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간발의 차 (26/50)

26. 간발의 차

재현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곳은 그가 이번에 론칭한 브랜드이자, 혜운의 팀에서 광고 제작이 한창인 본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갑작스러운 본사 관계자의 등장에 직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재현은 그저 태연했다. 개인적으로 식사를 하러 온 것이니 긴장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어때? 음식 괜찮았어?”

“소고기는 늘 옳아.”

재현이 직접 브랜드를 기획했단 사실을 알기 전, 혜운은 광고 준비를 하면서 매장을 몇 차례 방문했었다.

그때마다 브랜드의 콘셉트와 타깃으로 잡은 주 고객층, 매장의 위치 선정과 매장 인테리어, 메뉴의 구성까지 모든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든 기획이 재현의 손을 거쳤다고 생각하니, 콩깍지를 빼고서도 새삼 재현이 다르게 보였다.

“와인 한 잔 더 할래?”

“좋지.”

재현은 혜운을 위해 주문했던 단맛이 강한 포트와인을 한 번 더 채워 주었다.

“어! 재현아!”

재현이 그냥 마시려다가 혜운이 잔을 들어 보이자, 웃으며 건배를 해 주었다. 향기롭고 달콤한 와인 한 모금에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아, 좋다. 분위기도 좋고, 맛있어서 좋고, 배불러서 좋고, 누구랑 같이 있어서 좋고.”

혜운의 말에 재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괜히 와인이 담긴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왜? 내가 이런 얘기 하면 수줍어?”

“아니, 그냥…. 좀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데?”

“내가 살다 살다 신혜운 귀여움 떠는 것도 다 보는구나, 싶고.”

난 또 지금 이 순간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신기하다고 말한 줄 알았는데….

실망한 혜운은 미소를 걷어 내고 재현을 노려보았다.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내가 경고했지? 날 기다리게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라고. 하루에 하나씩 까도 13년이 걸릴 텐데, 그거로도 모자라서 날 언짢게 해?”

“미안. 알잖아.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못 하는 게 아니라 내 앞에서 거짓말하면 백 퍼센트 들통이 나니까 안 하는 거겠지.”

정곡을 찔린 재현은 와인 한 모금을 머금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브랜드 광고는 잘 진행되고 있는 거지?”

괜히 딴소리를 하는 재현이 얄미워서, 혜운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쉬는 날에는 일 얘기 안 합니다. 연애하는 사이도 예외는 없어요.”

“아…. 그러시구나. 성격이 아주 칼 같으시네요.”

“제가 공과 사 구분하는 건 아주 확실하죠.”

쿵 하면 짝 하는 사이.

말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잘 맞는 사이라서 늘 붙어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그 찰떡 호흡이 어디 안 가고 지금도 여전한 게 혜운은 마냥 우스웠다.

“잘못했어.”

고집 부리는 법 없는 재현은 오늘도 먼저 사과를 건넸고, 혜운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홍 실장님한테 들어 보니까 내년에 파트장 승진 앞두고 있다고 하던데. 그건 잘되어 가고 있는 거야?”

“덕분에 아직까진 순조로운데,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거라 단언할 순 없어.”

“실력 있다고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하더라. 멋있다, 신혜운.”

“나 되게 열심히 살았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일도 열심히 했고. 뛰어나다고는 말 못 해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 있어.”

경선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늘 최선을 다해 왔다. 그러다 보니 감사하게도 늘 좋은 결과가 따라온 것이다.

“그건 내가 잘 알지. 신혜운 뭐든 최선을 다하는 거. 잘했어. 기특하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고마웠다. 그의 칭찬에 그간의 설움이나 고생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울컥 눈물이 솟았지만 헛기침을 하며 도로 삼켰다.

Rrrr.

그때, 가방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가 무영인 것을 확인한 혜운은 잠시 멈칫했다.

“받아.”

“아냐. 괜찮아.”

때마침 벨 소리가 끊어졌고, 나중에 다시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은 혜운은 매너 모드로 바꿔 두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무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냥 받아. 중요한 전화면 어떡해.”

재현은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고도 그렇게 말했다. 일요일 저녁에 무영에게서 중요한 전화가 올 리 없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혜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들고 일어섰다.

“미안. 금방 올게.”

테이블을 벗어난 혜운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 선배 집 근처에 왔는데, 잠깐 나올 수 있어요?

“나 지금 밖이야. 저녁 먹고 있어.”

- 그렇구나. 그럼 집에 도착할 때쯤 전화 한 번 줘요. 기다릴게.

“무슨 일인데?”

- 할 얘기가 있어서요.

“내일 회사에서 들으면 안 될까? 언제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 기다릴게요.

무영은 일방적으로 먼저 통화를 끝내 버렸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에 혜운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혜운은 메시지 앱을 열어 기다리지 말고 내일 보자는 메시지를 적다가, 아무래도 오늘은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 친구, 너 좋아하지?”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아.”

“내가 자존심 상해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둘이 친해 보여서 좀 질투 나더라.”

“치…. 질투할 걸 해라. 그냥 회사 후배야.”

