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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가장 어려운 말 (23/50)

23. 가장 어려운 말

혜운은 한쪽 눈꺼풀만 간신히 밀어 올린 채 일어나 앉았다.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떴을 땐, 집 안의 모든 조명이 꺼져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재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에 시간이 휘발된 듯했다. 재현이 자신의 공간에 있었던 순간이 마치 꿈이었던 것만 같았다.

손을 뻗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시계를 확인해 보니 새벽 3시였다. 맥주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재현을 붙들어 두고 피곤함에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여긴 어떻게 왔지….”

평소 거실에 깔아 둔 매트에서 자던 혜운이 눈을 뜬 곳은 침실의 침대였다. 잠결에 여기까지 걸어 들어왔을 확률은 극히 적었고, 재현이 이곳에 눕혀 주고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침실을 나온 혜운은 주방으로 향하다가 재현이 남기고 간 흔적을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함께 마셨던 찻잔을 닦아 선반 위에 올려 두고, 출근하면서 버리려고 묶어 두었던 쓰레기봉투도 가면서 들고 나간 것 같았다.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혜운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단숨에 반병을 비우고 창가로 가 창문을 살짝 열어 찬바람을 맞았다. 약간의 울렁임과 속 쓰림이 조금은 가라앉아 한결 속이 편했다.

Rrrr.

휴대폰이 울림과 동시에, 혹시 재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급히 휴대폰을 찾았으나 혜운의 바람과는 달리 발신자는 무영이었다.

“여보세요?”

-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술 마셨어?”

- 조금.

늦은 시간을 핑계로 받지 말걸….

그러다 문뜩 무영이 아까 회식 때만 해도 술에 취하지 않아 멀쩡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신과 헤어진 후 이 시간까지 술을 마신 모양이다. 나지막하게 가라앉아 갈라진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무거웠다.

- 나 선배 집 근처인데. 잠깐 내려오면 안 돼요?

“늦었어. 얼른 집에 가. 출근 안 할 거야?”

- 안 그럼 내가 올라갈까?

“까불지 말고.”

- 차별이 너무 심하네. 짝사랑 너무 서러워서 못 해 먹겠다.

짝사랑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혜운도 잘 알고 있었다. 13년 전에 자신이 해 봤기 때문에. 그래서 단호하게 잘라 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무영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희망 고문으로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안했다. 그에겐 소중한 마음일 텐데, 자신은 받아 줄 수 없어서.

그럴수록 더 단호하게 잘랐어야 했는데 그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욕심에, 이만큼이나 여지를 주고 말았다.

“맨정신으로 다시 얘기하자.”

- 그 사람한테 가지 마.

“후배님?”

- 내가 더 잘해 줄게.

“최무영.”

- 알았어요. 그럼 날 좋아해 달라고 조르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말아 줘.

혜운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매트 위에 털썩 누워 버렸다.

“한 번만 더 술 마시고 전화하면 다신 네 전화 안 받을 거야.”

- 미안….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다신 안 그럴게.

“알았으니까 어서 집에 가.”

- 이쯤 되면 받아 줄 만도 한데, 선배도 참 대단하다.

무영과 처음 만난 건, 혜운이 속한 파트로 무영이 입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수려한 외모와 태강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후광이 더해져, 회사 내에서는 남녀 가리지 않고 모든 직원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무영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고, 적극적이고 거침없었다. 혜운에게도 먼저 다가와 살갑게 굴어 금세 가까워졌는데, 그게 자신에게만 특별히 호감을 표현한 것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할 말 다 했지? 끊는다.”

- 그래…. 잘 자, 혜운아.

“야! 너!”

전화 통화를 끝낸 후, 혜운은 휴대폰이 무영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곤 이불을 돌돌 말아 품에 끌어안은 채 다시 잠을 청했다.

* * *

재현은 나연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 두 사람은 종종 이곳에서 만나 필요할 때마다 의견을 나누고 작전을 세웠다.

“생각해 봤어?”

재현의 물음에 나연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 돌파를 해 볼까 해.”

“그거… 영리하지 못한 선택 같은데?”

“그치? 내가 생각해도 그래. 근데 한번 해 보려고. 그러니까 너라도 응원해 줘. 잘 생각했다고 빨리 칭찬해.”

“그래. 훌륭한 결정을 했네. 잘했다. 응원할게.”

엎드려 절 받기에도 나연은 정말 용기를 얻은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약혼을 선택하고 유지하려 노력했는지를 알기에, 그녀의 선택이 염려가 되면서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헤어졌지만, 끝내 서로를 놓지 못했던 나연과 그녀의 연인. 숨어서 사랑을 한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프고 속상한 일인지, 재현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다.

물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준하지만 용기를 낸 것만으로도 손뼉을 쳐 주고 싶었다. 이제는 떳떳하게 사랑받고, 사랑하길 바랐다.

나연의 그런 용기 있는 결정 덕분에 오히려 재현은 수월해졌다. 그렇지만 나연의 입장을 고려해 부모님께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합의하에 유지해 온 관계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건 옳지 않았다.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관계를 이어 온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게 맞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일이었다.

“혜운 씨하고는 잘돼 가?”

“우린 이제부터 시작이야. 차근차근 가 봐야지.”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13년을 기다리게 해 놓고 차근차근 소리가 나와?”

“그렇다고 내 욕심대로 서두를 수만은 없잖아.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서 기다리는 중이야.”

“기다릴 여유가 있다는 게 놀랍다. 나 같으면 앞뒤 안 재고 그냥 뛰어들 텐데.”

