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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우리가 놓쳤던 시간들 (20/50)
  • 20. 우리가 놓쳤던 시간들

    건물 안으로 들어온 혜운은 재현의 차가 떠날 때까지 몸을 숨기고 서서 지켜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자리를 떠났고, 혜운은 다시 밖으로 나가 재현의 차가 시야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면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를 텐데,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건지 염려가 되었다.

    ‘이제는 조금 상처가 아물었을까? 그랬다면… 진작 날 찾아왔겠지.’

    걱정이 되는 와중에도, 그를 다시 만나 설렜다. 실컷 미워하고 원망해 놓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다시 시작해 보자는 그 말을 붙잡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하재현이란 사람은 자신에게 유일한 존재라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한 번 시작하면 멈춰지지 않았다.

    분명한 건, 일단 그를 만나야겠다는 것. 보고 싶어도 참는 건 더 이상 불가능했다. 오늘 재현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쏟아 낸 것 같아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 둔 게 너무 많아서 그랬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게 될 줄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했다.

    고백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열여덟 살의 신혜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참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은 이런 애매한 감정을 안은 채 재현을 마주하게 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이젠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혜운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다 돌아서서 아까 재현이 가리켰던 노란 전구 옷을 입은 가로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서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어 하던 재현의 모습이 떠올라,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 *

    혜운은 오랜 로망이었던 복층 오피스텔 대신 방을 하나 늘리기로 결정하고 올 봄, 회사와 가까운 이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부터 자취를 시작한 혜운은 경선의 품 안에서 살던 시절이 얼마나 행복하고 따뜻했는지 절실하게 느꼈다.

    평소보다 한 시간가량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그녀는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들고 창가로 향했다.

    밤새 잠을 설쳤다. 계속 재현의 생각이 떠올라서인지, 아니면 오늘 다시 재현을 만나야 하기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분명한 건 그와 관련되었단 것이다.

    간밤에 눈이 그치긴 했지만 며칠째 쌓인 눈으로 세상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TV에서는 눈이 그치자마자 오늘부터 한파가 시작되었다는 예보를 내놓았다.

    차를 비운 혜운은 빈 컵을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미리 챙겨 둔 코트를 걸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현관으로 향하다 걸음을 멈칫하고 거울 앞에 선 혜운이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흐음.”

    평소였다면 별 고민 없이 걸쳤을 오버 사이즈의 블랙 계열 코트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걸렸다. 오늘부터 한파가 시작된다고 하니 이 정도 두툼한 코트를 입는 게 맞긴 하지만 어쩐지 부해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혜운은 다시 옷장을 열고 밝은 그레이 톤의 코트를 꺼내 몸에 대고 거울을 보았다. 슬림한 핏이라 몸의 라인이 사는 대신, 오늘 날씨에는 매우 부적합했다.

    “이게 낫네.”

    아침 최저 기온 영하 11도의 한파도 혜운의 결정은 바꾸지 못했다. 혜운은 코트를 입고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가방을 들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인했다.

    풍성하게 컬이 살도록 드라이를 한 머리칼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신경 써서 고른 코럴 색 립스틱도, 유난히 잘된 피부 화장과 오랜만에 최선을 다해 그린 아이라인도 만족스러웠다.

    “혜운아, 너 뭐 하냐.”

    거울에 비친 한껏 멋을 낸 자신의 모습에 실소가 터졌다.

    우습긴 하지만 재현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외모에 자신감을 갖고 싶어서라고 제 자신을 설득하며 현관을 나섰다.

    재현의 업무는 오늘도 회의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11월부터 본가인의 스테이크 하우스 브랜드 ‘본 스테이크 하우스’의 직영 매장이 오픈을 시작했다. 연남동 직영 매장을 시작으로, 한 달 동안 이태원, 인천 송도, 부산 해운대점이 오픈했고 이달 안에 두 곳이 더 오픈할 예정이었다.

    내년 상반기까지 전국에 오픈 예정 지역과 일정을 확정한 가운데, 오픈 예정 매장의 준비 상황을 보고받고, 현재 운영 중인 네 곳의 매출을 비롯한 전반적인 영업 상황을 체크했다.

    ‘본 스테이크 하우스’는 본가인의 직영 농장을 통해 공급되는 최고 등급 한우의 다양한 부위를 이용해 젊고 창의적인 스테이크 요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을 표방하고 있었다.

    매장 분위기는 무겁고 조용한 프리미엄 퀴진(cuisine)이나 파인다이닝(fine-dining) 레스토랑보다 캐주얼한 느낌인데, 현재 운영 중인 네 곳 모두 다양한 연령층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어 내고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본가인의 다섯 번째 외식 브랜드이기에 대내외적으로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신규 브랜드 론칭이 무난하게 성공한다면,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재현에겐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제 겨우 오전 회의를 마쳤을 뿐인데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갔다. 재현에게 붙잡혀 마라톤 회의를 한 각 팀 담당 직원들의 지친 표정을 뒤늦게 확인한 재현은 서둘러 회의를 갈무리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으려는데, 한 직원이 유리문을 똑똑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팀장님, 아까 김 변호사님께서 사무실로 전화하셨어요. 회의 중이라고 전달해 드렸습니다.”

    “고마워요.”

    책상 위에 두고 갔던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아마 일부러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기어이 사무실로 확인 전화를 건 모양이다.

    재현은 부재중이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신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 되었다.

    “왜?”

    - 다짜고짜 왜? 전화 매너가 아주 쓰레기네!

    상대방의 공격적인 말투에도 재현은 신경 쓰지 않고 웃어넘겼다.

    “미안. 왜 전화했는데?”

    - 같이 점심이나 먹자.

    “점심때 매장 나가 봐야 돼.”

