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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너밖에 더 있어? (34/50)
  • 34. 너밖에 더 있어?

    크리스마스이브.

    길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다양한 버전의 캐럴과 노란 전구 옷을 입은 가로수들이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마성의 날.

    눈까지 내려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낭만적이었겠지만, 한파가 한풀 꺾인 화창한 날씨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혜운과 재현은 이른 아침부터 둘만의 오붓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시끌벅적한 서울을 떠나 안면도 별장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 주변에서 떨어진 마을이라, 크리스마스의 화려한 분위기와는 정 반대의 고요함이 가득한 곳이었다. 혜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우와…. 바다다.”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할 것 같은 해변이 눈에 들어오자 혜운은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춥다, 얼른 들어와.”

    양손에 캐리어를 끌고 앞장서는 재현의 뒤로 혜운은 어제 미리 마트에서 장 봐 온 것들이 가득 담긴 박스를 들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건물 뒤편에서 봤을 때는 벽돌과 화강석으로 지은 모던한 2층 주택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와 보니 편백나무로 집 안 전체를 인테리어한 따뜻한 느낌의 집이었다.

    “무겁게 왜 들고 왔어. 내가 들고 오려고 했는데.”

    “내가 힘이 세잖아.”

    혜운이 들고 있던 상자를 잽싸게 받아 간 재현이 식탁 위에 짐을 내려 두고 다시 혜운에게 다가왔다.

    “재현아, 집 너무 예쁘다!”

    “이리 와 봐. 더 예쁜 거 보여 줄게.”

    재현은 혜운의 손을 잡고 나무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좌우로 길게 난 유리창이었다.

    “어때?”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자 재현이 뒤에서 혜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어깨 위에 턱을 얹으며 조용히 웃었다.

    “여기 앉아서 일몰 보고 있으면… 마법처럼 모든 걱정과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리한테 꼭 필요한 마법이네?”

    혜운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재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이곳에서 늘 위로를 받았던 모양이다. 이곳에 홀로 앉아 일몰을 지켜봤을 그를 생각하니, 왠지 코끝이 찡했다.

    “너랑 꼭 같이 보고 싶었는데…. 오늘 이룰 수 있겠다.”

    혜운은 뒤로 돌아서서 그의 두 볼을 양손으로 감싼 채 입을 맞췄다. 허리에 있던 그의 손이 등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따뜻하고 달콤한 그의 숨결과 부드러운 입술을 욕심껏 탐하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2박 3일의 짧은 휴가를 알차게 보내자며 야심 차게 준비한 일정이 한가득인데, 아무래도 일정대로 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미리 예약해 둔 좌대 낚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재현과 혜운은 결국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채 곧장 구매항으로 향했다. 낚시 장비를 빌려 배를 타고 좌대로 나가 자리를 잡는데, 생애 첫 낚시인 혜운은 그저 설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좌대 낚시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주변 좌대에는 낚시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가족이나 연인끼리 함께 온 사람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재현이 낚싯대를 세팅하는 사이, 혜운은 바로 휴대용 버너에 냄비를 얹고 라면부터 끓였다.

    계획에 없던 딴짓으로 인해 아침에 먹기로 했던 우럭 젓국은 포기해야 했지만, 낚시를 하면서 라면을 끓여 먹는 로망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리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잡힐까?”

    “눈먼 우럭이 한 마리 정도는 있겠지.”

    재현도 낚시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겨울에는 우럭이 꽤 많이 잡힌다고 하니 아주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라면이 끓는 동안, 혜운은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차를 컵에 따라 재현에게 건넸다. 낚시에 집중한 그의 모습에서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엿보였다.

    “잡았다!”

    그때, 바로 건너편 좌대에서 작은 낚싯대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 있던 작은 꼬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낚싯대를 당겨 큼지막한 우럭을 건졌고, 재현은 진심으로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재현아.”

    혜운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는 재현의 눈빛이, 이젠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혜운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낚시채비 넣은 지 5분도 안 됐어. 기죽지 마. 쟨 낚시 신동일 거야.”

    혜운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낚시에 집중했다.

    “재현아, 라면 다 끓었어. 먹고 해.”

    “먼저 먹고 있어.”

