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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너무 늦어서 미안해 (24/50)
  • 24. 너무 늦어서 미안해

    재현과 통화를 한 후로 마음이 심란해진 혜운은 경선이 먼저 잠든 사이 산책을 나섰다.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얼굴까지 돌돌 말아 눈만 내놓고 중무장을 해서인지 서울보다 낮은 기온에도 그리 춥지 않았다.

    큰길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골목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며칠 동안 내린 눈이 그 위에 계속 쌓여 단단해진 탓에 밟으면 뽀득뽀득 소리가 아니라 바사삭 소리가 났다. 혜운은 멀쩡한 길을 두고 굳이 눈 위를 걸었다.

    혜운의 발길이 점점 익숙한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은 재현의 집이 있던 곳….

    그 자리에는 이미 오래전에 카페가 들어섰다. 원래 있던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건물이라 예전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데도, 혜운은 이곳에 내려올 때마다 카페에 빼놓지 않고 들렀다.

    오늘도 따뜻한 차 한 잔을 핑계로 카페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워낙 날이 추워서인지 카페 안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미소로 답하며 안으로 들어간 혜운은 돌돌 감고 있던 목도리를 풀고 카운터로 향했다.

    “자몽 티 하나 주세요.”

    계산을 하고 비어 있는 좌석으로 걸음을 옮기던 혜운은 차 마시는 동안 눈요기를 할 만한 적당한 잡지를 하나 골라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외투를 벗어 빈자리에 올려 두고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편한 자세로 앉아 종이를 넘겼다.

    그사이, 직원은 친절하게도 직접 차를 가져다주었다. 상큼한 자몽 향이 코에 닿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향을 먼저 음미한 뒤 한 모금 마시자, 입 안 가득 기분 좋은 상큼함이 펴져 미소가 지어졌다.

    이곳에 오면 차를 마시는 내내 오래전의 기억을 끄집어내곤 했다. 그러다 찻잔을 내려놓고 이 카페를 나서면서 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 기억을 밀어 넣고 꼭 닫아 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서 참기 힘들 만큼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언제든지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도 있다.

    혼자 애태웠던 시간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쁜 일인데,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힘들어진다 해도 곁에 있고 싶다던 재현의 말에 조금 더 기대고 싶었다. 힘들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그게 혜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잘 마셨어요.”

    혜운은 빈 찻잔을 직원에게 가져다주고 카페를 나섰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나와서인지, 밤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혜운은 두르고 왔던 목도리를 손에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신혜운.”

    그때,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고,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재현이 서 있었다.

    “재현아!”

    예상치 못한 순간 나타난 그가 너무 반가워서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 버렸다.

    재현은 옅게 웃으며 성큼 성큼 걸어와 혜운이 손에 들고 있던 목도리를 목에 둘러 주었다.

    “감기 걸려.”

    “네가 여긴 어떻게….”

    “운전해서 왔지.”

    그걸 물은 게 아니었지만, 혜운은 재차 묻지 않았다. 그는 혜운의 목도리를 꽁꽁 묶어 주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재현이 스스로 떠났던 곳이다. 이곳에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곳에, 그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앞에 섰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떠났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혜운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왜 왔냐고? 너 보러.”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외의 다른 이유가 필요한지 오히려 되묻는 듯 했다.

    혜운은 입술 위까지 덮어 버린 목도리를 턱 아래로 내린 채, 어떤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더 설명이 필요해?”

    이 시간에 서울에서 이곳까지 운전해서 온 이유도, 스스로 떠났던 곳을 다시 찾은 이유도 오직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를 어떻게 욕심내지 않을 수 있을까.

    혜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내일까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왔어. 네가 어느 곳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더라고. 그래서 무작정 온 거야.”

    “잘했어. 잘했어, 재현아.”

    혜운은 손을 내밀어 재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이렇게 간단한 걸 13년을 망설였다. 미련하게.”

    그의 반성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멀리 돌아온 시간이 그리 헛된 시간만은 아니었기에,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된 걸 정말 행운이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이 동네 다시 오면 감당 안 될 정도로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네가 같이 있어서 그런가?”

    주변을 둘러보던 재현은 꽤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내 식당 건물이 있던 자리에 새로 생긴 카페 건물을 보고서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혜운은 잡고 있던 재현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빈틈없이 깍지를 꼈다.

    혜운은 그가 이곳에 자신을 보러 와 준 것만으로도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눈빛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기분과 마음을 알아차렸던 오래전 그날처럼….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재현은 혜운의 손을 잡고 매일같이 걸었던 등굣길을 따라 함께 걸었다.

    드문드문 서 있던 가로등은 전보다 훨씬 많아졌고, 둘이 나란히 걸으면 딱 맞던 인도 폭도 더 넓어져 있었다.

    고요한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별말이 없었다.