    - 음. 그럼 저녁을 먹자.

    “저녁에는… 아마도 약속이 생길 거야.”

    - ‘약속이 생길 거야’는 뭐야? 아직은 없지만 곧 약속을 만들겠다는 거야? 내가 먼저 저녁 먹자고 했는데도?

    “상대방한테 아직 의견을 못 물어봤거든. 미안하지만 난 그쪽이 영순위라서.”

    - 와, 너무한다. 약혼자를 이렇게 푸대접을 하네? 진짜 서운하다.

    재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창가로 향했다.

    약혼자…. 허울뿐이긴 해도 김 변호사, 김나연은 자신의 약혼자였다.

    나연이 쏘아붙였지만 재현은 한 귀로 듣고 반대쪽으로 흘려보냈다.

    - 쌀쌀맞다 못해 춥다 추워. 휴우…. 내가 너한테 갚아야 할 은혜가 많아서 참는 거야.

    “그러니까 밥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네 애인이랑 먹어.”

    - 당연히 나도 그러고 싶지. 사실 식사는 핑계고, 너한테 할 말 있어.

    “할 말이 아니라 부탁할 게 있는 거 같은데?”

    - 역시 눈치가 빨라.

    “이번엔 또 뭐야.”

    - 그건 만나서 얘기하자. 나 이따 오후 늦게 너희 회사 근처에 갈 일 있거든? 들를 테니까 30분, 아니 20분만 시간 내줘. 그 정도는 되지?

    “오후에 회의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몰라. 내일 보자.”

    - 제발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정 안 되면 회의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수고.

    나연과 통화를 마친 재현은 허탈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나연이 자신에게 부탁할 일은 뻔했다. 약혼자라는 방패가 필요할 때, 예를 들면 가족 모임에 동행해야 할 일이 있을 때가 전부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 민영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나간 첫 맞선 자리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자리에서 나연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재현과 나연은 서로에게 방패가 되어 주었다.

    나연은 가족들이 결사반대하는 남자와의 연애를 지속하며 재현을 이용했고, 재현은 두 번 다시 맞선 자리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으면 좋겠다는 민영의 잔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이 관계도 정리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혹시나 혜운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오해를 할 수도 있는 부분이라 미리 설명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혜운이는 언제쯤 오려나….

    다시 혜운을 만날 생각을 하니,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약서에 서명만 하고 간단히 정리될 줄 알았던 회의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건 재현 때문이다.

    확정된 광고 기획안을 두고 몇 가지 의견이 추가적으로 오가면서, 또 한 번 대토론이 열린 것이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의견 조율도 동시에 이뤄졌다.

    홍 실장이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음 회의도 있으니 그때 또다시 얘기하자고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면, 훨씬 더 길어졌을 것이다.

    다들 재현을 향해 일 중독자라고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일 때문에 재현과 마주하게 될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기에, 혜운은 신기한 마음도 들었다.

    일할 때의 하재현은 이런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재현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가끔 무언가를 말하다가 스치듯 그를 보면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모두가 회의실을 떠난 뒤에야 혜운과 재현은 가장 나중에 회의실을 나섰다. 혜운의 서류 가방과 노트북 가방은 재현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 때문에 퇴근 늦어져서 미안.”

    “괜찮아. 어제 회의 제대로 못 해서 오늘 길어질 것 같았어.”

    “같이 일하는 거… 나만 재밌는 거 아니지?”

    “난 힘들어 죽겠거든?”

    혜운의 대꾸에 재현이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혜운이 피식 웃었다.

    그동안 위에서 누가 이렇게 많이 수정을 요구하나 했더니, 다름 아닌 하재현이었다. 계약이 성사되었으니 이제 진짜 고생문이 열린 것이다. 꼼꼼한 클라이언트를 만나 걱정이 앞섰다.

    “이리 줘.”

    혜운이 가방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줄 생각이 없는지 혜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바로 퇴근이지? 같이 저녁 먹자. 회사 근처에 새로 오픈한 매장 있거든.”

    “우리 팀 회식 있어. 바로 가 봐야 돼.”

    혜운의 대답에 재현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혜운은 이미 본부장까지 와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라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럼 회식 끝날 때쯤 내가 데리러 가도 되나?”

    재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혜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나 술 마시면 되게 와일드해져서 너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겁주는 거야?”

    애초에 술버릇 같은 건 없었다. 회사 분위기가 마시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술을 거의 마시지도 못하기 때문에 많이 마실 일도 없었다.

    다만, 하루 종일 일하느라 고생한 그도 피곤할 텐데 아까운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을 보더라도 맨정신일 때, 예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나?”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만난 지 고작 하루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길었던 공백이 점점 채워지는 것 같아 신기했다. 당장 뭘 어떻게 해결하려고 억지로 뭔가를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서로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이대로 가다 보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보고 싶다. 신혜운 술 마시는 거.”

    “그게 왜 보고 싶냐? 웃겨, 하여간.”

    “내가 놓쳐 버린 시간 동안의 네 모습, 다 보고 싶어.”

    그건 혜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왜 그랬어?”

    “미안.”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또다시 사과를 하는 재현의 모습에, 혜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방 주고 너도 얼른 퇴근해. 오늘 수고 많았어.”

    “아냐. 주차장까지 들어다 줄게. 내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있거든? 잠깐만 들렀다가 가자.”

    혜운은 조금만 더 재현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대부분의 사무실에는 조명이 꺼져 있었고, 재현이 속한 브랜드 기획팀 사무실만 조명이 켜져 있었다.

    재현이 일하는 공간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괜히 마음이 설렜다.

    “하재현!”

    그때, 한 여자가 재현의 이름을 불렀고, 재현의 뒤편에 있던 혜운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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