    “같이 먹어야지, 나 혼자 무슨 맛으로 먹냐?”

    혜운의 볼멘소리에 재현이 그제야 마지못해서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낚싯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볍게 두세 시간 정도만 하고 가기로 하고, 체험에 의의를 두고 잡았던 일정인데 어쩌면 이곳에서 다시 시간이 지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또 잡힌 거 같아!”

    아이는 또 한 번 큰 소리로 외쳤고, 이번에도 역시 제법 큰 사이즈의 우럭이 딸려 올라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혜운과 재현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허탈하게 웃었다.

    “거봐. 낚시 신동이라니까.”

    “낚시도 조기 교육이 중요하구나. 우리도 나중에 아이 생기….”

    재현이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혜운의 눈치를 살폈다. 혜운은 그런 재현의 모습이 의아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아냐, 아무것도.”

    그러더니 이유도 없이 씨익 웃으며 라면 한 젓가락을 입 안 가득 넣었다. 사실 혜운은 그가 뒤에 삼킨 말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혜운은 그릇에 코를 박고 라면을 먹고 있는 재현을 보다가 낚싯대를 힐끔 보았다.

    “저거 저렇게 움직이면 잡힌 거야?”

    혜운의 물음에 재현도 그제야 낚싯대를 확인했고, 그와 동시에 그릇을 내려 두고 낚싯대를 걷어 올리며 신중하게 릴을 감았다.

    “잡았어?”

    혜운도 그의 곁에 서서 점점 수면 위로 감겨 올라오는 팽팽한 낚싯줄을 바라보았다. 긴장감이 감돌던 바로 그 순간, 우럭이 펄쩍 뛰어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재현의 얼굴 가득 번졌던 근심이 걷히고, 미소가 얹어졌다.

    “우와! 하재현 멋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압박감에서 드디어 벗어난 그가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우럭의 입에 걸린 바늘을 빼고 살림통 안에 무심하게 우럭을 옮겨 담았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한 마리를 잡고 나니 혜운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 다섯 마리 정도 잡아서 회랑 매운탕이랑 같이 먹을까 봐.”

    “어우, 그건 너무 많다. 딱 한 마리만 더 잡자. 이번엔 내가 잡아 볼게.”

    “우럭이 그렇게 쉽게 잡히는 어종이 아냐. 특히 너처럼 초보들은 더 어렵다고. 그래도 뭐, 내가 잘 가르쳐 줄게. 이리 와 봐.”

    의기양양한 그의 모습에 혜운은 실소가 터지려 했지만 꾹 참으며, 그의 말도 안 되는 낚시 강의를 열심히 들어 주었다. 장난기 넘치고 뻔뻔하던 열여덟 살의 하재현을 다시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웠다.

    사람들은 이런 하재현의 모습을 왜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하긴, 이렇게 귀엽고 철없는 모습은 자신만 보는 게 나을 것 같긴 했다.

    * * *

    재현과 혜운은 2층 창가에 나란히 앉아 담요 하나를 사이좋게 어깨에 두르고, 따뜻하고 향긋한 뱅쇼를 마시며 일몰을 감상하고 있었다.

    말을 잃을 정도로 황홀한 절경이었다. 구름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찬란한 빛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의 순간마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메리 크리스마스.”

    재현의 인사에 혜운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팔을 꼭 안고 빈틈없이 손깍지를 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든든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완벽하게 저장해 두고 싶었다.

    고요함이 좋았다. 굳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같은 곳을 보며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의 이 평온함이 좋았다.

    혜운은 고개를 돌려 재현을 바라보았다. 아스라한 눈빛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일몰보다 더 아름다웠다.

    힘들고 지칠 때면 이곳에 앉아 홀로 일몰을 보았다던 그의 곁에 자신이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를 안아 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너무 잘생겼지?”

    오래전, 똑같은 말을 건네던 열여덟 살의 하재현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혜운은 재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혜운아, 배 안 고파?”

    “아직 괜찮아. 조금 이따가 먹자.”

    “그래.”

    “저녁 먹고, 바닷가로 산책하러 갈까?”

    “아까 실컷 봤잖아.”

    “그래도 또 보고 싶어. 바다는 역시 밤바다 아니겠어?”

