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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왜 굳이 그런 사랑을 해? (21/50)
  • 21. 왜 굳이 그런 사랑을 해?

    혜운은 낯선 여자를 살폈다.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잘 가꾼 외모와 세련된 옷차림은 둘째 치고, 재현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며 환한 미소로 반기는 그녀….

    회사 직원은 아닌 게 분명해 보였고, 재현과 사적으로 친밀한 사이인 듯했다.

    “무슨 회의를 세 시간이나 해? 자기 기다리다가 숨넘어가는 줄 알았어.”

    투덜거리곤 있지만 친근한 말투까지….

    두 사람 사이에 낀 훼방꾼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재현이 코트를 가지러 가자 먼저 눈치를 챈 여자는 그의 코트를 들어 친히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익숙해 보이는 두 사람의 행동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혜운을 초 단위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혜운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 건, 처음부터 지금까지 재현을 향해서만 고정된 여자의 시선이었다.

    “난 분명히 말했다. 회의 있다고. 그래서 내일 보자고 했잖아.”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지.”

    재현이 다시 혜운의 곁으로 다가와 서자, 그제야 여자도 혜운에게 시선을 건넸다.

    “어, 내가 방해한 건가?”

    그 말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혜운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견디고 있었다.

    “혹시… 이분이 영순위?”

    그녀의 말에 혜운은 재현을 올려다보며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라고 눈빛을 보냈다.

    내가 불필요한 오해하기 전에, 어떤 사이인지 빨리 설명하라고….

    “안녕하세요. 저는 김나연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신혜운입니다.”

    자신의 손을 덥석 잡으며 환히 웃는 그녀의 모습에 혜운은 당황스러웠다.

    “잠깐, 신혜운 씨라고요? 어머! 반가워요! 혜운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심지어 자신을 알고 반가워했다.

    혜운은 계속 재현과 눈을 맞추며 설명을 재촉했지만 그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혜운 씨 얘길 하도 많이 들어서 처음 보는데도 처음 보는 것 같지 않네요. 하하. 영순위 맞네, 인정!”

    나연의 성격은 매우 시원시원했다. 매력적이긴 한데, 대체 이 여자는 재현과 어떤 사이인 걸까?

    다정한 사이 같아 보이진 않지만 꽤 가까운 사이 같았다.

    사실, 혜운은 나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재현이 이 상황을 빨리 설명해 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대답이 재현의 입에서 나올까 봐 두려웠다.

    “전 하재현 약혼녀예요.”

    약혼자가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히, 그도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는 아닐까, 까지 생각하면서도 아닐 확률도 있다며 제 자신을 다독이던 게 우스워졌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니….

    잠시 머릿속이 멍했다.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결혼할 사이는 아니에요. 나머지 설명은 재현이가 직접 해 줄 거예요. 재현아, 나 실수한 거 없지?”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시선을 지켜보는 내내 혜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뭘 물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입술이 딱 붙어 버렸다.

    “혜운이 바래다주고 올 테니까 넌 잠깐 기다리고 있어. 혜운아, 가자.”

    나연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보였다. 혜운은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넨 후 재현의 뒤를 따랐다.

    귀에서도 심장이 뛰는 듯, 웅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두 발이 너무도 무거워서 한 걸음 내딛기도 버거웠다. 혼이 쏙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재현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설명을 듣고 싶은데 모든 게 다 귀찮아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집으로 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미안해.”

    “뭐가?”

    “좀 더 빨리 말해 주지 못해서.”

    “그런 얘기까지 나눌 겨를이 없었지. 우리가 다시 만난 것도 겨우 어제 일이잖아.”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귀띔이라도 해 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원망할 기운조차 없었다.

    혜운은 입술을 꽉 깨문 채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덜어 내려 노력했다.

    “결혼을 안 한다는 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그 친구랑 나는 결혼을 하려고 약혼한 게 아니거든. 서로 필요에 의해서, 이를테면 비즈니스 관계인 거지. 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각자 뭔가를 얻는 사이.”

    “어렵다. 하재현.”

    지극히 평범했던 우리의 시간들은 꿈인 것만 같았다. 지금의 하재현은 그때와 너무도 달라서, 순간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쨌든, 두 사람은 지금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거지?”

    “이제 정리하려고.”

    “그래도 괜찮은 거야?”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했다. 좀 더 뭔가를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직 서로의 상황도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그것까지 묻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단단히 꼬일 것만 같아서 거기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혜운은 마음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혜운을 바래다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재현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연에게 다가갔다.

    “바래다주고 왔어?”

    “어.”

    “신혜운 씨 다시 만났으면 만났다고 진작 말을 하지.”

    “어제 만났어.”

    “아, 그랬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너무 나댔네. 설명은 잘 해 줬어?”

    “아니. 이따 만나서 처음부터 다 얘기해 주려고.”

    “신혜운 씨 많이 놀란 것 같던데. 약혼 얘기 괜히 했나 봐. 그냥 친구라고 할걸. 어떤 사이인지 말은 해 줘야겠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약혼밖에 없어서….”

    “아냐. 거짓말보단 나아. 친구라고 했다가 실은 약혼녀라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해. 그리고 난 혜운이한테 절대 거짓말 못 해.”

    “때로는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을 하는 게 나을 때도 있단다.”

    나연의 말에 재현은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그럼… 우리 이제 정리해야겠네?”

    “그래도 되지?”

    재현이 되묻자 나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끄덕였다.

    “그동안 네 덕 많이 봤으니까 우리 집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너희 집은 네가 알아서 해.”

    “그래.”

    “그래도 대충 말은 맞춰야 하니까, 며칠 생각해 보고 주말에 만나서 정리하자.”

