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고백의 무게 (38/50)
  • 38. 고백의 무게

    무영은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본가를 찾았다. 강주와 지수는 갑작스러운 아들의 등장을 반가워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선배 만나셨어요?”

    그런 두 사람에게, 무영은 돌려 묻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무영아, 일단 앉아.”

    지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무영에게 말했고, 그래도 꼼짝하지 않자 팔을 잡아당겨 강주의 맞은편에 앉게 했다.

    “어떤 아이인지 보고 싶어서 엄마가 불렀어. 예쁘게 생겼더라.”

    “엄마.”

    “야무지고 똑똑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어. 회사에서도 유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보기 안쓰러워서 그랬지. 엄마 별말 안 했어.”

    무영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알아듣게 얘기했으니까 일로 성공할 마음이 있다면 현명한 선택을 하겠지.”

    “아버지!”

    강주의 의미심장한 말에 무영이 발끈했다.

    “설마… 선배한데 제가 맘잡고 회사 일 하게 해 주면 승진이라도 시켜 주겠다고 하셨어요?”

    “내년에 파트장 승진 앞두고 있다며? 파트장이 문제겠니?”

    그런 말을 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듯, 강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아…. 아버지 덕분에 이제 선배 얼굴도 못 쳐다보겠네요. 쪽팔려서.”

    “최무영!”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서 선배 본인 능력으로 잡은 기회에요. 아버지한테는 계열사 파트장 자리쯤은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툭툭 줄 수 있는 쉬운 자리일지 몰라도, 누군가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쉬지도 못하면서 노력 끝에 갖는 자리라고요. 그런데… 선배한테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다고요?”

    무영은 바짝 마른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년에 본사로 들어갈게요.”

    “정말이니?”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어차피 더는 쪽팔려서 선배 얼굴 못 본다고. 다신 선배 찾아가지도 말고, 부르지도 마요. 완전히 잊어버리세요. 저도 그럴 거니까.”

    무영은 강주와 지수에게 차례로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곤 집을 나섰다. 뒤따라 나오며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지수를 외면한 채 바로 차에 올랐다.

    오기로 붙잡고 있던 마음까지 이제는 놓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계속 혜운을 좋아하고 싶었는데, 이 이상의 욕심은 집착이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웃는 얼굴로 인사할 수 있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관계는 지키고 싶었다.

    부모님의 탓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들의 탓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정해진 결말이었으니까.

    미련마저 가질 수 없게 해 줬으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무영은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았다.

    재현이 운전하는 동안, 혜운은 평소보다 밝은 톤의 목소리로 연신 재잘거렸다.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쓰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생했어.”

    주차를 하고 안전벨트를 푸는데, 혜운이 웃으며 재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재현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자 못 이기는 척 입술에도 뽀뽀를 해 줬다.

    “혜운아.”

    “응?”

    “미안해….”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우는 민영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운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기에, 마음 졸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나 누구 하나 상처받게 될까 봐 내내 불안했다.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같이 해내겠다고 다짐했지만 혜운이 힘들어하는 걸 계속 지켜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이제라도 떠나겠다고 한다면 붙잡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재현아, 우리 둘 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잖아. 미안해하지 마.”

    재현이 팔을 벌리자 혜운이 웃으며 다가와 품에 안겼다. 재현은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등을 가만히 다독였다.

    “어머니 마음 편안해질 때까지 기다리자. 우리 급할 거 없잖아? 노력하면서 천천히 가면 돼. 알지? 나 기다리는 거 되게 잘해.”

    재현은 말없이 혜운을 꽉 끌어안았다.

    “이 정도 힘든 건, 널 기다리면서 마음 아파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난 다 괜찮아.”

    혜운이 재현의 품에서 빠져나가 그의 두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눈을 맞췄다.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재현은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혜운.”

    “응?”

    “내가 너한테… 사랑한단 말을 한 적 있었나?”

    혜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옅게 웃었고, 이내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재현은 그런 그녀의 볼을 조심스레 만지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랑해….”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 안에 꽉 들어찬 혜운에 대한 마음을 ‘사랑해’라는 짧은 말에 모두 다 담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사랑한단 말보다 훨씬 더 멋진 말을 해 주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혜운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재현의 품 안에 안겼고, 재현은 그녀를 다시 한번 빈틈없이 꽉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혜운을 사랑해 왔지만,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사랑한단 말이 이렇게나 어려운 말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꺼낸 그 순간부터, 평생 이 말을 지켜야겠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재현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재현과 혜운이 집을 나선 뒤, 영철과 민영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민영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영철이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아뇨.”

    “혜운이, 참 잘 자랐더라. 그치?”

    민영은 대답 대신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마음도 못 정했으면서, 애들은 왜 오라고 했어?”

    “보고 싶어서요. 얼굴 보고 나면 마음이 달라질까 싶어서….”

    “그래서 달라졌어?”

    민영은 옅게 웃었다.

    “웬만하면 얼굴 안 보고 살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혜운이 얼굴 보니까…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혜운이한테 그런 독한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내가 걔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맞아, 그랬지. 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인걸.”

    참 많이 아꼈고, 예뻐했다. 이틀 차이로 태어난 재현과 혜운이 함께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뻐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던 꼬물이들이 걸음마를 떼던 날, 두 녀석의 발에 신발을 신겨 주던 것도 영철이었다. 둘이 손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학교에 함께 간 것도 영철이었고, 중학교 졸업식 날 자장면을 먹으러 중식당에 데려간 것도 영철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마냥 축복해 줄 수 없어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건 자신뿐 아니라 민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재현이도 많이 힘들었잖아. 그 녀석 마음 둘 곳이라고는 혜운이가 유일하다는 거 당신도 알지? 저희들이 좋다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어?”

