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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진심 어린 충고 (27/50)
  • 27. 진심 어린 충고

    본가를 찾은 재현은 집 대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슈트 재킷을 벗은 재현은 넥타이도 풀고 셔츠 소매도 걷어 올린 채 직접 서빙에 나섰다. 저녁 식사 시간대라 가게 안은 이미 만석이었고, 바깥에도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걸 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본가인이 있게 한 홍성곰탕 본점. 진현이 세상을 떠난 뒤, 평생 살던 곳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은 민영과 영철이 억척스럽게 일군 첫 번째 식당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라니까 뭐하러 가게로 왔어. 옷에 음식 냄새 다 배겠다. 아이구, 이거 봐! 벌써 깍두기 국물 튀었잖아.”

    빈 국밥 그릇을 내려놓고 돌아서다가 민영에게 붙잡힌 재현은 결국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민영은 재현의 목에 앞치마를 걸어 주고 허리끈을 단단히 묶어 주었다.

    “집에서는 엄마 얼굴 보기 힘들잖아. 우리 사장님이 도통 집에 들어오셔야 말이지. 가게나 나와야 오다가다 말이라도 한 번 붙여 보죠.”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민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고, 재현은 펄펄 끓는 뚝배기를 쟁반 가득 담아 주문이 들어온 테이블에 가져다 놓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민영은 항상 가게에 있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자정 즈음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 중독자라고 말하지만 민영에 비하면 쉬엄쉬엄 일하는 편이었다.

    식당에서는 그 누구보다 활기가 넘치는 민영이지만, 집에서는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재현은 식당에서 민영을 만나는 게 더 편했다.

    밤 열 시가 넘어 식당 간판 불이 꺼지고 마감이 시작됐다.

    그제야 재현은 영철과 마주 보고 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낸 민영은 다시 주방으로 가 내일 아침 장사 때 쓸 고기를 삶기 시작했다.

    “엄마 발목은 좀 어때요?”

    “의사는 무리하지 말라는데, 네 엄마가 어디 그 말을 들을 사람이니? 일 안 하면 더 병난다고 기어이 저러고 나와 있으니, 내가 아주 속상해 죽겠다.”

    한숨을 내쉬며 소주잔을 비우는 영철의 모습을 보며, 재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을 삐끗했던 민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주방에서 날아다녔다. 그런 민영을 영철은 늘 안쓰러워했고, 가슴 아파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민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또 지켜 주고 있는 영철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늘 담담하려고 노력하는 영철을 볼 때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철도 참 많이 아프고 괴로웠을 텐데, 그는 내색하지 않고 듬직하게 민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그래. 말해 봐.”

    “조만간 나연이랑 약혼 정리할 거예요. 아버지한테는 따로 귀띔해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그게 무슨….”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나연이랑 합의된 거고, 저희는 결정 끝냈습니다.”

    갑작스러운 재현의 통보에 영철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했다.

    “저희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해요. 저희가 양가 어르신들을 속였어요.”

    “결혼을 약속한다는 게 애들 장난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어? 너답지 않게.”

    “잘못했어요. 변명하지 않을게요.”

    나연과 자신의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어른들께 사죄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두 사람 볼 때면 서로 애정이 없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됐구나. 흐음…. 네 엄마가 실망이 클 텐데.”

    재현이 하루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길 바랐던 민영이었다. 그런 민영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유지해 왔던 관계지만, 혜운을 만나게 된 이상 이 관계를 끌고 갈 이유가 없었다.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그리고 저… 혜운이랑 만나고 있어요.”

    그 만남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듯, 영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결국 둘이…. 녀석들 참.”

    영철이 씁쓸하게 웃으며 또 한 번 소주잔을 비웠다.

    “조만간 관계 정리하고 양가 어른들께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혜운이를 다시 만나면서 조금 빨라졌어요.”

