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새로운 시작 (19/50)
  • 19. 새로운 시작

    “하재현.”

    혜운이 한참 만에 입술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너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오늘처럼 이렇게 입술을 떼기 힘겨울 만큼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재현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혜운을 바라보았다.

    “난 지금도 1초 단위로 마음이 극과 극을 오가고 있어. 널 그냥 이대로 두고 가 버릴까, 아니면 좀 더 얘길 해 볼까 고민 중이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날 붙잡고 싶으면 무슨 얘기든 해.”

    혜운의 말은 지금 당장 무슨 말을 해서라도 붙잡아 보라는 말 같았다.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재현에겐 그렇게 들렸다.

    “혜운아.”

    “어.”

    “…나 추워.”

    재현의 말에, 혜운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 그러네…. 하재현이 추위를 많이 타긴 하지.”

    혜운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더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와중에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내가 참…. 따라와.”

    혜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장섰고, 재현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다행히도 전해진 것 같아, 재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혜운이 향한 곳은 길 건너편에 위치한 카페였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와 향긋한 커피 향이 가장 먼저 두 사람을 반겼다.

    혜운은 카페 가장 안쪽 창가 테이블로 향했고, 재현은 그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뭐 마실래?”

    혜운은 코트를 벗어 옆자리에 내려놓고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아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혜운이 뭘 입고 있는지 볼 생각도 못 했는데, 위에는 블라우스에 얇은 니트를 덧입고 있었고 아래는 스커트 차림이었다.

    아침부터 눈에 폭 파묻혀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또 한 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 준다고 할 때 빨리 말해. 뭐 마실 거야?”

    “어? 어…. 너랑 같은 거.”

    혜운은 피식 웃으며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을 하고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뒷짐을 진 채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마도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는 듯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그녀는 양손에 하나씩 테이크 아웃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혜운은 컵 뚜껑을 열어 재현에게 건넸고, 재현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제 안 춥지? 할 말 있으면 빨리해.”

    13년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혜운이 톡 쏘듯이 말했다. 하지만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마냥 좋을 뿐이었다.

    “나 오늘 엄청 피곤하거든?”

    “클라이언트가 피곤하게 했어?”

    “어. 기가 쪽 빨렸어.”

    혜운은 일부러 재현의 눈을 빤히 보며 말했고, 재현은 미소 지었다. 그러자 혜운이 갑자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너한테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니, 지금.”

    “왜? 나한테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어제도 만나고 그제도 만났던 것처럼 너한테 너무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오잖아.”

    자책을 하는 건가.

    어쨌든, 혜운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 분위기를 못마땅해 하는 건 틀림없었다.

    “난 여전히 너한테 화가 나 있고, 널 다시 만나서 마음이 매우 복잡한 상태야. 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굴어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거 알아 둬.”

    “알았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재현이 순순히 대답하자 그제야 혜운이 컵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혜운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밖을 바라보았다.

    “신혜운.”

    “말해.”

    “보고 싶었어.”

    혜운이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 귀에는 네가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어서 잘못했다, 보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로 들려.”

    “진심이야.”

    어떻게 표현해야 내 마음이 그대로 전달될까.

    전하고 싶은 진심에 비해, 그 진심의 절반의 절반이라도 담을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참고 견뎠던 의지만큼이나 혜운을 향한 그리움도 컸다.

    수도 없이 마음을 다잡고 버텼다. 오늘처럼, 한 번 보고 나면 봇물 터지듯이 막을 수 없는 마음인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버티고 또 버텨 왔다.

    “나도 내가 이렇게 꼬인 사람인 줄 몰랐어.”

    “혜운아.”

    “겁나. 너 볼 때마다 계속 이렇게 화풀이할까 봐, 마음은 그게 아닌데…. 자꾸 이런 모습만 보일 것 같아서 겁난다고. 두 번 다시 널 만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나면 다 해결될 감정 같은데, 나 솔직히 그럴 자신은 없거든?”

    “네 마음 내키는 대로 해. 난 다 괜찮아. 넌 뭐든 다 해도 돼. 내가 다 감당할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전처럼 그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혜운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눈썹을 살짝 구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3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열여덟 살의 신혜운도,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서른한 살의 신혜운도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스러웠다.

    만약, 서른한 살의 신혜운을 오늘 처음 만났다 해도 자신은 분명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지 다 아니까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미워. 난 네가 미워. 나도 너무 밉고…. 이런 상황도 너무 싫어. 근데 너는 계속 보고 싶을 거 같아. 어떡할까? 우리 어떡할래?”

    “억지로 네 감정 바꾸지 않아도 돼. 너 기분 내키는 대로 해도 돼. 화를 내도 좋고, 욕을 해도 좋고, 걷어차도 좋아. 뭘 해도 좋으니까… 널 볼 수 있게만 해 줘.”

    결국 혜운이 눈물을 보였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끝으로 쓱 닦아 내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울지 않고 버티고 버티다가 아주 가끔씩 자신의 앞에서만 울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자신의 앞에서 벌써 두 번째 눈물을 보였다.

