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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미안해 (37/50)
  • 37. 미안해

    혜운은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본가인 바로 전에 계약했던 렌즈 업체의 지면 광고 촬영 도중 점심 식사 시간이 주어졌고, 현장의 촬영 스태프들과 함께 촬영 세트장에서 간단히 샌드위치와 커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무영이 팔짱을 낀 채 혜운을 빤히 보았지만, 혜운은 괘념치 않고 볼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샌드위치를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무영 씨, 저희 대표님 삼십 분 후에 도착하신답니다.”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업체 담당자가 무영에게 건넨 말을 들은 혜운은 부랴부랴 식사를 마무리했고, 무영은 혜운에게 다가왔다.

    “선배, 광고주 30분 후에 도착한대요.”

    “어, 나도 들었어.”

    “촬영팀에 전달하고 올게요.”

    혜운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무영은 마지못해 자리를 떠났다.

    무영은 그의 부모님이 갑자기 자신을 불러냈던 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듯했다. 만약 알고 있다면 무슨 이야기든 꺼냈을 텐데, 아직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게다가 무영은 여전히 정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혜운은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영의 반응에 혜운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자신을 대했지만 혜운은 조금 달라졌다.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게 맞는 것이었는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욕심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미뤄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애매한 관계를 하루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무영에게 말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영아, 잠깐 얘기 좀.”

    혜운은 촬영 세트장을 나와 인적이 드문 건물 뒤편으로 무영을 데리고 갔다.

    “급한 얘기 아니면 퇴근하고 하시죠? 광고주 곧 올 텐데….”

    “생각해 보니까, 굉장한 급한 얘기야. 마음먹었을 때 해야 할 거 같아.”

    혜운의 말에 무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뒷짐을 지었다.

    “얼마 전에 너희 부모님 만났어.”

    “우리 부모님이요? 왜요?”

    무영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진심으로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나한테 진작 얘기 안 했어요! 무슨 얘기했는데요?”

    “내가 네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네가 맘잡고 회사 일 하는데 내가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그래서 만나는 사람 있다고도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충분히 생각해 보라고 하셨어.”

    “하아…. 미안해요, 선배.”

    “너는 내 답을 알잖아. 그치?”

    무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쪽팔린다. 쪽팔려서… 선배 얼굴을 볼 수가 없네.”

    혜운은 그런 무영의 팔을 다독여 주었다.

    “나머지는 너한테 맡겨도 될까?”

    무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혜운의 거절에도 그래도 계속 좋아할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무영이지만, 그의 부모님이 나선 것은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혜운은 그를 그곳에 남겨 둔 채 걸음을 옮겼다.

    무영과 좋은 선후배 관계로 시작했던 것에 비해 점점 비틀리는 관계가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이런 식의 마무리를 원했던 건 아닌데, 정리될수록 후련한 마음보다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마음이 무겁고 불편해도, 일은 계속해야 했다. 현실을 살아야 했다.

    본격적으로 광고주 맞이를 시작하기 위해 휴식 중인 광고 모델의 대기실로 향하던 혜운은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열한 자리의 낯선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 혜운이니?

    “네,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

    - 나 재현이 엄마. 오랜만이다, 그치?

    친근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단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설마 했는데, 역시 민영이었다. 혜운은 다시 촬영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잘 지내셨죠?”

    - 응. 난 잘 지냈어.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지?

    “놀란 거보다 반가워서…. 근데 어쩐 일이세요?”

    - 어…. 별건 아니고, 한 번 만났으면 해서.

    혜운은 재현이 민영을 만난 뒤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과 재현이 만난다는 얘기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민영의 제안에 순간 긴장한 혜운은 소리 나지 않게 숨을 깊게 들이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될까?

    “오늘 저녁이요?”

    - 내가 오늘밖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듯이 연락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어머니. 괜찮습니다. 제가 가게로 갈까요?”

    - 아니, 우리 집으로 와. 재현이도 오라고 했으니까 둘이 만나서 같이 오면 돼.

