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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한테 왜 그랬어 (16/50)
  • 16. 나한테 왜 그랬어

    진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재현은 고모가 있는 호주로 떠났다.

    혜운은 오래 걸리지 않아 재현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늘 이곳에 있으니, 네가 날 찾아와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을 때, 상처가 조금은 아물었을 때, 그때 다시 찾아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와 줄 거라 생각했다.

    전과 같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우린 다시 함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기꺼이 기다렸다.

    1년, 2년, 3년.

    기다림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아직은 돌아오고 싶지 않은가 보다, 여전히 아프고 괴로워서, 날 보는 것만으로도 형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혜운은 제 자신을 설득했다. 적어도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해야 한다고 제 자신을 타일렀다.

    한편으론 편지 한 장, 아니 아무것도 적지 않은 엽서 한 장 보내 주지 않는 그에게 밉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자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메일은 열어 보지도 않고, 전화는 받지 않았다. 먼저 연락할 마음이 없다면 내 연락 정도는 받아 줘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넌 정말 전혀 궁금하지 않은 건지….

    서운한 마음에 잠시 원망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재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는 그의 부모님에게 재현의 소식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의 부모님은 재현이 호주로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를 떠났다. 그들 역시 진현의 기억으로 가득한 동네에서 더는 버티지 못했다. 경선에게 재현과 같은 이유로 동네를 떠난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서울로 떠난 후 자연스레 경선과 연락이 뜸해졌고, 아주 가끔씩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왔지만 그뿐이었다.

    경선은 그들에게 자세한 소식을 묻거나 이곳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에서의 아픔을 떠올리게 될까 봐 배려한 것이다. 이후 혜운이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친척들과 함께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얘기가 전부였다.

    재현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게 군 입대를 할 무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와야 할 테니, 그땐 진짜 연락을 하겠지. 설마 이번에도 안 할까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어김없이 빗나갔고, 그 무렵부터 혜운은 확신을 잃었다.

    재현이 다시 돌아올까?

    난 정말 끝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나 혼자 억지로 미련스레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이미… 날 잊은 건 아닐까?

    그렇게 10년을 보낸 후, 혜운은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포기였다. 잊을 순 없겠지만, 기억에 묻어 두기로 했다. 가끔씩 참을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어질 때만, 그리워서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만 꺼내 보기로 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면 충분하다고. 아주 오래전, 나의 전부였고 나와 모든 순간을 함께했던 친구일 뿐이라고.

    그리고 오늘. 13년 만에 재현을 다시 만났다.

    재현을 다시 만나게 될 거란 희망을 체념한 지 오래여서였을까. 막상 마주하고 나니 머릿속이 하얘져 버렸다.

    만나면 어떤 말을 먼저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수도 없이 상상하며 기다려 왔는데, 포기를 하고 나서인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13년이란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수많은 감정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재현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했다.

    혜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다.

    네가 정말 날 보고 싶었다면, 정말 그랬다면, 그 말이 진심이라면 한 번쯤은 날 보러 왔어야 했다고. 아니, 적어도 목소리 정도는 들려줄 수 있는 거 아니었냐고. 차라리 거짓말인 게 더 그럴듯하다고.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3년 만에 다시 만난 재현을 붙잡고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을 시간이 없었다. 우습게도 현실이 먼저였다.

    무슨 정신으로 회의를 마친 건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일단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달달 외울 정도로 준비했던 자료를 들고 어떻게 회의를 해내긴 했다. 뒤늦게 들어온 무영의 말로는, 반쯤 넋이 나간 사람 같아 보이긴 했지만 큰 실수는 없었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실제로는 반이 아니라 아예 넋이 나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날만을 위해 밤낮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들과 노력들,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버틴 결과였다.

    회의가 끝난 후, 회의실에는 재현과 혜운만 남았다. 재현과 혜운은 회의 내내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멀찍이 떨어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신혜운.”

    “응.”

    “무슨 생각해?”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쓰게 웃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어.”

    이 순간에도 혜운은 그 생각 중이었다. 재현과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말을 고르고 있긴 했지만 그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너희 쪽이랑 계약 진행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친구라서 특별히 봐주는 건가? 다행이네.”

    혜운의 말에 재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못 본 사이에… 되게 멋있어졌다, 재현아. 네가 슈트를 입으면 어떤 모습일지 가끔 상상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져.”

    재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혜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어떤 거 같아? 그대로니? 아니면 좀 달라진 거 같아? 가끔 동창회 나가면 다들 그대로라고 하긴 하는데,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같기도 하고…. 근데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예전 그대로인 것도 마냥 좋은 건 아닌 거 같아. 그치?”

    재현은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나 혼자 계속 떠들려니까 되게 민망하다. 아무리 네가 갑이고 내가 을이라도, 지금은 우리 친구로 만난 거잖아.”

    대화가 계속 겉도는 느낌이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채 계속 다른 얘기만 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을 견디는 게 힘들어서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재회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입 꾹 닫고 앉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재현과는 더 이상 마주 보고 앉아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다.

