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지금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재현은 혜운의 집에서 함께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보신각 타종 행사를 TV 생중계로 지켜보며, 12시 정각이 되자마자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하재현, 새해 복 많이 받아.”
“너도.”
혜운은 재현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고, 재현은 좀 더 깊은 키스로 이어 가려했지만 혜운이 품 안에서 쏙 빠져나가 버렸다.
촛불을 끄고 스푼을 손에 쥔 혜운은 아이스크림을 뚝 떠서 재현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맛있지?”
이것보단 다른 게 더 먹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기겁하며 집으로 돌려보낼까 봐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과 혜운은 TV를 끄고 창가 쪽으로 옮겨 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퍼 먹으며 오붓하게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혜운의 집 야경은 참으로 훌륭했다.
“줄 거 있는데.”
“응?”
재현은 벗어 둔 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혜운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새해 선물.”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자 선물을 건네받은 혜운이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벗겼다.
“뭐야….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그녀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고, 안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재현아….”
“이리 줘 봐. 내가 해 줄게.”
재현이 혜운에게 선물한 것은 새 시계였다. 상자 안에서 시계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오래된 시계를 풀고 그 자리에 새 시계를 채워 주었다.
“그동안 간직하고 있어 줘서 고마워.”
손을 꼭 잡자, 혜운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너무 예쁘다.”
시간이 멈춰 버린 시계를 차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그녀를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시큰거렸다.
재현은 혜운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혜운은 재현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예전에 형이 너한테 시계 선물해 줬잖아.”
“응. 그랬지.”
“형이 나한테도 같은 디자인의 시계를 선물해 줬었거든? 근데 그때 네가 형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을 때라서, 뭔지 열어 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던져뒀었어. 형한테 괜히 짜증 부리느라….”
“으이그, 철없는 하재현. 그래서 언제 열어 봤는데?”
“…형 보내고 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끌어안고 있었던 이야기를 이제야 비로소 혜운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혜운의 말대로 철없던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혜운에게는 하지 못할 이야기가 없었다.
혜운은 고개를 들어 재현을 바라보았다.
“형한테 엄청 미안했겠다.”
재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혜운은 그런 재현의 손을 꼭 잡고 엄지로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때 너한테 시계 선물한 것도, 형 거 말고 내 거 차라고 준 거였어. 내가 생각해도 참… 유치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차고 다녔네.”
혜운이 팔을 앞으로 내밀어 손목에 채운 시계를 가만히 보다가, 재현을 바라보았다.
“쌤이 우리 둘이 사귀는 거 알면, 엄청 웃을 것 같지 않아?”
“다른 건 모르겠고, 잔소리는 무지하게 했을 것 같다.”
“쌤이 잔소리를 한다고?”
“네가 우리 형을 잘 몰라서 그래. 얼마나 잔소리가 심한데…. 그 다정하고 상냥한 톤으로 기본 두 시간씩 붙들고 계속 얘기해. 사람 아주 미친다니까?”
“에이, 그건 잔소리가 아니라 너한테 애정 어린 조언을 해 준 거지.”
“너 지금 형 편드는 거야? 와… 어이가 없네.”
“그걸 잔소리라고 생각한 네가 더 어이가 없거든?”
늘 그랬듯, 혜운과의 언쟁은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이야기에서부터였다. 오늘은 그 시작이 진현이었다.
진현을 떠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던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점점 진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혜운과 있을 때면 셋이 얽힌 옛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진현을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느리지만 조금씩, 분명히 뭔가 변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 *
신년 연휴가 지나고 첫 근무 날부터 본가인 본사가 떠들썩했다.
두 사람 이상 모이기만 하면 오늘 오전에 뜬 인터넷 기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임원급은 물론이고 과장 이상의 실무진들은 팀별 회의에 소집되었다.
막 임원 회의에 참석하고 나온 재현은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철저히 예방한다고 했는데도 기어이 일이 터졌다. 말 그대로 비상 상황이었다.
본 스테이크 하우스의 브랜드 론칭을 기념해 SNS 이벤트로 진행했던 레시피 응모작 중 최종 선정되어 이번 주부터 판매가 시작된 신규 메뉴에 대해 특허권 침해 소송이 들어온 것이다.
문제는 합의금을 요구하며 사측에 먼저 접근해 오던 경우와 달리,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주려고 작정한 듯 수십 개의 인터넷 뉴스 매체를 통해 기사를 먼저 뿌렸다는 점이다.
특허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도 전에, 이미 본가인은 소규모 업체의 특허권을 침해한 상도덕도 없는 프랜차이즈 기업 프레임이 씌워졌다.
재현은 가장 급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정말 특허권 침해에 저촉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법률 자문을 받아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나 대리인과 접촉을 시도한 후, 누구의 잘못인지를 가려내기로 했다.
본사에 따로 법무팀을 운영할 정도로 큰 규모의 회사가 아니었기에, 그동안 경영 관련 법무 부분은 한때 자신의 장인이 될 뻔했던 나연의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로펌에서 전담해 왔다.
파혼 후 다른 로펌을 찾고 있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라 더욱 난감한 상황이었다.
소송 소식을 접하고 몇몇 유명 로펌에서 제안이 들어오긴 했지만 섣불리 맡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부 임원들은 상주 법무팀에 대한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일단 상황 정리가 먼저였다.
앞으로 회사가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진 않을 것이기에, 최소 법률 자문 고문이라도 모시는 게 맞는다는 의견에는 재현도 동의했다.
그 순간, 재현은 농담 삼아 나연이 자신을 고용하라고 말하던 게 번쩍 떠올라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연의 정확한 전문 분야는 알지 못하지만 회사에서 쫓겨나기 전까진 기업 경영과 지식재산권 전문 로펌인 아버지의 로펌에서 근무했기에 조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걸어 보았다.