    “뭘 어쩔 생각 같은 거 없어요. 그냥… 내 마음이 좀 복잡해서 그런 거죠. 늦었어요, 얼른 주무세요.”

    다시 옆으로 돌아누우며 등을 보이는 민영의 모습에 영철은 마음이 무거웠다.

    영철은 민영의 마음도, 재현의 마음도, 혜운의 마음도 모두 헤아릴 수 있었기에, 누구 하나 마음 다치는 일 없이 모든 게 다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려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좋을지, 영철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자 식당가 골목에는 술에 취해 길 위에서 휘청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무영의 팀 역시 회식을 하고 방금 헤어진 참이었다.

    혜운은 취객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큰길 쪽으로 걸어갔고, 무영은 그녀의 뒤쪽 먼발치에서 따라 걷고 있었다.

    그녀는 택시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건물 앞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연신 웃고 있었다. 그 상대는 그녀의 연인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가 그녀를 데리러 오기로 한 모양이다.

    무영은 혜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혜운과 시선이 닿았다. 그 순간 미소 가득하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지만, 무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계속 그녀에게 향했다.

    “누구 기다려요?”

    “남자 친구.”

    “와…. 이젠 대놓고 말하네.”

    무영의 대꾸에 혜운이 눈을 흘기며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던 목도리를 턱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 회사는 연말인데 회식도 안 한대요?”

    “지금 퇴근하는 길이래. 외식 업계가 연말에 더 바쁘잖아.”

    “거봐. 일 중독자랑 연애하면 재미없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 줬는데…. 쯧쯧, 고소하네.”

    “어디 감히 선배 앞에서 혀를 차? 술 좀 마셨다고 뵈는 게 없나 보지?”

    혜운이 미간을 구기며 쏘아붙였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무영은 옅게 웃으며 코트 양쪽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혜운을 바라보았다.

    “저 내년에 다른 계열사로 갈 거예요.”

    “어디?”

    “아마도… 본사?”

    “야… 부럽다. 본사로 가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본사로 딱 갈 수도 있고.”

    “아니, 내가 왜 다른 곳으로 가는지는 안 궁금해요?”

    혜운은 멋쩍어하며 어깨를 으쓱였고, 무영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진심으로 섭섭했다.

    “안 궁금해도 물어봐 주면 안 돼요?”

    “왜 가는데?”

    “선배 행복해하는 거 보기 싫어서.”

    “괜히 물어봤네….”

    “난 아직 선배가 좋거든요. 옆에서 계속 보고 있기 싫어서 도망가는 거예요.”

    “나 좀 그만 놔줘.”

    “그 남자랑 헤어지라고 매일 불공이라도 드릴까 봐요.”

    “그래도 너한테 안 가.”

    “사람 마음에 대못 박는 취미가 생기셨네요.”

    혜운은 입술을 꽉 깨물고 단단하게 말아 쥔 주먹으로 무영의 팔을 툭 쳤다. 그만 기어오르라는 신호였다.

    “네 말대로… 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가질 수 있잖아. 그런데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더 갖고 싶었던 거 아닐까?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들 하잖아.”

    혜운의 말처럼, 마음만 먹으면 다 가질 수 있었는데 그녀만은 유일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 더 그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그녀를 갖고 싶어서 오기를 부렸던 건 아니었다. 무영은 진심으로 혜운을 좋아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녀가 좋았다.

    “미안하지만 전 진심으로 선배를 좋아해요.”

    혜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면 나한테도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꼬셔도 안 넘어오긴 하지만 다른 놈한테도 안 가니까… 뭐,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죠.”

    “…….”

    “선배가 그동안 아무한테도 안 갔던 이유가 그 남자 때문이란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해 보고 싶었어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던 때보단,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나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내가 그 상대를 너무 얕본 거지.”

    “…….”

    “선배를 갖고 싶어서 오기 부린 거 아니고… 내 진심이었어요.”

    무영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던 혜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마음 받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도,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웠단 말도 안 할게. …고생했어.”

    정중하지만 완벽한 거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온몸에 힘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무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혜운을 보았다.

    “그래! 정 떼자, 선배! 나도 이제 혼자 좋아하는 거… 지긋지긋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무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영 역시 그녀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는 건 원치 않았다. 좋아해 주는 거 말고 다른 마음은 받고 싶지 않았다.

    “무영아.”

    “다정하게 이름 부르지 마요.”

    “최무영 씨.”

    “네.”

    “새해 복 많이 받아.”

    무영은 눈을 질끈 감고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약 올라!”

    “너 좋다는 여자 만나서 사랑 듬뿍 받고.”

    “됐습니다. 내가 꼭 네오 사장 돼서, 제일 먼저 선배부터 잘라 버릴 거야.”

    “내가 먼저 사장 될 거라니까?”

    “어디 한 번 두고 봅시다.”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자 그녀는 또 한 번 웃었다.

    그때, 자동차 경음기가 울려 고개를 돌려 보니 재현이 차에서 내려 무영과 혜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영은 다가오는 그를 향해 고개 숙여 먼저 인사를 건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팀장님.”

    “네, 무영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벼운 악수가 결국은 힘겨루기가 되어 버렸다. 그걸 눈치챈 혜운이 잽싸게 두 사람의 손을 떼어 놓았고, 여봐란듯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무영은 속이 쓰렸다.

    “잘 가. 연휴 끝나고 보자.”

    “들어가요. 들어가세요.”

    무영은 혜운과 재현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넨 후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발이 너무 무거웠다.

    클럽에 모여 있다며 빨리 오라고 재촉하던 친구들의 성화에 곧장 그리로 갈 생각이었지만, 오늘은 조용한 곳에서 한잔 더 하고 싶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