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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25/50)
  • 25.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혜운은 재현과 함께 곧장 서울로 향했다. 새벽에 갑자기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자, 경선은 차도 없이 어떻게 가냐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친구가 데리러 왔다는 말에 이 새벽에 친구가 왔냐며 조심히 가 보라고 허락을 해 주었다.

    조수석에 앉은 혜운은 재현 쪽으로 완전히 돌아앉아 시트에 눕듯이 기대어 운전 중인 재현을 바라보았다.

    “생각났어. 너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언제부턴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 뒤편 잔디밭에서 매일 요구르트 병으로 잔디 씨 훑던 거 기억나?”

    “어, 맞아. 그랬지.”

    “요구르트 병에 가득 채워서 내야 하는데, 한번은 내가 까불다가 그걸 홀랑 다 쏟았거든. 그때 네가 네 걸 나한테 주고, 너는 네 거 쏟았다고 해서 나 대신 선생님한테 혼났었어.”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좀 멋있어 보이기도 하더라. 우습게도 아홉 살짜리가 그 모습에 반한 거지.”

    “귀여운 꼬맹이네.”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런 일이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실수나 부족한 부분을 네가 대신 채워 줬던 거 같아. 어쩌면 그 전부터 항상 그래 왔는데 그 무렵이 되어서야 알아차린 걸 수도 있고.”

    “네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 보는 눈이 있었구나?”

    재현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장난기가 다분한 그의 눈빛에, 마치 예전의 재현을 보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하재현, 너는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

    “글쎄…. 너무 오래전 일이라.”

    “딱 기억나는 순간 없어?”

    혜운의 재촉에 재현은 신호 대기에 걸린 틈을 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기대가 되어, 혜운은 마음이 설렜다.

    “흐음…. 맨날 우리 둘이서 놀다가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네가 내 짝이 아니라는 거야. 그때 되게 당황스럽더라. 줄지어 다닐 때마다 네가 다른 남자애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데, 볼 때마다 질투 났어. 뭐, 꼬마였으니까 질투라기 보단 시샘한 거겠지.”

    “좋아하는 감정을 질투로 먼저 느꼈구나? 귀엽네.”

    “난 진지했어.”

    그는 제법 단호한 표정을 하고 딱 잘라 말했지만,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나 나나 좋아하게 된 포인트가 되게 뜬금없다. 웃긴 꼬마들이었어.”

    재현의 말에 혜운은 동의했다.

    “원래 사랑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오는 거야. 우린 서로한테 너무 익숙해서 일찍 깨닫지 못한 것뿐이고.”

    재현은 혜운을 보며 슬쩍 웃었다.

    “아…. 사랑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봐요?”

    “그럼요. 제가 이론에는 좀 강합니다.”

    재현은 혜운의 손을 꼭 잡고 손등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며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혜운은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일찍 알아차렸다면, 13년 전 그날의 사고가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수도 없이 다투고,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는 연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진즉에 헤어져서 서로를 잊은 채 다른 사랑을 만나고 있을까?

    그 어느 것도 지금의 우리보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말이야. 정말 내가 널 좋아하고 있는 거 몰랐어?”

    “형을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했어.”

    재현과 만나는 동안, 앞으로 계속 지금처럼 불쑥 진현의 존재감이 드러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진현의 기억이 떠오르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면 조금 나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혜운은 그저, 재현이 조금만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한테 못나게 굴었어. 너한테 그랬던 것처럼 괜히 짜증 내고 신경질 부리고.”

    “사과는… 했어?”

    “응. 오해 다 풀고 축구 보러 가기로 했던 건데, 그날 사고가 나 버렸지.”

    이제야 조금 더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왜 자신에게까지 모질 만큼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받지도 않았던 건지 말이다.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자책했을 그가 안쓰러웠다.

    “알아. 말 그대로 사고였던 거. 그래도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어. 내가 미련하게만 굴지 않았어도, 나랑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생각들을 좀처럼 털어 낼 수가 없더라고. 다 내 탓인 것만 같았어.”

    혜운은 재현의 손에 빈틈없이 깍지를 끼고 다른 한 손으로 손등을 감쌌다.

