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너와 나의 시간 (17/50)
  • 17. 너와 나의 시간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재현은 의자에 앉자마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아까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회사 내에 소문이 돌았는지, 다들 재현을 힐끔거렸다.

    평생 살아온 곳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홍성곰탕’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내걸고 다시 식당을 열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식당 일에만 매달렸던 부모님의 노력으로, 식당은 생각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다.

    그간 수많은 투자 제의와 가맹 사업 제안도 거절하고 식당 운영만을 고집했던 민영이 생각을 바꾼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간편식을 생산, 판매하는 식품 업체를 운영하던 외삼촌 충민이 ‘홍성곰탕’의 가맹 사업을 제안했고, 더 큰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일거리가 필요했던 민영은 직접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민영이 워낙 사업 수완이 좋고 밤낮없이 노력한 것도 있지만, 하늘이 돕는 건가 싶을 만큼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을 거뒀다. 가맹점 확장과 동시에 운 좋게도 홈쇼핑 사업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성공 가도에 올랐고, 본격적인 식품 기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성장한 회사는 네 개의 외식 브랜드를 론칭해 500여 개의 가맹점을 보유하게 되었고, 3년 전, 충민이 기존에 운영하던 기업과 통합하며 지금의 ‘본가인’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성공을 거듭해도 여전히 뭔가에 굶주린 것처럼 민영은 계속해서 일에 매달렸다. 영철과 재현은 물론이고 온 친척들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두 회사가 통합되고 재현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야 회사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민영은 예전처럼 ‘홍성곰탕’ 본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어서였다.

    식품 업계에서 나름대로 중견 기업으로 손꼽히는 ‘본가인’을 일궈 낸 장본인이 기어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간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고객들은 그런 민영의 고집에 믿음과 신뢰를 보냈다.

    재현이 회사에 입사한 건 호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다. 재현은 먼저 충민의 회사에 들어가 바닥부터 차근차근 회사 일을 배웠고, 이내 민영의 회사로 자리를 옮겨 두 회사의 통합을 주도한 후 실무진으로 자리를 잡았다.

    꽤 이른 나이에 이뤄진 승진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트집을 잡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거나, 오히려 임원으로 바로 승진되지 않은 걸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재현이 밤낮없이 일하는 건 두 회사의 직원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재현에게는 그런 생활이 잘 맞았다. 일에만 미쳐 지내다 보니 상념에 잠길 틈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영철과 민영이 그러했듯이, 재현도 자연스레 그런 생활이 몸에 익었다.

    꼬박 1년을 준비해 온 스테이크 하우스 브랜드 ‘본 스테이크 하우스’는 ‘본가인’의 다섯 번째 외식 브랜드 론칭작이었다. 자신이 브랜드 개발팀 팀장직을 달고 처음으로 출시한 브랜드라서 더욱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재현이 사활을 걸고 준비한 기획이었기에 광고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유력했던 세 곳의 광고 회사 중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이 네오였다.

    그 과정에서 본부장과 마케팅팀 홍 실장의 적극 추천이 있긴 했지만, 네오에서 제작한 기존 광고들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좋았기에 성사된 것이었다.

    계약에 앞서, 양사가 최종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혜운을 만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인데도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스라했다.

    똑똑.

    혜운에 대한 생각으로 가지가 뻗어 나가려는데, 마침 홍 실장이 자신의 사무실 유리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팀장님, 본부장님이 팀장님 들어오는 대로 바로 같이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그 자리에서 광고 업체 선정 마무리하실 것 같은데…. 네오로 결정하신 거죠?”

    여기서 파투가 나면 다시 처음부터 고생을 해야 하기에, 홍 실장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홍 실장님 안목 믿고 가죠.”

    “에이, 저한테 떠밀면 곤란합니다.”

    재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넥타이를 고쳐 매고 슈트 재킷의 단추도 꼼꼼히 채웠다.

    “네오로 결정될 거니까 바로 계약 준비해 주세요.”

    “네, 팀장님. 날짜는 언제로 전달할까요?”

    “내일이 좋겠네요.”

    “내일이요? 그렇게 빨리요?”

