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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복잡한 마음 (18/50)
  • 18. 복잡한 마음

    혜운은 목에 걸었던 사원증을 빼 가방 안에 넣고,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며 회사 로비를 나섰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렸지만 건물 출입문 앞은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전히 가는 눈발이 바람을 타고 조금씩 흩날렸고, 어둑한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걸로 보아 눈이 금방 그칠 것 같진 같았다.

    혜운은 계절 중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간밤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는 것도 좋아했고, 숨을 깊게 들이쉬면 폐 속까지 깨끗해질 것 같은 차갑고도 상쾌한 바람도 좋았다.

    혜운은 지금,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는 새하얗게 쌓인 눈 위를 걷고 싶었다. 아침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원망하기도 했지만, 눈길을 걸으면 왠지 답답한 마음과 복잡한 머릿속이 개운해질 것만 같아서다.

    유난히 길었던 하루다.

    일에 치여 잠시나마 잊을 만도 한데, 마주한 순간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현실 감각이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난 사람인데, 그와 다시 만났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한 번 생각이 시작되면 멈출 수 없기에, 혜운은 애써 재현의 생각을 털어 내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

    자신을 부르는 무영의 목소리에 혜운은 뒤로 돌아섰다.

    “내가 집까지 바래다준다니까.”

    “됐어. 지하철 타고 갈 거야.”

    “편하게 내 차 타고 가요. 차로 가면 금방인데.”

    “도로 상황을 봐. 아마 너보다 내가 더 빨리 도착할걸? 그리고 우리 집 역세권이라 도보로 3분이면 도착해.”

    혜운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지만 무영은 기어이 혜운을 따라왔다.

    “얼른 가. 간만에 일찍 퇴근했으니까 그동안 못한 여가 생활도 즐기시고. 여자도 좀 만나고. 응?”

    “내 말이. 간만에 일찍 퇴근하니까 나랑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술도 한잔하면 얼마나 좋아?”

    “그런 건 여자 친구랑 하세요, 후배님.”

    “그러니까 나랑 연애 좀 하자고요.”

    “네가 기어이 매를 벌지.”

    혜운이 성큼성큼 걸어가 무영의 팔뚝을 주먹으로 툭 때리자 그가 과장되게 아픈 척을 하며 몸을 숙였다.

    “헛소리 말고 빨리 가.”

    “알았어요. 갑니다, 가요. 선배도 조심히 들어가요.”

    “그래. 내일 보자.”

    “집에 도착하면 메시지 남겨요.”

    “네가 내 서방이야? 간섭하지 마라.”

    “네! 주제넘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살펴 가십쇼!”

    허리를 90도로 숙여 가면서 인사를 하는 무영을 뒤로하고 혜운을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지인의 소개로 소개팅도 해 봤고, 좋아한다며 다가오던 사람도 몇 명 있었지만 어느 선 이상으로 자신의 감정이 커지지 않았다.

    결국 모두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접고 물러섰다. 오매불망 재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것은 아닌데, 결론적으로 그런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무영은 시도 때도 없이 솔직하게 호감을 표현하고 있지만 혜운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영도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어 주길 바랐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에게 상처를 주기 싫었고, 그의 마음까지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나쁜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은 욕심, 지극히 이기적인 그 이유 때문이다.

    한편, 무영은 느릿느릿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리는 눈을 구경하고 있는 혜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그 자리에서 한참을 지켜보았다.

    혜운의 곁에서 2년을 맴돌았지만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번쯤 기회를 줄 만도 한데 어림없었다.

    빈틈이 보이는 것 같아서 다가가 보면 늘 아니었다. 조금 가까워졌나 싶으면 좀 더 견고한 벽을 쌓아 올렸다.

    혜운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무영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쉽게 가질 수 없기에 더욱더 탐나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모든 걸 가져 봤지만 유일하게 갖지 못한 하나가 그녀였다.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던 그 이유, 어쩌면 아까 보았던 그 남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럴 확률이 가장 컸다.

    혜운이 그렇게까지 큰 감정 기복을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남다른 존재인 게 분명했다. 서로에게 향하던 시선, 눈빛,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 분위기 모든 것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었다.

    2년 동안 거의 매일 만나고 가깝게 지내 왔던 자신도 처음 보았던 혜운의 전혀 다른 모습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남자에게만 허락된 그녀의 낯선 표정과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아주 많이 사랑했던 친구….”

    갑자기 나타나 늘 평온하던 그녀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그 남자가 몹시 신경 쓰였다. 오늘 처음 보았던 그녀의 반응 또한 신경 쓰였다.

    여자 하나를 두고 질투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나 우스웠다. 그것도, 여자의 마음조차 얻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서 질투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이 지금 현재 짝사랑을 하고 있단 사실을 주변 친구들이 알게 되면 아마 다들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씁쓸하게도 지금 그게 무영의 현실이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혜운은 눈 구경에 정신이 팔려 몇 번이나 걷다 서다를 반복했다.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을 구경하기도 하고, 어둑해진 길을 밝혀 주는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눈을 구경하기도 하고, 도로 위 차들이 쏟아 낸 조명 사이로 떨어지는 눈을 보기도 했다.

    혜운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경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 그래, 혜운아. 퇴근했니?

