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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 (32/50)

32.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

재현은 퇴근 후 본가를 찾았다. 식당 마감을 돕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엄마, 너무 많은 거 같은데?”

“다 했어! 이게 마지막이야.”

소주 한잔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민영은 안주가 부실하면 안 된다며 기어이 김치 부침개를 몇 번이나 부쳐서 내왔다.

하는 수 없이 재현은 민영을 주방에서 강제로 데리고 나왔고, 그제야 세 사람은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었다.

재현은 영철과 민영의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재현의 말에 영철과 민영이 웃으며 건배를 나누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재현은 민영의 입에 부침개 한 쪽을 찢어 넣어 주었고,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던 영철에게는 민영이 직접 넣어주었다.

“우리 아드님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시간까지 기다리셨을까?”

민영의 물음에, 재현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음…. 바로 말씀드릴게요. 저, 나연이랑 약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미리 귀띔을 했던 영철은 예상대로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약혼을 정리한다고?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민영은 갑작스러운 재현의 통보에 어리둥절해하며, 영철과 재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정리할 거라는 얘긴 들었는데, 자세한 얘긴 나도 이제 듣는 거야.”

영철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민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재현을 보았다.

“엄마가 알아들을 수 있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얘길 해 봐.”

“저희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할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그렇게 하기로 합의하고 시작한 관계였고요.”

“결혼하지 않기로 합의를 하고 시작한 약혼이라고?”

“저희가… 양가 어르신들을 속였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민영은 서운함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준비한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기에, 재현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곤 깊게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 *

혜운은 퇴근하자마자 곧장 경선의 집으로 내려왔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재현의 이야기를 꺼냈고, 연애를 시작했다는 말도 털어놓았다.

혜운의 이야기를 들은 경선은 마음이 조금 복잡한 것 같았다. 혜운 역시 그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서운하진 않았다. 그녀가 우려하는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평생 동안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두고 떠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던 재현의 가족을 알기에, 혹시나 혜운으로 인해 그 아픔이 다시 들춰지게 될까 봐…. 그리고 그것 때문에 혜운 또한 마음에 상처를 입고 힘들어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혜운에게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피할 방법이 없으니,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밖에는….

누구 하나 아프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복잡하게 얽혀 버린 인연의 끈을 단번에 풀어 버릴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덜 아픈 방법을 계속해서 찾는 중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계속 뒤척이던 혜운은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왔다.

편의점에 들러 따뜻하게 데워진 두유를 사서 아파트 단지 안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걸리지 않은 검은 하늘에는 밝게 빛나는 별들이 가득했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생각이 복잡할 때면 이곳에 앉아 밤하늘을 구경하곤 했었다. 이렇게 앉아 있다고 해서 하늘이 뚝딱 답을 내려 주진 않지만, 하늘 구경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문득, 혜운은 이곳에 재현과 나란히 앉아 하늘 구경을 하던 오래전 그날이 떠올라 조용히 웃었다.

“흐음….”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혜운은 손에 쥔 두유를 양손 사이에 넣고 비비며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재현에게 부모님과 이야기는 잘 나누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혜운은 기다리기로 했다. 중간에서 자신에게 한 번 더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재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13년을 기다렸던 혜운에게 하루를 기다리는 일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혜운은 외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재현의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았다.

사진 찍는 걸 쑥스러워하는 재현이라 아직 같이 찍은 사진은 없지만, 재현의 단독 사진은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사진 찍히는 것도 멋쩍어 했는데, 어느새 카메라 렌즈 앞에서 미소를 짓는 것도 자연스러워지고, 최근에는 서슴없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와 자신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그동안 자신이 찍은 그의 사진을 보다 보면 한눈에 보였다.

혜운은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을 띄워 둔 채, 사진 속의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 너의 밤이 부디 편안했으면 좋겠다고….

* * *

나연과의 이야기를 영철과 민영에게 솔직하게 모두 털어놓은 재현은 고개를 숙인 채 긴 침묵을 감당하고 있었다.

처음 한마디를 떼는 것까지가 어려워 주저했을 뿐, 그 후로 망설임은 없었다. 다만, 후련한 마음 반, 죄송스러운 마음이 반이라 두 사람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재현이 말하는 동안, 민영은 도중에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었지만 가끔씩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고개를 가로젓기도 했다.

