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예쁘다, 너
출근 준비를 마치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제보다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어.」
재현이 보낸 메시지였다. 그는 보통 자신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날씨를 전해 주곤 했다.
「고마워, 기상 캐스터.」
답장을 보낸 혜운은 목도리를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혜운은 그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만 아는 하재현의 다정함은 생각할수록 가슴 설레게 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자신의 차 옆에 낯익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재현!”
재현은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팔을 양 옆으로 활짝 벌렸고, 혜운은 잽싸게 달려가 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그가 미치도록 반가웠다.
“뭐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놀라게 하고 싶어서.”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혜운은 재현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싼 채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근데 아직까지 출근 안 했네? 그래도 돼?”
“너 바래다주려고.”
“너희 회사랑 우리 회사랑 방향이 정반대잖아.”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너 지각할 텐데?”
“어쩔 수 없지.”
“약속 시간에 무척 예민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래도 되나요?”
“제가 연애를 시작한 뒤로 많이 변했거든요. 안 그래도 요즘 하 팀장 뭔가 달라졌다고 회사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혜운은 그의 옷에 묻은 자신의 화장품 자국을 털어 내며 코트 옷깃을 여며 주었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원래 네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봤어?”
“원래 내 모습?”
“하재현 은근히 착하고 다정한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주는 거 같아. 너무 은근해서 그런가?”
혜운의 말에 재현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사에서 내가 농담하면 다들 긴장해.”
“헐, 뻘쭘하겠다. 너 원래 장난기 많은 거 사람들은 모르지?”
“당연히 모르지. 회사 사람들한테 장난칠 일이 어디 있다고.”
“하긴. 아는 것도 웃긴다.”
“이러다 여기서 날 새겠어. 출근하자.”
“응. 가자.”
혜운은 재현보다 먼저 그의 차로 가 운전석 문을 열어 주었다.
“먼저 타.”
“신혜운 매너 있네. 고마워.”
“이 정도로 뭘.”
그가 차에 오른 뒤, 혜운도 보닛을 돌아 조수석에 올랐다.
“퇴근할 때 내가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좀 늦을 거야. 그냥 먼저 퇴근해.”
“괜찮아. 어차피 나도 늦어.”
“그럼 내가 중간에 상황 보고 전화해 줄게. 너희 회사 광고 작업하느라 바쁜 거니까 네가 이해해. 클라이언트가 워낙 일정을 빠듯하게 줘서 좀 힘드네?”
혜운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재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그 순간, 자신의 뒷자리에 앉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오래전의 하재현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점심을 먹기 위해 구내식당으로 향하던 혜운의 앞을 무영이 가로막아 섰다. 순간 놀란 혜운이 태연한 척하며 올려다보자 그는 싱긋 웃었다.
“왜?”
“왜긴요. 같이 점심 먹자고.”
무영은 며칠째 평소와 다름없이 굴었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난감했다.
계속 좋아하겠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자는 얘기인 건지….
‘난 내 입장을 확실하게 전달했으니까 난 몰라!’ 이게 되질 않았다.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본디 사랑이란 것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일인데, 이런 식의 일방통행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뿐 좋을 게 없었다.
무영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는 것 또한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가….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건, 결국 핑계였다.
“나 먼저 일어날게.”
무영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던 혜운이 결국 먼저 일어섰다.
“밥에는 손도 안 대 놓고…. 왜요, 속이 안 좋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
혜운이 식기를 반납한 뒤 구내식당을 나서자 무영이 뒤 따라와 붙잡았다.
“뭐가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까지 못 견딜 일이에요? 같이 밥도 먹기 싫을 만큼?”
혜운은 혹시나 누군가 그의 말을 듣게 될까 봐 주변을 살피며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목소리 낮춰.”
“촌스럽게 왜 이래요. 뭐, 애인 있으면 다른 남자랑 겸상도 못 하나? 그 남자가 싫대요? 그래도 어쩔 거야.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동료인데.”
“그래. 그래서 내가 불편해 미치겠어.”
“내가 신경 쓰여요?”
이러다간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혜운은 크게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할 얘긴 아닌 것 같다. 퇴근하고 다시 얘기하자.”
혜운이 걸음을 옮기는데, 무영이 혜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깜짝 놀란 혜운이 뒤로 돌아서서 무영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무영아!”
혜운이 무영을 쏘아보는 순간, 반대편에서 누군가 무영의 이름을 반갑게 불렀다.
무영은 그의 부름에 뒤로 돌아섰고, 그제야 혜운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버지.”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는데, 무영의 아버지이자 태강그룹의 오너인 최강주 회장이었다. 그는 서너 명의 임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 박 대표랑 지금 식사하러 나가는 길이야.”
“대표님 만나러 오셨었구나. 몰랐네.”
그 순간, 강주의 시선이 혜운에게 머물렀다. 혜운은 그를 향해 고개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분이 혹시….”
“맞아요. 이쪽이 신혜운 선배예요.”
“반가워요, 신혜운 씨.”
강주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혜운은 잔뜩 긴장한 채 그와 악수를 나눴다.
주변을 지나던 직원들도, 그와 함께 있던 임원들, 이제 막 합류한 대표와 본부장까지 모두 혜운을 바라보았다. 숨 막힐 정도로 부담스러운 순간이었다.
대체 어떤 사이기에 태강그룹의 회장이 일개 계열사의 사원을 알은체하는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무영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다.
“아까 제작 본부장이 칭찬하던 AE가 이 친구 맞지?”
