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보통의 데이트
요즘 한창 인기라는 영화를 보고, 맛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SNS에서 유명한 카페에서 차를 한잔하고…. 대부분의 연인들이 하는 보통의 데이트가 재현은 마냥 설레고 즐거웠다.
이유는 단 하나, 신혜운과 같이 있으니까.
아마 하루 종일 혜운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행복할 듯했다.
오늘 하루, 마치 짠 것처럼 각자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지금 느끼는 감정에 집중했다.
재현은 혜운을 집으로 데려왔다. 데이트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온 탓에 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혜운은 재현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다.
몇 번을 접어 올려도 여전히 손이 가려지는 티셔츠와 줄줄 내려가는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채 식탁을 책상 삼아 책을 읽으며 아이스크림을 퍼 먹는 혜운의 모습이, 재현의 눈에는 못 견디게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재현은 맞은편에 앉아 그런 혜운을 바라보았다.
“맛있어?”
“응. 난 세상에서 아이스크림이 제일 좋아.”
그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초콜릿 맛 쭈쭈바를 가장 좋아하고, 그것 하나면 서럽게 울다가도 눈물을 뚝 그친다는 것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추억 또한 많아서 오랜 공백을 견뎌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여행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생각해 봤어?”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입에 물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난 조용한 곳이 좋아. 매일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게 일이라, 쉴 때는 아무도 없는 곳이 좋더라고. 넌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다행이다. 나랑 여행 취향이 다르면 어쩌나 걱정했어.”
그녀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작게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아이스크림을 푹 떠서 입에 넣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 혜운을 보면서 재현은 속으로, 그 정도 취향 안 맞는 것쯤은 자신이 맞추면 되는데 뭘 그런 걸 걱정하나 싶었다.
“바다로 갈까?”
“오…. 너무 좋지. 근데 지금 숙소 잡을 수 있을까? 예약 다 찼거나 엄청 비쌀 텐데.”
“비어 있는 숙소 있어.”
“거기가 어딘데?”
“내 별장.”
재현의 말에 혜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현아! 너 진짜 성공했구나! 멋진데!”
혜운은 책을 덮어 두고 벌떡 일어나 재현의 두 볼을 양 손으로 감싸며 얼굴 곳곳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퍼부었다.
얌전히 뽀뽀를 받고 있던 재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혜운에게 다가갔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왜, 왜….”
“이제 자자.”
“…같이?”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운이 멋쩍게 웃었다.
“아이스크림 냉동실에 넣어 놔야 되는데…. 다 녹아….”
“아이스크림 말고 본인 걱정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점점 발그레 달아오르는 두 볼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재현은 혜운을 안은 채로 입을 맞추며 침실로 향했다.
이불을 반쯤 걷어 침대 위에 혜운을 눕히고, 재현이 그 옆에 비스듬히 누워 그녀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러곤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혜운의 가슴까지 끌어다 덮어 주었다.
“잘 자.”
“너는?”
“난 밖에서 잘게.”
재현이 침실 조명을 끄고 나서려다 다시 돌아서자, 혜운이 이불을 손에 꼭 쥔 채 얼굴만 빼꼼 내놓았다.
“재현아.”
“아이스크림은 내가 넣어 놓을 테니까 걱정 마.”
“그게 아니라… 여기서 자. 내 옆에서.”
혜운은 조심스레 이불을 들추며 수줍게 손짓했다.
“그 이불 안으로 들어가서… 얌전히 잠만 잘 자신이 없는데?”
자신의 경고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랑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혜운의 목소리가 재현의 마음을 간질였다. 재현은 다시 침대로 다가가 혜운의 옆에 누웠다. 키득거리며 웃는 혜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품 안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재현은 오늘 밤이 아주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회사 근처 중식당에서 나연을 기다리고 있던 재현은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했다. 홍 실장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시선은 노트북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중에 문제 될 수도 있으니까, 조리 방법에 관해서 특허권 등록되어 있는 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신규 브랜드 본 스테이크 하우스의 마케팅 일환으로 SNS를 통해 레시피 공모전을 진행한 참이다. 최종 선정된 메뉴를 실제로 매장의 신메뉴로 적용 가능하도록 레시피를 수정 보완하여 내년 1월 모든 직영점을 통해 출시할 예정이었다.