“미안하지만 그 후배님은 너를 그냥 회사 선배로 생각 안 하거든요? 그게 내 눈에도 훤히 보이던데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혜운은 입을 꾹 다문 채 손끝으로 턱을 긁적였다.

“뭐, 지금은 내가 더 가까운 사이니까 상관없어.”

“정말?”

“어차피 알아서 잘 정리할 거잖아. 좀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난 그냥 가만히 있을게.”

“고마워.”

“고마워할 거 없어. 신경질 나고 짜증 나는데 안 그런 척하고 있는 것뿐이야.”

“알아. 그래서 고맙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재회했고, 망설임 끝에 이제 겨우 시작한 연애이기에 혜운과 재현 모두 주변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씩 해 가자.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정리하면 되지 뭐. 앞으로 헤쳐 가야 할 것들이 한가득이잖아.”

재현의 말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말에 부모님 찾아뵙고 파혼 얘기할 거야. 그리고… 우리 얘기도 할 거고.”

혜운은 솔직히 걱정이 조금 앞섰다. 혜운의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다시 만날 그의 부모님이 마냥 반가웠지만, 그들에게 자신은 그리 달가운 존재만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노력을 할 생각이었다. 자신을 예뻐해 주고 아껴 주던 과거에만 갇혀 서운해하거나 마음 상하지 않도록 말이다.

“하재현. 우리 신나는 얘기할래?”

“그래. 그러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에 잠겨 정작 행복해야 할 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또다시 흘려보내고 있었다. 후회 없이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데, 이대로 가다간 계속 걱정만 하다가 끝날 것 같았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평소에도 충분히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얼굴 마주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좀 더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자신의 옆자리로 옮겨 앉은 재현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접어 올리고 손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크리스마스 때 뭐 할까?”

2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혜운은 생각만 해도 설렜다.

“여행 갈까?”

혜운의 제안에 재현은 진심으로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왜 놀라?”

“아냐! 아, 안 놀랐어.”

아닌 척했지만 속을 혜운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귀여워서, 혜운은 계속해서 놀려 주고 싶었다.

재현이 자신을 바래다주고 떠난 뒤, 혜운은 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러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밖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무영이 길 건너편에서 달려왔다.

“오래 기다렸지?”

무영은 별다른 대답 없이 씩 웃으며 코트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혜운을 빤히 보았다.

“할 말이 뭔데?”

“나한테 시간 주는 게 그렇게 아까워?”

“그게 아니라….”

“알았어요. 용건만 빨리 말하고 갈게요.”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유들유들하게 굴었다. 오히려 오늘 확실히 잘라 말하려고 준비한 혜운만 마음이 불편했다.

“무영아, 내가 먼저 얘기할게.”

“싫어. 내가 먼저 할래.”

“나, 그 사람이랑….”

“좋아해요.”

혜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이 얘기했다.

“늘 농담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어도 선배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어요. 그건 선배도 알고 있잖아.”

“미안해.”

혜운의 건조한 대답에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어쩜 그렇게 내 예상을 한 끗도 안 빗겨 날까. 난 선배가 그 말할 줄 알았어. 그 사람이랑… 연애하기로 했구나?”

헤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영과 눈을 맞췄다. 실망감이 어린 그의 눈을 오래 마주 보기도, 마음을 거절하는 일도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간발의 차로 놓쳤네.”

혼잣말 같은 그 말에, 혜운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재현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어도, 난 네 마음 받아 주지 못했을 거야.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으니까.”

혜운의 말에 무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숨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져, 혜운은 준비했던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은 이기심.

앞으로 회사에서 계속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나쁜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혹시 내가 널 헷갈리게 했다면 미안해.”

“아뇨. 그런 이유라면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선배는 늘 나한테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선배가 누군가를 좋아할 마음 없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한 거였어요.”

“…….”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나… 앞으로도 계속 선배 좋아할 거거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자, 혜운은 순간 당황했다.

“최무영.”

“나는 뭔가를 갖고 싶다고 욕심내 본 적이 없어요. 갖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다 내 것이었거든요. 그런 내가 처음으로 욕심낸 게 선배예요.”

지금 내 앞에 선 이 사람이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낸 그 최무영이 맞나 싶을 만큼 낯설었다. 혜운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작도 내 마음대로였으니까, 끝내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선택은 선배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네가 이렇게 나오면 우린 불편해질 거야.”

“그렇다 해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

어쩌면 그것을 핑계로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순간 피로가 몰려왔다. 당장 날 좋아하지 말라고 뜯어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라 답답했다.

“너… 고단수다.”

혜운의 말에 무영이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당한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거절한다고 순순히 ‘네’ 하고 물러설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일을 꼬아 버릴 줄은 몰랐다.

혜운은 무영을 그 자리에 두고 돌아서서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무영이 계속 뭐라고 말을 건넸지만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당장 눕고 싶을 정도로 피로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재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백하는 쪽은 해맑고, 받은 쪽은 당황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진 않았지만, 혜운의 표정으로 추측컨대, 생각했던 대로 얘기가 잘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흐음.”

우리 둘의 상황만으로도 벅차서 저 친구까지 상대해 줄 여유가 없는데….

재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창문을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 일단은 혜운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으니 참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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