“네, 맞습니다, 회장님. 실력 있는 친구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분명 칭찬인데 왜 벌을 받는 기분이 드는 걸까.
안 그래도 혜운을 시샘하는 무리에서는 자신과 무영의 관계에 의구심을 가지며 ‘회장 라인’이라고 수군거렸는데, 오늘부로 그 소문이 백배쯤 더 확산될 듯싶었다.
“식사 전이면 우리랑 같이 나가지.”
“아닙니다. 저는 방금 식사하고 사무실로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래? 그럼 차라도 한잔하든가.”
“아… 그게.”
혜운이 난처해했지만 다들 혜운에게 동행하겠다고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아버지,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자리 한번 만들게요.”
위기의 순간, 다행히도 무영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주었고, 혜운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신혜운 씨, 다음에 봅시다.”
혜운은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자신의 옆을 지나치던 본부장과 팀장은 왜 따라나서지 않냐며 자신의 일 인양 아쉬워했지만 혜운은 지옥에서 건져진 기분이라 후련했다.
“미안해요, 선배. 우리 아버지가 일부러 저러시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선배 좋아하는 거 아니까 괜히 핑계 대고 얼굴 보러 온 거예요. 계속 보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안 된다고 말렸거든요.”
“말도 안 돼. 기업 회장님이 고작 나 같은 사원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오신 거라고?”
“하나뿐인 아들, 정신 차리고 일하게 만들어 준 은인이니까. 선배 나한테 시집오면 이것보다 더 귀한 대우 받을 수 있어요.”
이 상황에서도 무영은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를 농담을 던졌다. 혜운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데도 내가 널 편하게 생각할 수 있겠니?”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날 줄 알았나? 나도 몰랐어요.”
혜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단 회사 밖으로 나왔다. 바깥의 찬 공기를 쐬고 싶었다. 답답해진 가슴과 복잡한 머리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오후에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배.”
혜운은 무영을 향해 돌아서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여지를 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분명히 할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네가 날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 이 상황이 못 견디게 불편해. 그러니까 네 감정 나한테 강요하지 마.”
“내 감정 강요한 적 없어요.”
“넌 계속 내 감정 같은 건 중요하게 여기지 않잖아. 난 그걸 강요라고 느꼈어.”
무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그가 조금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 사람… 선배를 힘들게 했잖아. 그래도 그 사람이야?”
“어. 나는 그래도 그 사람이야. 이것보다 힘들어져도 그 사람이야.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어.”
“그 사람이 먼저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다른 이유로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절대 없어. 그건 내가 확실하게 알아.”
무영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들어 자신과 눈을 맞췄다.
“와…. 되게 잔인하다. 아주 대못을 박는구나?”
“너한테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나쁜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은 내 욕심 때문에 널 헷갈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해, 내 실수야. 앞으로 계속 같은 사무실에서 얼굴 보고 일해야 하니까, 그래서 생각이 많았어.”
“알았어….”
“내가 좀 더 일찍 분명하게 잘라 말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내가 어리석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감정 잘 추스르고, 마음 정리해 줬으면 좋겠어.”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 나도 생각 좀 하자.”
아직 못다 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혜운은 그곳에 무영을 남겨 두고 다시 회사 안으로 돌아왔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현은 혜운의 전화를 받고 그녀의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그는 늦게까지 회사에서 일하는 날이 눈에 띄게 줄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혼자 일하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혜운의 퇴근시간에 맞춰 퇴근을 서두르곤 한다.
그때, 건물을 나서는 혜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 사이에 많이 지쳐 버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혜운은 재현을 발견하곤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재현은 조수석에서 미리 준비해 온 꽃다발을 꺼내 등 뒤에 감췄다.
“오래 기다렸지?”
혜운의 물음에 재현은 대답 대신 등 뒤에 숨겼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운 하나 없어 보이던 혜운의 얼굴에 생기가 돌더니 도톰한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 자신이 더 기분 좋아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웬 꽃이야? 이거 나 주는 거야?”
“그럼 내가 설마 자랑하려고 보여 주는 거겠어?”
“우와! 고마워.”
혜운은 꽃다발에 얼굴을 묻은 채 향기를 맡으며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재현은 너무나 흐뭇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선물을 하는 거구나, 싶었다.
“네가 꽃을 좋아했나?”
“그것도 몰랐어?”
“너한테 꽃을 선물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알 리가 없지.”
“그러게 꽃 좀 줘 보지 그랬어?”
혜운은 재현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받으니까 진짜, 진짜 기분 좋다.”
“앞으로 자주 사 줄게.”
다시 한번 눈을 지그시 감고 꽃향기를 맡는 혜운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예쁘다는 단어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예쁘고, 또 예뻤다.
“피곤이 싹 풀리는 거 같아.”
“오늘 많이 힘들었어?”
“그냥 뭐….”
뭔가를 말할까 말까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던 혜운은 재현이 집요하게 눈을 맞추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일 있었구나?”
“아니. 없었어.”
“분명 뭐 있는데….”
“회사에서 있었던 일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으면 너까지 더 피곤해져. 나 그건 안 할래.”
“내가 듣겠다는데 왜 네 맘대로 결정해?”
“뭐야, 지금 한번 싸워 보자는 거야?”
이렇게 일부러 과장되게 나오는 걸 보니 정말 피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재현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녀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어. 안 물을게. 얼른 타, 춥다.”
재현의 말에 혜운은 순순히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