    “우리… 참 어렵다. 이만큼 오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 그치?”

    혜운의 말에 그는 아무런 말없이 맞잡은 손에 힘을 줘 더 꽉 움켜잡을 뿐이었다. 그 간절함이 오롯이 전해졌다. 그렇게 혜운은 재현에게, 재현은 혜운에게 위로를 건넸다.

    우린 왜 이렇게 힘든 사랑을 하게 된 걸까. 힘들 거라는 걸 다 알면서도, 우린 그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포기하면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지금 재현의 곁에 있는 게 나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렇게 다시 만나 너를 사랑할 수 있어서, 그건 또 얼마나 다행인지….

    혜운은 모든 것이 감사했다.

    혜운의 집 앞까지 오는 사이, 그녀는 곤히 잠들어 버렸다. 재현이 운전하는 내내, 졸면 안 된다면서 두 시간 가까이 재잘거리더니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재현은 잠든 혜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졌다. 이어 가지런한 눈썹에도, 도톰한 입술에도 손을 대었다.

    앞으로 쏟아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고, 귀 앞 잔머리도 만져 보았다. 보들보들, 손끝에 닿는 촉감이 가슴을 간질였다.

    혜운이 이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게 가끔씩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그녀를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것도, 이렇게 만질 수 있는 것도 행복했다. 한때는 그녀와 함께인 게 너무도 당연했지만, 이제는 매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간절했다.

    세상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편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나를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

    설레게 만들고, 가슴 뛰게 만들고, 나를 통째로 쥐고 흔드는 유일한 사람.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미안해서, 그녀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참고 억눌러야만 했던 마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고 싶었다.

    “흐음.”

    혜운이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잠에 취한 나른한 표정이 재현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다 왔어?”

    “응.”

    “깨우지.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었어?”

    “너 자는 거 구경했지.”

    “그거 뭐 재밌는 거라고 구경을 해.”

    혜운은 멋쩍은 듯 웃으며 조그만 주먹으로 팔을 툭 쳤다.

    “근데, 넌 내가 옆에 있는데도 잠이 와?”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슬쩍 눈치를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오던데?”

    “긴장이 하나도 안 된다 이거지?”

    “너랑 있는데 왜 긴장을 해?”

    재현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거 봐. 우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까. 우리의 시작이 아무리 친구였다고 해도, 넌 나를 너무 편하게만 생각하잖아. 너 벌써 내 앞에서 두 번째 잠들었어. 나도 남자야.”

    “그게 그렇게 신경질 낼 일이야? 첫날부터 한 번 싸워 보자는 거야, 뭐야?”

    혜운이 장난스럽게 공격적으로 나오자, 재현은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너 내 앞에서 졸다 걸리기만 해. 가만 안 둬.”

    “난 널 보면 긴장돼서 숨도 제대로 못 쉬거든?”

    재현의 대꾸에 혜운은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치더니, 불쑥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재현의 코에 귀를 대고 가만히 있었다.

    “숨 잘만 쉬네. 누구 앞에서 뻥을 쳐?”

    그러다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마주 보는데,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재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쉰 채 참았고, 혜운은 재현의 눈과 입술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뒤로 물렸다.

    재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혜운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등을 감싸 안아 당겼다.

    “이제 좀 긴장이 되나 봐?”

    “놔, 놔줘.”

    놔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재현은 아까 혜운이 자고 있을 때부터 그녀의 입술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한 참이다. 아까 느꼈던 그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운전하는 동안 몇 번이나 입맛을 다셨는지 모른다.

    재현은 그대로 혜운에게 입을 맞췄다. 혜운은 자연스레 재현의 어깨를 붙잡았고, 재현은 그녀의 허리를 받쳐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스한 숨결에 재현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재현은 한 손으로 혜운의 목 뒤를 감싸며 좀 더 끌어당겨 빈틈없이 숨을 탐했다.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을 헤집고 들어가자 이리저리 도망치기 바쁜 그녀의 자그만 혀가 자신의 혀끝에 닿았다. 재현의 숨은 점점 가빠졌고, 혜운 역시 재현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나지막한 신음을 삼켰다.

