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건물을 빠져나온 차가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렸다.
혜운은 오늘 재현과 함께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의 차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집 방향이라는 걸 알아채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으로 바로 가?”
“너 피곤한 것 같아서.”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이래서 연애는 제대로 했겠나 싶었다.
“아니, 뭐라도 해야지.”
“뭘 해?”
“데이트… 뭐 그런 거. 꼭 내 입으로 얘길 해야 알아?”
“아…. 하하.”
재현이 머쓱해하며 웃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혜운도 덩달아 따라 웃고 말았다.
재현의 외모만 놓고 보자면 연애쯤은 눈 감고도 할 것 같은 연애 숙련자 느낌인데, 실제로는 허당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혜운은 재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 늦어서 저녁 식사할 만한 식당이 있을지 모르겠네.”
“외식업 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끼니는 무지하게 챙겨요.”
“아니, 나는 너 배고플까 봐. 배려 몰라? 배려?”
발끈하는 모습도 마냥 귀여웠다. 재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알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도 많은 것 같아서 그와의 연애가 점점 기대되었다.
“재현아, 너랑 연애하는 거 생각보다 재밌다.”
“얼마나 기대치가 낮았기에 고작 이 정도로도 재밌다는 거지?”
“기대치가 낮았다는 게 아니라, 기대 이상이라는 얘기야.”
혜운의 말에 쑥스러웠는지 재현은 오디오 볼륨을 높이며 딴청을 부렸다. 혜운은 그런 재현의 반응이 재밌어서 자꾸 놀리고 싶었다.
“그럼 앞으로 더 기대해도 되는 건가?”
“기대하지 마. 실망만 커져.”
“그럴 일 없을 거 같은데. 난 너 보고만 있어도 재밌거든.”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이해를 할 수가 없네.”
혜운은 아예 재현 쪽으로 돌아앉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배고파.”
“그럼 우리 집으로 갈까?”
“너희 집?”
“내가 해 줄게.”
“네가 요리를 한다고? 진짜?”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상상도 안 해 봤거든. 우와… 오늘 좋은 구경하겠네.”
혜운의 반응에 재현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까지 쳤다.
“네가 지금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어.”
신호 대기 중, 재현이 짐짓 목소리를 낮게 깔며 혜운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그게 뭔데?”
“넌 내가 요리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는데, 더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우리 집으로 가고 있다는 거야. 우리 집, 내 집. 나 혼자 사는 집.”
“그래서 어쩌라고? 선물이라도 사 갈까?”
“에휴…. 말을 말자.”
혜운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놀려 먹던 재현이 그동안 얼마나 즐거웠을지, 재현을 놀려 보니까 알 것 같았다.
요리를 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긴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대접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다.
혼자 만들어 먹을 땐 대충 해 먹어도 되지만, 자신의 요리를 먹게 될 사람이 혜운이라 더욱더 그러했다. 그냥 배달을 시켜 먹을 걸 그랬나, 하고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 엄청 깨끗한데?”
“다른 남자 혼자 사는 집도 가 봤나 봐?”
“그럼! 수도 없이 가 봤지.”
일부러 저러는 걸 알면서도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 말을 믿지도 않지만 말이다.
“저기 길 건너 보이는 게 공원이지?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얼마나 걸려?”
“10분쯤? 그렇게 안 멀어.”
“봄에 도시락 싸서 소풍 가면 딱이겠다, 그치?”
“그것도 괜찮겠네.”
재현의 속도 모르고, 혜운은 집 구경이 한창이었다.
연신 종알종알,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게 많은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 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있긴 한데, 무슨 정신으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재현은 바글바글 끓고 있는 순두부찌개의 간을 최소 백 번쯤 보았더니 미각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아직 멀었어?”
“다 됐어.”
혜운이 뒤에서 불쑥 나타나 점검에 나섰고, 재현은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다시 한번 간을 보고 전기 레인지를 껐다.
“주걱 줘. 밥은 내가 담을게.”
주걱을 건네자 혜운이 밥그릇 두 개에 하얀 쌀밥을 떠 담았고, 그사이 재현은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식탁 위에 두었다.
식탁에는 두 개의 수저, 두 개의 밥그릇이 사이좋게 마주 보고 놓였다. 자신의 집 식탁에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재현은 순두부찌개가 담긴 뚝배기를 집게로 집어 식탁 정중앙에 내려놓았다.
벌써 자리를 잡고 앉은 혜운은 기대감에 연신 웃고 있었다. 한껏 기대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간이 맞을지 모르겠네.”
재현은 국그릇에 찌개를 떠 담아 혜운의 앞에 내려놓았다.
“잘 먹을게.”
혜운이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입 떠먹는 동안, 재현은 혜운을 바라보며 반응을 기다렸다.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던 혜운은 다시 한번 더 국물을 떠먹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을 만해?”
눈치를 보던 재현이 한술 뜨자, 혜운은 그제야 재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진짜 기대 안 했거든? 맛없다고 놀려 주려고 했는데, 너무 맛있다.”
재현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흐뭇함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요리까지 잘하는 건 약간 반칙인데.”
“많이 먹어.”
혜운이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하고 행복했다.
“밥 얻어먹으러 자주 와야겠다.”
“뭐, 그러든지.”
그런 핑계라도 있으면 훨씬 더 좋겠지.
재현은 금세 바닥을 드러낸 혜운의 국그릇에 찌개 한 국자를 더 담아 주며 조용히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재현과 사이좋게 귤을 까먹던 혜운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현아, 나 칫솔 하나만.”
