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제발 놔줘
혜운은 재현과 함께 해가 중천에 뜨도록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세웠던 계획 따위는 잊고 여유를 만끽했다.
재현은 물론이고 혜운 역시 오랜만에 쓴 휴가였다. 사는 게 왜 그리 바빴는지, 돌아보니 앞만 보고 일만 하면서 살아온 것 같았다.
딱히 성공에 대한 욕심이 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아등바등하면서 살아온 건지….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마저 없었다면 허무할 뻔했다.
“우리 오늘은 이불 안에만 있자.”
재현의 제안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제 초저녁부터 재현에게 시달린 후로 체력이 떨어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참이다. 오늘은 절대 휴식이 필요했다.
혜운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잔뜩 가져다 둔 귤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재현의 입 안에도 넣어주며 TV를 보았다.
크리스마스답게 영화 채널에서는 <러브 액추얼리>가 한창 방송 중이었고, 영화를 보고 있으니 비로소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게 실감 났다.
여러 에피소드 중, 혜운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아픈 오빠를 돌보느라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던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타이밍이 어긋나는 순간, 혜운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인데도 마음이 짠하고 안쓰러웠다. 담담한 표정으로 짝사랑했던 남자를 향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여자의 모습에, 마치 내 일인 것처럼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혜운은 재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남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그래도 곁에 재현이 있어서 좋았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안을 수 있고,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자꾸 꼼지락거리면 힘든데….”
혜운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재현의 손이 겨드랑이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오더니 슬쩍 가슴을 움켜쥐었다. 혜운이 재현의 어깨를 살짝 깨물어 밀어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바짝 혜운을 끌어안았다.
“나 배고파.”
“아냐. 아닐 거야.”
“뭐가 아냐, 내 배가 고프다는데. 내려가서 밥 먹고 다시 올라오자.”
혜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현은 혜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입을 맞추며 기어이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는 손가락을 쫙 펼친 채 혜운의 가슴을 고무공 만지듯 주무르며 짓궂게 웃었다.
“잠깐만 떨어져 있자, 우리.”
“안 돼.”
“아우, 진짜!”
재현은 결국 이불 안으로 들어와 혜운의 위에 올라탔고, 혜운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위로 끌어 올리더니 배 위에 입을 맞추며 점점 가슴으로 돌진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그는 이곳에 온 이래로 혜운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잘 때도 꼭 안고 자는 걸로도 모자라, 뒤에서 안고 앞에서 안고 만지고 입 맞추고… 마치 한 몸처럼 붙어 지냈다.
재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이리저리 굴려 봤지만 그럴수록 그의 손에 단단히 붙들려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두 다리 사이에 완전히 갇혀 버린 혜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아래로 뻗어 그의 팔을 잡아당겼고, 그가 그제야 올라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혜운은 재현에게 입을 맞추며 넓게 편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과 허리, 배 위를 차례로 쓸며 지났다. 혜운의 스킨십에 긴장한 듯, 그의 근육이 바짝 올라붙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혜운의 손이 골반을 지나 속옷 근처에 닿자, 그의 반듯한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재현은 숨을 멈춘 채 혜운을 빤히 보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혜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옅은 미소를 띤 채 속옷 안으로 조심스레 손을 집어넣었다. 한껏 몸집을 부풀린 남성을 손안에 가득 쥐는 순간, 재현과 혜운은 동시에 숨을 멈췄다.
그의 낯선 반응이 재미있었다. 약간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도 귀여웠다. 쉽게 볼 수 없었던 반응이라 혜운은 장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혜운은 자신의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그의 남성을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조심스레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목에는 핏줄과 힘줄이 솟아올랐다. 숨소리는 가빠졌고, 혜운의 몸을 압박하고 있던 그의 몸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네 손짓에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날 지켜보는 동안, 네가 이런 기분을 느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약간의 승리감도 들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묘하고 또 한 번 아랫배 근처에서 야릇한 감각들이 뭉근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혜운은 더 이상 그를 자극했다간 오늘 이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것 같은 예감에, 쥐고 있던 남성을 놓고 손을 꺼냈다.
“나머지는 밥 먹고 와서 다시 하자.”
혜운의 제안에 그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발… 놔줘….”
혜운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배고픔을 어필했지만 소용없었다. 재현은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침대 밖으로 던지고, 순식간에 혜운도 알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번에는 네가 불붙인 거야.”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한 재현은 흐뭇하게 웃었지만, 혜운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다시 들이쉬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꿈만 같았던 사흘간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재현을 가장 먼저 반긴 건 꽤 많은 업무였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과 이렇게 한 해를 무사히 보내는 것에 대한 즐거움으로 도시는 소란했고, 재현의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연말연시 각종 모임이 몰리는 시즌이 되면 외식 업계는 훨씬 더 분주해진다. 지난가을부터 준비해 온 각종 연말연시 프로모션과 이벤트가 진행되고, 매출이 가장 큰 폭으로 급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일에 파묻히는 걸 좋아했지만, 이젠 조금 달라졌다. 제시간에 퇴근을 하고 주말에는 쉬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된 것이다. 점심 식사도 허기를 달래기 위해 대충 때우던 습관을 버리고,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을 챙기기로 했다.