    작고 귀여운 그녀의 혀를 붙잡아 이리저리 굴리며 잡아당겼다 놓아주고, 다시 빨아 당기길 반복했다. 결국 혜운이 재현의 혀를 제 입 안에서 억지로 밀어내곤 입술을 뗀 채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숨 좀 쉬자.”

    이로써 혜운은 이론에만 강하다는 게 입증되었다. 어딘가 어설픈 그녀의 키스가 너무도 귀여워서, 재현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재현은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다독였다. 이쯤에서 집에 보내지 않으면, 이대로 밤새 함께 있고 싶을 것만 같아서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우리가 딱 그 꼴이 될 듯싶었다.

    “가자. 바래다줄게.”

    붉게 부풀어 오른 혜운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후에야 차에서 내린 재현은 혜운의 손을 잡고 건물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다.

    “들어가.”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좀처럼 서로의 손을 놓지 못했다.

    “이따 같이 저녁 먹을래?”

    “그래. 내가 이쪽으로 올게.”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나서야 잡았던 손을 놓을 수 있었다. 혜운은 차마 돌아서지 못한 채 뒷걸음질 쳤다.

    “넘어진다. 앞에 보고 걸어.”

    재현의 잔소리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끝내 돌아서지 못했고, 잠시 멈칫하더니 성큼 성큼 걸어와 자신의 품에 안겼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두 팔로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는 그녀가 못 견디게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재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 *

    무영의 가족들은 일요일이 되면 아침 일찍 승마 클럽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곤 했다. 가족이라고 해 봤자 무영의 부모님과 무영이 전부지만, 일요일 점심 식사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하는 유일한 한 끼였다.

    무영의 아버지인 최강주 회장은 ‘왕자의 난’이라도 불렸던 치열한 형제간의 다툼 끝에 태강그룹을 거머쥔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었다. 유연하고 호방한 모습 뒤에는 섬세한 경영 감각과 강한 승부욕도 갖추고 있었다.

    무영의 어머니 지수 역시 타고난 경영인으로, 강주를 물심양면 지원해 주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무영은 조금 외롭긴 했지만 풍족한 환경 속에서 모난 구석 없이 밝게 자랐다.

    형제들과는 물론이고 부모와도 밑바닥까지 보이면서 전쟁을 치러 얻어 낸 태강그룹이기에, 강주는 이 회사를 반드시 자신의 아들인 무영에게 상속해 주고 싶어 했다.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무영은 회사 일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부모의 간절함을 알기에 그룹의 계열사인 네오에 입사를 한 것이다.

    수많은 계열사 중 네오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부담이 적어서.

    무영은 일단 부담 없이 일하고 싶어서 계열사 중에서도 가장 본사와 거리가 먼 광고사를 선택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런 무영이 회사에 꾸준히 다니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곳에 혜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강주와 지수도 알고 있었다.

    “회사 일 어느 정도 적응됐으면 내년부터는 본사로 들어오는 게 어때?”

    지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안 돼요.”

    “그 선배가 아직도 네 맘 안 받아 준 거니? 네가 노력이 부족했나 보다.”

    “엄만 지금 내 편 안 들고 선배 편드는 거예요?”

    “당연하지. 너 사람 만들어 준 은인인데.”

    지수의 대답에 무영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들이 남자로서 매력이 부족한가?”

    “아버지도 선배 편?”

    강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무영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난 누구의 아들인가.

    “무영이가 얼른 그 선배랑 결혼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차근차근 회사 일 배우면 참 좋을 텐데.”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 주네요.”

    “무영아, 엄마가 그 선배 한번 만나 볼까?”

    “외동아들 평생 혼자 사는 꼴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무영의 말에 지수가 기함을 하며 그의 등짝을 때렸다.

    “얘가 엄마한테 말하는 것 좀 봐!”

    “제가 어떻게든 해낼 테니까 두 분은 가만히 기다려 주세요. 그게 절 도와주시는 거예요.”

    강주나 지수나, 두 사람의 말 한마디면 대신 움직여 줄 사람이 주변에 가득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그런 걸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무영은 딱 잘라 말했다.

    생각지 못했던 남자의 등장으로 조바심이 난 그는 지난 2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또 한 번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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