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이따 만나서 얘기해 (13/50)
  • 13. 이따 만나서 얘기해

    진현은 자신의 말에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재현의 눈빛과 표정을 확인한 순간, 재현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즘 자신과 혜운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좀 더 떠보기로 한 진현은 재현의 옆에 앉아 어깨를 감싸 안았다.

    “혜운이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같던데…. 설마 너 그래서 이러는 거야?”

    재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지만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와 귀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반응을 보니 혜운이 좋아하는 사람이 본인이란 것도 모르는 듯했다.

    혜운은 그렇다 쳐도 자신에게까지 까칠하게 구는 건, 어쩌면 혜운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자기들이 고백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해 줄 수도 없고.’

    ‘고백’이라는 일생일대의 소중한 기회를 자신의 말 몇 마디로 날려 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두 사람이기에 사소한 오해로 멀어지는 것 역시 두고 볼 수 없었다.

    “혜운이가 좋아한다는 그놈, 내가 누군지 아는데. 알려 줄까?”

    재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진현을 바라보았지만, 내심 궁금하긴 한 듯했다.

    “그놈이 영 눈치가 없어서 혜운이가 자길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더라고. 속은 좁아터져 가지고 혜운이 마음고생만 시키고. 혜운이는 왜 그런 놈을 좋아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

    “형, 지금 누굴 말하는 거야?”

    “혜운이가 좋아하는 남자애. 왜? 너도 아는 애 같아?”

    “나 놀리냐?”

    재현의 그 말에, 진현은 재현이 오해하고 있단 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혜운이가 그놈을 많이 좋아한다고 하기에 내가 말렸어. 지금은 공부에 집중할 때니까 나중에 대학 가서 연애해도 안 늦다고. 그놈하고 당장 사귀지 않는다고 해서 둘 사이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 사이는 아니니까…. 지금처럼 계속 친구로 지내다가, 나중에 연애하라고.”

    이 정도 말해 줬으면 진짜 멍청이가 아닌 이상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점점 굳어 가는 재현의 표정을 지켜보며 진현은 재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가 그놈에 대해서 좀 잘 알거든.”

    “형….”

    “너 지금 혜운이한테 엄청 미안하겠다. 내 말이 맞지?”

    진현은 빙빙 에둘러 가며 재현의 정곡을 콕콕 찔렀다.

    “이따 축구나 보러 가자.”

    “예매는?”

    “알잖아. 우리 팀 경기는 항상 자리 넉넉한 거.”

    진현의 말에 재현이 오랜만에 웃음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을 보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진현은 나중에 두 녀석이 잘되고 나면 한몫 단단히 받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형 지금 점심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하니까 경기장 근처에서 만나자. 3시 경기니까 늦지 않게 와라.”

    “형이나 늦지 마.”

    자신의 눈에는 마냥 귀엽기만 한 재현의 머리를 손으로 이리저리 헝클어뜨리곤 방을 나섰다.

    “어휴. 귀여운 자식.”

    며칠 내내 혼자서 속을 끓이며 마음고생 했을 녀석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같이 마음고생 했을 혜운을 생각하면 재현의 철없음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딱 열여덟 살다운 삽질이란 생각도 들었다. 진현의 눈에는 둘 다 풋풋하고 예뻤다.

    혜운의 집 앞에 도착한 재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혜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 내려오라는 말에 싫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툴툴거리면서도 내려와 줬다.

    “왜.”

    재현의 눈에는 혜운의 삐죽 내민 입술도, 땅에 고정된 시선도, 꽉 움켜쥔 주먹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동안 정말 바보 멍청이 같은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불렀으면 말을 해.”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는 혜운의 목소리에 왜 자꾸 웃음이 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속도 없이 웃음만 났다. 눈앞에 신혜운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혜운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두 잊고 말았다.

    “신혜운.”

    재현의 부름에 드디어 혜운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 주었다. 재현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뭔데.”

    “생일 선물.”

    혜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재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뭘 잘못했고, 뭐가 미안하고, 뭘 안 그럴 건데?”

    “지난 며칠 내내 너한테 멍청한 짓 한 거 전부 다. 재수 없게 말한 것도 모두 다.”

    혜운이 또 한 번 허탈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래서 지금 생일 선물 들고 와서는 겸사겸사 사과하는 거야?”

    “무릎도 꿇을까?”

    “그걸로 되겠냐?”

    “자. 그럼 한 대 때려.”

    “여러 대 때려도 돼?”

    “어. 돼. 어디 때릴래? 어디 대 줄까? 화 풀릴 때까지 때려.”

    “하아…. 말이나 못하면.”

    혜운은 자그맣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재현의 팔뚝을 툭 치곤 재현이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받았다.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보던 혜운이 재현을 다시 쳐다보았다.

    “시계네?”

    “마음에 안 들어?”

    “나 진현 오빠한테 시계 선물받았는데.”

    “그럼 버리든가.”

    “너 10초 전에 재수 없이 말했던 거 사과하지 않았냐? 벌써 까먹은 거야?”

    재현은 두 손을 합장하듯 모으고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혜운이 입술을 꽉 깨물며 재현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일어나.”

    “잘못했어.”

    혜운은 시계가 든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재현의 눈을 빤히 보았다.

    “진심이지?”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혜운을 바라보았다.

    “네가 날 너무 속상하게 해서 너 보자마자 한 대 걷어차 줄 생각으로 나왔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또 마음이 약해지네. 내가 이렇게 착해.”