종종 특허권이 등록된 줄 모르고 응모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 본사 차원에서 여러 차례 확인을 거듭하고 거르지만, 혹시 몰라서 레시피를 보완하는 단계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중이었다.
하나의 메뉴를 개발하고 실제로 적용하는 과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본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든 메뉴들은 1년여의 시간 동안 수많은 전문 인력을 투입해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구성한 것이라 재현은 메뉴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재현에게 본 스테이크 하우스는 아직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본가인에서 출시한 다섯 번째 외식 브랜드이자, 자신의 자리를 걸고 처음으로 론칭한 브랜드이기에 아주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통화를 끝내고 노트북을 막 닫으려는데, 어느새 나연이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언제 왔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나연의 표정에 재현이 멋쩍어하며 웃자, 그녀는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왔으면 말을 하지.”
“알아채지 못한 네 잘못이라곤 생각 안 하니?”
“미안. 진짜 미안해.”
“어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뭐. 너 혜운 씨 앞에서는 안 이러지?”
“당연하지.”
“어우, 얄미워!”
재현은 손을 들어 서버를 부르고 음식을 주문했다.
“용케 살아 있네?”
“숨은 붙여 놔 주시더라.”
나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따뜻한 재스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쫓겨났어. 완전 빈털터리로. 차 압수, 집 압수, 사무실에서도 쫓겨나고…. 나 당장 취직부터 해야 돼. 너희 회사에 법무팀은 없지? 하나 만들어서 나 좀 뽑아 가라.”
“진짜? 진짜 쫓겨났다고?”
“진짜라니까! 사는 건 그 사람이랑 같이 살면 되는데, 생활비를 벌어야 하잖아…. 웬만한 로펌은 발도 못 디밀어. 아버지가 벌써 다 손써 놓으셨거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희 아버지 정말 칼 같으시구나.”
“그렇다고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 난 비로소 자유를 찾았으니까.”
“그래. 긍정적이라 보기 좋네.”
재현의 말에 나연이 웃으며 고개 끄덕인다.
“난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데…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해. 그 사람도 집에선 귀한 아들인데 나 때문에 그런 수모를 겪고. 우리 집 너무 웃기지 않아? 내 옆자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재현은 나연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상처받는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데, 자신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거기다 그 상대방이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면 더욱 괴로울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 사람이 좋아?”
“어. 그 사람이 내 전부니까. 그거면 충분해.”
그녀의 한결같은 사랑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잃어도 그 사람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멋있어 보였다.
“넌 어떻게 됐어? 부모님께 말씀드렸어?”
“말씀은 드렸는데, 별말씀이 없으시네. 그래서 좀 불안해.”
민영의 진짜 속마음을 읽을 수 없기에 오히려 혼란스럽고, 그래서 더 불안했다.
“좋게 생각해. 오히려 혜운 씨라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잖아.”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기에는, 민영의 표정과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재현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주문한 요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자장면 한 그릇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하는 나연의 모습을 보니, 재현은 자꾸만 혜운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너 왜 자꾸 웃어? 얘가 연애를 하더니 실없어졌네?”
“난 좀 웃으면 안 돼?”
“어색해서 그러지. 생전 웃는 꼴을 못 봤는데…. 이야, 사랑이 참 위대하긴 하다.”
대체 그 전의 나는 어쩐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했기에 이렇게 놀라는 사람들이 많은 건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표정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그저, 혜운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서 웃은 것뿐인데 말이다.
“혜운이한테 꽃 선물했는데 좋아하더라. 네 가르침 덕에 칭찬받았다.”