    혜운의 물음에 재현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워. 감기 걸려.”

    “난 하나도 안 추운데? 지금도 살짝 더워.”

    혜운은 재현의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뺨에 얹었다. 그러자 그가 뺨과 이마를 만지며 꽤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네가 뱅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술기운이 오른 거야.”

    “와…. 어쩐지 살짝 취기가 오르는 것 같더라. 이거 되게 위험한 술이네. 맛있어서 자꾸 먹게 돼.”

    “그러다 훅 간다. 그만 마셔.”

    재현은 혜운의 잔을 저만치 밀어 두고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그걸 노리고 만들어 준 거지?”

    혜운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흘겨보자, 재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옅게 웃었다.

    “노렸네, 노렸어.”

    “기껏 맛있게 만들어 줬더니….”

    “만드는 거 어디서 배웠어? 어? 빨리 말해 봐.”

    간지럼에 약한 재현임을 알기에, 혜운은 그의 옆구리와 목덜미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재현은 그런 혜운의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이리저리 피하기 바빴다.

    “하지 마!”

    “빨리 대답해! 누구 꾀려고 이런 거 배웠냐고!”

    혜운은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재현의 허벅지에 앉아 그를 마주 본 채로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고,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옆구리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발목을 교차해 결박하자 그가 결국 뒤로 쓰러졌고, 그 바람에 혜운이 재현의 위에 올라탄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르며 묘한 시선이 오갔다. 혜운이 슬쩍 재현의 위에서 내려가려 하자 재현이 혜운의 팔을 붙잡아 당겼고, 결국 두 사람의 몸은 완전히 포개졌다.

    위에서 재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술기운 탓으로 돌리기에는 정신이 너무 멀쩡한데, 심장 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숨소리도 거칠어져 민망했다.

    “내가 꾈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낮게 가라앉아 끝이 살짝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혜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재현아, 아직 6시도 안 됐는데….”

    “그래서?”

    “아니…. 그냥 그렇다고.”

    기어들어 가는 혜운의 작은 목소리에 재현이 슬쩍 웃으며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혜운의 눈썹을 쓰다듬었다. 혜운은 얼굴 곳곳에 닿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꼼짝없이 묶인 것만 같았다.

    눈썹에 머물던 그의 손가락이 볼을 지나 콧대를 쓸고 입술에 머물렀다. 턱을 지나 목선을 타고 점점 아래로 향하는 그의 손길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잖아?”

    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현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입을 맞췄다. 목 뒤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자신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그의 혀를 조심스레 감아 당기며, 그의 달콤한 숨을 빼앗았다. 재현의 단단한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좀 더 깊숙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숨이 가빠지고,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살짝 돋아난 그의 수염이 입술 주변의 연한 살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스치듯 닿았다.

    재현은 혜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옆으로 돌아눕히고,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맨살에 닿자, 등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점점 달아오르는 열기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혜운은 그의 팔을 꽉 움켜쥔 채 입 안에서 유영하는 그의 혀의 감촉을 만끽하며 가슴이 부풀어 오르도록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입술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왜?”

    뭐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물었지만 재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혜운을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단순히 장소를 옮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침대 위에 혜운을 바로 눕힌 재현은 입고 있던 티셔츠와 니트를 한꺼번에 벗어 던졌다. 한 꺼풀씩 옷을 벗는 재현의 모습을 지켜보던 혜운은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괜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맨몸을 보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다.

    처음 관계를 가지다가 도중에 멈춘 후로 몇 번의 밤을 함께 보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갖진 않았다. 처음부터 아직 경험이 없다고 자신의 입으로 먼저 말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재현이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았다.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 주니 고맙기도 한데,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재현이 속옷 차림으로 이불 안으로 들어오더니 혜운의 위로 올라와 그녀의 티셔츠를 벗겨 침대 아래 두고, 등에 손을 넣어 브래지어를 풀어 역시 침대 아래 두었다. 그러곤 이불 안으로 쏙 내려가 스커트를 벗겨 낸 후에 다시 올라와 눈을 맞췄다.

    왼쪽 가슴을 부드럽게 그러쥔 그의 커다란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자, 혜운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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