재현의 전화를 받고 곧장 회사로 들어온 나연은 소장부터 검토했다.
나연은 이기기 힘든 소송을 굳이 시작한 목적은 역시 합의금이고, 동시에 의도적인 브랜드 이미지 훼손일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건 재현을 비롯한 임원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위임해 주면 정식으로 로펌 섭외하기 전까진 내가 진행할게. 이런 건 시간을 오래 끌면 말만 많아져.”
“그래 줄 수 있겠어?”
나연은 싱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문서를 툭 던져 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편 대리인부터 만나 봐야 할 거 같다. 지금이야 얼굴 안 보고 상대하니까 작정하고 덤비지만, 일단 얼굴 보고 얘기하면 상황이 달라지니까. 어차피 소송 끝까지 끌고 갈 생각도 없어, 이 사람들. 우리가 이런 사람들 하루 이틀 상대해 왔니?”
그러곤 휴대폰을 꺼내 소장에 적힌 연락처를 저장하더니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뭔지 한번 들어 봐야지. 내용 정리 끝나면 그 다음에 언론 홍보팀하고 기사 방향 정해서, 내일 오전 일찌감치 보도 자료 돌리면 될 거 같아. 그사이에 너는 소송 맡길 로펌 확정하고. 어때?”
유사한 상황에서 늘 해 왔던 방식이었고, 나연을 믿고 맡기기로 한 이상 재현은 이견이 없었다.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가려고?”
“바로 가야지. 여기 앉아 있으면 답이 나오나? 이번 이벤트 마케팅 실무자 한 분만 붙여 줘.”
“홍 실장님 연결해 줄게.”
재현은 홍 실장에게 사무실로 올라와 달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오래간만에 일 생겨서 설렌다.”
“수임료 넉넉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김 변호사님.”
“그럼 저야 감사하죠.”
나연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재현도 옅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 같아서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당장 어느 로펌에 의뢰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었는데, 나연 덕분에 신중하게 고민할 수 있는 조금의 시간을 벌었다.
“안 그래도 임원들 사이에서 법무팀까진 운영 못 해도, 회사에 상주하면서 법률 자문해 주는 고문 자리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어.”
“그 얘긴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팀장님.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나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고, 재현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 복잡한 일 아니니까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고마워.”
“제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 마세요, 팀장님. 다녀올게.”
재현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올라온 홍 실장의 모습이 보이자, 나연이 사무실을 나서며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믿음직한 그녀의 모습에 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단단하게 뭉친 목 뒤를 주물렀다.
많은 사람들이 재현에게 그리 큰일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1년간 모든 걸 쏟아부어 기획했던 브랜드에서 일이 터지니 심란하고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재현에겐 여전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재현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 하나씩 시작하기로 했다.
혜운은 온종일 재현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뜩이나 바쁠 텐데 자신까지 나서는 건 그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아서, 재현이 먼저 연락을 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외식 업계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며 급성장한 본가인에 대한 견제일 뿐이라고 다들 간단한 일처럼 말했지만, 그건 당사자가 아니기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퇴근 준비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재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재현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혜운은 울컥하고 말았다. 얼마나 마음고생 했을지, 안 봐도 훤했기 때문이다.
“응, 재현아.”
- 오늘 예상 퇴근 시간은 몇 시야? 맞춰서 데리러 갈게.
요즘 거의 매일 함께 퇴근을 하긴 했지만, 이 와중에도 자신의 퇴근을 챙기는 재현의 성실함에 혜운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써 퇴근해서 집이야.”
- 내가 한발 늦었네.
혹시나 그가 데리러 오겠다고 할까 봐, 혜운은 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그는 속은 것 같았다.
“아직 회사야?”
- 응. 난 아직 일이 남았어. 너 빨리 데려다주고 와서 다시 일하려고 했는데….
“번거롭게 뭐하러.”
- 그냥…. 그 핑계 삼아 얼굴 한 번 보려고.
재현의 그 말에 혜운은 마음이 찡했다. 벽에 기대서서 애꿎은 바닥을 툭툭 차며 울컥한 마음을 다독였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 …조금?
“저녁은 먹었어?”
- 아직.
“내가 맛있는 거 사 가지고 갈까? 일하는 거 방해 안 하고, 딱 밥만 같이 먹자. 응?”
수화기 너머에서는 나지막한 웃음소리만 건너올 뿐이었다. 오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자신이 가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
- 너야말로 번거롭게 뭐하러.
“내 얼굴 보여 주려고.”
-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어.
“그렇게까지 막 보고 싶었던 건 아닌가 봐?”
혜운이 일부러 트집을 잡으며 장난을 걸자 그가 또 한 번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내가 뭐 해 줄까? 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 음….
“이렇게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돼, 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 진짜 솔직하게?
재현의 고민은 생각보다 길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어 긴장이 될 정도였다.
그사이 혜운은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통해 빠른 걸음으로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 지금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던 혜운은 그 말에 주춤하고 말았다.
- 일 방해해도 되니까… 그냥 네가 와 줬으면 좋겠어. 너랑 같이 있고 싶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담겼다. 자신이 곁에 없는 동안 늘 혼자였을 그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가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을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갈게.”
재현을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신나고, 혜운에겐 가장 기쁜 일이었다. 그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도 좋았다.
행복하고 기쁜 순간에는 자신이 일 순위가 아니어도 좋으니, 가장 힘든 순간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자신이 되길 바랐다.
그 순간만큼은, 반드시 그의 곁에 자신이 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지금, 그 순간이 혜운에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