    예전에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같은 기억을 안고 있기에 각자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잊으려 애쓰고 노력했던 게 무색할 만큼, 모든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매일 혜운을 기다리던 아파트 단지 쪽문 앞. 눈두덩이 통통 부운 채로 나타나던 교복 입은 혜운의 모습도, 같이 먹자고 양손에 들고 나왔던 두유와 바나나, 사과, 고구마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매일 들렀던 편의점. 그곳에서 컵라면에 삼각 김밥, 아니면 호빵에 뚱뚱한 바나나 우유를 먹던 것도 떠올랐다.

    많은 것이 변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혜운과 자주 가던 단골 우동 가게뿐인 것 같았다. 13년 전과 다름없는 간판이 유독 반가웠다.

    “나 떠나고 나서 어땠어? 허전했지?”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예전의 기분을 기억해 내려는 듯했다.

    “그것보단 걱정이 많이 되더라. 다른 나라 가서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그렇게 떠나서 괜찮을지…. 그래서 이메일도 보내고, 전화도 했는데 네가 하나도 안 읽고, 안 받았잖아.”

    “내가 괜한 걸 물었다.”

    혜운이 웃으며 재현의 어깨에 이마를 콕 박았다.

    “하재현, 춥지?”

    “괜찮아. 아직 견딜 만해.”

    “내 목도리 줄까?”

    “아무리 그래도…. 야, 나 남자야.”

    “추운데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 너 나보다 추위 훨씬 많이 타잖아.”

    “싫어. 참을 거야.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 줘.”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 건, 때론 이런 부작용을 불러오는 것 같았다. 순간 재현은 그녀의 목도리를 풀어 자신의 목에 감는, 꼴사나운 상상을 하다가 진저리를 쳤다.

    “이거 봐. 추워서 부르르 떨면서.”

    “그런 거 아니거든?”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친구 사이?”

    “틀렸어.”

    재현의 대답에 혜운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이제 너랑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이야.”

    “무슨 뜻이야?”

    “우린 시작부터 친구였잖아. 그거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자고. 서른한 살 하재현, 신혜운으로.”

    가만히 듣고 있던 혜운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난 친구에서부터 시작한 우리 사이도 너무 좋은데.”

    “난 처음부터 너한테 남자이고 싶어.”

    “너 남자야. 꽤 오래전부터 나한텐 그랬어. 그럼 넌 그동안 날 여자로 안 봤다는 거야?”

    혜운의 물음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 재현은 걸음을 멈추고 혜운을 바라보았다.

    “하재현, 내 눈 봐.”

    “음….”

    “잔머리 굴리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나 너한테 여자 아니었어?”

    재현은 채 두 뼘도 되지 않는 거리만 남겨 두고 혜운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내쉬는 숨소리마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심장이 사납게 두근대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집요하게 눈을 맞추고 선 혜운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재현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녀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럴 리가.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재현의 대답에 혜운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재현은 그녀의 턱을 손으로 부드럽게 받쳐 올려 다시 눈을 맞췄다. 이제야 그녀의 눈동자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재현은 시선이 붉고 도톰한 혜운의 입술 위에서 멈췄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지금도 난… 너를 끌어안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어.”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눈썹을 차례로 쓸며 점점 가빠 오는 숨을 간신히 골랐다.

    “곁에 있지 못해서 내가 보지 못했던 네 모든 순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어. 알아, 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는 거. 그래도 알고 싶어. 그리고… 앞으로 너의 모든 순간에 나도 같이 있고 싶어.”

    “재현아.”

    “위로해 주지 않아도 되고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그냥, 나 혼자 아파하고 힘들어할 테니까 옆에만 있어 줘. 그런 날 지켜보는 게 마음 쓰이면 잠시 나 혼자 둬도 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돼. 그러니까….”

    그 순간, 혜운이 성큼 다가와 두 팔 벌려 재현을 끌어안았다. 혜운은 재현의 등을 다독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백이 너무 길다, 재현아. 간단하게 말해 줘.”

    혜운은 상체를 뒤로 살짝 젖히며 재현과 눈을 맞췄다. 그러곤 그 작은 손으로 재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반짝이는 눈빛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나랑 연애하자.”

    혜운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환히 웃었고, 재현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눈꺼풀이 살며시 내려가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며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과 맞닿는 순간, 재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저릿함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13년 전에 했어야 할 고백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혜운의 말대로, 어쩌면 다른 말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진심을 고백한 순간, 그 안에 담겨 있던 수많은 감정들이 새로운 무언가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재현은 혜운의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콧등에도, 이마에도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늦어서 미안해.”

    혜운은 다시 한번 재현을 두 팔 가득 안아 주었고, 재현도 혜운을 품 안에 빈틈없이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 사이로 두근거리는 서로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대가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각오할게.”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이제야 시작점에 섰다.

    재현은 혜운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그 무엇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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