    못 본 사이에 눈물이 많아진 건가 생각하다가, 그녀를 울게 한 사람이 자신이란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 너무 애절한 사이 같다.”

    “나는… 애절해.”

    재현의 대답에 혜운이 자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온몸에 전율이 일 만큼 가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사납게 뛰었다.

    “날 보면… 힘들 거잖아.”

    “안 보는 게 더 힘들더라.”

    혜운을 보면 가끔씩 형의 기억을 떠올릴 때도 있겠지만, 전처럼 마냥 고통스럽진 않으니까…. 차라리 혜운의 곁에서 힘든 게 낫지 않을까.

    진현이 세상을 떠난 지도 13년.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책감을 덜 수 있었다. 여전히 진현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지만 그렇다 해도 다시 혜운을 놓을 순 없었다.

    “답을 찾아보자. 최선의 답을.”

    재현의 말에 혜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혜운의 물음에 재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열여덟 살이 아니고,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새로 시작할 순 있겠지.”

    재현의 대답에 혜운은 옅게 웃으며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아니라 술을 마실 걸 그랬다.”

    한숨 섞인 혜운의 그 말에 재현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재현의 차가 혜운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

    “너 운전 잘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혜운의 말에 재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웃어?”

    “그냥. 너한테 칭찬받으니까 갑자기 웃음이 나네.”

    혜운은 재현의 반응을 의아해했고, 재현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서 입술 안쪽 연한 살을 꾹 깨물며 필사적으로 참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13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는데, 방금 전 혜운의 칭찬은 서로가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내일 회사에서 또 보겠네.”

    “응.”

    “미팅 시간 오후로 잡은 건, 담당자가 나라서 배려해 준 건가?”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운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침엔 길이 많이 막히니까. 오늘처럼 눈 맞으면서 뛰지 말고 천천히 들어와.”

    “아침에 출근 시간대라 길 막히고 눈 와서 빙판길 된 거 아는 사람이, 아침부터 회사 직원들을 그렇게 잡았나? 나 들어가기 전까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홍 실장님한테 얘기 다 들었거든?”

    재현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늦은 건 내 잘못이니까 다시 한번 사과할게. 도로 사정이 그렇게 엉망일 줄 몰랐거든. 다음부턴 절대 늦는 일 없을 겁니다, 팀장님.”

    혜운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자, 재현도 따라 내려 조수석 쪽으로 향했다.

    “하재현, 만약에 그 회의에 늦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네가 그냥 넘어갔을까?”

    “분위기는 조금 안 좋아졌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작 10분 늦은 걸로 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 버릴 만큼 공과 사 구분 못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일 저지르는 놈 아냐.”

    “까칠하고 예민한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누구, 내가? 누가 그런 소릴 해?”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일 중독자라는 소문도 들었는걸요?”

    재현은 손사래까지 치며 사실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하긴, 너 예전에도 애들이 까칠하고 예민하다고 말하긴 했었어.”

    “좀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근데 진짜 내가 그래?”

    “아니.”

    “그럼 네가 아니라고 말 좀 해 주지 그랬어.”

    “내가 왜? 나만 알고 있으면 되지.”

    혜운의 대답에 재현은 웃고 말았다.

    맞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신혜운만 알아주면 되는 것이다.

    혜운에겐 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재현은 혜운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편안해진 눈빛에 안도했다.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자신을 보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꿈을 이뤘네.”

    “이뤘지.”

    “대단하다, 신혜운.”

    광고 기획자가 되겠다던 꿈을 이뤄 낸 그녀가 대견했다. 그녀가 꿈을 이뤄 가는 과정을 곁에서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다. 함께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들어가. 춥다.”

    “그래. 너도 잘 가. 운전 조심하고.”

    운전 조심하고…. 헤어질 때 늘 하던 인사에서 한 마디가 더 추가되었다.

    인사까지 나눈 뒤에도 재현은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잠깐이라도 이대로 좀 더 함께 있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재현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 그녀를 붙잡을까 망설이다가, 노란 전구를 칭칭 감은 가로수를 발견하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시선을 던졌다.

    “연말 느낌 난다!”

    재현의 말에 혜운도 그 가로수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여기 살면서도 이제야 봤네.”

    혜운의 눈동자에 노란 조명이 비쳐 예쁘게 반짝였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재현은 눈을 떼기 힘들었다.

    “혜운아.”

    “응?”

    “손 한 번만 잡아 봐도 돼?”

    혜운은 재현을 흘겨보면서도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재현은 그녀의 작고 하얀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살짝 위로 끌려 올라간 코트 소매 끝에 걸린 시계가 재현의 시선을 붙잡았다. 오래전, 자신이 선물해 준 그 시계였다.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대신해 그녀와 함께했을 시계가 어쩐지 반가워서 가슴이 뭉클했다.

    “여기서 날 샐 거야?”

    “알았어. 갈게. 너 먼저 들어가.”

    재현이 마지못해 손을 놓아주자 혜운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재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음이 허전해졌지만, 하루만 견디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되뇌며 아쉬움을 달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