나연의 말처럼 재현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그녀에게 보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려 온 만큼, 이번엔 자신이 그녀를 기다릴 차례였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재현의 일침에 나연이 싸늘하게 노려보았지만, 재현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혜운의 집에서 마셨던 루이보스 티가 떠올랐다. 술에 취해 발그레하던 볼도…. 요즘 매사에 이런 식이다. 모든 생각의 끝에 혜운이 서 있었다. 그렇게 혜운의 생각이 시작 되면 멈추기 힘들었다.

“혜운 씨 영향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너 변했어. 표정이 전혀 달라.”

“내가?”

“너, 신혜운 이름만 나와도 웃는 거 모르지?”

자신의 표정에 대해 크게 신경 써 본 적이 없었지만, 혜운을 다시 만난 뒤로 웃는 횟수가 늘었다는 것 정도는 느끼긴 했다.

그렇게 티가 날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나연의 지적을 듣고 나니 조금 쑥스러웠다.

“그렇게 좋냐?”

“당연한 걸 물어.”

“너 혜운 씨 앞에서는 잘 웃고 그래?”

“별로 그렇진 않은데…. 예전엔 장난도 잘 치고, 철없게 굴기도 했지.”

“헐! 말도 안 돼. 그건 내가 아는 하재현과 너무 거리가 먼데?”

“옛날 얘기야. 지금은 어려워서 눈치만 보고 있어.”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재현이 남의 눈치를 본다니.”

혀를 끌끌 차는 나연의 모습에 재현이 웃고 말았다.

“그럼 두 사람 당분간은 친구로 지내는 거야?”

“뭐, 굳이 관계를 규정하자면.”

“음…. 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 사이에 친구란 없는 법인데.”

“우린 시작이 친구였거든?”

“그건 미성년자 때 얘기잖아요. 지금은 서른한 살, 활력 넘치고 알 거 다 아는 성인이고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재현은 애써 관심 없는 척 외면했지만, 나연은 계속해서 짓궂게 웃으며 재현의 눈을 빤히 보았다.

“근데 너 괜찮겠어? 지금도 가끔씩… 힘들잖아. 너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나연이 염려하는 것은 혜운이 염려하는 것과 같은 부분이었다.

“부딪쳐 봐야지.”

혜운을 다시 만난 후, 재현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절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힘들어진다 해도, 혜운의 곁에서 힘든 게 낫다. 그녀 없이 혼자 버텨 보았지만, 어차피 아프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혜운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힘들 뿐이었다.

재현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고….

집에 돌아온 재현은 조명도 켜지 않은 채 곧장 소파에 앉아,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군 제대한 후로 쭉 혼자 살아온 재현은 회사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에, 이 집과 그리 친하지 않았다.

잠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가기 바빴고, 잠을 자는 곳으로만 이용했다. 때문에 집 안은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공간에 가까웠다.

셔츠의 단추를 풀며 집 안을 둘러보던 재현은 문득 오래전에 살던 그 집을 떠올렸다.

식당 건물 3층에 위치해 있어서 가끔씩 술 취한 손님들이 올라오곤 했던 그 집. 형과 함께 살던 그 집.

그 시절을 떠올리고 그리워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형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의 빈자리.

잠시나마 미소가 번졌던 재현의 얼굴이 금세 다시 굳어졌다.

재현은 혜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 여보세요?

“나야. 뭐 해?”

- 어…. 나 지금 할머니 집에 내려와 있어.

아주 잠깐 망설이는 혜운의 목소리에, 재현은 오래전 함께 혜운과 걷던 등굣길이 떠올랐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해 봤어. 언제 올라올 거야?”

- 오늘 자고 내일. 저녁때쯤…. 아니 낮에.

“올라오면 전화해.”

- 응, 그럴게. 저녁은 먹었어?

“아니. 별로 생각이 없네.”

같이 저녁 먹자는 핑계로 불러낼 생각에 나연과 저녁을 먹지 않고 헤어진 재현이었다. 혜운이 이곳에 없다고 하니 입맛도 싹 사라져 버렸다.

재현은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들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 끼니 거르지 말고 챙겨 먹어.

혜운이 하는 말이라면 잔소리도 듣기 좋았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알았어. 할머니께 안부 전해 주고, 푹 쉬고 올라와. 내일 보자.”

통화를 마치고 아까보다 더 쓸쓸해진 재현은 맥주를 들고 창가로 향했다.

혜운의 집은 야경이 참 예뻤지만, 자신의 집 창밖에는 건물밖에 보이지 않아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집을 계약할 때 야경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차피 잠만 잘 곳이니까….

재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뜨지 않은 밤하늘엔 구름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별빛이 빛나 보였다.

혜운이 살던 아파트 단지의 공원이 떠올랐다. 그곳의 화단에 걸터앉아 혜운을 기다리며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서울 하늘보다 훨씬 더 높고 예뻤다. 구름도 예뻤고, 별도 달도 예뻤다. 자신의 기억엔 그렇게 남아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13년 전의 하재현이 떠올랐다. 그땐 왜 그렇게 용기가 없었는지….

좋아한다는 말, 지금도 어려운 말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 전하지 못한 마음을 단단히 묶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는데, 혜운을 다시 만난 순간 그 마음이 다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혜운은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변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재현은 몸을 혹사시켜 가면서 하루 종일 일하고 힘들게 잠을 청하던 민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일에 매달리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재현은, 밤이 두려웠다.

그래도 해 보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혜운을 다시 만난 순간 결심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자신의 앞에,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던 내게, 밝은 빛을 내며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나 주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만나야만 했다.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왔는지도 잊은 채, 재현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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