    영철이 내쉬는 한숨의 의미를, 그 안에 담긴 걱정의 의미를 재현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괜찮지 그럼. 나야 워낙에 혜운일 예뻐했고…. 혜운이만 한 애가 어디 있니?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아버지도 좋아. 다만, 네 엄마는 어떨지 모르겠구나.”

    재현도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민영 역시 혜운이를 친딸처럼 예뻐하고 아꼈지만, 혜운을 보면 자연스레 진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녀가 더 힘들어질까 봐 염려가 되었다.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건, 민영이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철과 재현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 엄마한테는 언제 얘기하려고?”

    “나연이가 먼저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나면 그때 할 생각이에요. 아버지께도 그때 다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래. 네 얘기 들어 보니 이미 물은 엎질러진 것 같고, 결혼할 당사자들이 그렇게 결정한 거라면 따라 줘야지.”

    영철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며 재현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고, 재현도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오늘따라 유독 소주가 쓴 것 같아서, 잔을 비운 재현은 눈썹을 구겼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여태 회사에 남아 있던 혜운은 이제야 일을 끝내고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재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혜운은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본가에 간다고 했으니 지금쯤 식당 영업을 끝내고 쉬고 있을 듯했다. 혹시 자는데 깨우는 건 아닐까 싶어 그냥 끊을까, 망설이던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아직 안 잤어?”

    - 집에 도착하면 전화한다던 사람한테서 전화가 안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으면 중간에 메시지라도 남겨 둘걸…. 내내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가려고.”

    - 아직까지 회사에 있었어? 열두 시가 다 됐는데? 그 회사 너무하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해 봤어.”

    - 잘했어.

    혜운은 사무실 안 조명을 모두 끄고 나와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선택했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안녕하시지?”

    - 응. 두 분 다 잘 계셔. 아버지한테는 너랑 만나고 있다고 말씀드렸어.

    “뭐라고… 하셔?”

    - 혜운이만 한 애가 없다고, 잘 만나 보라고 하셨어.

    내심 걱정했기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 엄마한테는 아직 말씀 못 드렸어. 약혼 정리하고 나면 전부 자세하게 말씀드리려고.

    “잘했어. 그게 순서인 거 같아.”

    사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민영이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그 생각만 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 그 후배랑 얘기는 잘됐어?

    “어? 어… 그게. 일이 좀 꼬여서 몇 번 더 얘길 해야 할 거 같아.”

    -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마음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어제 무영이 자신에게 했던 말만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왔다. 무영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천하태평이었고, 눈치를 보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아까는 너무 약이 올라서 어떻게든 빨리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혹시나 탈이 날까 봐 좀 더 확실하고 단호하게 얘길 해 봐야겠다고 결론지었다.

    - 같은 사무실에서 계속 얼굴 보고 일해야 하는데, 좀 껄끄럽겠다.

    “나만 불편해하고 있어. 정작 당사자는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더라.”

    - 상대가 만만치 않구나?

    “아… 몰라.”

    주차장에 도착한 혜운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 고생 좀 하겠네. 내 도움 필요하면 말해.

    “아냐. 내가 알아서 잘 정리할게. 신경 쓰지 마.”

    -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둘이 같이 있는 거 상상만 해도 짜증 나는데.

    내내 태연한 척, 쿨하게 기다려 주는 척하더니 그가 결국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혜운은 그런 그의 반응이 반가워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보고 싶다. 나 지금 그리로 갈까?

    “내일 보자. 나 지금 꼴이 말이 아냐.”

    - 뭐 어때. 내가 보는 건데.

    “네가 보는 거니까 안 된다고. 좀 더 예쁠 때 봐.”

    - 항상 예쁘던데.

    혜운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끅끅대며 웃었다.

    재현에게 예쁘단 말을 들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오히려 못난이라고 놀렸으면 놀렸지, 예쁘다고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었기에 그의 말이 너무 낯설면서 동시에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너 술 마셨지?”

    -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 빨리 자라.”

    통화를 끝낸 후에도 혜운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만연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재현한테 예쁘단 소릴 다 듣고.