혜운의 부탁에 재현은 욕실로 향했고, 혜운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는 수납장에서 새 칫솔을 꺼내 포장을 벗겨 치약까지 짜서 건네주었고, 혜운은 곧장 양치를 시작했다. 그러자 재현도 옆에서 양치를 했다.
나란히 서서 똑같이 오른손으로 칫솔을 쥐고 양치질을 하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혜운과 재현은 그 모습을 보며 연신 웃고 있었다.
양치를 마치고 먼저 입을 헹군 재현이 욕조에 걸터앉아 혜운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혜운은 문득 이 집 안에 재현과 자신, 단둘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술 한잔할래?”
혜운이 양치를 끝내자 재현은 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난 술은 잘 못 마셔서….”
“그럼 나 혼자 마시지 뭐. 앉아서 구경해.”
“너 술 마시면 난 누가 바래다줘?”
혜운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만 깜박였다. 재현이 원하는 대답을 알 것 같았지만 혜운은 순순히 해 줄 마음이 없었다. 좀 더 애간장을 태우고 싶었다.
“알았어. 그럼 난 택시 타고 갈게.”
순식간에 실망감이 가득 차오르는 그의 두 눈을 보고 있으려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혜운은 그의 뺨을 꼬집고 손바닥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이 손바닥에 닿자 기분이 묘했다.
그 순간, 재현의 두 팔이 혜운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그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혜운의 두 손은 자연스레 그의 어깨를 짚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심장이 두근거려서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생각해 봐.”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허당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이 집에 온 이후로는 그런 기운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왠지, 이 모든 게 그가 계획한대로 착착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재현이 연애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혜운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고요한 욕실 안에는 그와 자신이 내쉬는 숨소리만 가득할 뿐, 이대로 더 있다간 심장 박동 소리까지 그의 귀에 들어갈 것 같아 부끄러웠다.
“욕실 조명이 되게 은은하고 예쁘다.”
“갑자기?”
“아, 아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분위기를 깨 보려고 작심하고 꺼낸 혜운의 말에 재현이 웃으며 순순히 혜운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혜운의 손을 꼭 감싸 쥐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가자. 더 늦기 전에.”
일어나 먼저 욕실을 나서는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혜운은 안도의 한숨, 아니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둘걸, 하는 후회도 되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긴장을 해서 저도 모르게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단 생각에 분위기를 깨 버렸다. 우리 사이에 더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 버렸다. 재현은 외투를 입고 차 키와 휴대폰을 챙겨 들고 서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허당은 하재현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안 가겠다고 할 수도 없고….
최근 몇 년 사이 자신이 저지른 한심한 짓 중 단연 1위가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혜운은 자신의 코트를 들고 대기 중인 재현에게 다가갔다.
내딛는 걸음이 이보다 더 무거울 순 없었다.
샤워를 마친 혜운은 거실 바닥에 앉아 재현에게 받은 꽃을 꽃병에 옮겨 닮았다.
“이게 얼마 만에 받아 보는 꽃이야?”
감격스러웠다. 대학 졸업식 때 경선에게 받아 보고 처음이었다. 꽃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다 놓고 볼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완성한 꽃병을 들고 어디에 둘까 고민하던 혜운은 창가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혜운이 이 집에서 잠자는 시간 빼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는 곳이라 이 꽃을 볼 때마다 쑥스러워하며 꽃다발을 내밀던 재현을 생각하기로 했다.
혜운은 테이블 앞에 웅크리고 앉아 꽃병과 자신의 얼굴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 재현에게 메시지로 보냈다. 그러자 30초도 지나지 않아 재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떤 게 꽃이게?”
- 술 마셨어?
상대가 하재현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재현의 무뚝뚝한 반응에 혜운은 이를 아득 물며 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아, 진짜 얄미워. 그냥 좀 받아 주면 안 돼?”
- 어떻게 받아 줄까? ‘어떤 게 꽃이지? 도무지 못 찾겠네?’라고 해 줄까?
“어후, 그건 아니야. 미안, 내가 괜한 짓을 했다.”
혜운의 빠른 반성에, 수화기 너머에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 신혜운, 참 새롭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거 같아.
“나도 매일이 새로워. 앞으로 어디까지 새로워질지 나도 장담 못 해.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
재현과 다시 만난 후로, 혜운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낯선 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재현이라서 연애를 시작한다 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재현이라서 점점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했지만, 우린 이미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운 관계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중이었다.
“지금 뭐 해?”
- 맥주 사러 편의점 왔어.
“결국 혼자서 한잔하는구나?”
- 이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거 같아서.
“왜?”
- 알면서 묻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너 다 알면서도 묻는 거면 진짜 나쁜 거다.
“내가 뭘….”
- 꼭 내 입으로 얘길 해야 알아?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혜운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을 품 안에서 놓아주던 그의 아쉬움 가득했던 눈빛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미안. 사실은… 아까 분위기 깨고 나서 후회했어. 너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었거든.”
혜운은 민망함에 옆으로 쓰러지듯 누워 거실의 매트에 데굴데굴 굴렀다.
- 그럼, 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기회?”
띵동.
재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초인종이 울렸고, 혜운은 벌떡 일어나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재현이었다.
-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안 된다고 하면… 그냥 갈 거야?”
- 아니.
혜운은 공동 현관을 열어 준 후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