민영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안심시키고 싶어서 나연과 만남을 이어 왔다고 말하진 않았다. ‘너 연애 안 하냐’, ‘너 결혼은 언제 할 거냐’라는 물음에 눈속임을 하려던 이기적인 생각에 내린 자신의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혹시나 민영이 자신의 탓으로 여길까 봐 재현은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실제로도 눈속임을 하려던 자신의 얄팍한 꾀이기도 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민영은 혹시 재현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결정한 것일까 봐, 그것을 가장 염려했다. 혹시나 나연이나 그 댁에 상처가 되는 일을 저질렀을까 봐 말이다.

민영은 나연에게는 어떤 피치 못한 상황이 있었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고 물었지만, 나연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단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서로의 상황을 다 알고 시작한 관계였고,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해서 상의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하자, 민영은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댁에도, 나연이에게도 여러모로 민망한 상황이 돼 버렸네.”

“죄송해요.”

예전 같았다면 등짝에 불이 나도록 얻어맞았겠지만, 민영은 차분하게 듣고만 있었다.

진현을 보낸 후로는 웬만해서는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았다. 시원시원하고 호탕했던 그녀는, 크게 화내는 일도, 크게 웃는 일도 없는, 잔잔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변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 있어요.”

“아휴…. 방금 폭탄 터뜨려 놓고 또 있다고? 엄마 마음의 준비 좀 하자.”

민영은 쓰게 웃으며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 재현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번엔 뭔데?”

민영의 물음에 재현이 영철을 먼저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혜운이 만났어요.”

혜운의 이름이 재현의 입에서 나오자, 민영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그래.”

“저, 혜운이랑 교제 중이에요.”

민영은 눈만 끔벅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재현의 마음을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고민 많이 했어요. 혜운이랑 저… 이제 겨우 시작했지만 가볍게 연애만 하다 말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서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시작한 거예요. 혜운이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가 사랑한 유일한 여자예요.”

생각만 하면 여전히 가슴 한쪽이 잘려 나간 것처럼 아프고 가여운 내 첫사랑….

보기만 해도 아까울 만큼 소중했던, 나의 유일한 사랑….

재현은 한마디 한마디 진심을 담아 꺼냈다. 자신의 말이 민영을 아프게 할까 봐 마음 졸이며, 그녀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하려고 고르고 또 고른 말이었다. 하지만 혜운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민영을 설득하고 싶은 욕심에, 중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재현은 민영이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아니면 조금의 표정 변화라도 일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민영은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깊은 생각에 잠겼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재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입술을 떼었고, 민영이 알았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혜운이….”

단 두 마디뿐이었지만 민영은 그사이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혜운이의 이름을 말하고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시간 날 때 혜운이 데리고 같이 와. 엄마도 혜운이 못 본 지 오래돼서… 보고 싶네.”

그 말끝에 민영은 애써 입매를 늘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표정에는 복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민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현의 어깨를 한번 짚어 주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괜찮을 거야. 네 엄마가 혜운이를 얼마나 예뻐했니? 혜운이 만나면 오히려 더 위로가 될 수도 있어. 지레 걱정부터 하지 말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영철도 재현을 위로하려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민영이 걱정되기도 하고, 동시에 재현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나쁜 쪽도 염두에 둬야 했다. 저만치 앞서 나간 걱정이 재현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부디 영철의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 * *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재현이 눈에 들어왔다.

몇 시에 도착하냐고 계속 묻더니 기어이 데리러 온 것이다. 저녁에 만나기로 해 놓고선 그새를 못 참고 달려온 그가 귀여웠다.

“재현아.”

혜운이 이름을 부르자, 그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잘 다녀왔어?”

“응.”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와 혜운을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포옹에 살짝 놀랐지만, 혜운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안 그래도 재현을 만나면 안아 주려고 했는데, 그가 한발 빨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혹시 마음 상한 일이라도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혜운은 그저 그를 꽉 끌어안아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를 더 많이 웃게 하고 싶었고, 그를 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와 자신의 사랑이 서로에게 아픔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땐 좀 더 밝아지려고 노력했다.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만난 줄 알겠다. 우리 너무 애틋한 거 아냐?”

“전에 말했잖아. 난 항상 애틋하다고.”

재현의 말에 혜운이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려 그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

하재현이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재현의 말에, 혜운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내일 밤까지… 네 시간 전부 다 나한테 줘.”

“…좋아. 다 가져가.”

혜운의 허락에 재현이 또 한 번 환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혜운의 눈에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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