녀가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그를 반겼다.

    재현은 혜운을 품 안에 가득 안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나의 안식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무언가가 마음을 뜨겁게 데웠다.

    “난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너 안 떠날 거야.”

    “나도 다시는 너 그렇게 쉽게 안 보내.”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해, 우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힘들었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그곳에서 버텼을 것이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와 함께, 부모님과 떨어지지 않고서 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할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걸 다 얻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모든 걸 잃어도 그 사람 하나면 충분하다던 나연의 말을, 재현은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재현이 걱정되어 저녁 장사를 마치자마자 회사로 달려온 민영과 영철은 사무실 앞에 멈춰 선 채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재현과 혜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철이 걸음을 내딛으려 하자, 민영이 바로 영철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렸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영철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혜운의 앞에서 비로소 환하게 웃는 재현의 모습이 근래 보았던 재현의 모습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

    ‘그래, 저 모습이 진짜 내 아들 재현이의 모습이지.’

    혜운에게 위로를 받은 듯한 재현의 모습에, 영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이만 가죠.”

    작게 속삭이며 자신의 팔을 붙잡는 민영의 표정이 어쩐지 밝아 보였다.

    영철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자고? 이거라도 전해 주고 오자.”

    영철이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흔들자 민영이 손사래를 쳤다.

    “이 양반이 눈치도 없나, 왜 이래! 빨리 와요.”

    앞장서서 걷는 민영의 뒤를 따르며, 영철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들 걱정에 한달음에 달려올 땐 언제고, 혜운과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긴 싫었던 모양이다.

    민영은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서서히 혜운에게 기울어지고 있는 마음을 어쩌진 못하고 있었다.

    그게 눈에 훤히 보일 때마다 영철은 마음이 뭉클하면서도 동시에 설렜다. 머지않아 아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본 스테이크 하우스 신규 메뉴에 대한 특허권 소송은 나연의 발 빠른 대처 덕에 순조롭게 상황 정리가 되었고, 이후 선정한 로펌을 통해 소송을 계속 진행하게 되었다.

    호기롭게 소송을 제기한 측에서는 모두의 예상대로 얼토당토않은 금액의 합의금을 제시했고, 회사에서는 끝까지 소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와 동시에, 실추된 브랜드 이미지에 대해서 역으로 명예훼손 소송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이번 일로 본사에 상주하는 법률 자문 변호사를 선임하기로 하면서 나연에게 가장 먼저 제안했는데, 그녀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다시 이런 일에 휘말릴 수 있으므로, 두 번 다시 무고한 피해를 겪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확실히 가이드라인을 잡기로 했다.

    한 번씩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환멸을 느끼게 되지만, 그래도 재현은 맨 처음 이 회사를 꾸렸을 때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끝까지 잘 지켜 낼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재현은 진현이 머물고 있는 서울 근교의 수목장림을 찾았다. 이번 주 주말이 진현의 생일이기도 하고, 그가 보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 찾았다.

    아침부터 내린 눈으로 길에는 약간의 눈이 쌓여 있었다. 혜운이 가장 좋아하는 푹신한 눈이었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라서, 한낮에 햇살을 받으면 금세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재현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난가을에 왔을 때는 크고 작은 나무마다 형형색색의 낙엽이 가득 매달려 있었는데, 겨울이 되니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눈이 쌓여 있어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재현은 가끔씩 진현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했다.

    떠난 사람 그렇게 오래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래 봤자 결국 남아 있는 사람만 괴로운 거라고 다들 말하지만 남몰래 상상하는 것까지 방해받고 싶진 않았다.

    삶이란 게 참 우습게도 사니까 또 살아졌다. 못 견딜 것 같았는데 견뎌지고, 슬픔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는데 살다 보니 웃는 날도 있었다.

    처음엔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마저 떠난 사람에게 미안했는데, 이제는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살고 있었다.

    형이 만약 살아 있다면, 이런 나에게 어떤 말을 해 줄까?

    기특하다고,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 줄까? 아니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더 열심히 살라고 해 줄까?

    재현은 그 어떤 말이든 듣고 싶었다.

    “재현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고개를 들어 보니, 진현의 나무가 있는 곳에 민영이 서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에 그녀 역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니?”

    “그냥 뭐…. 근데 엄마는 어쩐 일이에요?”

    “나도 뭐 그냥….”

    민영과 재현은 서로 멋쩍어하며 웃었고, 재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요즘 회사 많이 바쁘지?”

    민영은 회사 상황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그에 관해 묻거나 해결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줄 뿐이었다.

    “그렇죠 뭐. 더 바빠지기 전에 일찌감치 형 생일 챙겨 주러 왔어요.”

    “나도 주말에는 바빠서 일부러 한가한 날 온 건데…. 이렇게 만나네?”

    민영이 미소를 지었지만, 자세히 보니 눈두덩이 붉어져 있었다. 이미 울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엄마는 형을 생각하면서 울지 않을까.

    재현은 마음이 아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야? 얼굴이 반쪽이 됐다.”

    “식당 가맹 사업 하는 사람이 밥 굶고 다닐 리가 있겠습니까?”

    “으이그, 이놈 자식. 말이나 못 하면.”

    재현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자 민영이 웃으며 재현의 등을 찰싹 때렸다.

    “피곤해 보이네….”

    “잘 해결될 거예요. 우리 엄마의 노력, 피, 땀, 눈물이 담긴 회사… 내가 잘 지킬 테니까 걱정 마요.”

    “회사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재현은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것이길 포기했던 그녀의 따뜻한 눈빛과 살가운 애정 표현이 너무도 오랜만이라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것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제 제 옆에… 혜운이가 있잖아요.”

    재현의 말에 그녀가 슬쩍 눈을 흘기더니 이내 옅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이 이곳을 찾을 때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복잡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마음이 복잡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과 혜운 때문일 것 같았다.

    이 기다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지만, 혜운의 말대로 민영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때까진 꾹 참고 기다릴 작정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조급해지고 욕심이 나더라도, 모두를 위해서 참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재현은 민영의 손을 꼭 잡고 진현의 나무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그 누구도 마음 아프지 않게 도와 달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