    “알아. 신혜운 착한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혜운이 피식 웃더니 다시 눈을 맞춰 왔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눈동자를 지나 얼굴 곳곳에 머무르는 게 보였다.

    “나는… 너밖에 없어. 너는 내 가장 소중한 친구고,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고, 내가 제일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야. 네가 내 곁에 없으면… 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조곤조곤한 말투로 조심스레 꺼낸 혜운의 진심이 재현의 마음속으로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좋아한다는 고백보다 훨씬 더 따뜻한 말들이었다.

    자신이 혜운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그녀는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유일한 존재라는 말의 무게가 재현의 가슴속에 묵직하게 와닿았다.

    “그러니까 재현아. 내가 너무 밉고 싫어져도… 나 혼자 두지 마.”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 약속해.”

    “믿을게. 나는 너를 늘 믿으니까.”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혜운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 아이에게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너무도 후회되고 미안했다.

    재현은 혜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두 팔 벌려 그녀를 품에 안았다. 혜운은 재현이 어깨에 이마를 기댔고, 재현은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고 등을 가만히 다독였다.

    얼굴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막상 보고 나니 그저 안고 싶었다.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보다 항상 남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라 늘 괜찮다는 말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밴 혜운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 또는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늘 애쓴다는 걸 재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만은 늘 솔직했다. 유일하게 자신의 앞에서만 지금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혜운을 힘들게 했던 모든 순간들을 반성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보내 주는 믿음에 꼭 보답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곁에서 늘 함께할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와 동시에, 혜운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너를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지, 네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말해 주고 싶었다. 나중을 기약하며 참고 기다리기에는 혜운을 좋아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서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진현이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이런 일로 마음 아파하는 일 없이, 서로를 마음껏 좋아하고 싶었다.

    “이따 저녁에 다시 올 테니까 전화하면 내려와.”

    “저녁때?”

    “응. 너한테 할 말 있어.”

    “지금 해.”

    “지금은 좀 그렇고, 이따가 올게.”

    재현은 혜운의 머리칼을 귀 뒤로 단정히 넘겨 주며 웃었고, 혜운은 덩달아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약속 있구나?”

    “형이랑 축구 보러 가기로 했거든.”

    “지난번에 나 때문에 못 봤던 것까지 두 배로 재밌게 보고 와.”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혜운을 품에서 놓았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몇 시간 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서인지 마음은 가벼웠다. 자신의 고백에 혜운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면서 견뎌 볼 참이다.

    경기장의 홈 응원석 쪽인 N섹터 앞에서 진현과 만나기로 한 재현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진현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벤치로 향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약속 시간까지 아직 10분가량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재현은 일찌감치 진현의 지각을 점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기다리던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 주변 도로를 살피며 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재현아. 형 다 왔어. 바로 앞이야.

    재현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진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매번 약속 시간 늦는 것도 습관이다.”

    - 너 지금 형한테 잔소리하는 거냐?

    “근데 진짜 거의 다 왔어?”

    - 3분, 아니 1분이면 돼.

    “그 시간이면 지금 내 시야에 형이 들어와야 하는 거 아냐?”

    - 역시 내 동생 예리해. 횡단보도 두 개만 건너면 도착이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형이 금방 갈게.

    수화기 너머에서 거칠게 몰아쉬는 진현의 숨소리가 건너왔다.

    “됐어. 그냥 천천히 걸어와. 그러다 형 숨넘어가겠다.”

    - 휴우. 고맙다. 근데 우리 직관하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형이 미안해. 자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었는데.

    “형이 왜 미안해. 그게 언제 적 약속인데…. 그동안 형도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런걸 뭐. 나 대학 가면 우리 매주 직관하자.”

    -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때쯤이면 형도 진짜 선생님이 되어 있겠지?

    “지금도 선생님이시거든요?”

    재현의 말에 기분이 좋았는지, 진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형.”

    - 응?

    “…아니야. 이따 만나서 얘기해.”

    미안하고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못나게 굴어서 미안했고, 그런 날 미워하지 않고 늘 따뜻하게 보듬어 줘서 고마웠다고…. 근데 차마 입술이 안 떨어졌다. 얼굴 보고는 더욱더 못 할 말이라 통화로 하려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언제쯤이면 형에게 내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 싱겁긴. 조금만 기다려.

    진현과 통화를 마친 재현은 휴대폰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도로를 살폈다. 혹시나 진현의 모습이 보일까 싶어서다.

    “어?”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딱히 비 예보도 없었는데 아마도 소나기가 내릴 모양이다.

    재현이 우산을 사서 진현을 마중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 쪽으로 발걸음을 막 떼는 찰나였다.

    “어머! 저기 사고 났나 봐!”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자신의 뒤편에 앉아 있던 커플이 제법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외침에 입장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로 쪽을 살폈고, 편의점으로 향하던 재현 역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경기장 바로 앞 사거리에 승용차와 버스가 엉겨 있었는데 다행히 차가 크게 부서지진 않아 보였다.

    “저기 사람 다친 거 아냐? 저기 누워 있는 거 사람 맞지?”

    “맞아, 맞아! 어떡해! 많이 다쳤나 봐!”

    여자의 호들갑에 편의점으로 향하던 재현이 또 한 번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해일처럼 밀려드는 두려움에 심장이 터져 버릴 듯 사납게 뛰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대로변으로 달려 나갈 무렵, 재현도 그제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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