    재현은 나연이 제시한 계획에 동의했다.

    처음 이 관계를 시작했을 때부터 재현은 나연에게 혜운의 존재를 말했고, 그러면서 한 가지를 약속했다.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 관계를 바로 정리하자고. 그녀와 다시 만난다는 건,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고 나연에게 미리 말했다.

    2년 동안 약혼 관계를 유지했기에 관계를 정리한다는 게 말처럼 그리 간단하진 않을 것이다. 설득 가능한 이유로 양가 어른들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시 만났어? 절대 찾아가지 않을 거라고 하더니.”

    “우연히. 거짓말처럼.”

    “오…. 그런 게 운명인가? 어쨌든 축하해. 난 네 용기가 부럽다.”

    “너도 용기를 내.”

    재현의 말에 나연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드러냈다. 그녀 역시 본인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녀만의 방법으로 수년째 노력하는 중이었다.

    “아!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있었는데, 이젠 없어. 내 선에서 해결하면 될 거 같아.”

    약혼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정한 탓인지, 나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보아하니 저녁 식사는 영순위 님이 거절하신 것 같은데, 나랑 먹으러 가자.”

    “미안. 처리할 일이 좀 남아서.”

    재현이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걸어 두고 다시 노트북을 열자 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깜빡했다. 하재현 일 순위는 일이라는 거. 그럼 나 먼저 갈게. 주말에 봐.”

    “조심히 가.”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서는 나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재현은 다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혼란스러워 보였던 혜운의 눈빛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본부장까지 참석한 회식 자리라 파트별 회식 때와 달리 분위기는 잔잔하게 흘러갔다. 게다가 호텔 일식당에서의 회식은 익숙지 않은지라 다들 식사에 열중했다.

    본부장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혜운은 본부장이 주는 사케를 세 잔 연달아 마시고 머리가 지끈거려 애를 먹었다. 술을 잘 못하는 편이라 미리 숙취 해소제를 먹고 들어왔지만 소용없었다.

    감사하게도, 눈치 빠른 본부장과 팀장은 2차 회식에 동행하지 않았다.

    혜운을 포함한 1파트 소속 여섯 명의 동료들은 자주 찾던 퍼브(pub)로 가, 편안한 분위기에서 평소처럼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맥주를 비웠다.

    혜운이 생맥주 두 잔을 비우고 세 번째 잔을 받자, 무영이 중간에서 가로채며 그녀의 손에 대신 감자튀김을 쥐여 주었다.

    “내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내일 출근 안 할 겁니까?”

    “얼마 안 먹었어.”

    “맥주 두 잔이 한계치로 알고 있는데. 아까 사케도 드셨잖아요.”

    혜운이 빼앗긴 맥주를 포기하며 감자튀김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무영이 안심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어어!”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혜운은 잽싸게 잔을 가로채 벌컥벌컥 끝까지 들이켰다.

    “왜 그래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맛있어서. 술이 술술 넘어가서 술인 걸 오늘 처음 알았네.”

    혜운은 안주로 나온 소시지를 잘라 입에 넣고, 빈 잔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퍼브 안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음악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혜운의 귀에는 이 모든 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들렸다.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 낯간지럽고 민망한 팀장의 칭찬과 본부장의 격려에도 기계적인 리액션만 내놓았고, 동료들의 수다에도 끼지 못했다.

    혼자 다른 세상에 빠져들어 생각에 갇혀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재현에 대한 생각에 갇혀 있었다.

    “선배, 나 좀 잠깐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영이 혜운의 손을 잡고 퍼브를 나섰다.

    뜨겁고 열정적이던 퍼브 안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바깥은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길에는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발길을 재촉하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정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한기를 느낀 혜운은 어깨를 움츠리며 옷깃을 여몄다.

    “술기운 올라서 볼 빨개진 거 봐.”

    “추워서 그래.”

    “밖에 나온 지 1분도 안 됐거든요?”

    혜운은 멋쩍게 웃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로 뺨이 뜨끈했다.

    그때, 무영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혜운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됐어, 너 입어. 나 괜찮아.”

    “나도 괜찮으니까 입고 있어요.”

    다시 건네자 그는 도로 걸쳐 주었다.

    “자, 이제 말해 봐요.”

    “뭘?”

    “지금 답답하잖아. 그냥 모르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말해요. 가만히 듣고 있을게.”

    “야,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해….”

    “듣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란 얘기에요. 선배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생각들, 조금만 내려놓으라고.”

    혜운은 무영을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도 제 모습이 답답해 보였나 보다.

    정말, 털어놓고 나면 생각이 조금 비워질까?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무영을 상대로 말하고 싶진 않았다. 재현과의 일이기에, 힘들어도 재현을 붙잡고 말하는 게 맞았다.

    혜운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무영의 팔을 다독였다.

    “말이라도 고맙다.”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안 보이네.”

    한숨 섞인 그의 말에 혜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혜운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선배는 나 같은 남자 만나서 사랑받아야 하는데.”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게.”

    “아프고 힘든 사랑하지 마요. 왜 굳이 그런 사랑을 해? 하지 마.”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래도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거겠지.

    “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농담에 진심을 담아 건네고, 상처가 되는 말에도 그저 허허 웃어넘기는 그런 사랑. 그도 이제 그만하길 바랐다.

    혼자 마음 졸이고 속상해하는 거 그만하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서 원 없이 사랑하길 바랐지만 이런 얘길 그에게 직접 하는 건 너무 주제넘는 일 같아서 말을 잇지 않았다.

    혜운은 그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머릿속과 마음을 가득 채운 재현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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