    룸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슬쩍 확인한 혜운은 연신 웃으며 차를 몰았다.

    * * *

    재현과 나연은 폭탄선언 디데이를 확정했다.

    그녀는 부모님께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했고, 같은 날 재현은 민영에게 나연과의 관계는 물론 혜운과 다시 만나게 된 것까지 차근차근 이야기하기로 했다.

    “겁나지 않아?”

    재현의 물음에 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해 봐야지. 언제까지 숨길 순 없잖아.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면 가발 쓰면 되고,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농담처럼 웃으면서 말했지만, 두려운 건 사실인 듯했다.

    “그 사람, 그렇게 해서라도 얻고 싶은 사람인 거지?”

    “응.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어떻게 보면, 나연과 자신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제 서로를 방패 삼아 눈속임을 하는 건 끝이 났고, 가지고 있는 무기는 오직 진심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설득하고, 허락받기 위해 노력할 일만 남았다.

    “그러고 보니까 얼굴이 활짝 폈네? 연애하는 재미가 쏠쏠한가 봐?”

    나연의 짓궂은 물음에 재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떼어 놓고 오직 혜운과 자신만 보면 매일이 행복하고 즐겁지만, 주변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이다.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네가 여자 마음을 알 리도 없고, 영 어설플 거 같은데.”

    “내 걱정 말고 너나 잘해.”

    “뾰족하긴. 너 설마 혜운 씨랑 얘기할 때도 이렇게 톡 쏘니?”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마냥 다정하거나 자상하게 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친구일 때부터 늘 그래 왔기에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이제 혜운 씨랑 친구 아냐. 말도 가려 가면서 예쁘게 해야지 사랑받는다?”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관계가 달라진 만큼, 행동과 말투도 변하는 게 맞는 듯했다. 좀 더 조심할 게 많아졌고, 신경 쓸 것도 많아졌다. 그런데 그게 귀찮지 않고 오히려 설렜다.

    “갑자기 꽃도 사 주고, 예고 없이 선물도 사 주고. 꼭 비싸고 좋은 거 아니어도 돼. 뭐, 비싸고 좋은 거면 두 배로 더 좋긴 하지만.”

    재현은 나연이 전수해 주는 팁을 새겨들었다.

    나연의 말대로, 재현은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하느라 바빴고, 일하느라 바빠서 여자 생각도 없었다. 연애나 결혼은 재현의 관심사 밖의 일이었기에 누군가를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혜운이를 좋아하는 후배가 있는데, 혜운이가 거절을 했는데도 여전히 좋다고 하나 봐. 그런 건 어떻게 떼어 내야 하지?”

    재현의 물음에 나연이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이구. 하재현 씨 당분간 속 좀 썩겠네. 긴장하고 있어. 그러다 혜운 씨 뺏길라.”

    방법을 가르쳐 달라니까 오히려 겁을 주는 나연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재현이 미간을 구겼다.

    “말이 되는 소릴 해. 절대로 뺏기는 일 없어.”

    “자만하지 마. 잘은 몰라도, 그 후배보다는 네가 더 많은 리스크를 안고 있을 텐데? 막말로, 너희 부모님 반대하시면 답 있어? 너 혜운 씨가 상처받는 거 지켜만 보고 있을 자신 있냐고.”

    “나도 그걸 가장 염려하고 있고, 가장 고민하고 있어. 그래도 같이해 볼 거야.”

    “몇 달은 사랑의 힘으로 버텨 볼 만하겠지. 13년 만에 다시 만나서 마음을 확인했는데 그쯤이야. 근데 그게 계속되면? 기약도 없이 길어지면? 네가 힘든 건 너 혼자 감당하면 되지만, 혜운 씨 힘들어하는 거 지켜보는 건 얘기가 다르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건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내 말은, 그렇게 손 놓고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야. 내가 이미 겪어 보고 하는 말이니까 잘 새겨들어. 너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다.”

    나연의 진심 어린 충고에 재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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