    “네, 그럴게요. 퇴근하자마자 재현이 만나서 같이 가겠습니다.”

    - 그래…. 그럼 이따 보자.

    통화를 마친 혜운은 떨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깊게 심호흡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민영의 초대.

    어떤 의미인지 아직 알지 못하기에 긴장되고 떨렸다. 재현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이곳으로 오고 있는 광고주를 맞이할 일이 더 중요했다.

    혜운은 일단 다시 세트장으로 돌아갔다. 머릿속은 복잡할지라도, 지금은 일이 먼저였다.

    재현은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 혜운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혜운의 차가 주차장으로 빠르게 들어왔고, 재현이 손을 흔들자 그녀의 차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운전할게.”

    재현의 제안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재현이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안전벨트를 매고 혜운의 얼굴을 보니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재현은 혜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혜운아.”

    “응?”

    “많이 놀랐지?”

    “어…. 조금.”

    “너 한번 데리고 오라고 하셨는데, 너한테 미리 말 못 했어. 미안해.”

    “아냐, 괜찮아. 안 그래도 새해 되면 겸사겸사 인사드리러 갈까, 생각하고 있었어.”

    혜운은 미소를 지었지만, 긴장감에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아진 상태였다. 재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근데… 날 왜 오라고 하셨을까? 별일 아니겠지?”

    “보고 싶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재현의 대답에 혜운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재현은 차를 몰았다.

    혜운은 가는 내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엇을 염려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아서 재현은 마음이 무거웠다.

    “혜운아, 만약에… 엄마가….”

    “재현아.”

    “어?”

    “생각해 봤는데, 우리… 미리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서 생각하자. 어떤 말씀하실지 아직 모르는 거니까, 다 듣고 와서 같이 고민해도 되지 않을까?”

    긴 고민 끝에 혜운이 내린 결정이기에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었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괜히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며 그 안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13년 만에 다시 너희 부모님 뵙는 거니까 밝은 모습으로 인사드리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다음에 매를 맞게 된다 해도….”

    혜운이 제법 씩씩하게 말했지만 재현은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을지…. 지금은 혜운에게도, 자신에게도 용기가 필요했고 응원이 필요했다.

    다 잘될 거라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매는 내가 다 맞을게. 걱정하지 마.”

    혜운이 웃으며 옆으로 돌아앉아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자, 그녀도 재현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민영은 진수성찬을 차려 두고 혜운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본 것처럼 친숙해서 어색함은 없었지만,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는 느껴졌다. 불편함까진 아니지만, 약간의 거리감이었다.

    영철은 여전히 인자하고 다정한 눈길로 혜운을 바라봐 주었고, 민영도 자신을 살갑게 챙겨 주었다. 그러나 긴 시간의 공백에서 오는 조심스러운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도 변한 부분이 있을 테니, 그들의 변화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과는 완전히 같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서로의 지난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눌 땐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 주었던 민영이기에, 망설임 끝에서 결국 자신을 이해해 주진 않을까 하는 기대… 혹은 욕심이 들었다.

    식사 후 간단한 술상이 차려졌고, 혜운은 영철과 민영의 술잔을 채웠다.

    “혜운이가 어른이 돼서 아버지랑 같이 술도 마셔 주고…. 왠지 기분이 묘하다.”

    영철은 혜운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미소를 지었고, 민영도 영철에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혜운은 자신이 이들과 함께 있으니 열여덟 살이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운전을 해야 하는 재현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 잔을 기울였다. 민영은 두부를 작게 잘라 김치를 얹어 영철의 입 안에 넣어 주었고, 재현은 혜운에게 동태 전을 건넸다.

    “두 사람,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민영의 물음에 혜운은 입에 남아 있던 전을 통째로 꿀꺽 삼키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대답했다.

    “네. 제가 본 스테이크 하우스 광고를 담당하게 됐거든요.”

    “음…. 그랬구나.”

    민영은 혼잣말처럼 작게 말하며 잔을 채웠다.

