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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 옆에 있어 줘 (22/50)

22. 내 옆에 있어 줘

술기운이 오른 탓인지, 아니면 오래 걸어서인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 혜운은 재현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입었던 얇은 코트를 단단히 여미고 팔짱을 낀 채,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혜운은 스무 발자국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무영에게 물었다.

퍼브에서 나온 뒤,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그가 신경 쓰였다. 바래다준다기에 바로 집 근처라 거절을 했더니 얕은수를 쓰고 있었다.

그때, 가방 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재현이었다.

“여보세요?”

- 회식 언제 끝나?

“왜. 알아서 뭐하려고?”

톡 쏴붙였는데도 수화기 너머에서는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 술 마시니까 진짜 와일드해지네.

“몇 잔 안 마셔서 온순한 편이야. 자극하지 마.”

- 알았어. 자극 안 할게. 대신 데리러 가도 되지?

“집에 다 왔어. 안 와도 돼.”

- 어…. 난 혹시나 해서 너희 회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화라도 먼저 하지 그랬어.”

- 열 번도 넘게 했어. 네가 안 받은 거야.

“아, 진짜? 그랬다면 미안.”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혜운은 발길을 돌려 건물 뒤편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밝은 가로등 아래 서서, 소복하게 쌓인 눈을 꼭꼭 밟았다.

“아니야. 미안하단 말 취소. 하나도 안 미안해. 난 너를 13년이나 기다렸잖아.”

- 그래 네 말이 맞아. 이젠 내가 항상 너를 기다릴게. 약속 시간에 늦어도 절대 뭐라고 안 할게.

“좋은 생각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에도 그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하재현답지 않았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달려들며 툴툴거려야 하는데.

그사이, 무영이 자신의 앞에 다가와 입술만 뻥긋거리며 누구냐고 물었고, 혜운은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술 위에 얹었다.

- 집에 들어갔어?

“아니. 밖에서 바람 쐬는 중.”

- 그럼 잠깐 얼굴 보여 줄래?

“그거야 어렵지 않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와.”

- 금방 갈게.

통화를 끝낸 혜운이 작게 한숨을 쉬며 슬쩍 웃었다.

실은, 혜운도 재현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보러 오겠다는 재현의 말을 술기운을 핑계 삼아 냉큼 받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건가 싶었다. 평소라면 망설였고 고민했을 일을 이렇게 쉽게 결정해 버리다니….

“그 사람이에요?”

무영의 물음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 오고 있으니 이제 너도 가 보라는 뜻을 담았지만,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로 온대?”

“응.”

“나는 가라고 하면서, 그 사람은 오라고 하는 건 무슨 경우지?”

“나도… 보고 싶으니까.”

혜운의 솔직한 대답에 무영의 표정이 아주 잠시 굳어졌다가, 이내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에서, 아무리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서 매번 점점 더 센 강도로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늦었다. 어서 집에 가.”

“그분 오는 거만 보고 갈게요.”

“굳이?”

“응. 굳이. 오해하게 만들 거예요. 선배랑 나랑 단둘이 있는 거 보고 질투심에 부들부들 떠는 거 보고 싶거든요.”

“못됐다.”

혜운은 재현이 자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도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도착했고, 차에서 내려 달리듯 걸어왔다. 혜운을 발견하고 밝아졌던 재현의 표정이, 뒤에 서 있던 무영을 확인하곤 금세 굳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

“그러게요. 둘이 같이 있는 줄 몰랐어요.”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시선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무영이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것인 듯했다. 부들부들 떨진 않았지만 재현의 두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제 가. 내일 보자.”

“네, 선배. 저 먼저 가 볼게요.”

무영이 손을 흔들며 함께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혜운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재현을 바라보았다.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시원하고 좋은데 뭐.”

“술은 얼마나 마셨는데?”

“음. 사케 세 잔에 생맥주 세 잔?”

“과음했네.”

혜운이 웃자 재현의 표정이 그제야 편안해졌다.

“하재현.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아까 그… 네 약혼녀가 나한테 영순위라고 그랬잖아. 그거 무슨 얘기야?”

“말 그대로야. 나한테는 네가 영순위라고 했거든.”

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었다. 내심 기분이 좋아진 탓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고 유치한 건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생각까지 철이 드는 건 아닌가 보다.

“얼굴 봤으니까 이만 갈게. 춥다. 얼른 들어가.”

“재현아…. 올라가서 차 한잔하고 갈래?”

이대로 그냥 보내려니 너무나 아쉬워서 혜운은 재현을 붙잡았다.

못다 한 얘기가 너무 많았다. 하고 싶은 얘기도, 듣고 싶은 얘기도 너무 많은데 하루는 너무 짧았다.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음은 급했다. 앞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을 거란 걸 알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남아 있는 탓이다.

그가 또다시 떠날까 봐,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와 함께하고 있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래. 그러자.”

그가 순순히 자신의 초대에 응하자, 혜운은 그제야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제 더 이상 열여덟 살 어린 나이도 아닌데, 혼자 사는 공간에 남자를 들이다니. 내가 지금 술기운을 핑계로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단순히 친구니까, 하고 넘기기에는 자신이 재현에게 갖고 있는 마음이 열여덟 살의 우정처럼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재현은 차를 다시 주차한 후 올라가겠다고 말한 뒤 혜운을 먼저 올려 보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벌어 둔 후에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심호흡을 했다.

혜운의 집 앞에 서서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누르자, 찰칵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열렸다. 재현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혜운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들어와.”

그사이, 혜운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차를 끓이고 있었다. 훈훈한 온기에 온몸이 노곤해지는 듯했다.

“외투 벗고 편하게 있어. 아무 데나 앉아도 돼.”