“은혜 갚을 생각 있으면 회사에 법무팀 좀 만들어 줘.”
“식사나 하세요.”
나연은 다시 고분고분 식사를 이어 갔다.
사랑 앞에서 사람이 어디까지 용감해질 수 있는지,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많은 것을 느끼곤 했다. 재현은 그녀의 사랑에 축복을 빌며, 자신도 용감해져서 자신의 사랑도 좀 더 강해지길 빌었다.
혜운은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는 제작 본부장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약속 장소인 모 호텔의 한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제작 본부장 대신,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던 최강주 회장과 낯선 중년의 여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신혜운 씨.”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 파악을 하기 전에, 혜운은 일단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이리 와서 앉아요. 많이 놀랐죠?”
“아… 네. 근데 제작 본부장님은….”
“하하. 신혜운 씨랑 식사 한 번 하고 싶은데, 내가 부르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자리 좀 만들어 달라고 제작 본부장한테 부탁했어요.”
혜운은 외투를 받으려고 옆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식당 지배인에게 외투를 벗어 맡기곤,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제작 본부장과의 식사도 부담스러운데, 그룹의 회장과의 식사라니…. 아무것도 안 먹은 상태지만 벌써 체한 것 같았다.
“인사해요. 이쪽은 태강 백화점 임지수 사장.”
강주는 아까부터 연신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여성을 소개했다.
“아휴, 당신은 소개를 왜 그렇게 딱딱하게 해요? 반가워요. 나 무영이 엄마예요.”
“안녕하십니까. 신혜운입니다.”
혜운이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혜운은 얼떨결에 그녀와 악수까지 나누었다.
무영의 아버지로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만나게 되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혜운은 이 자리에 자신이 왜 앉아 있는 건지 잠시 생각해 보았고, 답은 오래 걸리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자리는 내가 부탁한 거예요. 예전부터 혜운 씨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무영이한테 혜운 씨 얘길 많이 들어서 그런지, 처음 보는 건데도 낯설지가 않네요? 하하.”
“네….”
혜운은 두 사람이 자신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확인하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도 난처했다.
“부담 갖진 말아요. 만나서 너무 고맙단 얘길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우리 무영이, 마음잡고 회사 생활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혜운 씨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재원이라고 들었어요. 내년에는 파트장 승진도 앞두고 있다면서요?”
지수는 아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듯 말하는 그녀 때문에 혜운은 입이 바짝 마를 정도로 긴장했다.
“능력 있는 친구니까 앞으로 더 잘되겠죠, 여보?”
“그럼! 파트장 승진뿐인가? 최연소 팀장도 되고, 임원도 되고, 언젠간 사장도 되겠지.”
혜운은 두 사람의 말을 순수한 격려나 칭찬으로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자신을 가운데 두고 너무나 노골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난 혜운 씨처럼 똑똑한 사람이 좋더라. 말이 잘 통할 것 같아.”
은근한 압박이었다. 지수는 혜운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혜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영이는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하지만, 부모 마음은 또 그게 아니라서. 하나뿐인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마음 졸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게 보기 안쓰럽더라고요.”
“무영이 엄마나 나나, 무영이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무조건 오케이 하지 않아요. 혜운 씨처럼 능력 있고 현명한 사람이 무영이 곁에 있어 주면 녀석이 정신 차리고 회사 일 열심히 할 테니까, 거기에 큰 점수를 준 거죠. 무영이는 반드시 내 회사를 물려받아야 하거든.”
혜운의 무반응에 마음이 급해진 건지, 이번엔 강주와 지수가 꽤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혜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교제 중인 남자 친구가 있습니다. 이미 무영이한테 제 의사 확실하게 전달했고요.”
혜운의 말에 두 사람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이런 이야기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지금 당장 답을 할 필요는 없어요.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지수는 끝까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혜운의 어떠한 설득도 그녀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