    혜운의 온 신경은 민영이 순간순간 짓는 표정에 집중되었다. 무심코 찡그린 미간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고, 살며시 미소를 지으면 비로소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둘이 어떻게든 다시 만날 인연이었겠지.”

    영철의 말에 민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가득 채운 잔을 단숨에 비웠다.

    “어렸을 때부터 각별했잖아. 남매나 다름없이 자랐으니… 서로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

    영철이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자 민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혜운은 재현의 눈치를 살피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떨리는 가슴을 다독였다.

    “재현이한테 얘기 들었어. 두 사람… 교제하기로 했다고?”

    “네.”

    “그 얘기 듣고 엄마가 며칠 동안 생각해 봤는데…. 휴우….”

    민영이 긴 한숨을 내쉬자 혜운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가졌을 고민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까 식사 때부터, 서로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먼저 꺼내지 못하고 계속 주변만 빙빙 돌았다. 영철이 분위기를 잡아 주자 민영이 먼저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혜운은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고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른 사람 아니고 혜운이니까, 엄마가 솔직하게 말할게. 혜운이는… 다 알고 있잖아. 우리 가족이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내 왔는지…. 그치?”

    “네….”

    “재현이가 어떤 마음으로 널 찾아가지 못했는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그 동네를 떠났는지, 그것도 알지?”

    “네, 알고 있어요.”

    “자식을 잃으면… 흔히들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아. 엄마도 그랬어. 가슴에 묻어 두고 가능하면 떠올리지 않으려고, 내 삶에 집중하려고 늘 노력해 왔는데… 그게 잘 안 될 때가 있더라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확 튀어나와서 나를 통째로 쥐고 흔들어 버려.”

    민영이 혜운의 손을 꼭 잡았다. 늘 물이 닿아 있던 그녀의 손을 거칠고 뻣뻣했다. 손톱은 벌어지고 손가락 마디는 굵어져,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상해 있었다.

    “널 보면 우리 진현이… 그놈이 더 자주 생각나겠지. 그럼 널 보는 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

    혜운과 재현이 가장 염려하고 걱정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어김없이 민영이 그 말을 꺼냈다. 혜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예쁜 혜운이… 엄마가 덥석 안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무래도 엄마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 같아.”

    “어머니….”

    “그렇다고 두 사람 만나지 말란 소릴 하는 건 아냐. 그냥… 내 솔직한 마음을 말하는 거야. 우리 혜운이가 참 귀하고 소중한 아인데, 어디 가서 이런 대접받을 애가 아닌데, 이런 말밖에 못 해서… 엄마가 너무 미안해.”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민영은 결국 눈물을 보였고, 혜운은 울지 않으려고 입술 안쪽 연한 살을 꾹 깨물며 버텼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힐 만도 한데… 여전히 힘들고 아프네.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고… 하루 종일 반복이야. 꿈에서도 그래. 꿈에서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웃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살면서도 내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휑해. 그동안 엄마가 이러고 살았다, 혜운아. 흐읍….”

    혜운은 민영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민영이 흐느낄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몸이 이렇게나 작았었나 싶었다.

    늘 강하고 씩씩했던 그녀였기에, 자신의 기억 속엔 그런 모습만이 남아 있었기에 가슴이 저렸다.

    “두 사람… 시작하면서부터 고민 많이 했을 거란 거 엄마도 다 알아. 그래서 너희들한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은데….”

    서러운 울음이 뒤섞인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에 혜운은 눈을 감고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끅끅 숨을 들이쉬며 눈물을 쏟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며 혜운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그녀의 눈빛이 너무 서글퍼 보였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다 보였다. 차라리 두 사람 절대 만나지 말라고, 난 그 꼴 못 본다고 말했다면 지금처럼 마음이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 마음 무겁게 만들어서 미안해.”

    애써 미소 짓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 서글퍼 보여서, 혜운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민영에게 자신이 짐을 더한 것 같아 미안했고, 그럼에도 재현을 포기할 수 없어서 죄송했다.

    혜운은 자신의 손을 꼭 잡는 재현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불안해하는 그의 시선에, 혜운은 또 한 번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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