    “한시가 급한 일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재현은 사무실을 나서려다 돌아서서 홍 실장을 마주 보았다.

    “신혜운 씨보고 직접 들어오라고도 전달해 주시고요.”

    “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할게요.”

    의미심장한 홍 실장의 미소에 재현은 아무런 대꾸 없이 돌아서서 브랜드 개발팀 사무실을 나섰다. 자신의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던 홍 실장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Rrrr.

    막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재현은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영철이었다.

    “저 먼저 올라가 있겠습니다.”

    홍 실장을 먼저 보낸 후, 재현은 복도 끝으로 가 통화를 연결했다.

    “네, 아버지.”

    - 통화 괜찮니?

    “괜찮아요. 어쩐 일이세요?”

    - 아빠 지금 네 엄마 데리고 병원 왔어.

    병원이란 말에 심장이 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았고,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병원이요? 왜요? 어디 다치셨어요?”

    - 새벽부터 가게 앞에 눈 치우다가 살짝 미끄러졌어. 발목을 좀 다친 것 같아서 지금 검사 중인데, 의사가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하네. 머리라도 다쳤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지.

    “어느 병원이에요? 제가 지금 갈게요.”

    - 네가 올 정도는 아냐. 그냥… 아버지도 조금 놀라고 그래서…. 그래서 너한테 전화 걸어 본 거다. 네 엄마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날의 사고 이후, 내색하진 않지만 영철 역시 마음에 상처가 남은 것이다.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요새 자꾸 어깨랑 손목도 안 좋다고 해서 온 김에 겸사겸사 전부 다 검사하기로 했어.

    “잘하셨어요.”

    아파도 좀처럼 병원을 가지 않으려 하는 민영이었다. 워낙 무리를 해서 몸 곳곳이 말썽일 텐데도 그저 버티려 했다. 그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아버지, 오늘… 혜운이 만났어요.”

    - 혜운이?

    “우연히 만났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 그래. 그 얘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대신, 당분간은 네 엄마한테 혜운이 만났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빠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반가움 마음과 동시에, 복잡한 속내가 섞인 영철의 나지막한 음성에 재현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알아요.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 너희들 오랜만에 만나서 엄청 반가웠겠다! 혜운이 여전히 예쁘지? 아빠도 선생님한테 가끔 소식만 전해 들어서….

    “네, 여전히 예뻐요.”

    영철은 경선과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곤 했지만, 경선은 그곳의 이야기를 잘 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알기에, 재현의 가족, 특히 민영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영철도 재현에게 굳이 그곳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가끔씩 재현이 먼저 묻지 않아도 혜운이 잘 지내고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전해 주곤 했다.

    그럴 때면 재현은 혜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더 물으면 보고 싶어지니까…. 참을 수 없을까 봐, 생각나면 보고 싶고, 그럼 만나고 싶어질까 봐 입을 꾹 다물고 마음에만 묻어 두었다.

    “저녁에 집으로 갈게요, 아버지.”

    - 그래, 그럼 이따 집에서 보자. 수고하고.

    통화를 끝내고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던 재현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광고 기획사 네오.

    태강그룹의 계열사로, 국내 3대 광고사 중 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네오의 광고 제작 본부는 세 개의 제작팀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제작 1, 3팀은 태강그룹 계열사들의 광고를 전담하고, 혜운이 속해 있는 제작 2팀은 외부 광고를 주로 작업하고 있다.

    각 팀마다 적게는 세 개에서 많게는 여섯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는데, 혜운은 제작 2팀에서도 1파트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녀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입사해, 올해로 7년 차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본가인 홍 실장의 전화를 받은 혜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계약서에 사인하러 가는 거예요?”

    혜운이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하자, 그녀의 통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1파트 동료들도 주먹을 불끈 쥐며 함께 기뻐했다.

    “우리 혜운 선배, 내년에 파트장 가나요?”

    “소연 씨, 누가 들어.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해. 부정 탈라.”

    혜운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오히려 동료들이 더 신나서 혜운의 파트장 승진을 예단했다.