재현은 혜운이 시키는 대로 코트와 재킷을 벗어 바닥 한쪽에 내려놓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혼자 살기 딱 좋은 아담한 사이즈였다.

“집이 좀 휑하지?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자다 보니까 살림이 거의 없어.”

혜운의 말대로 거실에는 TV와 침대 대용으로 보이는 커다란 매트가 전부였다. 기본 옵션으로 들어 있을 법한 가전제품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고, 창가 쪽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래도 뷰는 좋아. 햇빛도 잘 들어오고.”

혜운은 창가로 가 블라인드를 걷어 야경을 자랑한 후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재현은 의자에 앉아 창 쪽으로 돌아앉아 야경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마실래?”

“응.”

혜운이 찻잔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뜨거워. 조심해.”

“고마워.”

예쁜 찻잔에 담긴 따뜻한 차에서 모락모락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재현은 조심스레 찻잔을 감싸 쥐고 향을 먼저 음미한 후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루이보스 티였다.

“하아. 섞어 마셔서 그런가 술이 영 안 깨네.”

발그레 달아오른 볼에 연신 손부채질을 해 대는 혜운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혜운은 귀 뒤로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기곤 찻잔을 들었다.

“그 약혼녀랑 왜 결혼 안 하는데?”

“애초부터 결혼하려고 약혼한 거 아니었어. 그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약혼을 선택한 거야.”

“너는?”

“나이는 먹는데 연애도 안 하고 여자도 안 만나니까 엄마가 걱정됐나 봐. 어쩔 수 없이 선 자리에 나갔는데, 거기서 이 친구를 만났지.”

“아….”

“얘기하다 보니까 잘하면 서로 도움이 될 거 같더라고. 서로 방패 삼은 거지. 난 더 이상 선 보지 않아도 되고, 그 친구는 나 앞세우고 뒤에서 계속 연애할 수 있고. 그렇게 2년 정도 지냈어. 그게 다야.”

“양가 어른들을 속인 거네?”

재현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혜운이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이제 어머니 아시면 등짝 불나게 얻어맞겠다.”

“엄마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했던 일이지만, 결론적으론 엄마를 속인 거니까 때리면 맞아야지.”

약혼을 하면서 표면적으로 재현은 회사에서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변호사 약혼녀도 두게 되었다. 그 모습에 민영은 안도감을 느낀 것 같았다. 민영이 자신에 대해 걱정하길 원하지 않았던 재현의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민영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진현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아왔고,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왔다.

하지만 재현도 알고 있다. 진현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순 없다는 걸. 자신이 모든 걸 대신할 수 없다는 걸. 그래도 재현은 노력했고, 민영은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겼다.

“네가 더 이상 방패가 되어 주지 않으면, 그 여자분은 어떡해?”

“애인이랑 헤어지든지, 계속 숨어서 만나든지, 아니면 당당하게 만나든지 그중 하나를 선택하겠지. 언제까지 내 뒤에 숨어 있을 순 없잖아.”

“냉정하게 말하네. 그래도 약혼자인데. 너도 많이 도움받아 놓고선.”

“너 지금 내 걱정 안 하고 그 친구 걱정하는 거야?”

혜운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 네 걱정해 줄게. 그럼 넌 이제 어떡할 건데?”

“뭘 어떡해. 네가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알잖아. 무슨 뜻인지.”

혜운은 자신과 눈을 맞춘 채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는지 분명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난 괜찮아.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도… 힘들 거야. 너도 아프고, 그런 널 보는 나도 아플 거야. 아니, 난 힘들어도 괜찮은데, 네가 힘들어지는 건 내가 너무 미안하니까….”

“생각나겠지. 어떻게 잊겠어. 그래도 예전만큼 힘들거나 괴롭진 않아. 조금 편해졌어. 그러니까….”

재현은 손을 내밀어 혜운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내 옆에 있어 줘.”

13년을 기다리게 해 놓고 이런 말 하는 거 면목 없지만, 그래도 붙잡고 싶었다.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붙잡고 싶다. 혜운이 자신의 곁에 있어 준다면, 그래 주기만 한다면 계속 함께하고 싶다.

“너 없이 13년 살아 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도 결국 네 생각을 하면서 버틴 거였어. 그럴 줄 알았으면, 결국 그럴 거였으면… 그렇게 네 곁을 떠나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만 더 일찍 혜운을 찾아갔더라면, 아니… 그녀가 보내 준 편지와 이메일을 읽고, 그녀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차라리 덜 힘들었을 텐데.

그녀의 소식을 모를지라도 그녀는 자신에게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되어 주었다.

형을 잃은 슬픔과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 차마 민영을 볼 수 없는 괴로움에만 사로잡혀 어리석게도 혜운을 놓아 버렸다.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이 소중했고, 그랬기에 함께하지 못한 순간들이 사무치게 후회되었다.

또다시 같은 상황에 닥쳐 결정을 해야 한다면, 고민 없이 혜운의 곁에 남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괜찮아. 그때의 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거야. 난 널 이해해.”

혜운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었다. 혜운은 재현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 주며 예전처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울컥할 만큼 반가운 눈빛이었다.

“끝내 날 찾아오질 않았던 건 여전히 밉지만… 그래도 옆에 있을게.”

혜운의 붉어진 눈시울을 지켜보는 것이 마음 아팠다. 웃고 있는 입매를 보는 것도 왠지 서글펐다. 우리가 헤맸던 지난 시간들이 너무나 짙은 아쉬움으로 남아서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자신의 곁에 있어 주겠다는 혜운의 약속이 재현의 가슴 한가운데 콱 박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 안에 담아 꽁꽁 묶어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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