    “지금 집에 가는 중이에요. 저녁은 드셨어요?”

    - 오늘 성당에 김장하는 날이라 수육까지 삶아서 성당 식구들이랑 다 같이 먹었어.

    “우와. 맛있었겠다.”

    혼자 지내는 그녀가 혹시나 적적하거나 쓸쓸하진 않을까 싶어서, 매일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게 혜운의 일상이었다.

    - 근데 오늘 어째 우리 혜운이 목소리가 힘이 하나도 없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목소리만 들어도 자신의 컨디션을 알아맞히는 경선이기에, 혜운은 조금 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주말에 내려갈게요.”

    - 아이구, 일도 힘든데 주말에는 집에서 푹 쉬어. 왔다 갔다 운전하는 것도 보통 일 아니다. 나는 혼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알았지?

    “한 주 거르면 할머니 보고 싶어서 안 돼요.”

    - 녀석도 참.

    언제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녀의 듣기 좋은 웃음소리에, 혜운도 덩달아 웃었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항상 조심하시구요.”

    - 그래. 알았다. 내 걱정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몸 잘 챙기고.

    “네. 할머니.”

    경선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쓸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혜운은 코트의 소매를 살짝 걷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재현이 선물로 주었던 그 시계. 오래전에 시간이 멈춰 버린 시계였다. 그 모습이 마치 그와 자신의 모습인 것만 같아 서글펐다.

    화가 치미는데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지, 그동안 왜 찾아오지 않았는지 실은 조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더 힘들었다.

    “그래도 13년은 너무했어….”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손바닥 뒤집듯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마음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가자. 집에.”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독인 혜운이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낯이 익다 싶었는데, 재현이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 멈춘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을 향해 서서히 걸어오고 있는 것만 또렷하게 보였다.

    거짓말 같은 그 모습에 혜운은 하마터면 달려가 안길 뻔했다.

    재현은 퇴근길에 잠시 혜운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욕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회사로 찾아갔다. 혜운의 회사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보며 전화를 걸까 말까 수백 번도 더 망설이고 있는데, 회사를 나선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다들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데 혜운만 그 눈을 오롯이 맞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 오히려 하늘을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여전했다. 겨울을 좋아하고, 눈을 좋아하는 것. 어렸을 때도 지금처럼 볼이 빨갛게 어는 줄도 모르고 밖에 나와 눈 구경을 하곤 했었다.

    혜운이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그녀의 모습도, 서서히 굳어 가는 표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현에겐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재현이 혜운의 앞에 멈춰 서자, 혜운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혜운.”

    “여긴 왜 왔어?”

    “너 보러.”

    혜운이 고개를 숙이며 옅게 웃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생각으로 가득 찬 복잡한 눈빛….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진즉에 좀 보러 오지 그랬어.”

    기운 없는 그 목소리에 또 한 번 마음이 아렸다. 재현은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며 거리를 좁혔다.

    “아까 너 그렇게 보내고 계속 후회했어.”

    “아깐… 둘 다 정신없었지 뭐.”

    혜운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백하게 말했지만, 그래서 더 불안했다.

    ‘괜찮아. 그러니까 난 이만 가 볼게’ 하며 미련 없이 가 버릴 것만 같아서….

    “잘못했어.”

    “…뭘?”

    “다. 내가 다 잘못했어.”

    사과부터 하고 싶었다. 아까 그렇게 보낸 것도, 혜운에게 먼저 찾아가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았던 것도,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모두 다 사과하고 싶었다.

    자신의 진심을 ‘잘못했다, 미안하다’라는 한없이 가벼운 말 안에 담아 건네기 싫었지만,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서 재현도 너무나 답답했다.

    혜운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고,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이제 열여덟 살 아니야. 다 잘못했다는 말로 한꺼번에 쉽게 정리하려 하지 마. 이거 그렇게 간단한 문제 아냐.”

    “나는….”

    “나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풀어야 할 게 너무 많아. 엄두조차 안 나. 너 만나고 난 후로 계속 생각해 봤는데 여전히 같은 상태야. 아까 한 번 만난 거 없던 걸로 치고 그냥 모른 척 살고 싶은데, 그렇게는 안 될 거 같아. 그래서 화가 나.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와.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우리?”

    고저가 없는 차분한 말투로 쏟아 내는 혜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 안에 콕콕 박혔다.

    “널 생각하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파. 중간이 없어.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널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13년은 너무 길었던 거지. 그래서 감당이 안 되나 봐.”

    혜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한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피어올랐다. 움켜쥔 주먹은 보고 있기 안쓰러울 만큼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다.

    “차라리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면, 이렇게 머리가 터져 나갈 정도로, 생각에 빠져 죽을 만큼 괴롭지 않았을 거야. 내가 너를 너무 잘 알아서…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지 훤히 보여서…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입버릇처럼 괜찮다고 말하던 혜운이 힘들다고 했다. 자신에게 솔직하게 꺼낸 힘들다는 그 말이 반가우면서도, 그래서 못 견디게 미안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완전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혜운의 말대로 13년은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이제 더는 자신을 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날 잊지 않아 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갖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에 대해 벌을 받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받으면 좋을 텐데, 그녀까지 괴롭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자신은 끝까지 그녀를 아프고 힘들게 하는 사람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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