    내년 인사 이동 때 혜운의 최연소 파트장 승진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혜운의 승진을 점쳤지만, 일부는 시기 어린 질투와 견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럴수록 혜운은 일에 더 집중했고, 사내 소문에는 무관심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내년 1월 첫 방송 들어가는 주말 연속극 PPL 일정 맞추려면 되게 빠듯해. 일단 모레 오전에 미디어팀하고 회의부터 잡자.”

    “네, 선배님.”

    혜운의 말에 씩씩한 대답을 한 무영을 뒤로하고, 최종 회의 자료를 챙겨 팀장에게 향했다.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2파트장 기석은 혜운을 발견하곤 위아래로 훑어보며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혜운 씨, 잠깐만. 금방 끝나.”

    팀장이 혜운을 보며 손을 흔들어 반겼고, 혜운은 기석의 시선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 후 뒤에 서서 대기했다.

    “회의는 잘하고 왔어?”

    “네, 내일 계약서 쓰기로 했습니다.”

    “역시…. 믿고 맡기는 신혜운.”

    팀장은 기석을 앞에 세워 두고 혜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럴수록 기석의 따가운 시선이 혜운에게 날아와 꽂혔지만 익숙한 상황이라 타격감은 없었다.

    용무를 마친 기석이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난 후, 뒤에서 기다리던 혜운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자료를 건넸다. 그는 모니터와 자료를 번갈아 보며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어디 보자, 1파트…. 본가인하고 계약서 사인만 남은 거면 미디어팀하고 회의부터 잡아야겠네?”

    “안 그래도 제작 일정이 빠듯해서, 모레 오전 중으로 바로 잡아 보려고요.”

    “미디어팀에서 그날 안 된다고 하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날 잡아다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팀장님.”

    광고 제작 전반에 대한 준비가 끝나면, 미디어팀과의 회의가 필수였다.

    광고주 측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광고 매체의 범위를 지정하면 제작팀이 그것을 토대로 매체별 광고를 기획하고, 미디어팀에서 해당 매체를 섭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도 없이 회의를 하고, 기획을 수정하고, 다시 컨펌을 받는 작업이 반복되는데, 모든 제작 파트에서 미디어팀에 수시로 회의를 요청하다 보니 담당 미디어 바이어와 회의 일정을 잡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본부장님이 혜운 씨랑 식사 자리 한 번 만들어 달라고 하셨는데.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아?”

    “저희 파트 모두 다 고생했는데, 다 같이 사 주시면 안 될까요?”

    “당연히 되지!”

    “감사합니다, 팀장님.”

    혜운이 고개 숙여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기석이 그 앞을 막아섰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시비 걸고 싶어 죽겠다는 눈빛이 고스란히 읽혔다.

    “팀장님 사랑 독차지해서 좋겠다?”

    “제가 워낙 어딜 가도 사랑받는 타입이라. 선배도 아시면서.”

    “그럼, 잘 알지. 신혜운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지. 독종도 이런 독종이 없는데, 사람들은 그저 예쁘장한 겉모습에 속아 그걸 못 보더라. 쯧쯧쯧.”

    기석이 혀를 끌끌 차도 혜운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노골적인 경계는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게요. 근데 다들 선배처럼 생각 안 하고, 일까지 잘하니까 더 예뻐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혜운의 말에 기석이 이를 꽉 다물며 코웃음을 쳤고,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동료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

    사실 혜운은 인정받고 싶은 욕심보단 미움받고 싶지 않은 욕구가 훨씬 더 컸다. 지금껏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등바등 노력해 왔다.

    외면받고 버려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라는 걸,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은 혜운의 입술 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파트장님은 선배가 숨 쉬는 것 만 봐도 질투하는 거 같아.”

    무영이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옆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아무리 열 받아도 선배가 좀만 더 참아 줘요. 내가 사장 되면 저 인간을 당장에….”

    “네가 사장 되는 거보다 내가 사장 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혜운의 말에 무영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 멋있어! 내가 이래서 선배를 좋아하는 거야.”

    혜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노트북을 열었다. 재현을 다시 만난 후로 머리가 터져 나갈 만큼 복잡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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