    내내 참고 있었던 혜운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일어날게. 회사 들어가 봐야 돼. 다음에 만나면 식사나 한 번 하자.”

    혜운이 코트와 가방을 챙겨 걸음을 옮기자 재현이 성큼성큼 걸어와 문 앞을 막고 섰다.

    “…비켜.”

    혜운이 재현을 밀어내고 문손잡이를 잡았지만 그가 다시 막아섰다. 혜운은 이를 악물고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비키라고.”

    “혜운아.”

    “입 닫고 앉아서 나 떠드는 거 구경만 할 거면 그냥 보내 줘. 너랑 같이 있는 거… 나 지금 너무 불편해. 숨 막혀.”

    잔뜩 날이 선 혜운의 말에 재현이 옆으로 비켜섰고, 혜운은 그대로 문을 열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심장이 바닥까지 쿵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런 재회를 원했던 게 아닌데, 그동안 재현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그에게 듣고 싶었던 말도 너무 많았는데 대체 이게 뭔지 혼란스러웠다.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혜운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서 회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재현에게 다가선 혜운은 바닥에 코트와 가방을 던져두고 재현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이 나쁜 자식아! 내가 그냥 가려고 했는데,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해서 안 되겠다. 계약 놓칠까 봐 내가 진짜 참아 보려고 했거든?”

    가슴이 들썩이도록 숨을 몰아쉬던 혜운은 주먹을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

    혜운의 물음에 재현의 두 눈이 조금씩 젖어 드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미안해.”

    낮게 가라앉은 재현의 목소리에 혜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어찌할 틈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원망스러웠다. 재현의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짜증이 치밀었다.

    “한 번쯤 찾아올 수 있었잖아. 한 번쯤 목소리 들려줄 수 있었잖아. 내가… 항상 그곳에 있겠다고 했잖아. 근데 왜…. 그래. 이해하려고 해 봤어. 여전히 많이 아프고 괴로워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조금 더…. 그렇게 13년이 지났어.”

    재현이 손을 내밀어 혜운의 눈물을 닦아 주려 하자, 혜운은 재현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하나만 묻자. 오늘 여기서 날 만나지 않았으면… 계속 날 만나러 오지 않을 생각이었지?”

    재현은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뭔가 드라마틱한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대답… 잘 들었어.”

    혜운은 가방과 코트를 집어 들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끅끅 차오르는 눈물과 아픔에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지만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울음을 삼키며 계속 걸었다.

    “선배!”

    막 건물 로비를 나서는데,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무영이 혜운을 불러 세웠다. 혜운은 급히 눈물을 닦아 내며 계속 앞만 보고 걸었다.

    “선배, 울었어요?”

    “아냐. 얼른 가자.”

    “팀장님한테 점심시간 지나고 들어간다고 연락 드렸어요. 괜찮은 거예요? 어디 봐.”

    무영이 혜운을 붙잡고 얼굴을 보려 했지만 혜운은 그의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건물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닥쳤다. 아까와 달리 눈발은 매우 가늘어져 있었다.

    “선배, 나 좀 봐요.”

    “차 어디 뒀니?”

    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혜운의 앞에 서서 손끝으로 턱을 살며시 고정한 채 혜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왜 울었어? 아까 그 남자가 울렸어? 왜? 그 남자가 뭔데?”

    자신을 보면 늘 생글거리며 웃던 무영이 굳은 표정으로 제법 단호하게 물었다. 그냥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기어이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친구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반가워서, 그래… 반가워서 울었어.”

    “가슴에 사무친 첫사랑이라도 되나? 둘이 되게 애틋해 보이던데.”

    혜운은 무영의 손을 쳐 내며 희게 웃었다.

    “내가 아주 많이 사랑했던 친구야. 이제 됐지?”

    재현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규정하는 게 무의미했다. 혜운에게 있어서 하재현은, 하재현 그 자체로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춥다. 얼른 가자.”

    “알았어요. 차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혜운의 재촉에 무영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혜운은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너무 멀리 온 거겠지?

    “다시 만났으니까… 됐어. 이제 끝! 정말… 끝.”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모습도 보았고, 잘 지내고 있는 거 봤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창가에 선 재현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혜운과 그 뒤를 따라가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까 회의에 혜운과 동행했던 같은 회사 직원이었다.

    혜운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사소한 행동에서 동료라고 하기에는 뭔가 있어 보였는데, 재현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혜운의 얼굴에 손을 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턱 근육이 움찔거릴 만큼 이를 꽉 다물었다.

    오늘 같은 순간이 오지 않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오늘 같은 순간을 기다려 왔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맞이한 갑작스러운 재회에 혜운도 당황했지만 재현 역시 당황했다. 두 사람을 향해 수군거리는 직원들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이성적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혜운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참고 버텼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간의 노력과 시간들이 우스울 만큼, 만남은 너무 순식간에 찾아왔고 후회는 깊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는 못 참겠다.

    그녀를 볼 때마다 다시 아프고 괴로워진다 해도, 그녀를 보지 못해서 아프고 괴로운 것보단 낫다는 걸 깨달은 이상 버틸 이유가 없었다.

    그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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