하루를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는 매끼의 식사가 인간의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알아야 할 외식 업계 실무자가, 정작 자신의 식사를 소홀히 여기면서 고객에게 믿음을 줄 수 있겠냐는 혜운의 날카로운 지적을 받은 후로 반성한 것이다.
재현은 회사 구내식당에 내려와 홍 실장과 함께 식사를 했다. 하루 종일 자신의 사무실에만 박혀 있던 재현이 사무실 밖에 나와 구내식당에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 다들 신기해했다.
“팀장님, SNS 메뉴 공모 이벤트에서 당첨된 신규 메뉴요. 프로모션 수정안 올려 둔 거 확인하셨어요?”
“수제 버거 홍보 프로모션 말이죠? 네, 확인했습니다.”
“각 매장별로 셰프님들이 테스트해 보고 레시피 보완한다고 하셨잖아요? 거의 손댈 게 없어서 과정만 단순화했답니다. 전문가 수준의 완성도라고, 일반인이 제출한 거 맞냐고 할 정도래요. 큰 기대 안 했는데….”
“특허권 등록된 건 없는지 확인해 보신 거죠?”
“네, 지금도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특허권이 있다며 찾아와 소송을 걸겠다고, 합의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음식에 관한 특허권 침해는 증명하는 절차가 쉽지 않아서 일단 공론화가 되면 타격을 입는 쪽은 기업이기에 소송을 끝까지 끌고 가지 않고 중간에 합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을 알고 이용하는 일부 꾼들이 있어서, 그 부분은 항상 신중하게 확인하고 메뉴를 출시하곤 했다.
“실장님, 저 앞으로 업무 시간 외에 업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요.”
재현의 말에 홍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홍 실장은 박수까지 치며 격하게 반겼고, 재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팀장님 혹시… 요즘 연애하세요?”
“그래 보입니까?”
“네, 되게 그래 보여요. 표정도 부드러워지셨고, 무엇보다 요즘 칼퇴근하신다면서요? 얼마 전에 팀장님 휴가 가신다고 들어서 저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다들 신기해했어요.”
휴일에도 나와서 일을 하던 사람이 휴가를 가겠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그가 입사한 이래 처음 써 본 휴가였기 때문이다.
“팀장님 자리 비우신다고 회사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니까 종종 휴가 다녀오세요. 그동안 너무 일만 하셔서 곁에서 보기 안쓰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쉴 땐 쉬어 줘야 능률이 팍팍 오른다고요.”
“새겨듣겠습니다, 실장님.”
재현의 대답에 홍 실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홍 실장은 재현이 담당하고 있는 팀의 업무 특성상 가장 많이 마주치는 편이라, 회사 내에서도 자신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꾸밈이 없는 솔직한 성격이라 잘 맞았다.
지금쯤 진현이 곁에 있다면 홍 실장과 비슷한 또래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독 홍 실장이 편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치고 구내식당을 나선 재현은 홍 실장과 헤어져 건물 밖으로 나섰다. 혜운이 끓여 주던 루이보스 티가 생각나서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은 이미 인근 회사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사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재현은 시끌벅적한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혜운의 집에서 마셨던 것보다 못했다. 재현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혜운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혜운아,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 차 마시러 가도 돼?」
자신이 생각해도 아주 그럴싸한 핑계였다. 혜운이 순순히 넘어와 줄지는 미지수지만….
「차‘만’ 마시고 갈 거면 가능함.」
혜운의 답장에 재현은 웃고 말았다.
「그럼 안 되겠다.」
「빈말이라도 그러겠다고 하면 안 돼? 진짜로 차‘만’ 마시고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야?」
「미안. 나 너한테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
지금 혜운이 짓고 있을 법한 표정의 귀여운 이모티콘이 답장 대신 도착했다.
「휴가 다녀와서 더 피곤한 건 왜 때문이죠?」
「왜 때문이긴. 너 때문이지.」
재현의 억지 논리에 그녀는 또 한 번 지금 심정을 대변한 듯한 이모티콘을 보냈다.
혜운을 안고 또 안아도 허기졌다. 몸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재현은 스스로도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 정도였다. 이렇게 피가 끓어 주체 못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은 퇴근 예상 시간이 언제쯤이야?」
「나 지금 촬영 세트장 나와 있어. 일 끝나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재현은 시계를 확인하곤 조용히 웃었다.
앞으로 혜운에게서 연락이 오길 기다리며 수십, 아니 수백 번도 더 시계를 확인하게 될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설렐 것을 알기에, 재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